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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에 쓴 글이니 지금에 와서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를 확장시키고, 새롭게 글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일단 큰 골격은 유지해도 될 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 안녕. 

 

중요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이런 관련 정보들을 잘 알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씨름하면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찾아 두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측면이 많을 것 같아. 특히 넌 진리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에 대한 중요성에도 많이 노출되었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달란트를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민들은 지속적으로 해 보는 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 (너의가는 길을 숙고할 때도 언젠간 응용될 날이 오리라….)

 

일단 전제 자체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가 많아서 언제든지 오류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게 될 말들도 몇 년 후에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고 유지될 거야.)

 

두 번째로는 이와 같은 치열한 고민들은 답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씨름해 나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정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에….)

 

마지막으로는, 어떤 답을 내릴 때는확신하기 보다는, 좀 더신중한 편에 서는 게 좋을 것 같고,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있을 때는 양쪽을 다 공부하고,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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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은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이라고 정의할께. 또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전 존재를 걸어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이와 같은 Base를 깔아 두고, 고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

 

한국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칼빈주의)이 주류인 것 같고, 상당히 보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반적으로는 장로교고신이 보수의 극단에 가깝게 분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이외에도 합동,통합,기장 등다양한 분파가 있을 거구…(‘고신보다합동을 더욱 극단으로 두는 견해도 존재함)

 

한국에서 본격적인 신학을 체계화 시킨죽산 박형룡교수님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교에 있던메이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 자체가 정통신학에 철저히 서 있는 학교였고, 그 이전에 세워진 프린스턴 신학 대학교가 기존의 정통신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한 반발로 태동하게 되었어. 메이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확고하게 정통신학을 지키고 싶어 했었지.

 

그러한 스승을 둔 박형룡 교수님의 가르침은 총신대학교 조직신학과에서 시작되었고, 그 분의 제자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축을 이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정암 박윤선교수님 등 걸출한 분이 많으셨어)

 

 

 

미국에서는 장로교인의 숫자가 미미한 편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독 장로교가 주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열할 때는 성서의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분열을 했었어. (이 부분은 이따가 자세히 언급해 볼께)

 

그 이외에도 일본 강점기 당시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고신이 분리 되어 나가고…..

 

WCC라는 세계 기독교 연합 활동이 있는데, 이 속에서는 모든 교파와 카톨릭까지 손을 잡는 분위기인데 이와 같은 타협을 거부하는 측을 합동이라 분류하고, WCC 참여에 찬성하는 쪽은 통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카톨릭을 어느 정도 포용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쟁점이 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생략할께. 좀 어려워서..)

 

일단 요약을 하자면, 한국에서는 장신대(통합)나 한신대(기장) 쪽은 정통신학(칼빈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프린스턴 대학교 처럼신정통주의 신학에 상당히 열려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아.

(장신대에 계시는 조직신학 교수님인김명용 교수님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전파에 열심이 있어 보이셔)

 

그 이외에 고신이나 합동 등은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높은 우선순위를 주고 있구….

 

그렇다면신정통주의 신학정통신학을 구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신정통주의 신학은 20세기에 활동했던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견해를 많이 따라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아.

(정통신학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칼빈(장 깔뱅)의 계보를 잇는다고 보면 됨. 개혁주의 신학은 대개정통신학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지만, 화란 계열<네델란드>아브라함 카이퍼등의 신학을 같이 융합시켜서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아. 하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학적 견해로는개혁주의의 범위는칼빈정통신학이나, 화란 계열신학모두를 포괄하고도 더 큰 범주를 의미해야 한다고 생각해. , 칼 바르트의신 정통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하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 같아.) (이 견해는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음)

 

여기 까지 논의를 해 놓고, 내 신앙 이야기를 잠깐만 할께

 

 

일단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세퍼에 매료되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견지하려고 했었어.

 

C.S 루이스는 성공회 소속이라서 정통신학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내가 볼 때는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반면에 프란시스 쉐퍼는 극도의 보수주의는 아니였다지만,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20세기에 이 두 사람처럼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애 쓴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내겐 두 사람이 정의의 사도로 보였어. 지금도 존경하고, 좋아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고)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가 누누히 비판했던 게 바로칼 바르트였어. 내가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의 수 많은 번역서들을 읽고 나서 내렸던 잠정적 결론은, ‘칼 바르트는 기독교에 아주 위험한 짓을 범한 잘못된 신학자구나!! 였어.

 

또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일명문화 선교라는 용어를 주창해 냈고, 그의 제자들인 오스 기니스나 낸시 피어시(‘완전한 진리의 저자)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장을 들을 수 있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정통신학(또는 개혁주의)에 기반을 둔 칼빈주의 신학자, 목회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물론,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에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을터.)

