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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매력은 딱딱하고, 접근하기 어려워들 하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예술의 여러 장르들(ex) 미술, 음악, 무용, 건축, 사진, 연극, 영화, 문학)에 접근해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강력히 추천해 줄 만한 책이다.

 

철학을 교양화, 대중화 시키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는 철학아카데미의 걸작이라고나 할까?

 

컬러풀한 사진들이 들어 있어서 책을 읽어 내려갈 때 지루함이 적고, 한 챕터가 끝나고 나면 [더 생각해 볼 문제], [더 읽어볼 책]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 책에 대한 자세한 해설까지 해 놓는 친절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뭔가 친구들끼리 모여서 디스커션 하기도 좋고, 조별 활동 등에 활용해도 좋은 책이다.)

 

 

독자의 눈까지 내려가서 책을 서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여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도 중요한 논점을 많이 제시한다.

 

가령 "니체는 오로지 미의 현상으로서만 이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예술에는 여러 장르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미술과 음악과 시다. 이 세 가지는 어떤 동일성과 차이가 있는가?"

 

등의 질문들은 우리의 사유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요즘 시대는 워낙, 사유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이런 시대일수록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

 

책의 저자의 말처럼 예술과 철학은 뭔가 깊고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예술 혹은 예술가는 감각적인 직관의 힘으로 세계를 강도 높게 느낀다면 철학 혹은 철학자는 강도 높은 강렬한 감각의 흐름을 견고하고 명료한 언어의 체로 걸러 갈무리한다. 

 

그리고 역시 저자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의 힘은 결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리하여 철학 속에 서려 남아도는 감각은 철학에서 예술로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수 많은 철학자들이 단지 '철학 하기'만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주목했었다.

 

그 미묘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철학 속에 서려 남아도는 감각'의 맛을 보며, 실제 다양한 예술 분야를 자유로이 탐색해 보고 싶지 않는가?

 

그런 지적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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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 거리(Zeitabstand)' 는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가다머-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 교회 현실은 정말 상상력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힘들 거예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게 소명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동시대와 시대적 거리 두기가 아닌가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볼 수 없어요.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얘기해 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극히 소수만이 근대의 문제를 깨달았어요.

데카르트나 칸트를 보면 근대를 형성한 사람이면서도 근대의 문제를 동시에 본 철학자들이 아닌가 해요.

독특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큰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근대를 형성하면서 그 한계를 벗어날 다른 면을 드러내지요. 그렇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양희송: 현실의 교회 구조에서 일차적으로 거리두기는 누구의 역할일까요?

강영안: 신학자들이지요. 목회자는 현장에 워낙 깊숙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떨어져 있으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지요. 목회자들의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상상력의 눈이 열리고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달리 신학자는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신학자들이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받는 이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눈을 잃어 버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가 해요.

양희송: 우리 현실에서 그 과제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원인이랄까, 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강영안: 글쎄요, 그것이 뭘까요? 신학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교단 신학자라는 점이에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교회 정치로 부터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 발을 빼고 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신학자라는 본질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가 지적하는 점인데 신학자들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과 달리 한 '기관'에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기관이 교회인데, 일반 교인들과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칸트는 지적했지요. 대중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그런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일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수단이나 충고를 신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이죠. 신학자들의 연구나 발언도 교회 현실이나 사회문화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조하고 발언하기 보다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이것이 칸트의 진단이에요.

양희송: 신학자들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군요? (웃음)

강영안: 신학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가 지적한 또 다른 두 직업,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도 동일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과 대학 교수들은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의사들은 환자들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법대 교수들은 변호사나 판사를 키워 내고, 변호사나 판사는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단 말이죠.

중세 대학의 세 중심 대학, 중심 학부(faculty)인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영혼의 질병, 사회 질병, 신체적 질병, 이렇게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칸트는 이제 그런 비판적 역할을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인문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봐요.

칸트가 말년에 저술한 <학부간의 논쟁> 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양희송: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법학이나 의학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의 공적 역할 수행자로 여겨지는데, 신학은 종교 분과 혹은 특정 종교의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축소되면서 그만큼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잖아요.

강영안: 배제되었죠. 그건 계몽주의 문화의 소산이에요. 사실 계몽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아니, 계몽주의가 한참 유행할 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공적 역할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했거든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먹혀 들어갔습니다.

​칸트가 활동한 18세기 말만 해도 프로이센 제국에서 경건주의파 출신 목사들의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빌헬름 2세 치하에 종교 검열이 생기고 종교 문제에 심한 억압이 있었지요. 지금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역할이 공적 영역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인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지요. 영적 문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가, 심리상담가가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초래한 현상입니다.

