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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지라르의 이론에 대입해서 해석해 보자.

 

"희생양의 선택은 적절했다. 나사렛이라는 변방 마을 출신의 한 청년, 스스로 선지자인 척하며 어부, 세리 등과 같은 주변적 인물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는 청년에게 희생양의 역할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문제는 이 희생양에게 집단의 모든 갈등의 책임을 떠안기는 것, 즉 유죄화 작업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라는 청년은 유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폭력을 한 데 모으기에 적절한 언행을 일삼는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쉽고 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희생양도 드물 것이다.

 

공동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러 갈등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민족의 해방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청년은 정치적 해방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청년에게 가졌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 죄명을 덧붙인다면 간단하게 만장일치적 폭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신교와 선민사상에, 특히 오랜 세월에 걸친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 군중들에게 신성모독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사탄은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이번에는 그가 한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었다. 군중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희생물이 된 존재가 스스로 사탄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탄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라는 청년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의 왕국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의 계산을 철저히 좌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신화와 성서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는데

 

성서는 집단적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고, '희생양'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성서는 희생양의 무고함을 드러내며, 폭력의 책임이 박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화가 박해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성서는 철저히 희생양의 입장에서 기록된 텍스트이며 신화가 박해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성서는 희생물의 무고함을 입증하고 박해자들을 단죄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화가 공동체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근간으로 집단적 폭력을 칭송한다면, 성서는 처음부터 집단적 폭력을 금지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성서는 신화적 희생양 메커니즘의 해체를 가르치고 있으며 무고한 희생양의 위치를 복권시킨 후 박해자들에 대한 '용서'와 '복수 금지'를 한결같이 주장한다. 특히 구약성서는 한결같이 인간 공동체가 숨겨진 희생자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 희생자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양 이론

 

그리고 성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통해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와 구별된다.

 

그러다 보니 지라르는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신성과 집단적 폭력 사이의 철저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성서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2차 변형 작업처럼 희생양을 신격화하는 일도 없었다.

(기독교는 일신교이기 때문이다.).

 

성서 속 희생양은 처음부터 무고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화 속 희생양은 1차 변형 작업으로 유죄화 되고, 2차 변형 작업으로 신격화 된다.)

 

결국 지라르의 이론은 종착점에 다다르는데 '복음서'의 승리가 결론이 난다.

 

예수는 인간의 종교와 문화가 초식적 폭력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폭력은 진짜 좌 있는 자들, 즉 박해자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폭로하면서 세상 설립 이후부터 감추어져온 것에 대한 금기를 단번에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존의 신화적 성스러움에 종지부를 찍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느 희생양의 신성화 작업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을 '용서'한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의 굴레를 해체시킨다. 그는 폭력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항상 '용서'와 '사랑'에 집중했다.

(더군다나 희생양 메커니즘 파트에서 공부했듯이 희생양의 조건은 '복수를 할 수 없는 자'여야 하는데, 예수는 스스로 복수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고 선언한 이상, 복수는 이미 포기된 것이다.)

 

지라르는 이러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고 나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의 마지막 말들을 좀 더 들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겠다.

 

요약하면 인간의 욕망은 모방적인데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을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에 대한 금지,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모방 경쟁에 귀착되지 않는 다른 욕망 모델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 때 지라르가 제시하는 결론인 '좋은 모방'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탄에서 그리스도로 모방 모델을 갈아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기독교의 영향이 일부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무고한 자에 대한 일방적인 왜곡 작업과 집단적 폭력은 사실상 불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건 모방 경쟁으로 인해 초래되는 폭력과 갈등을 미봉책으로나마 막아줄 수 있는 보호책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므로 이 시기를 조심해야 한다.

 

결국 이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서 좋은 모방을 모델로 삼는 것인데 이 때 '그리스도'를 모방하면 된다.

 

소유 욕망과 경쟁적이고 상호적인 폭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모델인 그리스도를 모델로 받아들이고 그의 욕망을 모방할 때 우리는 희생양 메커니즘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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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계점을 정리하자.

 

1. 폭력에 의해 폭력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2. '선한' 폭력도 문자 그대로 '선한' 폭력은 아니다.

 

결국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류가 안고 있는 폭력적 속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건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가기 전에 '희생양의 조건'이 몇 가지 나오고, 그 조건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한 '변형 작업'이 이뤄지는데, '희생양'은 복수할 수 없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희생양을 유죄로 만장일치 정죄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그 유죄성을 씻겨 버리는 변형 작업을 거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렇다.