 

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칼빈주의적인특정 세계관 운동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런 논의나 고민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해 버리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으로 세상 속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거라지만, 관계를 맺게 될존재들은 결국 세상(문화)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건 자체적인 모순이 있어 보여.

è  (물론, 이런 모종의 movement 복음과 혼동하는 시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일꺼야. 가령, ‘창조과학같은 경우는 근본주의 계열의 문자 해석과 방법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theory 중 하나인데, 마치 이 창조과학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구원을 잃어 버릴 것처럼 이야기 하는 분들은복음과 자신들의신념을 착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이 관점에 힘을 실어 줄거야)

 

(일단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입장과 중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리처드 니버가 쓴 <기독교와 문화>를 읽어 보면, 크리스천이 문화(세상)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5가지로 분류를 해 둬.

 

그 중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은 5번째에 해당되구

 

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분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누리며 살아가던 중 큰 문제에 봉착했었는데, 그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5번째 견해가 논리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데 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어.

(이건 모 대학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시는손화철 교수님’, ‘양희송 교수님도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었고, 다른 수 많은 교수님들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어.)

 

작은 예를 하나만 들자면, 군대에 들어가서 프란시스 쉐퍼에게 열심히 배운 데로, 모든 문화를 변혁시켜야 겠다고 각오를 했었어.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미술, 역사 등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인 문화가 세워질 수 있다는승리주의적인 견해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어. 세상 속에 들어가서 내 믿음 하나 지켜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세상은 전혀 그리스도적인 문화에 관심이 없었어….(딱히 이게 바로그리스도적 문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빈약했고, 그게 뭔지 알려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 때 느꼈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아무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Useless 하게 보였어.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신음하던 중, 오직 하나님만이 한 영혼을 바꾸실 수 있고,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은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사역’(고전2:2)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인격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쟈크엘룰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이 분이 서 있는 입장은 기독교 세계관의 4번째에 해당되었어. 이 지점에는 마틴 루터나 사도 바울도 서 있었는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다분히 역설적인 것이다!! 라는 관점이었어.

 

이 영역은 실제로 세상 속에서 살아 보니 공감이 되고 인정이 되는 부분이었어.

마치 우리의 삶은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순간의무게 중심을 찾아 내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또한 내가 어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의 세밀한 균형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살 수 없으며,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관점이었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정말 그러하더라구…..

 

 

 

분명 논리상으로는창조-타락-구속이 맞아 보였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지만, 그 모든 게 타락의 범위 안에 들어갔으며, 마지막 때에 온전하게 구속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문화가 사실 선한 건데,(ex) , 노래, , 연극, 영화, 정치, 경제 등 등) 지금 그와 같은 선하던 것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방향을 바로 잡아 주면 그본질’(구조)는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화될 것이다라는 관점. (이게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5번째 세계관)

 

è  이 관점의 맹점은 누가 기준점이 되어서 방향을 바꿔줄 것이며, 그 방향이라는 걸 어느 정도까지 바꿔 줘야 창조 본연의선함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 그리고 그 본질(구조) 자체가한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을까? 라는 질문을 남겼어.

è  그리고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인 N. T. Wright(‘톰 라이트라고 불리는)는 이와 같은정통 신학창조-타락-구속이라는 그림 자체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어. ‘성경이라는 장대한이야기’(Narrative)를 이와 같이 단순한 구조로 환원시켜 버리는 건, ‘성경의 놀라운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참신한 주장이야. , ‘창조-타락-구속도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흐름이긴 하지만, 성경은 그 이외에도 더욱 섬세한 역사적 맥락과 상징적 맥락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고 있기에 보다 더 넓은 관점이 요구된다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참신한 세계관 적 견해가 있지만

 

결국 이 4번과 5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만 남게 되더라구….

(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토록 찬양하고 열광하던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논리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칼 바르트의 주장도 들어보기 위해 김명용 교수님이 쓰신 <칼바르트의 신학> 을 읽게 되었어.

(또한 쉐퍼가 경계하던 실존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마틴부버, 사르트르 등의 글을 읽어보게 되었어. 그리고 학부 시절에 <실존치료>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쉐퍼의 주장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그 이후에 쉐퍼가 많은 사역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었어.)

 

è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지니는 위험성에는 철저히 동의를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사고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깊이 있고, 진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이건 단지 지식적인 차원이나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사고가 얼마나 귀하게 쓰이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영역이었어.

