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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곧 크리스마스(Christmas) 라는 용어는 그리스도(Christ) 와 미사(Mass) 의 합성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탄생한 아기 예수를 위한 예배와 경배를 말하는 구절은 있으나(눅 2:8~12) , 실제로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 탄생일을 기념일로 지켰다는 기록은 없지만 , 대부분의 개신교와 가톨릭은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고 있다.

 

한편 그리스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와 콥트교회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이지만 ,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 , 포르투칼에서는 "나탈(Natal)" , 스페인에서는 "나비다드(Navidad)" 로 불린다.

 

 

 

주목할 만한 것 하나는 나탈과 나비다드는 출생을 의미하는 영어 네이틀(Natal) 과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인데 , 우리 한국어의 "낳다" 와 발음이 비슷한 느낌이 들어 예수 탄생에 한국적인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성경에는 12월 25일이 예수의 출생일이라는 내용이 없다.

 

당시에 백성들이 지키던 축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평화와 풍년을 가져다주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us)" 를 섬겼다.

 

이 뜻은 "씨를 뿌리는 자" 로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제우스신으로부터 추방당한 크로노스 신이 이태리로 가서 농업기술을 보급하면서 로마의 황금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는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농신제가 열렸다.

 

백성들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한 주간을 보냈다.

 

 

 

어린이에게는 선물이 주어졌다. 여러 가지 오락도 즐겼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점차 농신제 축제 대신 크리스마스 축제로 바꾸어 나갔다.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는 이교도들의 동지절 축제가 열렸는데 ,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인 동지절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채택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날짜에 대하여는 고대 교회 당시에도 분분했다.

 

이미 2세기 말경 1월 6일과 12월 25일의 두 의견으로 갈라졌다.

 

공식적으로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 즉 성탄절이 된 것은 AD 336 년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선포하고 ,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로 지켰다.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예수가 세례를 받은 날로 정하여 지냈다.

 

서방교회는 이 날을 主顯節(주현절)로 기념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자 동박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서 갓 태어난 구세주 예수를 경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5세기 말경 서방교회에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고정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은 성 어거스틴이었다.

 

그 당시 새해 첫날이 3월 25일이었지만 , 교회가 그 날을 수태 고지일로 잡았다. 결국 어거스틴의 주장은 교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 교회 역시 어거스틴의 영향력에 힘입어 그 이후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켜왔다.

 

<성탄카드 대신에 보내드리는 마음의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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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약이 연구되면서 이런 개념은 더욱 굳건해졌다.

1954년 스위스 제약회사인 가이기에서 소라진의 화학 구조를 살짝 바꾸어 G22355라는 화합물을 만들고 ​이미프라민​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삼환계 약물이었다.(삼환계 약물은 화학적 구조가 고리 세 개로 되어 있다)

 

더 우수한 수면제를 개발하려고 연구 중이던 스위스 정신의학자 롤란드 쿤이 이미프라민을 환자들에게 주었다. 소라진과 이미프라민은 화학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원자 두 개만 다르다) ​쿤은 이미프라민도 소라진처럼 진정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환자들이 잠들게 하는 대신 활력을 주고 기분을 돋워주었다.

 

​50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이미프라민을 투여해본 쿤은 1957년 취리히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 심한 우울증을 겪던 환자들도 이미프라민을 수 주 투여한 뒤에 엄청나게 호전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제출했다. 기분이 좋아지고 활력이 솟고 '건강염려증'이 사라지고 '전반적 억제'가 해소되었다고 밝혔다.

"완치도 드물지 않았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이 이렇게 좋은 상태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효과를 확인해 주었다." 라고 쿤은 보고했다.

가이기는 이미프라민을 창고에서 꺼내어 1958년 ​토프라닐​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시장에 내놓았다.

1959년 9월 6일, 이미프라민이 미국 시장에 나온 날, <뉴욕 타임스>는 [약과 우울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어 ​마르실리드(이프로니아지드, 최초의 MAOI)와 토프라닐(이미프라민, 최초의 삼환계 우울증 약)​을 다루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약을 '항우울제'라고 불렀는데, 아마 언론이나 대중 문화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게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항우울제를 먹는 사람이 40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지만, 1957년 롤란드 쿤이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서 발표할 때에는 항우울제라는 게 없었다.

 

그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MAOI와 삼환계 우울증 약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낸 셈이다.

​1960년대 초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자이자 스티브 브로디 실험실 출신인 생화학자 줄리어스 액설로드는 이미프라민이 뇌 안의 여러 화학물질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연구를 했다.