 

"갈등과 위기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희생물이 희생당한 뒤, 즉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단합을 통해 희생물은 역설적으로 사회를 위기에서 구원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존재로 신성화 된다."

 

결국 위기와 극복, 갈등과 화해, 희생양과 신성한 존재, 폭력과 성스러움은 하나의 메커니즘의 양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폭력이 근거 없는 폭력이었다는 사실, 무고한 자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희생물에 대한 두 번째 변형, 즉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이 작업에 참가하여 실제로 희생물을 신성한 존재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남는 건 '폭력' 뿐이다.

 

그리고 지라르는 이러한 폭력의 반복적 메커니즘을 '사탄'의 존재에 비유한다.

 

이제 지라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결론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그는 신화는 박해자들의 관점에서 폭력을 정당화하고 진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성서, 특히 복음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희생양의 관점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그 진리성을 믿는 프로세스 자체가 상당히 파격적이다) 

 

잠시 요약 정리하면 지라르는 모방 욕망 -> 희생양 메커니즘 에 이르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뒷받침 할만한 다양한 문학 작품, 인류학 자료, 신화 등을 활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이미 '기독교'라는 답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내용들만 추려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지라르는 자신은 결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적인 발검음이 결국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이르게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점이 정말 인상깊다.)

 

르네 지라르-작업하는 모습-

 

"제 연구 결과들이 저를 기독교로 향하게 했고, 그 진실을 믿게 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친 것은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치고, 또 기독교인이 된 것은 연구 결과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신학의 눈으로 지라르의 이론을 바라보면, 성서 해석이 특정 이론에 치우쳐 있어서 불완전한 부분도 있고, 그 영역 이외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지라르가 주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계점도 보일 수 있지만, 최소 지라르는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알렸고, 세상의 모든 법칙과 역사를 초월하는 유일한 계시로 기독교 복음을 제시했으니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고 볼 수 있다.

 

(ex) 사탄에 대한 해석은 성서와 많이 다르다. 지라르는 박해자와 희생양에 대한 진술을 숨기고 끊임 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실체, 그 자체를 사탄으로 본다. 즉, 사탄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무의식이자 그것의 구조 자체, 경쟁적 모방 시스템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성서 속에 나오는 인류의 원죄는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모방적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즉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자체에 대한 욕망보다는 그것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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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회의자의 사도 루이스와 쉐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 끊임 없이 고민하고 , 공부했던

 

성실한 지식인 루이스와 쉐퍼.

 

이 둘의 만남이 책으로 성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두 저자를 잘 아는 기독교인들의 가슴은 요동을 칠 것이다.

이는 마치 [베놈2] 영화 쿠키 영상에서 스파이더 맨이 나타났던 것과 같은 흥분이다. multi-universe 를 통해 둘이 

같은 시공간에 놓이는 상상을 얼마나 해 왔던가?

 

이 책은 개인적으로 인생 책 best 30 안에는 넣어줄 수 있는 명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당신은 이런 소망을 지녀 본 적 있는가?

 

'아~ 아인슈타인과 뉴턴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소크라테스와 비트겐슈타인이 만나면 어떤 재미있는 대담을 하게 될까?'

 

그렇다. 정말 함께 비교,대조 해 보고 싶은 두 인물이 있는데 , 마침 그 두 사람을 잘 묶어서 책으로 편찬되었다.

(기독교 세계관, 철학에서 워낙 중요한 인물들이다.)

 

바로 이 책!!!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 물론 , 동시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이지만 , 실질적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서로가 자신들의 사역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기에....)

 

하지만 ,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 쉐퍼도 루이스를 많이 인용했었고 , 루이스도 쉐퍼를 옥스퍼드 대학교로 초청하고 싶어 했음을 기억해 본다면 이 둘의 관계는 꽤나 우호적이고 , 동맹적 관계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 이들의 핵심 논증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 이 둘을 만약 한 자리에 앉혀 났다면 상당히 목소리가 높아졌을 가능성이 많다. 굉장히 핵심적이고 중요한 분야에서 서로의 입장이 상당히 다르다. 공통점은 그저 두 분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이웃을 사랑했으며 , 진리를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것 뿐..)

-> 그리고 논리, 이성 토론의 측면에서는 루이스의 압도적 승리를 점하는 편이다. 

-> 쉐퍼의 책은 처음 읽었을 때 엄청난 감동은 있으나 그 한계가 비교적 빨리 보였다고나 할까?

-> 하지만, 그렇게 답을 내리기 이전에 둘의 만남을 성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는 크다.