(간혹,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변증론에 익숙한 사람들이실존주의를 지독히 경계하는 발언들을 많이 해. <창조과학>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 중에도 마냥실존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만 말해 둘께)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신학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등에서 주장했던 내용의 연장선 상에 있었어. , 칼빈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어 보였어. 그래서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지….. 칼빈의 교리가 워낙 체계적이고, 성경에 잘 기반하고 있어서 누구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는 없었어. 하지만, 칼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칼빈의 교리 중 성경적이지 않아 보이는 영역들을 잘 수정하고, 발전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è  일단 칼 바르트는 구원 받을자와 버림 받을 자가 모두 예정되어 있다는 칼빈의이중 예정론등을 반대했었어.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버림 받을 자 예정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었지.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이 칼빈과 다른 의견을 보였는데, 칼 바르트의 의견이 와닿는 게 많더라구)

 

(오히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칼 바르트에 가까웠고, 내가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더욱 잘 서술해 주는 신학이라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그의 이론에서 동의가 안 되는 몇 가지가 있긴 했어. 특히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 라는 개념은 난 아직은 와닿지 않더라구.. 하지만, 거의 모든 영역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의 맹점을 잘 수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어떤 목사님들은 유독칼빈주의 신학에 서서 설교를 많이 하시는데, ‘계시의 정지라든지,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 시대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회신을 통해 입장을 밝힌 바 있었지)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해야 한다는 Rule 이 있거든. 그 신앙고백 1장에서 말하고 있는게계시의 정지이고……..그런 목사님들은 그 틀에 충실했을 뿐……. (수 많은 분파로 나뉘어진장로교측에서 자신들의 연합을 추진할 때,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합의점이 바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해.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이신이승구 교수님의 글과 논문을 근거로 볼 때..)

 

하지만, 말이 거창하게 들려서 그렇지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바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속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다시 해 보게 되었어. (무엇보다도 정통 신학이 그토록 강조하는성경’(Scriptura)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다는 근거들이 무수히 적혀 있지)

 

다행인 것은 황영호 목사님이나 윤진규 목사님 김형겸 목사님은 이런 영역에서 상당히 열려 있기 때문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가질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 신학교수로 재직 중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에게 여쭤 봤을 때,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계열 신학자) 그는 감리교에서 가지고 있는 웨슬리안 사대행이라는 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를 이야기 하더라구

(그가 답해 준 관점이 내가 동의하고 있고,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방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è  위에서도 언급한 N. T. WRIGHT(톰 라이트) 교수님은, 웨슬리안 사대행,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루트인성경’, ‘전통’, ‘이성’, ‘경험중에서 마지막 범주인경험의 범주를 비판하긴 해. (하지만, 이 영역은 가장 많은 위험성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이론과 실재를 연결시킬 만한 더욱 매끄러운 Categorization(범주화)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연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우리가 정통신학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온전한 진리를 끊임 없이 찾아가지 않으면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사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어.

 

일부 목사님이성령 체험등에 대한 극도의 경계를 보이시는 이유는 그 분들 스스로가 겪으셨던 아픈 기억들도 큰 이유가 될 것이고, 요즘신비주의 적인 성령 사역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계로서도 그러하셨던 것 같아.

 

(그와 같은신비주의 영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요즘 성행하고 있는예언자 학교등을 수료하여, 자신들이 꾼 꿈이나,  예언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일부 성도들은 부지불식간에 성경 읽기를 등한시 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심상이나 이미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 입장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입장은 이미하나님의 입장 equal하게 되어 버리기에……) <그들의 인식 속에서>

 

 

 

즉 스펙트럼을 그려 보면, 오른쪽 끝에는 완전한 계시의 정지와 이 시대에 더 이상 성경책 이외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는 보수 측의 장로교나 근본주의자가 있다면 그 그래프의 왼쪽 끝에는 오순절, 순복음 계열의 성령파들이 있을 거야. 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을 위험하게 넘어서는특이한 체험이나기사,이적을 무분별하게 강조하곤 할거야

 

우리는 중간 어디 쯤을 견지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구. 그 스펙트럼은 온건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쪽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꼭 이렇게 분류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 소속은 한 쪽 극단이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내고 있는 신앙 생활은 진리에 가까울 가능성도 분명히 있어)

 

참고로 내가 책을 분별해서 읽을 때십자가 복음에 잘 서 있고, 말씀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고 성령님의 역사도 제한하지 않고 민감하게 깨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책들은 대개침례교쪽에 많이 있더라구. (그렇다고 침례교로 옮기자는 말은 아니야…..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신학의 틀에 메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

Ex)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데이비드 플랫 <래디컬>, 여주봉 목사님 <십자가의 복음> , 손기철 장로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 정원 목사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등은, 신앙의 본질이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균형감 있게 잘 말해 주고 있어 보였어. (여기서 손기철 장로님 같은 분들은성령 사역’, ‘치유 집회도 많이 하시기 때문에 한국 정통 장로교에 계신 분들은 매우 경계하고 있어. 그들은, ‘계시의 정지라는 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 체험과 깨달음으로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정원 목사님의 다른 책들은 아직 추천을 잘 못하겠어. 약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하지만 저 책은 상당히 좋아.)