 

액설로드는 이미프라민이 시냅스에서 ​노르에피네프린 ​ 재흡수를 막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몇 년 뒤 세로토닌 재흡수 역시 막는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액설로드는 항우울제가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분이 밝아지고 우울감이 사라진다는 이론을 세웠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이미프라민이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를 막고 환자들의 불안과 우울을 줄여준다면, 노르에피네프린과 정신건강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마르실리드나 토프라닌, 또 비슷한 효과를 내는 코카인은 시냅스의 노르에피네프린 수치를 높임으로써 불안과 우울을 치료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 매사추세츠 정신건강 센터 의사였던 조지프 실드크로트는 불안과 신경증은 어린 시절의 외상이나 해소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 때문에 일어나므로 프로이트 식 심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믿던 사람이다.

그런데 환자들 몇에게 이미프라민을 주어보았다. "이 약이 마법처럼 보였다." 실드크로트는 나중에 이렇게 밝혔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학이 연 정신의학의 신세계가." 1965년 실드크로트는 <미국 정신의학 저널>에 [정서장애에 대한 카테콜아민 가설:근거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스티브 브로디와 줄리어스 액설로드의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뇌 안의 카테콜아민 수치가 올라가면 우울증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카테콜아민은 노르에피네프린 등 싸움 또는 도주 반응과 관련이 있는 호르몬을 총칭하는 말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신에서 분비된다.

실드크로트의 논문은 정신의학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이 되었고 불안과 우울이 화학적 불균형 때문이라는 이론을 이 분야 중심에 당당히 올려놓은 논문이기도 했다.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첫 번째 기둥이 세워진 셈이다. ​프로이트 모델은 무의식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불안과 우울을 치료하려 했다. 항우울제가 등장하면서 ​정신병과 정서장애는 점점 더 특정 신경전달물질 시스템의 장애 탓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조현병과 약물 중독은 도파민 시스템 문제 때문으로 생각되었고, 우울증은 부신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이고, 불안은 세로토닌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약리학이 불안의 역사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의학계에서 불안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변화는, 이미프라민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P.S: 이미프라민 역시 우연 덕에 시장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우연이 없었더라면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역사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쿤의 말에 따르면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서 이미프라민에 대한 보고를 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우울증을 약으로 치료한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과 약에 관심이 얼마나 적었던지 취리히에서 쿤이 발표를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열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나중에 쿤의 발표는 약리학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라고까지 불렀다.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역사에 남게 될 사건이라는 뜻이다.)

 

가이기 사도 시큰둥해했다.

 

정신의학계와 마찬가지로 정서장애를 약으로 치료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고 이미프라민을 판매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쿤이 로마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가이기 사의 대주주인 로베르 보링거를 만났다. 보링거가 지나가는 말로 제네바에 사는 친척이 우울증이 깊다고 얘기했는데 쿤이 이미프라민 한 병을 손에 쥐어주었다. 보링거의 친척은 약을 먹고 며칠 만에 호전되었다. "쿤 말이 맞습니다. 이미프라민은 우울증 치료제입니다." 보링거가 가이기 이사회에서 단언했다. 가이기 중역들도 마음을 바꾸고 약을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이미프라민=Imipramine-> 삼환계 항우울제=T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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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스티브' 브로디는 2차 세계대전 때 ​말라리아약을 만들어 생화학자로 명성을 높였다. 1950년대 소라진과 밀타운이 시판되기 시작했을 때 브로디는 메릴랜드 주 베서스다에 있는 미국 국립보건원 심장 센터 실험실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뒤 10년에 걸쳐 이 실험실은 정신의학에 혁명을 가져온다.

 

 

 

그 획기적인 실험의 시작은 ​레세르핀 실험​이었다.

 

레세르핀은 ​라우월피아 세르펜티나(​뿌리가 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물질로 천 년도 넘는 옛날부터 인도에서 ​고혈압부터 불면증, 뱀독, 영아 산통까지 온갖 병에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그런데 힌두 문헌에 보면 "광기" 치료에도 효과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 전까지는 서구에서 레세르핀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소라진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걸 보고 스큅 사 경영진이 레세르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큅 사는 네이선 클라인에게 자금을 대주었고 클라인은 이 물질을 로클랜드 주립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시험 삼아 투여했다. 여러 명이 현저하게 호전되었고 불안 때문에 생활에 '장애'를 겪던 환자 몇몇이 퇴원하여 일상으로 돌아갈 정도로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

대규모 연구가 시작되었다. 1955년 뉴욕 주 정신위생국장 폴 호크가 뉴욕 주지사 W. 애버렐 해리먼과 협의하여 주 안에 있는 정신병원의 환자 9만 4000명 전부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는 15억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늘날이라면 이런 연구는 FDA 규정에 따라 시행될 수가 없다)

 

결과는 이랬다.

