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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박명림 교수는 대한민국의 기원을 한국전쟁으로 본다.

이런 시각은 홉스의 이론에 맞닿아 있다. 70년 전 우리는 지구적 차원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해방정국의 혼란과 민족분​단을 겪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민족 전체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참혹한 내전을 치렀다.

국가를 대하는 국민의 의식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려 500만명이 죽고 사라지고 다쳤던 동족상잔의 이 전쟁을 우리는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이라고 한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이토록 좁은 영토에서 그처럼 많은 인명이 살상당한 전쟁은 세계사에서 흔치 않았다.

 

 


게다가 미군의 공습, 이념전쟁, 반전을 거듭한 전황 때문에 다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살상이 많았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후 긴 세월이 흘렀고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국민들이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이후 최대 사건으로 꼽는 것은 단연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이전의 사건들은 크건 작건 모두 전쟁으로 흘러들어갔고, 그 이후 정치와 사회, 외교도 모두 이 전쟁의 테두리 안에 놓였다. 이것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며 북한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 결과 북한은 사회주의국가나 독재국가라는 말보다 병영국가(garrison state)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피바람을 마시면서 성장했다. 국가기구가 급속하게 팽창했고 반공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안보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가까스로 국가의 안정을 확보했다.

 

10만 남짓하던 군대는 전쟁을 거치면서 60만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했고 경찰의 규모도 단기간에 5만 명을 넘겼다.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적 발전 단계를 고려하면 지나친 규모였으며 이것이 전쟁 이후 정치의 틀을 결정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와 뒤이은 30년간의 군부독재는 분단과 전쟁이 아니고는 그 유래를 설명하기 어렵다. 기나긴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를 거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가 발전하고 국가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길게는 8년, 짧게는 3년에 불과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도전을 파괴하면서 밖에서 주어진 다음 급팽창하는 형태로 구축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발생사는 홉스의 국가론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철학적으로는 홉스를, 통치기술로는 마키아벨리를 추종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 내부의 혼란을 방지하고 '북괴의 침략'을 막는 것을 국가의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했고, 이를 위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국민이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반대하지만 해놓고 나면 좋아할 것"이라며 국민이 압도적으로 반대한 사업을 밀어붙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말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다.

북한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의 위협을 쉼 없이 강조하면서 국론통일을 요구한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평등권과 노동권은 법질서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통치권을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 공산집단의 침략 위협과 북괴의 지령을 받는 친북용공세력이 야기하는 내부적 혼란'에 대한 실제적인 또는 조작된 대중의 공포감을 이용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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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동일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서 좌는 진보이고 우는 보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단지 20세기에 한해서 그랬을 뿐이다.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자본주의(우)가 보수고 사회주의(좌)가 진보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된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우)가 진보고 공산주의(좌)가 보수다.

좌와 우는 20세기의 경제체제 중 어느 쪽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정해지지만 진보와 보수는 다르다.

즉 기존 체제가 무엇이든 이를 지키고자 하면 보수, 변화를 원하면 진보가 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놓고 갈등을 빚었던 것처럼, 유럽의 왕실과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대헌장'​으로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는 본래 영국 왕 ​존의 실정을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왕에게 귀족의 권리를 다시 확인시킨 봉건적 문서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서 또다시 왕권과 의회가 대립하게 되자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9년에 공포된 '권리장전'으로 압축되는데 이로써 의회의 입법권,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의 금지, 의회 내의 언론 자유 등 국민과 의회의 권리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유럽에서도 투표권이 귀족에서 평민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표면적으로는 평민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르주아(유산)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재산의 규모나 교육, 나이의 정도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표의 수가 다르게 배분되었기에 남성 유산 계급의 전유물이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보수당인 토리당이 귀족과 대지주의 권한을 지키려 했고, 진보당인 휘그당은 산업과 상업으로 성공한 유산 계급으로서 신분제 폐지와 자유로운 무역을 주장했다.

휘그당의 후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자유당이다.