 

 

 

그 이외에도 청교도 신앙을 견지하는 정통신학의 대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성령님의 임재에도 상당히 깨어 계시기 때문에 상당히 좋아하는 분이고(물론 카톨릭을 이단시 여기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힘쓰신에큐메니컬 운동에 함께 하지 않으려 한 점에서 기독교의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분 입장에서는 나름 옳다고 생각한 길을 지키려고 한 결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문일 때가 많아.) 아까 언급한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앙도 참고하기 참 좋은 것 같아. (그 이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등의 삶을 들여다 봐도 성경과 성령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어)

(찰스 스펄전의 설교집은 정말 최고!!!!!!....이런 믿음의 조상이 있어서 너무 다행)

 

말하고 싶은 요지는, 성경에 계시된 구속사는 당연히 완성된 게 맞지만 그와는 별개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고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성경적이라고 난 주장하고 싶어. (이런 고백은 이미 칼바르트의 신학 틀 속에 포함이 되어 버려…)

 

è  보수 장로교 어르신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허용해 버리면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고, 너도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각종 이단을 양산하고, 분별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해….. 이러한 경계도 매우 중요하고 맞는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맞다고 생각해. (이 역시 칼 바르트 신학에 포함된 고백이더라구)

è  종교 개혁 당시에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가 워낙 강조되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성경만을 보려고 했었어. 그러다 보니, 안정성은 뛰어 나고 모가 난 행동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큰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님의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게 되 버리는 문제점이 생기더라구. (사실 그 분들 논리를 따라가면 기도를 할 필요도 없게 됨….. 기도는 철저히 관계성에 속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듣고 구하는 시간이며, 그 분을 만지는 시간인데 이와 같은 논리가 먹혀들 자리가 없더라고……….그냥 성경을 읽고 그 내용에 지식으로 동의해서 끄덕이면 그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여기시는 분도 많아……….만약 이 정의가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면, 바리새인이 저주를 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할 텐데…. 라는 큰 의문을 남겨…)

 

특정 교단은 큰 문제다!!! 이런 말은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 심지어 그 분들이 <계시의 정지>를 주창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다 해도 칼빈주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수 많은 강점들과 견고함 또한 높게 보고 있거든. (답이 잘 나오지 않아도 연합은 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칼빈이 주장한 핵심 5대 강령인 TULIP 이라는 교리가 있는데, 그 중 T에 해당하는 Total Deprivity(전적 타락) 같은 부분은, 감리교에서는 반대를 하지만 난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

 

그 이외에도 I 에 해당하는 Irresistable Grace(저항할 수 없는 은혜), P에 해당하는 Perseverence of Saint(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도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고 있어. (결국 가장 근간이 되는 베이스는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에 가까워 보이긴 해)

 

그리고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마지막 신호> 라는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책을 추천하셨는데(영풍 문고에 갔더니 신앙 서적 베스트 셀러에도 올라와 있더라걱정이 된다), 이 책이 말하는프리 메이슨’ , 666 배리칩에 대한 의견들은 정통신학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고, 나도 정통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어.(이와 같은 책을 추천하는 목사님들은 대개하나님의 음성 듣기’ , ‘성령의 기름 부으심등에 매우 익숙한 분이실 가능성이 커. 그래서 개방된 사고 속에서 누군가가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 그들의 논리를 일단 따라가 보게 되고, 결국은 극단적인 예언자적 메시지나 문자적 해석도 충분히 거부감 없이 수용해 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원하는 바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임재하심을 제한하진 말되, 철저히 성경에 기반하여 민감하게 분별하며 하나님께 길을 구해야 하는 섬세한 지점을 찾아 나가는 거…)

(그런데,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의 간증을 직접 듣고 나눠준 어떤 형의 말을 들어보면, 참 진실되고 가슴을 후벼파는 스토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어디까지 문을 열어 놔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만약 저와 같은 고백들이 허용되어 버리면 다른 이단들을이단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매우 빈약해 진다는 위험성이 커서……….일단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수 있고,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에 담아둘 수는 있지만 이 메시지들을복음의 일부로 여기고 마냥 전하기가 위험해 보여)