 

​레세르핀은 일부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었지만 소라진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심각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었다. ​그래서 레세르핀은 임상에서 정신과 약으로는 부적절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스티브 브로디와 국립보건원 동료들은 레세르핀을 통해 생화학과 행동 사이에서 뚜렷한 관련성을 발견했다.

 

존 개덤이 LSD와 세로토닌의 관계를 통해 발견한 것에 힌트를 얻어 브로디는 토끼에 레세르핀을 투여해 세로토닌 수치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폈다. 브로디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끼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면 뇌 안의 세로토닌이 감소하고, 그렇게 되면 토끼들이 마치 우울증이 있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무심'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토끼의 세로토닌 농도를 조절하여 '우울한' 행동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도 있었다. ​브로디는 1955년 <사이언스>에 이 발견을 보고했는데,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농도와 동물의 행동 변화를 연결 짓는 최초의 논문이었다.

한 의학사가는 브로디가 ​신경화학과 행동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표현했다.

브로디의 레세르핀 연구는 당시 정신의학자들이 MAOI에 관해 알게된 것과 연결된다. 좀 심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1950년대 뇌과학자들은 '상류'의 뉴런이 신경전달물질을 시냅스(신경 세포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로 방출하여 '하류'의 뉴런이 발화하게 한다는 사실을 막 알아낸 참이었다.

 

신경전달물질은 뉴런에서 뉴런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나중 뉴런의 세포막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여 신호를 전달한다.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할 때마다 (세로토닌은 세로토닌 수용체에, 노르에피네프린은 노르에피네프린 수용체에 결합한다) 신호를 받는 뉴런의 형태가 바꾸니다.

 

세포막에 구멍이 생겨 뉴런 바깥의 원자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여 뉴런의 전압을 바꾼다. 그러면 나중 뉴런이 발화하여 자기 신경전달물질을 주위 시냅스로 방출하게 된다. 이 신경전달물질이 또 다른 뉴런의 수용체에 닿는다.

 

 이런 ​연쇄 반응(​뉴런 발화, 신경전달물질 방출, 다른 뉴런이 발화하게 함)이 우리 뇌 안의 ​수천 억 개의 뉴런과 수조 개의 시냅스 사이에서 이루어져 정서, 지각,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은 정서와 사고의 물질적 재료이고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이프로니아지드​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 이 항생제가 ​모노아민 산화 효소(MAO)​라는 효소를 불활성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MAO는 시냅스에 쌓이는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을 ​분해하여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에 분출되면 ​보통은 MAO가 금세 치워서 다음 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이프로니아지드를 먹어 MAO가 억제되면 신경전달물질이 신경 말단에 더 오래 남아 있게 된다. 브로디 연구팀은 이프로니아지드가 시냅스에 신경전달물질이 쌓이게 하기 때문에 항우울 효과가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토끼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기 전에 이프로니아지드를 주면 그냥 레세르핀만 투여했을 때처럼 무기력한 상태가 되지 않았다. 브로디 연구팀은 이프로니아지드가 시냅스의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서 토끼가 '우울해지지' 않게 막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약업계가 새로운 생각에 눈뜬 순간이었다. ​정신과 약을 '화학적 불균형'을 바로잡는다거나 특정 신경전달물질 결핍을 보충하는 약이라고 선전하여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호프만라로슈는 1957년 이프로니아지드를 처음 광고하면서 이 약이 '세로토닌, 에피네프린,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아민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아민 산화효소 억제제'라고 선전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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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인간 중심 이론의 기원은 인간 역사의 가장 깊은 근저에 뿌리내려 있다.

스스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실존적 인간 중심 탐구에 이미 참여한 것이다.

 

실존주의가 라틴어(ex-sistere)에서 나온 것으로 '나아가다' 또는 '~이 되다'를 뜻하는 말이라면, 인본주의(humanism)는 고대 그리스 전통의 '자신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므로 실존적 인본주의는 자신이 되어가는, 또는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인간 중심 심리학은 인본주의와 실존주의에 기대어 심리학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접근은 정신분석과 행동주의에 내포된 환원주의적 관점을 반대하며 선택, 표현의 자유, 그리고 초월성의 특성을 강조한다.

