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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정신약리학의 정신적 선조는 그보다도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세기에 병리적 불안은 생물학적, 의학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썼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머리를 갈라 보면 뇌에 습기가 많고 땀으로 가득하고 역한 냄새가 난다."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이 광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려가면 불안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어 담즙의 온도에 중대한 비중을 두었다. 담즙이 따뜻하면 온화하며 열정적이고 담즙이 차가우면 불안하고 겁이 많다.)

 

  히포크라테스는 불안 등 정신장애는 체액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면 나을 수 있는 의학적, 생물학적 문제라고 봤다.

 

  그러나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은 정신세계는 생리학과 구분되는 자율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여 불안이나 우울이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어느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정신병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린애 이야기처럼 허황하다."​ 고 했다. 플라톤은 사소한 심리적 문제는 의사가 치료할 수 있지만(정서적 문제가 신체를 통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근원이 있는 정서적 문제는 오직 철학자들만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불안 등의 정신적 문제는 생리적 불균형이 아니라 영혼의 부조화에서 오며 여기에서 회복하려면 깊은 자아성찰, 자기통제,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의 몸과 마음이 대체로 건강한 상태라면 배관공을 불러 집수리를 하듯 의사를 불러 사소한 질환을 고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 구조가 망가졌다면 의사는 쓸모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적절한 방법은 철학 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저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쓴 글들은 미술과 무관한 만큼 의학과도 무관하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

 

 


  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 오든, 데이비드 리스먼(미국 사회학자, 교육자로 [고독한 군중] 등의 저서를 남김),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은 생물학적 기능인 동시에 철학적인 기능이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개성과 문화 모두와 관련 있다. 우리는 불안을 정신적, 심리적으로 경험하지만, 분자나 생리학적 층위에서도 불안을 측정할 수 있다.

 


 

  불안은 유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시에 양육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심리적 현상이면서 사회적 현상이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하드웨어의 문제(배선이 엉망이다)이면서 소프트웨어의 문제(논리적 오류가 있는 프로그램을 돌려서 불안한 생각을 일으킨다.)이기도 하다.

 


 

 기질은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위험 유전자라든가 어린 시절의 상처 같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스피노자와 두드러지게 침착한 성품이 본인의 철학 덕분인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스피노자가 유전적으로 자율신경 각성 정도가 낮기 때문에 고요한 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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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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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3월 26일 ≪뉴스위크의 표지에는 녹색과 흰색 캡슐 그림과 함께 "획기적 우울증 약"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이렇게 해서 플루옥세틴, 상표명 프로작은 전 미국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고 20세기 후반의 상징적인 항우울제가 된다프로작 제조사 엘리 릴리는 블록버스터급의 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작은 미국에서 판매된 최초의 SSRI로 곧 자낙스제치고 향정신성 약물 가운데 역사상 최대 판매고를 기록한다. 곧 다른 SSRI인 졸로프트, 팍실, 셀렉사, 렉사프로 등이 시장에 나와서 프로작의 판매량을 능가하게 되지만 말이다.

  아마 항생제를 제외하면 SSRI가 역사상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처방약이 아닐까 싶다. 통계에 따르면 2002년 미국인 가운데 2500만 명이(남자는 전체의 5퍼센트 이상, 여자는 11퍼센트 이상) SSRI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증가해서 2007년에는 SSRI를 복용하는 미국인이 3300만에 달했다. SSRI는 정신병원과 가정집 약장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문화와 자연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로작 네이션』, 『프로작 일기』, 『프로작에 귀 기울이기』(당연히 『프로작에게 대꾸하기』라는 책도 있다.) 등의 책이 1990년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영화나 ≪뉴요커≫ 만화에도 프로작·렉사프로와 관련된 농담이 단골로 등장한다. 프로작, 팍실, 졸로프트, 셀렉사 잔류물이 미국 개구리 생태계에서 발견되었고(발달 지연과 기형을 유발했다.) 노스텍사스에서는 물고기의 뇌와 간에서 발견되었으며, 라스베이거스, 로스엔젤레스, 샌디에이고, 피닉스에 식수를 공급하는 미국 최대 저수지 미드 호에서도 발견되었다. 

  SSRI가 우리 문화와 환경에 이렇게 속속들이 침투해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 플루옥세틴(프로작) 특허를 가지고 있는 엘리 릴리 사는 이 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게 나와 일곱 차례나 프로젝트를 폐기했었다. 1984년 독일 허가 당국에서는 프루옥세틴 실험의 애매한 결과와 부작용에 대한 불만을 검토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득실을 견주어보면 우울증 치료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다른 SSRI인 팍실도 초기 임상 시험결과는 실패로 나왔었다.
  효과가 없다고 간주되던 SSRI가 어떻게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이 되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불안과 우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짧은 기간 동안에 얼마나 급변하였는지에 관한 이야기 속에 있다. 