è  김우현 감독 등처럼 존경하는 분들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할 때가 많으시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긴 힘들 것 같아. 더욱 선명하게 비춰 주실 날이 있겠지……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나, 류대영 교수님이 쓰신 <미국 종교사> 등을 함께 읽어 보면, 19세기에 태동한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요한 계시록 해석법 등을 알게 되고 그 연장선 상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자적 해석, 예언들의 문제점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이나 블로그 카페에 있는 이런 류의 기사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맞는 것 같아……가령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라든지, 적 그리스도는 유럽 어딘가에서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든지…..윌리엄 왕자가 적그리스도라든가……이런 류의 말들은 One of the possibility 정도로는 받아 들일 수 있지만, ‘진리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아 보여………100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이상한 해석이 성취한다 해도 그걸 모른다 해서 우리가 버림 당할 이유도 없고……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해석이 일관되게 하나로 모아지면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해 보겠는데, 워낙 의견들이 다르니………)

 

이런 면에서 정통신학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

 

결론은치열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본질을 살아내고 경험하며 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바르게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자세….

 

그리고 우리가 특정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그 목사님의 철저한 신학에 많이 노출이 될 것인데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마음도 계속 지니면서 열심히 존경해 드리고 좋은 것을 알아가되, 진리의 문제에서는 내적인 씨름을 그치지 않아주길 부탁하며…..(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에 늘 한 몸이라는 연대의식과 친밀한 중보는 잊지 않아야 함)

 

세상은 날로 혼탁해 지고, 영분별 하기가 정말 힘들어 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기 보다는 더욱 경험하고, 알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핵심 이야기]

 

1.     평신도지만, 우리의 첫째 사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 것. 그래서, 장로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과 아울러,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등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가장 성경적인 지점을 찾아 나갈 것.

2.     균형과 긴장을 철저하게 유지하기. 진리는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시대 속에서 민감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중요할 것 같아. 가령,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성령 사역자들의 활동들을 보면 분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고, 권장할 부분도 많지만 워낙 질병 치유나 눈에 보이는 기적에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과 그 분의 인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구…. 그런 류의 운동은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반대 극단에 있는 것처럼 율법에 너무 메여서 성경 속문자에 머물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모종의 교리적 틀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 같아. 극단은 늘 위험하며, 양 극단이 과도하게 변질되었을 때 각종 이단이 양산되었음을 기억하며

3.     프란시스 쉐퍼와 C.S 루이스가 했던 역할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 지금에 와서는 쉐퍼의 핵심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긴 하지만, 그가 세상과 소통하려 했으며 기독교는 논증이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철저한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른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비하면 정말 많이 열려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높이 살만한 것 같아. 여전히 두 사람을 존경하고 있고, 알아가는 중.

è  세상과의 소통을 잃어 버리면, 기독교가 아무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려줘서 빚을 많이 진 분들.

4.     그리고 내가 칼빈이니, 칼 바르트니 어려운 신학자들 이름을 언급했지만 정말 중요한 건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그 신학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고 그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신학을 조금씩 공부해 보니 이미 내가 했던 경험들이 신학의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 결국 역사 속에 하나님이 심어 두신 신학자들의 활동들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런 측면에서 신학은 중요해 보여…)

5.     한국에서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하는 분들도 인터넷을 포함해서 꽤 있는 것 같던데,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틀에서 바라볼 때 자유주의라는 것 뿐이지, 실제로 독일에서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들이 구분되는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성경 무오설부분인데, 정통신학 측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니 오류가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성경을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분석하려 했던고등 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어. 그들이 성경이라는 신령한 경전을 인본주의적으로 비평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었지. 여기서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데, 모든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다는 쪽은 요즘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고등비평에서 말을 굳이 안 해도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어도 분명오류가 있기에….. 그런데오류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이 하도 오해를 많이 해서 그냥불일치’(discrepancy)가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즉 내용의 오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4복음서 등에 흔히 등장하는 시간의 오류, 인물의 오류 등 단어에 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더라구칼 바르트는 이런 영역에서 열려 있었어. , 인간의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내시고자 했기에 단어나, 연대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고 주장했던 게 칼 바르트였어. (지금에 와서 보면, 이 고백이 가장 맞아 보이는데 정통 신학 하시는 분들은 그걸 납득할 수 없나 봐,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너무 훼손되어서 그런 허점이 있는 경전을 진리라고 주창하기가 힘들어 질까 봐 두려워 해. 계몽주의를 거쳐서 과학적이고 분석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들의 비판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내 놓은 타협안은 성경의 사본들에는 이런 글자의 불일치가 많지만, 성경 원본에는 결코 그런 불일치가 있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요즘 하고 있어. (그래도 꽤 깨어있는 장로교 신학자 분들이 지지하실 듯) ->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면, 모든 사본이 하나 같이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완벽히 일치하는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말은 원본 또한 그와 같이불일치를 내포한 채 기록되어져 있었기에 그걸 필사한 사본이 조금씩 틀린 게 아니냐고 해석하는 게 일단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맞는 말인데, 이런 류의 비평을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그 분들은 말씀하고 있어.

