'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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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5.12

 

 

톰 라이트가 나타났다. 그의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칭의'(Justification) 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개념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이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예상했던 대로 존 파이퍼 목사님은 눈에 불을 켜고, 톰 라이트와 vs 구도를 그리면서 배틀 도서를 냈고, 라이트는 그에 대해 여유롭게 응수하며 다음과 같은 화답서를 출간한다.

 


 

승패를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파이퍼가 쓴 [칭의 논쟁] 과 톰 라이트가 쓴 [칭의를 말하다]를 통해 두 인물의 이야기를 거의 처음 들어봤다.

 


 

제 3자가 봤을 때 라이트의 압승이었다. 파이퍼는 계속 뒤에 가면 그 부분을 격파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결국 싱겁게 책을 끝내 버린다. 그냥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때 정립된 교리와 개념을 그렇게 바꾸려고 하면 안되는 거야~ 그건 잘못된 거야 ~ 알지? 그건 진짜 중요한 거야" 라는 말을 하고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사실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성경 속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라는 나의 기본 개념마저도 흔들어 놓는 그의 대담한 '역사적 눈으로 성경 읽기'는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칭의' 논쟁에 대해 이 책만 읽고 나면 라이트의 주장에 설득 당하지 않기가 정말 어렵다.

 


 

무슨 마법을 쓰는 것 처럼, 그의 주장은 정교하고 논리가 탄탄하며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일단 몇 가지 지식을 나눠보자.

 


 

  존 파이퍼는 '의'(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처음 믿는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죄인을 그와 같은 상태로 옷 입히는 것을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은 파이퍼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쓴 책이 바로 [칭의를 말하다]이다.

 


 

 그는 먼저 '전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이란 극히 세심하고 경건하며 박식한 사람들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전통이다. 내가 루터와 칼뱅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특별히 칼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진술하고 실천한 성경 읽기 방법만은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방식이란 나 자신을 성경 속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 안에 푹 담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경이 나의 혈액을 따라 흐르게 하는 것으로서, 나는 내가 교회와 세상에 성경을 신선하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소원했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보내야 할 가장 위대한 경의는 그들에게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들에게도 섬뜩한 일일 것이다), 그들이 행한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수준에서 상당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존 파이퍼는 내가 '교회가 1500년 동안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암시한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이퍼의 영웅인 루터와 칼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말로 공격했었다. 그때 루터와 칼뱅은 성경을 통한 대답을 했고,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에 의거하여 대응했다."

 


 

  아직 책은 28page로서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말만 읽어도 라이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전통으로 덤빈다면 나는 나의 명검인 '성경'으로 너희를 격파해 주겠노라"

 


 

  그토록 '진리'를 강조하며, 기존 체계를 흔드는 라이트의 등장에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파이퍼', 보수 기독교 측은 이 황당한 말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위대한 공헌은 그가 정말로 성경과 역사의 엄밀성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나같은 초보 신자는 반대측 진영이 라이트의 주장을 성경대로 격파해 주는 걸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승구 교수님, 존 파이퍼 목사님 등의 적극적인 시도는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전혀 라이트를 이겨내기 어려워 보였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기존 기독교에 폭탄을 날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 싶은 핵심 본문들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신학 사전과 성경 사전들에 수록된 '칭의'에 대한 내용들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때 반복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이 성경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시된 주제들을 나열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 이 주제들은 어디로 가 버렸나?"