  이야기는 이번에도 역시 국립보건원 스티브 브로디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아르비드 칼손은 1959년 브로디 실험실을 나와 스웨덴이 있는 예테보리 대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칼손은 인공적으로 세로토닌 수치를 낮춘 쥐에게 삼환계 항우울제를 투여하는 실험을 했다. 항우울제가 세로토닌 수치를 높일까? 그랬다. 이미프라민에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 효과가 있었다. 1960년대에 칼손은 항히스타민제를 가지고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 약도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할까? 이것 역시 그랬다. 클로르페니라민이라는 항히스타민제가 뇌의 세로토닌 수용체에 이미프라민이나 아미트립틸린보다 더욱 강하고 정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미프라민과 아미트립틸린은 가장 흔히 처방하는 삼환계 우울증 약이다. 칼손은 이 발견을 우울증이 세로토닌 부족 때문이라는 가설의 근거로 제시했다. 다음으로 이 발견을 기반으로 더 강한 항우울제 개발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SSRI가 탄생하게 되었다." 의학사가 에드워드 쇼터는 이렇게 말했다.
  칼손은 다음으로 다른 항히스타민제인 브롬페니라민(기침약 다임탭의 주요 성분)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물질도 이미프라민보다 더 확실하게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를 막았다. 칼손은 이 항히스타민제를 변형해서 세로토닌 재흡수만 막는 H102-09라는 화합물을 만들었다. 칼손은 스웨덴 제약회사인 아스트라의 연구팀과 협력하면서 1971년 4월 28일 H102-09을 지멜리딘이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 신청했다. 초기 임상 시험에서 지멜리딘이 우울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음이 나타나자, 아스트라는 1982년 젤미드라는 이름을 붙여 유럽 시장에 항우울제로 내놓았다. 아스트라는 머크 사에 젤미드의 북아메리카 판매 라이선스를 주었다. 머크는 미국에서 젤미드 판매를 준비했다. 그때 재앙이 일어났다. 젤미드를 먹던 환자 일부가 마비를 일으켰다. 사망자도 몇 명 나왔다. 젤미드는 유럽 약국에서 회수되었고 미국에서는 결국 판매되지 못했다. 

  엘리 릴리 경영진은 이런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10여 년 전에 인디애나에 있는 엘리 릴리 실험실 생화학자들이 디펜하이드라민(알레르기약 베나드릴의 주요 성분)이라는 또 다른 항히스타민제에서 유도해낸 물질을 가지고 LY-82816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낸 일이 있었다. 이 물질은 세로토닌에는 강한 영향을 미치는 반면 노르에피네프린 수치에는 약한 영향만 미쳤다. 그러니까 LY-82816은 이 연구자들이 실험한 여러 화합물 가운데 가장 "깨끗한", 곧 "선택적"인 약이었다. 엘리 릴리의 생화학자 데이비드 윙은 LY-82816을 재합성하여 LY-110140을 만들었고 발견한 내용을 1974년 라이프 사이언스≫에 기고했다. 윙이 나중에 회상하기를 "이 시점에서는 LY-110410에 관한 연구가 순전히 학술적이었다." 세로토닌만을 높이는 정신과 약에 시장성이 있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게디가 몇 년 앞서 개발된 젤미드가 임상 시험을 거쳐 시장에 나온 탓에 엘리 릴리는 LY-110140, 곧 플루옥세틴에서 손을 뗐다.


반면 삼환계 약과 MAOI는 세로토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등의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더러운", "비선택적" 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불쾌한 부작용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젤미드가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자 엘리 릴리는 플루옥세틴이 미국 시장 최초의 SSRI가 될 기회가 아직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구를 재가동했다. 초기 임상 시험 가운데 뚜렷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1986년 벨기에에서 승인을 받고 판매가 시작되었다. 1988년 1월, 플루옥세틴이 미국 시장에 "특정하게 작용하는, 매우 강력한 최초의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로 배포되었다. 엘리 릴리는 프로작이라는 상표명을 붙였다. 브랜딩 회사에서 날렵한 느낌을 준다고 권한 이름이었다. 

  2년 뒤, 이 약이 ≪뉴스위크≫의 표지를 장식했다. 3년 뒤, 브라운 의대 정신과 교수 피터 크레이머『프로작에게 귀 기울이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1993년 여름 『프로작에게 귀 기울이기』가 출간되었을 때 나는 스물 세 살이고 세 번째 삼환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데시프라민(상표명은 노르프라민)이었다. 나는 놀라운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크레이머의 환자들이 프로작 덕에 겪은 변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환자들이 "병이 나은 것 이상"으로 좋아졌다고 크레이머는 말했다. "프로작은 소심했던 사람들에게 사회적 자신감을 주고 예민한 사람을 대범하게 만들어주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세일즈맨에 버금가는 사교적 기술을 심어주는 듯했다." '음, 아주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만나왔던 의사 L박사가 몇 달 전부터 프로작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파우스트처럼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프로작이 긴장감이나 우울감을 사라지게 만들면 개성이나 독특한 성품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크레이머는 책에서 불안이나 우울이 아주 심한 환자라면 그런 거래라도 나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크레이머도 이른바 "미용적 정신약리학"에는 우려를 표했다. '정상'이거나 '건강한' 사람이 더 행복하고 더 사교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약을 먹는 일을 가리킨다.



-스콧 스토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중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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