 

참 중요한 이슈들이 많아. 나눌 말이 많지만 이 정도만 나눠 둘께.

늘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지점을 찾기 위해 씨름하며 기도하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함께연합해야 하기에, 바른 지점을 주장할 때도 늘분열을 조장하는 글과 말과 행동은 지양하자.

마지막으로 어떤 입장이 되었든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점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모든 논리는 뒤집힐 수 있다는 점. 분명히 피력해 두고, 글을 마칠께.

 

[성경 무오설]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글을 올려 줄께!

 

-기존에 우리가 들어 왔던장로교적 틀을 약간 벗어난 관점을 전개하고 있지만,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로이드 존스, 칼빈, 성 어거스틴 등이(최근에는존 파이퍼 목사님) 보여주는 탄탄한 신앙적 고백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두 지점을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좀 더 기도하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칭의라는 이슈를 놓고 현대 신학자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부분들도 양 측의 의견이 모두 팽팽하기 때문에 답이 내려질지는 잘 모르겠음.(무엇보다도 가장 큰 target이 되었다는 점에서장로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정통신학의 정통성 또한 일견 증명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진리를 분별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정죄와 판단을 일삼진 않았는지…. 우리가 특정 교파의 흐름에 너무 익숙해 진 나머지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는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너무 단순히 여겼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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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나의 사귐]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해요?’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예수님은 잠잠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란다.’ … 나를 잡으렴…. 나를 만지렴…. 나를 보렴…..나를 받아 들여 주렴……네가 나와 같이 걸어가게 될 때, 네 마음 속의 수 많은 질문들은 사라질 거란다……..미래를 주도하고픈 너의 욕망은 사라지고, 모든 주도권을 내리게 되기에 참된 자유와 평강 속에서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단다. 무언가를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무거운 의무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고, 그저나의 생명과 나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내가 곧 길 그 자체며, 내가 곧 생명 그 자체란다…….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다시 관계를 맺자꾸나…….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난 너와 관계 맺을 수 있단다……. 가자꾸나함께….난 분명한 목적과 뜻과 의중을 지닌 인격체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고, 구체적인 계획도 있단다. 그러나내가 원했던 건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으며, 지금 이순간너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을 열망했단다. 네가 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을 난 확신한단다. 넌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고,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내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시편39: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27: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를 고백하게 될 거란다.

 

그저 기도할 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계속 함께 할 것을 확신하며

 

샬롬!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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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광은

출판 포이에마

발매 2014.02.12

 

 

 

 

 

  근 몇년 간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감동을 받았던 책이다. (꼭 책의 저자의 주장에 동의해서는 아니다)


 

  저자의 신학적 노력과 다양한 학문 활동이 집약된 농축된 저서라고 볼 수 있다.

 


 

  [메가 처치 논박]을 써서 한국 교회의 괴상한 문제점의 중요한 한 측면을 밝혀냈던 신광은 목사님이 이번에는 한층 더 강력해진 '한국 교회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나타났다. (메가 처치 논박에서는 문제 분석이 혁명적으로 탁월했지만 해결책 제시는 미흡했던 아쉬움이 있다. 이번 책은 해결책이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상으로나 추론상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아르뱅주의와 메가처치 현상이 더해져서 한국 교회가 병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상당하다. (이러한 원인 이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 측면이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르뱅주의라는 개념은 정말 신선하다)

 


 

  이는 아르미니우스주의 + 칼빈 주의의 합성어인데, 좋은 의미로 합성된 의미는 아니고 각 교리에서 필요한 부분만 쏙 빼서 하나로 합쳐 버린 변종 교리를 의미한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 많아서 두고두고 별도의 글로 인용해서 올릴 예정이다.('아르뱅주의가 한국 토양에 자리를 잡은 역사'는 글로 따로 올릴 예정이다)

 


 

 이 책은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체에 대한 공부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저자는 종교개혁이 지닌 인간적인 문제점을 부정하지 않고,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장,단점,윤리관 등을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는 합치될 수 없는 두 사상을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데,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부분이 참으로 신선하다.

 


 

-> 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융합될 수 있는 방법이 논리적으로는 도통 없다 보니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도입된다. 둘 다 100% 작용하는 상호 모순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둘이 50%씩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가톨릭 신학자인 몰리나의 '중간 지식'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이 부분이 정말 신선하다)

 


 

'중간지식'은 다른 말로 하면 '조건적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상 아는 지식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알게 된 지식도 아니다.