양희송: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비판과 방향 제시 기능을 하려면, 교단 신학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로 종교적 영역에 관심사를 국한시키고, 기독 철학자나 기독 인문학자들이 공적 영역에 기독교 담론을 제공하는 구조로 힘을 기울여야 할까요?

강영안: 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 인문학자들과 기독 사회과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좀 더 확대한다면 기독 학자들이 교회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독교 전통과 세속 문화 전통을 모두 고려한 뒤 나오는 온당한 목소리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대학 신학부가 있거든요.

그 경우 왜 교회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이 경우에는 교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교단 신학의 경우, 교회와 너무 밀착해서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고, 교단 신학과 관계없는 일반 대학의 신학자들의 경우, 교회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발휘할 공통의 바탕(common basis)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해요.

​.........

동시대와 거리를 두려면 교회에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에 몸을 담아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 두기를 해야 현실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말씀에 합당한 교회를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빈들의 소리에 그치겠지요.

신학자나 기독 학자들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믿어요.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철학적 논의를 시도한 예를 지난 세기에서 찾자면 두 전통이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카이퍼 전통(Kyuper tradition)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와 네델란드 중심으로 한 이 전통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카이퍼 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이어베이르와 폴른호븐과 그 후예들이 이 작업을 했어요. 경제학 분야에서는 봅 하웃즈바르트, 기술 철학 분야에서는 반 리슨과 스후르만, 에술 분야에서는 한스 로크마크르 등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등장한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나 존 밀뱅크(John Milbank)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카이퍼나 도이어베이르트 전통은 사실 철학을 중심으로 경제학, 미술, 기술철학 등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고 신학이 토대가 아니에요.

오히려 철학이 토대에 있죠. 그런데 급진정통주의는 신학 자체가 모든 영역을 성찰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성경 연구나 기독교 전통 연구에 머물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영성 등 전통적으로 신학적 성찰에서 제외된 영역 전체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 점에서 카이퍼 저너통과 급진정통주의는  비슷한 데가 있어요.

...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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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곳 : http://www.gotoquiz.com/which_philosopher_are_you


 

 

 

 

아래는 번역


 

1.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18살 미만
18-24살
25-30살
31-40살
41-50살
51-60살
60살 초과


 

 


 

2. 성별은?
남자
여자


 

 


 

3. 만일 숲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곳에 아무도 없다면, 소리가 나겠습니까?
아뇨

질문이 합당치 않네요.


 

 


 

4.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나요?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세상의 "진리"를 변화시킵니다.
아무것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는 그것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5. 진리는 상대적인가요?

아뇨. 진리는 절대적입니다.
둘 중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6. 진리는 선험적인가요?
네. 진리는 경험의 세계와 나뉘어진 더 높은 층에 있습니다.
아뇨. 진리는 경험의 세계에 있습니다.(내 마음 밖에)
아뇨. 진리는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내 마음" 역시도 경험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7. 예술..
인간의 모방과 조화의 충동을 만족시킵니다.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 한, 예술은 해롭고 망상적인 것입니다.
불멸하고 선험적인 것으로써 존재합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목적입니다.
사실의 이상적인 표현입니다.


 

 


 

8. 삶은..
우리가 잘 살았다면, 예술입니다.
그건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로부터의 착각입니다.
으스스한, 삶은 광휘이다. 삶은 우리의 가장 작은 부분이, 우리 대부분이 바로 그 부분(즉, 우리의 최소한)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다.삶은 새싹의 돋움이며, 음산한 시간의 소비 안에서 흐릿한 최초의 충동의 생성이다.


 

사실들의 편집물입니다.


 

 


 

9. 신은..
죽었다.
우리가 세계를 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불변의 범주이다.
진리이자 정의이다.
하나 이상의 것이다.
삶의 불합리함을 피하려 하는 시도이다.


 

 


 

10. 우리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하는가.
삶의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람
진리에 도달하는 사람
선, 악의 저편에 도달해야한다.
완벽한 중간자, 고결한 개인
오로지 선의지에서만 행동하는 윤리적인 인간


 

 


 

11. 수학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과학과 달리)
수학은 우리에게 뜻이 없는 진리를 제공한다.
믿음이란 거미줄(네트워크)의 한 부분
아폴론적인 꿈의 한 부분
순수하게 분석적인 것


 

 


 

12. 언어는..
지각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
지각에 관여되어 있다.
언어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질 수 있다.

 

 

 

원글(출처와 번역) 철학포럼 주유님 :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033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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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수 많은 걸출한 철학자를 배출해 낸 나라이다. 실제로 독일에 가면 테오도르 호이스 다리에서부터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남다른 위용이 느껴지는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특별한 철학을 정립하기도 했었다.