자유당은 19세기 중반 이후 자유무역 구현, 선거법 개혁, 공장법 제정 등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노동당​이 대두하면서 이들 일부는 보수당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내분을 거듭하다 졸지에 몰락했다. 자유당의 몰락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역사적 우연이라는 주장도 있고 리더십의 부재와 내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입헌 민주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화가 진행되는데, 나는 자유당이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이 투표권을 획득하면서 새로운 진보 세력으로 등장하자, 보수화된 자유당 일부가 보수당으로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정당의 재연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자본가가 보수가 되고 노동자가 진보가 되는 20세기의 특수한 현상이 시작됐다.

보수를 우, 진보를 좌로 보는 개념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처음 탄생했다고 한다.

 

 

 


​자코뱅 클럽은 프랑스 전국에 지부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혁명을 주도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혁명 이후 이는 자코뱅파와 지롱드파로 분리되는데 둘은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실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지주, 사교계에 진입한 도시 상공 부르주아 계층으로 해외 망명 은행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반면 민중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온건공화파인 지롱드파는 1791년 12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입법의회를 장악했다.

 

 

이들은 1792년 4월부터 심해지던 경제위기로 민주의 불만이 거세지자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들은 반혁명파를 응징하고 정정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하고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지자 각지에서 반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롱드파는 이를 수습하지 못했고, 결국 1793년 민중봉기로 추방되었다.

반면 ​자코뱅파는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등 하층민이 지지 기반이었다. 자코뱅당은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설치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이들은 농민에게 토지 무상분배를 시행했으며, 서구 체계 최초로 식민지를 포함한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코뱅당을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높이 평가했다. 이 시기 우연히 자코뱅파가 국민공회에서 왼쪽에 앉고 지롱드파가 우측에 앉게 된 게 죄파와 우파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19세기 말 영국의 자유당은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이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유산 계급의 사유 재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노동당이 등장해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진보적인 의제를 제시하면서 자유당은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 당시 많은 진보 지식인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19세기 영국의 자유당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노무현만 때리면 당시 제 3당이던 민노당이 제1 야당이 되는 줄 알았다고, 민노당 출신 박용진 의원이 2012년 '국민의 명령'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19세기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노무현은 21세기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이 점에소 소위 진보 지식인과 언론이 노무현 뿐만 아니라 노무현의 지지자인 친노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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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들어와 우주가 실제로 팽창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밤 하늘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성운들(nebulae)-안드로메다자리에 있는 M31이나 오리온자리에 있는 M42 같은 것들-이 은하수(Milky Way)의 일부이며, 우리가 속한 태양계도 이 은하수 안에 자리해 있다고 추측했다.(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추측하지는 않았다.)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캘리포니아 윌슨 산에 새로 세운 100인치짜리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이런 것들(즉 안드로메다자리에 있는 M31이나 오리온자리에 있는 M42 같은 것들)이 우리가 속한 은하와 다른 은하이며 우리 은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Ediwn Hubble

 

허블은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이 은하들의 ​적색 이동​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 ​어떤 두 은하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들이 서로 멀어지는 속도도 더 커진다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었다. 팽창 속도는 더 커지고 있었으며, 팽창에서 수축으로 돌아설 가망성도 분명 없어 보였다.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었다. 이런 주장은 우주가 틀림없이 엄청나게 압축된 첫 상태로부터 발전해 왔다는 것-다시 말해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블의 이런 주장은 단지 주장으로서 관찰 결과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했다.

 

달리 생각하는 것도 틀림없이 가능했다.

1948년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몇몇 사람들은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theory of the universe, 우주가 계속 팽창하긴 하지만 우주의 평균 밀도는 늘 변함이 없다는 이론)​을 펼쳐 보였다.

 

 

이 우주론은 ​우주가 비록 팽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물질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우주팽창으로 생겨나는 빈 공간들을 채워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우주론의 주장이었다.

1960년대 들어와 견해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를 발견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1965년,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뉴저지의 벨 연구소(Bell Laboratories)에서 실험용 ​극초단파 안테나(microwave antenna)​로 연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안테나 방향을 어느 쪽으로 돌려도 쉭쉭 소음을 내며 불쑥 끼어드는데 도통 제거할 수 없는 불청객인 ​히싱 잡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현상을 안테나 위에 둥지를 튼 비둘기들이 안테나 전파를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새들을 강제로 제거해 버린 뒤에도 쉭쉭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 골치 아픈 배경의 쉭쉭 소리가 지닌 엄청난 의미를 완전히 인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랠프 알퍼(Ralph Alpher)와 로버트 허먼(Robert Herman)​은 1948년에 그 소리를 우주에서 일어난 첫 폭발-뜨거운 '빅뱅'-의 '​잔광'(afterglow)​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 열복사는 그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절대온도 2.7K 상태에서 우주 공간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광양자들(photons)​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배경복사는 다른 증거들과 더불어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설인 정상 우주론에는 심각한 난점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대한 증거 역할을 했다.