철학적 측면도 중요하게 다루는데 죽음, 깊은 슬픔과 인간의 한계와 같은 실존적 요소에도 관심을 둔다.

 

특히 철학적 측면은 Rogers(1951)와 Perls(1971)에 의해 발전된 다른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구별될 수 있는 부분이며 자기 초월적 운동의 흐름과도 차별성을 지닐 수 있는 측면이다.

이에 대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오늘날의 실존적 인본주의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실존적 강조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 중심적 주장을 결합한 미국신 혼합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 결합은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역설적 통합을 만들어 낸다.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가 아우르는 세 가지 가치는 자유(인간의 한계 속에 주어진 것 안에서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것), 경험적 반영(참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싸우는 것), 책임감(자신이 된 것에 따른 행동 또는 반응을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대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1) 주어진 한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전인적'(지적-정서적-운동감각적) 능력

(2) 그 선택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전인적 능력

(3) 결정한 선택에 따라 행동하며 표현할 수 있는 전인적 능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치를 기반으로,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근본적인 변화가 단지 지적 또는 행동적 재구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험적 또는 '전인적' 재각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을 근거로 방법론을 개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뒤에서 다룰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던 해밀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해밀턴은 조절화 기술을 통해 두려움을 없애는 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정작 두려움을 훈습하고 이를 바꾸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두려움을 온전히 경험적으로 마주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실존적 인간 중심 접근법의 핵심은 전인적 만남에 대한 강조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접근법은 특히 우리가 의도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르는 것, 즉 내담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하다.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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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수 많은 걸출한 철학자를 배출해 낸 나라이다. 실제로 독일에 가면 테오도르 호이스 다리에서부터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남다른 위용이 느껴지는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특별한 철학을 정립하기도 했었다.

 

갑작스레 독일을 언급한 이유는, 이와 같이 인간 지성의 정점을 선점하고 있던 독일이라는 나라로부터 유토피아(Utopia)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던 계몽주의의 환상이 세계대전(The World War)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오명 앞에 사그라 들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철학이 가야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그 길을 논하기 위해 아주 서툴게나마 주요한 철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나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면상의 한계와 글쓴이의 미미한 지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 서툰 흐름 파악조차도 범위를 한정 지어야 할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자연 중심이었고, 중세로 넘어 오면서 중심이었다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를 거쳐서 서서히 ’(인간)란 존재를 향해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인으로서 지성을 중요시한 합리론자였다면, 동시대에 영국에선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경험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합리론이냐 경험론이냐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칸트라는 철학자가 등장함으로써 두 관점을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세계 철학사에서는 만약 칸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칸트를 창조해야만 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칸트는 철학을 신학과 과학으로부터 독립시켰으며 독일 관념 철학의 막을 열었는데 이 시기 즈음부터 철학의 본 무대는 독일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했던 에 대한 논의는 계몽주의 철학의 조류를 따라 나란 존재가 지닌 이성과 인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발전해 왔다면 몇 차례의 혁명과 전쟁을 치르고 난 19~20세기에 와서는 이성을 지닌 나란 존재의 본질을 찾기 보다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의 존재인 실존’(Existence)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유신론적 철학은 키에르케고르 등을 위시하여, 지금까지도 다양한 갈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선 엘빈 플란팅가와 같은 유신론적 분석 철학자가 등장하여서 탄탄한 논리로 유신론의 합리성을 변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무신론적 철학이 지성의 영역에서 이 정도의 지위를 누리게 된 시기도 19~20세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기반 속에서 사유하던 방식이 의심되기 시작하고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 모더니즘을 향해 세계관이 변화되어 가면서 실존 철학’, ‘분석 철학’, ‘해체주의까지 무신론적 철학은 거침 없는 항해를 이어 나간다.

 

다시 철학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인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인간이 무지한 정신에서 절대정신으로 발전해 간다고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변증법을 이어받은 칼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주창하여 역사 속에서 실질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이와 같은 논리를 인간에게만 한정 짓지 않고,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도 절대 속박에서 절대 자유로의 변천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이 정,,합에 기초하여 이뤄졌듯이 철학의 도 헤겔이라는 걸출한 철학자의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 철학’()이 등장했다는 것이다.(‘에 도달한 철학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엔 절대 정신을 주장하는 헤겔의 모습 속에서 합리론자의 망령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삶에 회의를 느끼며 염세적인 느낌으로 살기를 촉구하는 반작용을 일으켜 본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내리고 금욕을 체득하라고 독려 하기도 하며 나름의 입지를 굳히던 쇼펜하우어는 니체, 프로이트, 바그너 등에게도 영향을 줌으로써 철학사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철학의 은 다른 학문들과도 적절한 통섭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비단 쇼펜하우어 뿐만 아니라 헤겔의 철학이 칼 마르크스를 통해 사회 이념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독일을 최고의 지성 국가로 등극하게 해준 칸트의 관념 철학이 쇼펜하우어라는 인물의 반작용으로 인해 비판 받기 시작하면서 철학의 은 새로운 응용과 조합을 이뤄 나가기 시작한다.