 

 

이 책은 , 루이스와 쉐퍼의 저서들을 상당량 탐독하고 보면 좋을 것이다.

(루이스의 책도 계속적으로 번역이 되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읽고 나서 이 책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책은 구성도 탁월하고 , 분량도 만만치 않은 책이다.

 

내용은 두 사람의 삶 자체가 워낙 변증적이고 , 깊이가 있었다 보니 쉽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 이들의 논증이 지니는 '중요성' 을 기억해 본다면 이 정도 '수고' 는 감수하고도 남음이 있다.

(책에 별점 5점을 찍는 경우는 드문데, 책 자체가 엄청나게 맛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걸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 책은 정말 맛있는 별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 중요 논증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소장용으로도 그만이다.)

 

일단 , 두 사람의 발자취를 비교해보며 성장 과정을 알아본 뒤에 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계기를 조망해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예정) 과 인간의 자유 의지' 라는 기독교의 중요 이슈. (인간이 살아 평생 완벽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는 그 난제 중의 난제) 를 두 인물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자세하게 비교,대조한다.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성경' 이라는 텍스트의 권위를 두 인물이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이야기 해 보며 , 중요한 기반을 다져 본다. 

(이 부분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성경, 진리로 씨름해 본 사람은 이 이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크리스천이면서 지성을 사랑한다면 이 부분은 무조건 읽어보자.)

 

C.S Lewis

 

그리고 , 두 사람이 '변증' 을 해 나간 방식을 서로 비교,대조 해 보고 , 중간 중간 저자의 의견까지도 잘 반영되어 있다.

 

두 사람의 입장도 신선하지만 , 이 책의 저자가 수정,보완,평가 해 둔 부분들이 더욱 감칠맛이 난다. 단순히 루이스와 쉐퍼의 책을 발췌하고 끝내는 느낌이 아니고, 두 저자의 논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분석해 둔 이 책의 저자가 더욱 빛나는 책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논리','내적 일관성' 의 면에서는 쉐퍼보다 루이스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

(워낙 Super Intelligent  하다 보니...)

 

하지만 , 쉐퍼가 지닌 강점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그가 고수하는 근본주의 노선 , 성경의 권위를 철저히 받드는 모습 등은 일종의 '안정감' 을 부여해 주는 게 사실이다.) ,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렵다.

 

또한 , '논리' 의 측면에서는 루이스를 따라갈 사람이 별로 없다 할지라도 , 기독교가 '논리' 의 틀에 완전히 종속될 수 있는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깊은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비이성적인' ,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 을 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일터.....

(이런 식으로 사실과 신념이라는 층을 나누고, 신앙의 논의를 할 때만 되면 '신념'의 영역으로 도약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했던 게 바로 '쉐퍼' 자신이었다. 그런데, 실제 살아보면 논리적으로 깔끔한 개념이 '진실'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 부분은 참 어려운 것 같다.)

 

프란시스 쉐퍼

 

아마 이러한 '변증' 의 역할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순복했을 때 , 비로소 빛을 발하리라 생각한다.

 

'변증' 은 [베전3:15] 에 근거하여 분명히 지지될 만한 분야이며 ,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 이러한 것들이 '진리를 위한 절대 노선' 이라고 이야기 하는 순간 , 그 길은 제대로 된 '진리' 를 가리키지 못하는 '방향 뒤틀린 표지판' 이 되고 말 것이다.

 

쉐퍼와 루이스의 사역에 관심이 많고 ,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이성을 순복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 책을 보라.

 

그리고 ,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신앙 생활에 넉넉한 도움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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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Stuart Mill <자유론> 을 읽고

 

상당히 깔끔한 책이다. 말 그대로 자유 를 주창하는 책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한번쯤 고민해 봤을 것이다역시 이 책 속에서도 , 자유 를 논함에 있어서 기독교가 빠지지 않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 그 이유는 쉽게 유추 가능하다.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을 믿고 있으며 , 그들이 역사 속에서 지녔던 힘과 권력이 상당했기에 , 자유 를 논함에 있어서 그들의 배타적인 모양새는 분명 언급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기독교가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내용상의 배타성 이 지적 받는다기 보다 , 그들의 완고하고 , 편협한 태도, 자세 의 문제가 지적을 받는다는 것을....  (중세 카톨릭에 대한 비판까지 실컷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 이 책 속에서는 토론의 중요성 , 열린 대화의 당위성 등을 강하게 그리고 누차 역설한다. ('노암 촘스키'도 이러한 중요성을 역설한다)

 

예를 들어 , 그는 몰몬교에게 가해진 탄압에 반박하는데 , 그도 1명의 사람이 근대에 계시를 받아 형성되고 , 일부다처제를 지지하는 그들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비판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한다.