그 뒤로 과학계에서는 ​표준우주론 모델​의 기본 요소들이 분명하게 밝혀져 이 요소들이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모델이 관찰 결과와 가장 잘 일치한다는 데 널리 동의한다. ​이제 과학자들은 우주가 약 140억 년 전에 생겨났으며, 그 뒤로 계속해서 팽창해 식고 있다고 믿는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증거는

1. 우주 극초단파 배경복사와

2. 빅뱅 직후에 결합한 빛의 핵들[수소, 중수소(deuterium)], 그리고 헬륨 같은 것들]이 상당히 풍부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우주의 기원이 어떤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결코 되풀이할 수 없고,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정확한 실험 분석이 불가능한 독특한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인식시켜 준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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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곧 크리스마스(Christmas) 라는 용어는 그리스도(Christ) 와 미사(Mass) 의 합성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탄생한 아기 예수를 위한 예배와 경배를 말하는 구절은 있으나(눅 2:8~12) , 실제로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 탄생일을 기념일로 지켰다는 기록은 없지만 , 대부분의 개신교와 가톨릭은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고 있다.

 

한편 그리스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와 콥트교회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이지만 ,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 , 포르투칼에서는 "나탈(Natal)" , 스페인에서는 "나비다드(Navidad)" 로 불린다.

 

 

 

주목할 만한 것 하나는 나탈과 나비다드는 출생을 의미하는 영어 네이틀(Natal) 과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인데 , 우리 한국어의 "낳다" 와 발음이 비슷한 느낌이 들어 예수 탄생에 한국적인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성경에는 12월 25일이 예수의 출생일이라는 내용이 없다.

 

당시에 백성들이 지키던 축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평화와 풍년을 가져다주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us)" 를 섬겼다.

 

이 뜻은 "씨를 뿌리는 자" 로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제우스신으로부터 추방당한 크로노스 신이 이태리로 가서 농업기술을 보급하면서 로마의 황금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는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농신제가 열렸다.

 

백성들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한 주간을 보냈다.

 

 

 

어린이에게는 선물이 주어졌다. 여러 가지 오락도 즐겼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점차 농신제 축제 대신 크리스마스 축제로 바꾸어 나갔다.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는 이교도들의 동지절 축제가 열렸는데 ,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인 동지절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채택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날짜에 대하여는 고대 교회 당시에도 분분했다.

 

이미 2세기 말경 1월 6일과 12월 25일의 두 의견으로 갈라졌다.

 

공식적으로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 즉 성탄절이 된 것은 AD 336 년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선포하고 ,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로 지켰다.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예수가 세례를 받은 날로 정하여 지냈다.

 

서방교회는 이 날을 主顯節(주현절)로 기념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자 동박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서 갓 태어난 구세주 예수를 경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5세기 말경 서방교회에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고정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은 성 어거스틴이었다.

 

그 당시 새해 첫날이 3월 25일이었지만 , 교회가 그 날을 수태 고지일로 잡았다. 결국 어거스틴의 주장은 교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 교회 역시 어거스틴의 영향력에 힘입어 그 이후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켜왔다.

 

<성탄카드 대신에 보내드리는 마음의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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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신약리학의 정신적 선조는 그보다도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세기에 병리적 불안은 생물학적, 의학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썼다.

 

 

                                -히포크라테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머리를 갈라 보면 뇌에 습기가 많고 땀으로 가득하고 역한 냄새가 난다."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이 광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려가면 불안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어 담즙의 온도에 중대한 비중을 두었다. 담즙이 따뜻하면 온화하며 열정적이고 담즙이 차가우면 불안하고 겁이 많다.)