 

철학이 발전되어온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간략하게 추려 내고, 요약해서 설명하려 해도 그 복잡성(Complexity) 자체가 철학의 진가이자 매력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실존주의 철학의 시조 격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절대 정신개념을 비판했었는데 그는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가다.

 

즉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를 실존이라고 지칭했는데 인간의 실존 방법 3단계인 1.미적 실존 2.윤리적 실존 3.종교적 실존 속에서 인간은 종교적 실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갈 때 필연적으로 나란 실존은 윤리의 벽 앞에서 쾌락과 본성을 죽여야 하기에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고, 우리는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기 위해 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종교와 연계되어 새로운 깊이를 더해 가던 실존철학은 기존의 사변적이고, 이성적인 논의였던 삶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일단 그런 삶과 인간의 개념을 정의 내리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는 이미 이곳에 실존하고, 이미 이곳에 놓여 있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종교적 입장을 떠나서라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대표주자인 니체와 사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와 기존의 모더니즘 적 문명 전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니체의 철학 사상은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정의했던 사르트르의 영향력은 실제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철학의 모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 없이 철학사를 요약하며 달려왔지만 실상 너무도 놓친 부분이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철학자 몇 명만 더 살펴 보고, 우리는 지금 현재우리의 과 근접해 있는 철학의 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후에야 비로소 철학이 장차 나아갈 에 대한 고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별명은 존재의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란 존재는 현존재로서 세계와 유리되지 않은 세계 내 존재이다.

 

단순히 합리주의 철학이 행했던 것처럼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를 들여다 보는 삶을 원치 않았던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어떤 사태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실존 전체를 미래를 향해 내던져서(‘기투된 존재로 표현함)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해란 사태의 피상에만 머무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그 사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 철학에서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 구조의 분석에 집중했었다면, 후기 철학에서는 존재 전체인 세계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역사성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처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인간의 실존 방식에 따라 자신을 달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살짝 나누기만 했지만, 그의 실존 철학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 즈음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과 연계시키며 나란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바라보며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나란 존재의 참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시도를 해 보인다. 현실에 참여하는 삶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은 학생 혁명에 불을 당겨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철학의 을 간략히 나누고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일상 언어, 학문 용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중요시하는 철학을 우리는 분석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기존의 관념 철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막역한 것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한 철학이 바로 분석 철학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드런트 러셀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분석 철학의 조류는 19세기에는 의식을 분석하는데 더 집중했다면, 20세기에는 언어를 분석하는 길이 더 득세했다고 보면 된다.

 

 

 

존재에 집중했던 하이데거완 달리 의미에 더 중요성을 두고 고민했던 언어 분석 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도 놓칠 수 없는 철학사의 중요 인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사유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구조를 알면 그의 내면 세계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가 가능한 영역만을 철학적으로 분석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분석할 수 없고, 자신이 설명해 낼 수 없다고 해서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무궁무진함과 귀중함을 자주 강조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변증법이라느니, ‘실존재라느니, ‘초인이라느니 다양한 가짜 언어로 규명하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철학의 주제를 존재사유로부터 언어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가 쓴 책은 <논고>로서 논리학을 기초로 사용하는 철학에 관한 논고라는 뜻인데, 2만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었지만, 이 책 한 권에 대한 연구 논문이 수 천편에 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만큼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적인 철학자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철학의 은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는 실존주의가 철학의 중심에 있었다면 프랑스 등의 서구 철학은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급격한 물살을 타게 된다.

 

먼저 구조주의는 사회나 현상은 각각 다른 모습, 특성을 지녀도 그 안의 공통적인 몇 가지 일반 법칙으로 참된 결론이 도출된다는 사조로서 인간의 행동이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데카르트의 계몽주의 철학이나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한 사르트르의 실존적 철학에도 반기를 드는 철학 사조다.

