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은 #죄 #공감 #연민 #근원 #김기현'에 해당하는 글 1건

728x90
반응형
SMALL

공감과 연민의 사고가 상상력이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은 타인의 처지에서 배려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잔혹한 살상 행위를 국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류를 꾸미고 보고하며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꼼꼼히 점검하면서도 아이히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무심히 자기 일을 수행한 것을 '상상력의 결여'라고 짚어 냈다.

 

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소환한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는 '상상력의 결여'라는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 가상칠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한다. (눅 23:34)

 

한나 아렌트

 

이 말을 역추적해 보면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 최악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려는 연민도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았다.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다. 

 

그런 상상력 결핍이 최선을 다해 아주 성실히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저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을 '무사려'라고 고쳐 읽는다.

 

'무사려='무배려'다. 

 

사려 깊지 못함과 배려하지 못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 처지만 생각하고 나를 우선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그 극단적 사례가 아이히만이다.

 

예일대 신경 과학 석좌 교수인 이대열 교수는 지능을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지능이다. 반면, 점수로 매긴 지능 지수(IQ)는 그저 인지적인 능력을 수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지능을 지능 지수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가려면 타인의 마음과 선택을 예측해야 하고, 그러자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파악해야 한다. 뇌 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그것을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능력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에게 생각이란 지능 지수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은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것이고,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공감과 연민이 다름 아닌 사유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예측을 빗나가는 상황과 맞닥뜨려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런 지성과 지능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가 되어 간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