(제임스 패커의 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외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에 대한 논의는 그의 후속작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더욱 자세하게 이어진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굉장히 천재적인 비유가 나온 부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작업에 동의가 되어야 이후에 펼쳐질 논의를 받아들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후대의 교리와 경건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사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음악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보겠다. 피아노의 댐퍼 페달을 누르고 낮은 '라' 건반을 눌러보자. 피아노가 조율이 잘 되어 있다면 곧 다음 옥타브의 '라'가 공명되어 울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위의 '미'가 들리고 그 다음 '라'가 들린다. 그 다음은 '올림 도', 그리고 또 '미'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혼란스럽다. 화성진행에 따르면 다음 음은 약간 내린 솔 제자리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음들, 몇 개의 '라'가 원래 '라' 음을 강화해주고, '미'와 최소 1개 이상의 '올림 도'는 실제로 원래 음들의 일부를 이룬다. 피아노와 같은 악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 음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그 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듣다가 '미' 음만 귀에 들어와서 '미' 건반을 누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들어봐! 이게 바로 우리가 듣고 있던 그 음이야!") 물론 '미' 음도 원래 '라' 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상이한 조합의 공명이 시작된다. 즉 다른 '미' 음이 들리고, '시', 또 '미', 그리고 '올림 솔' , '시' 와 같은 음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종교 개혁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회에서 바울을 적용하려 했을 때 발생한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동안 루터와 칼뱅이 (물론 그들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성급하고 때로는 분노한 반-새관점 운동에서는 이러한 차이도 얼버무리곤 한다) 바울이 이야기했던 내용에서 진짜 배음을 실제로 들었다고 치자. 바울이 댐퍼 페달을 밟고 '라' 건반을 누르자 울려 퍼진 화성의 다섯 번째 음인 '미'를 그들이 들었고 그 '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개신교 내부에서 상황은 계속 변화했다.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오고 갔다. 18세기 대륙의 계몽주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개신교적인 운동이었다. 즉, 권위적인 종교를 제거하고,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 후 건조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낭만주의 운동은 개신교의 정서가 지닌 또 다른 흐름을 담게 되는데, 이번에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경건의 모습들이 나타나서 번성하다가 변형되고 그 유산을 남겼다. 마지막에는 (물론, 지금의 설명은 긴 역사를 과도하게 단축시킨 이야기이다) 실존주의가 나타나서 진정한 신앙의 핵심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신앙을 판정하는 척도로서 본래적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간 동안 순전하게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려는 흐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의 반향실(Echo chamber) 속에 들어가 반복해서 그들 자신의 말을 듣고 또 들었을 뿐이며, 반향실이 존재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바울 읽기는 그러한 반향실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기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의 원래 목소리는 완전히 들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피아노의 모든 음들이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태가 되어, 처음에 울렸던 음을 알아내보려는 어떤 노력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역사로 되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울은 그 역사속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이야기의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의 신망 있는 전통이나 좀 더 최근의 학자들의 그보다는 덜 신망 있는 각주들보다, 성경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향해야 할 곳이 바로 역사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16세기의 문제들과 19세기의 시각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왔다. 이제 21세기의 문제들과 1세기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말을 어떤 재주로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만약 파이퍼의 주장대로 '전가된 의'가 기독교에 핵심적이고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면 바울이 왜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파이퍼는 16세기 기독교 갱신 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거라면 라이트는 1세기로 돌아가서 성경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난감하다. 이 두가지가 대립관계에 놓이면 기독교인은 당연히 '진짜'에 기준점을 두는 게 맞지 않나?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함과 동시에 파이퍼의 주장들의 비논리성을 반박하고, 2부에서는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를 세밀하게 주해한 뒤 결론에 도달한다. (성경 해석과 역사 지식으로 무장해 버리면 정말 쉽지 않다)

 


 

놀라운 그의 주해는 생략하고, 끝 자락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많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방식을 따라 '이신칭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우리는 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으로만' 이라는 요소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세계와 맺으신,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바울의 성경적 신학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신칭의를 바라본다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바울과 부합하는 그 큰 틀로부터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행위들'의 위치(때때로 이런 식으로 언급된다)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곧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신칭의'와의 연대를 위협하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스라엘이 엣 종교개혁이 주장한 의미에서 '행위로 얻는 의'를 추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한 도덕적 행위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구출한 백성이었고, 그들이 지닌 율법은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실수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한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통한-단일-계획으로 보지 않고, 세상과는 무관한-이스라엘을-위한-단일-계획으로 보았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악한 것이라는 루터의 틀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그 결과 '의'(행위로 얻는 의 라는 면에 주목하라)를 획득했고, 그 의가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칼뱅의 틀도 아니며,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에 관한 내러티브가 메시아 안에서 그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사고 틀 안에서 진정한 의미가 파악된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라이트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려던 루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율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뎐 칼뱅을 뛰어넘어 더 정확한 관점에 도달한다.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립관계로 여기게 만들어 기독교의 윤리관에 타격을 주고, 신앙이라는 것을 이상한 수준으로 쪼그려 놨다고 말했었는데 라이트의 성경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우리가 바른 '지식'을 지니게 되면, '행위'도 자연스레 회복시키면서 참된 하나님과의 신앙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뿐이다! 라는 그의 선언은 빛이 난다.

 


 

의는 '전가'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고백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명증한 방법이다.

 


 

성경 주해를 세밀하게 하는 부분에서는 꽤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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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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