 

요즘 가장 주류를 이룬다는 해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절대로 선 언어적, 선 개념적인 실재와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현존(present)은 실제로 부재(absent)이며, 소여는 한갓 인간 담론의 구성물일 뿐이다. 그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은 실재론이다.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실재론자들은 소박한 실재론자(naïve realist), 관점주의적 실재론자(perspectival realist)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는 심판이 야구 경기 후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기를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야. 나는 있는 그대로 정확히 선언한다네.” 라고 말할 것이고 후자는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그런데 나는 내가 보는 대로 선언한다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론을 쇠퇴시키고 포스트 모던적인 관점에선 심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하지만 내가 선언하기 전까지 그것은 볼도, 스트라이크도 아니야.” 라고 말이다. 즉 데리다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은 실재론이 주를 이뤘기에 진리의 개념 체계 내에 현존한다고 전제된 것은 언어와 사고보다 앞서 존재하는 참된 소여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해서도 적합하게 파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게 서양 철학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 모더니티 사상은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이론은 실재와 실재에 대한 기술’(description) 사이에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해체주의자들은 이런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사고방식의 획일화도 그 본성상 폭력적이라고 규정하는 해체주의식 철학 앞에서 우리는 어떤 논의를 더 전개할 수 있을까?

 

헤겔, 하이데거, 칸트의 철학을 해체시켜 나가며 소위 로고스 중심주의를 격파해 나가는 그의 대담함은 언어를 가지고 마치 유희를 즐기듯이 꼬투리를 잡고, 애매모호함과 어중간한 표현들로 자신의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당혹시킨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글 자체도 그 앞에선 조목조목 해체될 것이기에 이 정도 선에서 논의를 마쳐야 할 것 같다.

 

해체주의 철학 그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속에서 모든 것이 상대화 되어 가고 있고 모든 기준이 부정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철학이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음 번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신 철학을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 보며, 그러한 철학의 강점과 한계점에 대해 논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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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년, 영국에서 바그다도로 파견한 영사 R. 테일러 대령이 고대 아시리아 왕궁터를

발굴하다가 설형 문자가 가득 적힌 육각 점토 기둥을 발견했다.

 

  테일러 각기둥이라고 하는 이 유물은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를 통치한 센나케리브 왕의 정복활동이 적혀 있다. 구약 성서에 나온 사건에 관한 동시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가나 신학자들 모두 매우 소중한 유물로 생각한다.

 

  나한테는 이 각기둥에 적힌 글에서 아시리아와 엘람(오늘날 이란 남서부에 해당)의 젊은 왕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각기둥에 새겨진 글은 센나케리브 왕의 군대가 엘람 군을 압도했을 때 일어난 일을 이렇게 들려준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병사들의 시신을 밟고 달아났다. 그물에 걸린 어린 새처럼 용기를 잃었다. 소변으로 전차를 더럽히고 대변을 지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에, 예민한 장을 경멸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전사를 도덕적으로 폄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  영웅적인 태도, 용기, "긴박한 상황에서의 우아함" 따위 운동 경기에 관련된 문구들을 전쟁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  그렇지만 전쟁의 성패에는 운동 경기에서 잘하고 못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대가가 걸려 있다. 삶과 죽음이 갈리기 때문이다.

 

  긴박한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군인(과 운동선수)은 사회적으로 가장 큰 칭송을 받고, 압박을 느낄 때 흔들리는 사람은 심한 지탄을 받는다. 불안이 강한 사람은 변덕스럽고 나약하다. 용맹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고 강하다.

 

  겁쟁이는 두려움에 지배당하지만 영웅은 두려움을 모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파르타 최고의 전사 아리스토데모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리스토데모스는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 때 "심장이 그를 저벼러" 후위에 버무르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토데모스는 '떠는 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치욕이 너무 컸던 탓에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

 

​  군대에서는 병사들이 불안에 내성을 갖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바이킹은 사슴 오줌으로 만든 흥분제를 이용해 화학적으로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기르려고 했다.

 

​  영국군 사령관들은 전통적으로 럼주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러시아군은 보드카를 사용했다. (약한 진정제인 쥐오줌풀도 사용했다.). 미국 국방부는 ​싸움 또는 도주 반응​을 막고 전장에서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을 약학적으로 연구해왔다. 얼마 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병사들의 ​히드로코르티손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병사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어느 수치를 넘어서면 전장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관리 방식이다.