(노암 촘스키도 반유대주의자의 글 내용에는 반대했지만 , 그의 책이 출간되는 것은 막아선 안 된다고 이야기 했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그저 맹목적으로 , 누군가의 강요로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신념 , 신앙 등을 지니는 현대인들에게 , 일침을 가하는 그의 말은 이성적 논리 의 중요성에 꽤나 힘을 실어주는 것들이다.

 

맹신 , 미신 이 되지 않도록 , 이성의 필터기를 거쳐야 진정한 진리 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은 , 극단으로 치우쳐 졌을 때는 인본주의적이고 ,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갇히게 될 우려가 있지만 ,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 편이다.(여러분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 대체적으로 이성 을 완전 부정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 분명 이성 으로 판별 가능한 , 실재 를 마주 대하며 살아가는 육적 그리고 영적 인간 이기에..

 

 

무엇보다도 , 우리는 진리 앞에 정직해야 하고 그 진리 진정한 진리 라면 , 결코 가벼이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류의 믿음 도 지녀봄 직 하다.

 

그가 자유 를 주창해 나가는 과정을 좀 더 들여다 본다면 , 편협함과 독선 에 대한 계속 되는 우려를 표명하고 , 비판,비평에 대한 거부 반응 이 심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진리를 찾아내기보다는 이론상의 약점이나 실천상의 과오만 지적하는 부정적 논리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조류가 되고 있다. 이런 부정적 비판은 궁극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값을 하는 모든 긍정적인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하는 데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사람들이 이제 다시 그런 부정적 논리에 체계적으로 숙달되지 않으면 위대한 사상가가 나오기 힘들다. 수학이나 물리학 분야 등을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의 지적 수준 또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싸움을 걸든지 아니면 스스로 그런 싸움을 붙이든지 , 어쨌든 적극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 그 어떤 주제에 관한 의견도 지식다운 지식이 될 수 없다.

 

이런 부정적 비판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 한번 없어지고 나면 복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논쟁의 기회가 스스로 찾아왔는데도 마다하다니 ,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 법이나 여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데, 또는 그 믿음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 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보다시피 상대방이 비판적으로라도 관심 가져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것인지 , 그 소중한 가치를 몰라 보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동의한다)

 

 

무엇보다도 , 자신의 귀를 닫아 버린 폐쇄적인 단체들도 이러한 말들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떠오른다.)

 

  

또한 그는 인권을 수호하고 ,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이고 , 계몽적인 느낌이 난다.

 

그리고 그는 천재 는 자고로 자유로운 분위기 에서 나올 수 있고 , 그러한 걸출한 인물이 많아져야 더욱 멋진 사회를 이룰 수 있을 텐데 , 작금의 시대는 천재 를 죽이고 있다면서 개탄한다.

 

그러면서 천재 , 특별한 자 가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투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 평범한 대중 이 지배하는 사회는 약간 부정적으로 다루는데 , 이 쯤에서는 그의 국가관이 플라톤의 주장과 흡사한 것인지 , 고민해 보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그의 말을 들어 보면 , 결국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 단지 천재 등에게도 확실한 자유 를 주고 , 대중의 틀에 그들을 가두지 말아줬으면 하는 의도였음을 알게 되는데.(이렇게 끌고 가면 , 또 빈부격차라든지 , 불공평의 문제가 들고 일어나진 않을지 우려되지만..)

 

결국 그는 책의 제목 답게 철저한 자유 옹호하고 강조한다.(일관성 있게..)

(그러다 보니 , 소위 자신의 선택 , 자신의 기호 , 자기 자신 기준 됨으로써 , 절대적 진리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된다)

 

획일성 을 경계하고 , 다양성(개별성) 을 찬양하는 삶.

 

 

분명 나쁜 말은 아닐 것이다. 다양함 속에는 창조성

 

숨어있으니 , 이 얼마나 아름답고 독려할 만한 것인지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주의 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이 나오게 된 데에는  그리스도교의 편협한 만행 이 큰 몫을 했기에 , 우리는 기독교의 신앙관 과 함께 빗대어 이 책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의 후반에 가면 밀이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챕터가 나오는데 , 막상 현실 적용 을 한 그의 이론은 기준이 좀 모호하고 , 불안정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말의 지혜는 상당하지만 말이다)

 

때론 그는 , 금주법 등과 연계시켜 , 그의 이론을 적용해 보기도 하고 , 교육론 에 있어서도 그의 이론을 적용해 보는데 , 피히테가 말했던 교육론 과는 배치되는 듯 하다.