 

갑작스레 독일을 언급한 이유는, 이와 같이 인간 지성의 정점을 선점하고 있던 독일이라는 나라로부터 유토피아(Utopia)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던 계몽주의의 환상이 세계대전(The World War)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오명 앞에 사그라 들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철학이 가야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그 길을 논하기 위해 아주 서툴게나마 주요한 철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나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면상의 한계와 글쓴이의 미미한 지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 서툰 흐름 파악조차도 범위를 한정 지어야 할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자연 중심이었고, 중세로 넘어 오면서 중심이었다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를 거쳐서 서서히 ’(인간)란 존재를 향해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인으로서 지성을 중요시한 합리론자였다면, 동시대에 영국에선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경험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합리론이냐 경험론이냐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칸트라는 철학자가 등장함으로써 두 관점을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세계 철학사에서는 만약 칸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칸트를 창조해야만 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칸트는 철학을 신학과 과학으로부터 독립시켰으며 독일 관념 철학의 막을 열었는데 이 시기 즈음부터 철학의 본 무대는 독일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했던 에 대한 논의는 계몽주의 철학의 조류를 따라 나란 존재가 지닌 이성과 인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발전해 왔다면 몇 차례의 혁명과 전쟁을 치르고 난 19~20세기에 와서는 이성을 지닌 나란 존재의 본질을 찾기 보다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의 존재인 실존’(Existence)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유신론적 철학은 키에르케고르 등을 위시하여, 지금까지도 다양한 갈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선 엘빈 플란팅가와 같은 유신론적 분석 철학자가 등장하여서 탄탄한 논리로 유신론의 합리성을 변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무신론적 철학이 지성의 영역에서 이 정도의 지위를 누리게 된 시기도 19~20세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기반 속에서 사유하던 방식이 의심되기 시작하고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 모더니즘을 향해 세계관이 변화되어 가면서 실존 철학’, ‘분석 철학’, ‘해체주의까지 무신론적 철학은 거침 없는 항해를 이어 나간다.

 

다시 철학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인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인간이 무지한 정신에서 절대정신으로 발전해 간다고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변증법을 이어받은 칼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주창하여 역사 속에서 실질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이와 같은 논리를 인간에게만 한정 짓지 않고,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도 절대 속박에서 절대 자유로의 변천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이 정,,합에 기초하여 이뤄졌듯이 철학의 도 헤겔이라는 걸출한 철학자의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 철학’()이 등장했다는 것이다.(‘에 도달한 철학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엔 절대 정신을 주장하는 헤겔의 모습 속에서 합리론자의 망령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삶에 회의를 느끼며 염세적인 느낌으로 살기를 촉구하는 반작용을 일으켜 본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내리고 금욕을 체득하라고 독려 하기도 하며 나름의 입지를 굳히던 쇼펜하우어는 니체, 프로이트, 바그너 등에게도 영향을 줌으로써 철학사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철학의 은 다른 학문들과도 적절한 통섭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비단 쇼펜하우어 뿐만 아니라 헤겔의 철학이 칼 마르크스를 통해 사회 이념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독일을 최고의 지성 국가로 등극하게 해준 칸트의 관념 철학이 쇼펜하우어라는 인물의 반작용으로 인해 비판 받기 시작하면서 철학의 은 새로운 응용과 조합을 이뤄 나가기 시작한다.

 

철학이 발전되어온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간략하게 추려 내고, 요약해서 설명하려 해도 그 복잡성(Complexity) 자체가 철학의 진가이자 매력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실존주의 철학의 시조 격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절대 정신개념을 비판했었는데 그는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가다.

 

즉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를 실존이라고 지칭했는데 인간의 실존 방법 3단계인 1.미적 실존 2.윤리적 실존 3.종교적 실존 속에서 인간은 종교적 실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갈 때 필연적으로 나란 실존은 윤리의 벽 앞에서 쾌락과 본성을 죽여야 하기에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고, 우리는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기 위해 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종교와 연계되어 새로운 깊이를 더해 가던 실존철학은 기존의 사변적이고, 이성적인 논의였던 삶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일단 그런 삶과 인간의 개념을 정의 내리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는 이미 이곳에 실존하고, 이미 이곳에 놓여 있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종교적 입장을 떠나서라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대표주자인 니체와 사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와 기존의 모더니즘 적 문명 전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니체의 철학 사상은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정의했던 사르트르의 영향력은 실제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철학의 모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 없이 철학사를 요약하며 달려왔지만 실상 너무도 놓친 부분이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철학자 몇 명만 더 살펴 보고, 우리는 지금 현재우리의 과 근접해 있는 철학의 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후에야 비로소 철학이 장차 나아갈 에 대한 고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별명은 존재의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란 존재는 현존재로서 세계와 유리되지 않은 세계 내 존재이다.