 

2부에 계속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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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30년 전만 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1950년 정신분석학자 롤로 메이는 [불안의 의미]라는 책에서 자기 이전에 불안을 책 한 권 분량으로 다룬 사람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두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1927년 <심리학 초록>에 실린 목록을 보면 불안을 다룬 학술 논문은 세 편이 전부다. 1941년에도 열네 편 뿐이었다. 1950년이 되어도 서른일곱 편이 전부다. 불안이라는 주제 하나만을 다루는 학회가 처음으로 열린 때가 1949년 6월이었다.

 

  1980년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불안 장애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3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편람에 프로이트 식 '신경증'이라고 되어 있었다.

 

  치료가 진단을 앞선 것이다.

 

 


  그러니까 불안 치료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불안이 진단 범주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해마다 불안을 다룬 논문이 수천 편은 나온다. 불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도 여럿이다. 무수한 연구를 통해 불안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더 크게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밝혀진다.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유전자와 행동, 분자와 정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등에 대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 MRI) 기술을 이용해서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여러 정서를 뇌의 특정 부위와 연결할 수 있고, 또 뇌 기능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다른지 눈으로 확인하여 불안을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도 있다.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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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3월 26일 ≪뉴스위크의 표지에는 녹색과 흰색 캡슐 그림과 함께 "획기적 우울증 약"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이렇게 해서 플루옥세틴, 상표명 프로작은 전 미국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고 20세기 후반의 상징적인 항우울제가 된다프로작 제조사 엘리 릴리는 블록버스터급의 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작은 미국에서 판매된 최초의 SSRI로 곧 자낙스제치고 향정신성 약물 가운데 역사상 최대 판매고를 기록한다. 곧 다른 SSRI인 졸로프트, 팍실, 셀렉사, 렉사프로 등이 시장에 나와서 프로작의 판매량을 능가하게 되지만 말이다.

  아마 항생제를 제외하면 SSRI가 역사상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처방약이 아닐까 싶다. 통계에 따르면 2002년 미국인 가운데 2500만 명이(남자는 전체의 5퍼센트 이상, 여자는 11퍼센트 이상) SSRI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증가해서 2007년에는 SSRI를 복용하는 미국인이 3300만에 달했다. SSRI는 정신병원과 가정집 약장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문화와 자연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로작 네이션』, 『프로작 일기』, 『프로작에 귀 기울이기』(당연히 『프로작에게 대꾸하기』라는 책도 있다.) 등의 책이 1990년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영화나 ≪뉴요커≫ 만화에도 프로작·렉사프로와 관련된 농담이 단골로 등장한다. 프로작, 팍실, 졸로프트, 셀렉사 잔류물이 미국 개구리 생태계에서 발견되었고(발달 지연과 기형을 유발했다.) 노스텍사스에서는 물고기의 뇌와 간에서 발견되었으며, 라스베이거스, 로스엔젤레스, 샌디에이고, 피닉스에 식수를 공급하는 미국 최대 저수지 미드 호에서도 발견되었다. 

  SSRI가 우리 문화와 환경에 이렇게 속속들이 침투해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 플루옥세틴(프로작) 특허를 가지고 있는 엘리 릴리 사는 이 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게 나와 일곱 차례나 프로젝트를 폐기했었다. 1984년 독일 허가 당국에서는 프루옥세틴 실험의 애매한 결과와 부작용에 대한 불만을 검토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득실을 견주어보면 우울증 치료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다른 SSRI인 팍실도 초기 임상 시험결과는 실패로 나왔었다.
  효과가 없다고 간주되던 SSRI가 어떻게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이 되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불안과 우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짧은 기간 동안에 얼마나 급변하였는지에 관한 이야기 속에 있다. 