히포크라테스는 불안 등 정신장애는 체액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면 나을 수 있는 의학적, 생물학적 문제라고 봤다.

그러나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은 정신세계는 생리학과 구분되는 자율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여 불안이나 우울이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플라톤-

 

어느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정신병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린애 이야기처럼 허황하다."​ 고 했다.

 

플라톤은 사소한 심리적 문제는 의사가 치료할 수 있지만(정서적 문제가 신체를 통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근원이 있는 정서적 문제는 오직 철학자들만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불안 등의 정신적 문제는 생리적 불균형이 아니라 영혼의 부조화에서 오며 여기에서 회복하려면 깊은 자아성찰, 자기통제,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의 몸과 마음이 대체로 건강한 상태라면 배관공을 불러 집수리를 하듯 의사를 불러 사소한 질환을 고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 구조가 망가졌다면 의사는 쓸모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적절한 방법은 철학 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저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쓴 글들은 미술과 무관한 만큼 의학과도 무관하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


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 오든, 데이비드 리스먼(미국 사회학자, 교육자로 [고독한 군중] 등의 저서를 남김),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은 생물학적 기능인 동시에 철학적인 기능이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개성과 문화 모두와 관련 있다.

 

우리는 불안을 정신적, 심리적으로 경험하지만, 분자나 생리학적 층위에서도 불안을 측정할 수 있다.


불안은 유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시에 양육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심리적 현상이면서 사회적 현상이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하드웨어의 문제(배선이 엉망이다)이면서 소프트웨어의 문제(논리적 오류가 있는 프로그램을 돌려서 불안한 생각을 일으킨다.)이기도 하다.


기질은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위험 유전자라든가 어린 시절의 상처 같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스피노자와 두드러지게 침착한 성품이 본인의 철학 덕분인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스피노자가 유전적으로 자율신경 각성 정도가 낮기 때문에 고요한 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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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정신약리학의 정신적 선조는 그보다도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세기에 병리적 불안은 생물학적, 의학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썼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머리를 갈라 보면 뇌에 습기가 많고 땀으로 가득하고 역한 냄새가 난다."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이 광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려가면 불안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어 담즙의 온도에 중대한 비중을 두었다. 담즙이 따뜻하면 온화하며 열정적이고 담즙이 차가우면 불안하고 겁이 많다.)

 

  히포크라테스는 불안 등 정신장애는 체액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면 나을 수 있는 의학적, 생물학적 문제라고 봤다.

 

  그러나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은 정신세계는 생리학과 구분되는 자율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여 불안이나 우울이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어느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정신병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린애 이야기처럼 허황하다."​ 고 했다. 플라톤은 사소한 심리적 문제는 의사가 치료할 수 있지만(정서적 문제가 신체를 통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근원이 있는 정서적 문제는 오직 철학자들만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불안 등의 정신적 문제는 생리적 불균형이 아니라 영혼의 부조화에서 오며 여기에서 회복하려면 깊은 자아성찰, 자기통제,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의 몸과 마음이 대체로 건강한 상태라면 배관공을 불러 집수리를 하듯 의사를 불러 사소한 질환을 고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 구조가 망가졌다면 의사는 쓸모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적절한 방법은 철학 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저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쓴 글들은 미술과 무관한 만큼 의학과도 무관하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

 

 


  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 오든, 데이비드 리스먼(미국 사회학자, 교육자로 [고독한 군중] 등의 저서를 남김),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은 생물학적 기능인 동시에 철학적인 기능이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개성과 문화 모두와 관련 있다. 우리는 불안을 정신적, 심리적으로 경험하지만, 분자나 생리학적 층위에서도 불안을 측정할 수 있다.

 


 

  불안은 유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시에 양육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심리적 현상이면서 사회적 현상이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하드웨어의 문제(배선이 엉망이다)이면서 소프트웨어의 문제(논리적 오류가 있는 프로그램을 돌려서 불안한 생각을 일으킨다.)이기도 하다.

 


 

 기질은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위험 유전자라든가 어린 시절의 상처 같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스피노자와 두드러지게 침착한 성품이 본인의 철학 덕분인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스피노자가 유전적으로 자율신경 각성 정도가 낮기 때문에 고요한 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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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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