 

단순히 합리주의 철학이 행했던 것처럼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를 들여다 보는 삶을 원치 않았던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어떤 사태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실존 전체를 미래를 향해 내던져서(‘기투된 존재로 표현함)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해란 사태의 피상에만 머무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그 사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 철학에서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 구조의 분석에 집중했었다면, 후기 철학에서는 존재 전체인 세계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역사성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처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인간의 실존 방식에 따라 자신을 달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살짝 나누기만 했지만, 그의 실존 철학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 즈음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과 연계시키며 나란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바라보며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나란 존재의 참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시도를 해 보인다. 현실에 참여하는 삶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은 학생 혁명에 불을 당겨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철학의 을 간략히 나누고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일상 언어, 학문 용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중요시하는 철학을 우리는 분석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기존의 관념 철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막역한 것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한 철학이 바로 분석 철학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드런트 러셀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분석 철학의 조류는 19세기에는 의식을 분석하는데 더 집중했다면, 20세기에는 언어를 분석하는 길이 더 득세했다고 보면 된다.

 

 

 

존재에 집중했던 하이데거완 달리 의미에 더 중요성을 두고 고민했던 언어 분석 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도 놓칠 수 없는 철학사의 중요 인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사유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구조를 알면 그의 내면 세계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가 가능한 영역만을 철학적으로 분석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분석할 수 없고, 자신이 설명해 낼 수 없다고 해서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무궁무진함과 귀중함을 자주 강조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변증법이라느니, ‘실존재라느니, ‘초인이라느니 다양한 가짜 언어로 규명하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철학의 주제를 존재사유로부터 언어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가 쓴 책은 <논고>로서 논리학을 기초로 사용하는 철학에 관한 논고라는 뜻인데, 2만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었지만, 이 책 한 권에 대한 연구 논문이 수 천편에 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만큼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적인 철학자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철학의 은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는 실존주의가 철학의 중심에 있었다면 프랑스 등의 서구 철학은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급격한 물살을 타게 된다.

 

먼저 구조주의는 사회나 현상은 각각 다른 모습, 특성을 지녀도 그 안의 공통적인 몇 가지 일반 법칙으로 참된 결론이 도출된다는 사조로서 인간의 행동이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데카르트의 계몽주의 철학이나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한 사르트르의 실존적 철학에도 반기를 드는 철학 사조다.

 

요즘 가장 주류를 이룬다는 해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절대로 선 언어적, 선 개념적인 실재와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현존(present)은 실제로 부재(absent)이며, 소여는 한갓 인간 담론의 구성물일 뿐이다. 그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은 실재론이다.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실재론자들은 소박한 실재론자(naïve realist), 관점주의적 실재론자(perspectival realist)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는 심판이 야구 경기 후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기를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야. 나는 있는 그대로 정확히 선언한다네.” 라고 말할 것이고 후자는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그런데 나는 내가 보는 대로 선언한다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론을 쇠퇴시키고 포스트 모던적인 관점에선 심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하지만 내가 선언하기 전까지 그것은 볼도, 스트라이크도 아니야.” 라고 말이다. 즉 데리다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은 실재론이 주를 이뤘기에 진리의 개념 체계 내에 현존한다고 전제된 것은 언어와 사고보다 앞서 존재하는 참된 소여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해서도 적합하게 파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게 서양 철학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 모더니티 사상은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이론은 실재와 실재에 대한 기술’(description) 사이에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해체주의자들은 이런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사고방식의 획일화도 그 본성상 폭력적이라고 규정하는 해체주의식 철학 앞에서 우리는 어떤 논의를 더 전개할 수 있을까?

 

헤겔, 하이데거, 칸트의 철학을 해체시켜 나가며 소위 로고스 중심주의를 격파해 나가는 그의 대담함은 언어를 가지고 마치 유희를 즐기듯이 꼬투리를 잡고, 애매모호함과 어중간한 표현들로 자신의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당혹시킨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글 자체도 그 앞에선 조목조목 해체될 것이기에 이 정도 선에서 논의를 마쳐야 할 것 같다.

 

해체주의 철학 그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속에서 모든 것이 상대화 되어 가고 있고 모든 기준이 부정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철학이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음 번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신 철학을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 보며, 그러한 철학의 강점과 한계점에 대해 논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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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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