  이야기는 이번에도 역시 국립보건원 스티브 브로디 실험실에서 시작된다. 아르비드 칼손은 1959년 브로디 실험실을 나와 스웨덴이 있는 예테보리 대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칼손은 인공적으로 세로토닌 수치를 낮춘 쥐에게 삼환계 항우울제를 투여하는 실험을 했다. 항우울제가 세로토닌 수치를 높일까? 그랬다. 이미프라민에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 효과가 있었다. 1960년대에 칼손은 항히스타민제를 가지고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 약도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할까? 이것 역시 그랬다. 클로르페니라민이라는 항히스타민제가 뇌의 세로토닌 수용체에 이미프라민이나 아미트립틸린보다 더욱 강하고 정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미프라민과 아미트립틸린은 가장 흔히 처방하는 삼환계 우울증 약이다. 칼손은 이 발견을 우울증이 세로토닌 부족 때문이라는 가설의 근거로 제시했다. 다음으로 이 발견을 기반으로 더 강한 항우울제 개발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SSRI가 탄생하게 되었다." 의학사가 에드워드 쇼터는 이렇게 말했다.
  칼손은 다음으로 다른 항히스타민제인 브롬페니라민(기침약 다임탭의 주요 성분)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물질도 이미프라민보다 더 확실하게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를 막았다. 칼손은 이 항히스타민제를 변형해서 세로토닌 재흡수만 막는 H102-09라는 화합물을 만들었다. 칼손은 스웨덴 제약회사인 아스트라의 연구팀과 협력하면서 1971년 4월 28일 H102-09을 지멜리딘이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 신청했다. 초기 임상 시험에서 지멜리딘이 우울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음이 나타나자, 아스트라는 1982년 젤미드라는 이름을 붙여 유럽 시장에 항우울제로 내놓았다. 아스트라는 머크 사에 젤미드의 북아메리카 판매 라이선스를 주었다. 머크는 미국에서 젤미드 판매를 준비했다. 그때 재앙이 일어났다. 젤미드를 먹던 환자 일부가 마비를 일으켰다. 사망자도 몇 명 나왔다. 젤미드는 유럽 약국에서 회수되었고 미국에서는 결국 판매되지 못했다. 

  엘리 릴리 경영진은 이런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10여 년 전에 인디애나에 있는 엘리 릴리 실험실 생화학자들이 디펜하이드라민(알레르기약 베나드릴의 주요 성분)이라는 또 다른 항히스타민제에서 유도해낸 물질을 가지고 LY-82816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낸 일이 있었다. 이 물질은 세로토닌에는 강한 영향을 미치는 반면 노르에피네프린 수치에는 약한 영향만 미쳤다. 그러니까 LY-82816은 이 연구자들이 실험한 여러 화합물 가운데 가장 "깨끗한", 곧 "선택적"인 약이었다. 엘리 릴리의 생화학자 데이비드 윙은 LY-82816을 재합성하여 LY-110140을 만들었고 발견한 내용을 1974년 라이프 사이언스≫에 기고했다. 윙이 나중에 회상하기를 "이 시점에서는 LY-110410에 관한 연구가 순전히 학술적이었다." 세로토닌만을 높이는 정신과 약에 시장성이 있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게디가 몇 년 앞서 개발된 젤미드가 임상 시험을 거쳐 시장에 나온 탓에 엘리 릴리는 LY-110140, 곧 플루옥세틴에서 손을 뗐다.


반면 삼환계 약과 MAOI는 세로토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등의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더러운", "비선택적" 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불쾌한 부작용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젤미드가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자 엘리 릴리는 플루옥세틴이 미국 시장 최초의 SSRI가 될 기회가 아직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구를 재가동했다. 초기 임상 시험 가운데 뚜렷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1986년 벨기에에서 승인을 받고 판매가 시작되었다. 1988년 1월, 플루옥세틴이 미국 시장에 "특정하게 작용하는, 매우 강력한 최초의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로 배포되었다. 엘리 릴리는 프로작이라는 상표명을 붙였다. 브랜딩 회사에서 날렵한 느낌을 준다고 권한 이름이었다. 

  2년 뒤, 이 약이 ≪뉴스위크≫의 표지를 장식했다. 3년 뒤, 브라운 의대 정신과 교수 피터 크레이머『프로작에게 귀 기울이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1993년 여름 『프로작에게 귀 기울이기』가 출간되었을 때 나는 스물 세 살이고 세 번째 삼환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데시프라민(상표명은 노르프라민)이었다. 나는 놀라운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크레이머의 환자들이 프로작 덕에 겪은 변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환자들이 "병이 나은 것 이상"으로 좋아졌다고 크레이머는 말했다. "프로작은 소심했던 사람들에게 사회적 자신감을 주고 예민한 사람을 대범하게 만들어주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세일즈맨에 버금가는 사교적 기술을 심어주는 듯했다." '음, 아주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만나왔던 의사 L박사가 몇 달 전부터 프로작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파우스트처럼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프로작이 긴장감이나 우울감을 사라지게 만들면 개성이나 독특한 성품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크레이머는 책에서 불안이나 우울이 아주 심한 환자라면 그런 거래라도 나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크레이머도 이른바 "미용적 정신약리학"에는 우려를 표했다. '정상'이거나 '건강한' 사람이 더 행복하고 더 사교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약을 먹는 일을 가리킨다.



-스콧 스토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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