[일단 '지식'은 하나님이라면 본성상 필연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본성적 지식'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사건을 예정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의지적 지식'으로 구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수학적 지식, 과학적 지식' 등은 하나님의 본성상 알고 계실 것이다. 이런 걸 '본성적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의지가 달린 문제이므로 '의지적 지식'이라고 볼 수 있다. ]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 지식은 하나님이 탁월한 예지력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조건 아래 A를 선택할지 혹은 B를 선택할지를 내다보는 지식을 말한다. 비유로 말하면 바둑의 고수가 초심자와 바둑 둘 때 초심자의 바둑 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유사하다. 초심자는 무척 고심해서 바둑을 두지만 고수는 자신이 어디다 돌을 놓으면 초심자가 그 다음 어떤 식으로 돌을 놓을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고수는 하수가 실수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때 고수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예지하고 그 예지에 기초해서 특정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초심자로 하여금 실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 이 때 하수가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수가 하수에게 강제적으로 시킨 일일까?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초심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고수가 예측한 실수를 했다. 고수는 다만 상황을 조성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신학적으로 너무 훌륭한 개론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을 다 따로 정리해 둬도 좋을 것 같다.

 


 

간략하게나마 양측 교리를 살펴보고,아르뱅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저자가 주장하는 3개의 우물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칼빈주의 5대 교리 TULIIP]

 


 

T: total Depravity : 전적타락

U: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 Limited Atonement : 제한속죄

I: Irresistable Grace: 거부할 수 없는 은혜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 성도의 견인

 


 

T: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U: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택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비택자) 모두를 미리 정하셨다.

L: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비택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실 이유가 없다.

I: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P: 한 번 구원받은 신자는 영원히 구원받는다. 그가 가끔 낙심하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을지라도 그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저자는 칼뱅주의의 한계를 적절하게 비판한다. 몇 군데만 살펴보면 이미 버림 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 논리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십자가 사랑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두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억지로 하나를 포기하면서 하나로 합치려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변증법 적인 모순을 그대로 두고 끌고 가는 것을 더 이야기할 때가 많다.

 


 

  제한속죄 개념도 이상하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는 구절에 대한 칼빈주의측 논의를 들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모두 해석이 이상하다. 누가 들어도 끼워 맞추기 해석일 뿐인 주장을 한다. 무엇보다도 제한속죄를 하는 신이 과연 자비로운 신이고, 공평한 신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사실 이 책에서는 T,U,L,I,P 가 다 비판을 받는데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개혁주의도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분들은 극도로 강경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거짓'이라고 매도할 때가 많다.)

 


 

   그건 그렇고 칼빈주의자들의 윤리적 추진력은 '두려움'이었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택자'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진리를 지키려 애를 쓰고 그러한 열매를 통해 자신이 '택자' 임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참고로 칼빈주의의 TULIP 교리는 그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만든 '예정론'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미-펠라기우스 주의가 등장했고 이게 상당 부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닮았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를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구원을 주장한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주요 교리]

 


 

Natural inability (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


Conditional Election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를 미리 알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예정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을 믿을 것이라는 조건에 따른다.


Unlimited Atonement (보편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차별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Resistable Grace (저항할 수 있는 은혜)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는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Conditional Perseverance (조건적 견인): 신자는 인내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칼빈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했다지만 저자는 이 5개의 교리도 차근차근 반박해 나간다.

(난감하겠지만, 논리가 상당히 탄탄하다)

 


 

가령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죄와 악을 개인의 도덕적 결단과 책임의 문제로 환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저자는 2개의 예시를 든다.

 


 

1) 중독현상 : 중독 환자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할까? (ex)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대로 알코올 중독 환자는 술을 마실 자유는 있어도 마시지 않을 자유는 없다. 이와 같이 도무지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중독현상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칼뱅주의에 더 잘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2) '집단악' 개념 :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집단악'을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맞다는 걸까? 결론은 둘 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가령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 에서도 12단계 치유법이 있는데 그 중 1단계가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스스로 생활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시인했다"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칼뱅주의의 전적 타락설인 T)을 자기 스스로 인정(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의지론)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역설적인 결론이다.


  참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윤리적인 추진력은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 티켓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칼빈주의와 달리 구원은 -> 성화 -> 영화로 진행되므로 그 구원을 삶으로 이뤄 나가라는 신학을 지지하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저자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교리를 하나씩 반박해 나가는 건 대단하다.)


  결국 이와 같은 지점까지 왔는데 이제 아르뱅주의를 봐야 한다.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 열차를 거머쥘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렇게 구원을 받고 회심을 했으면 이제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 교리처럼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는 퓨전 신학이다.


  이런 이상한 신학이 한국 교회에 정착을 하면서 신자들은 윤리적인 추진력도 잃어 버리고, 비성경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 전체가 거대한 논리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깔끔하고 잘 읽힐 것이다.)

 


 

아르뱅주의의 특징은 1) 자기 중심적 2) 반지성주의 3) 편의주의 4) 맹신주의 다.

 


 

  구원의 근거를 '구원의 확신' 자체에 두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진리'가 구원 받은 믿음의 내용이 아닌게 되어 버린다. 믿음의 내용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믿음' 자체가 되어 버림으로써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짓 체계에 빠져 버린다.


(저자는 한국 교회에 신천지가 판을 치게 된 것도 '아르뱅주의' 때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 측면에서는 나도 동의한다. 그 이외에도 '율법주의, 근본주의 신학' 으로 인해 성경의 위치가 본연의 자리를 이탈하면서 '그들이 성경을 활용하는 방식에 성도들이 속게 된 점'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저자는 개신교 구원론이 3개의 우물에 빠졌다고 주장하는데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2)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3) 루터의 우물이 바로 그것이다.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먼저 그리스 철학의 명제적, 명사적,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갇혀 버리는 바람에 칼빈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다 성서 해석에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적이 아닌 성서적 해석법을 창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저자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이 전수되면서 모든 성경의 진리를 '명제화'시켜서 참과, 거짓으로 판단이 가능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점도 지적하는데 문제는 성서의 모든 내용이 명제화 될 수 있냔느 것이다. 성서의 계시란 역사를 의미하며 역사는 삶인데 그 삶을 다 명제화 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명제화 되지 않는 성서의 내용은 결국 제거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설도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에 따른 전제(방법론)으로 도출되는 결론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와 같은 방법론 자체를 폐기하고 나면 이런 오류도 걷히게 될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결국 성서의 진리관은 '인격적 진리관', '실존적 진리관'이지, '명제적 진리관'이 아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성서는 '진리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논리적 지식'이 아닌 인격체에 대한 '관계적 지식', 즉 '야다(yada)'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명제적 진리,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 프란시스 쉐퍼 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틀리지 않다. 아퀴나스는 워낙 유명하고, 쉐퍼도 명제적 진리를 진리에 이르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펠라기우스의 행위 중심적 구원관에 반대되는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런데 실제 성서 속에는 은총과 행위 사이에 긴장은 있어도 대립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에서는 은총과 공로가 대립할 뿐이다. 즉 행위를 앞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는 게 문제인 것이다. 오히려 은총과 행위는 서로 함께 가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는 상대측의 주장을 거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원인이 될 만한 행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버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강조하게 되고 인간은 믿음조차 자발적으로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 여기서 예정론이 추론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오류 투성이다.


  은총이 보존되려면 인간은 자유도 없고 지성도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성경에도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놓아주지 않을 때 마음이 완고해진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완고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두 표현이 다 등장한다). (가룟 유다 건도 마찬가지다)


  성서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충돌하지 않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총이 마치 대립되는 듯이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의 저자는 공로는 은총을 파괴하지만 행위와 은총은 대립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서 인간 편에 주도권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서 성경에 위배되진 않는다고 말하며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 황산벌 전투 등의 비유를 들어서 멋지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켜 나간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톰 라이트의 '관점'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적이고 탁월한 글을 쓸 수 있는 저자도 그의 논리에 설득을 당했나 보다. '칭의'에 대한 개념도 라이트의 노선을 따라가는 듯 하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행위 라는 대립구도 형성에 의해 은총은 '행위 없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 도식은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을 거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루터의 우물]

 

  오직 믿기만 하면 칭의가 수여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신학으로 인해 그저 믿는 순간이 칭의의 순간이고, 칭의의 순간은 구원의 순간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칭의론을 벗어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아 버리는 격이 되므로 루터의 칭의 중심주의는 윤리적 추진력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칼빈은 이 칭의 뒤에 '성화'가 이어지는 도식을 그리려 했고, 그런 식으로 윤리관을 어느 정도 되찾긴 했지만 깔끔한 서술이 안 되는 문제점이 생긴다.


 결국 루터로 인해 한번의 결단의 체험, 놀라운 영접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게 되어 버린 것이다.

(좀 애매하긴 하다. 왜냐하면 루터 뿐만 아니라 존 웨슬리나 스펄전, 무디 등도 이와 같은 회심 체험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교리대로 칭의 중심주의가 되어 버리면 그 회심 체험 한번으로 모든 구원이 해결된 것처럼 살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정교한 교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후반에는 바른 구원관을 제 3의 대안으로 모색하면서 이 책은 마무리가 된다.

 

 

 

두고두고 공부하면서 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 모색해 봐야 겠다.

 


 

진실된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가뭄에 단비와 같이 훌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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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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