 

그는 , 자유 사회주의자 라는 역설적 칭호를 얻었다는데 , 여기서 자유 라는 단어는 개인을 중시 하는 느낌이라면 , 사회주의 , 사회 를 중요시 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나름의 균형을 지닌 밀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성 논증의 중요성 , 토의 , 토론의 중요성 , 상대방의 권리도 마땅히 인정해 주는 윤리관 등으로 가볍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지적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 꼭 참고해 볼 만한 고전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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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잘 소개된 재미있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워낙 생소한 분야라 전적으로 배우면서 읽었으나 기독교에 대한 설명 파트는 반박할 수 있는 부분

이 더러 보이는 책입니다. 사실 검증도 좀 해 보시고, 마약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잘 얻어 가시길..

 

이 책을 통해 마약을 잘 이해하고, 마약을 근절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약에 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기독교가 도입되면서부터입니다. 기독교가 박해받고 지하에 숨어 있던 초창기에 그들은 마약에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힘든 고난 속에서 신의 뜻을 따르려면 역시 약을 빠는 수 밖에 없죠.

(이 책의 저자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바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함)

 

 

마약은 성격에도 몇 차례 등장합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세 명의 동방박사가 찾아오는데, 그들이 준 선물 중 하나가 몰약(myrrh) 입니다. 여기서 'myrrh'가 무엇인지 여러 의견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아편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편이 예수의 탄생에 선물할 만큼 좋고 귀중한 물건이었다는 거죠.

(수십년간 성경을 읽어 왔지만 몰약=아편은 처음 들어봤네요. 이 부분도 자세히 알고 계시는 분들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또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갈(gall)'이라는 음료를 주는데, 이건 와인에 아편을 섞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음료를 거부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역시 우리 예수님, 마약을 하실 리가 없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가 갈을 거부한 이유는 마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고통을 주는 신을 탓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이 고통이 신이 준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죠. 즉, 진통제인 아편이 들어간 갈을 마시지 않은 건 일종의 오기입니다. '내가 이거 못 참을 거 같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런 마음이었던 거죠.

-> 이 부분 해석은 완전 코미디네요. 성경을 이렇게 잘못 읽으면 안 됩니다.;;;;;;;

 

 

 


 평소였다면 예수도 특별히 이 음료를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예수의 첫 번째 이적이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렵면, 아편에 대한 예수의 태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이 책의 저자는 마약을 권장하기 위해 책을 쓴 게 아니라고 주장은 하는데 가만 보면 은근히 마약을 찬양하는 듯한 느낌을 살살 풍깁니다. 재미있는 저자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예수가 마약을 했다 안 했다 따지자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마약이 지금 우리가 생각했듯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거죠. 지금처럼 마약이란 규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마약과 알코올에 대한 태도가 돌변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로마의 전통 종교, 그리스 신화, 이집트 신화, 샤머니즘, 기타 이민족 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투쟁 없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다신교가 익숙했고,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죠.

그러나 기독교는 기존의 이교도에 대한 관용을 없애 버립니다.  정확하게는 이교도보다 같은 기독교 내에서의 주도권 다툼에서 더 가혹해지죠. 이 과정에서 알코올과 마약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됩니다.

-> 이 부분도 정확한 레퍼런스가 필요한 주장을 하고 있음.

처음에는 알코올이 먼저 탄압받았습니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알코올은 당시에도 꽤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했죠. 그래서 권력자들도 통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이때부터 포도주는 오직 사제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술의 신 '바커스'(그리스신화에서의 디오니소스)는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천국에서 추방된 사탄으로 격하됩니다.

-> 사탄이 술의 신 바커스의 격하된 버전이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요..???

​술처럼 악한 것을 다루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거죠. 바커스는 하느님께 쉬운 해고를 당한 겁니다.


하지만 마약은 통제하기 쉽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마약이 거의 유일한 의약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장 규모도 너무 컸고요. 지금도 담배나 술이 사회에 큰 피해를 주는데도 금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시장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종교 의식에서 마약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기득권이 된 교회 입장에서는 마약이 시중에 돌아다니는 것이 굉장히 불편한 거죠. 새로운 종교(경쟁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다른 종교나 자신들과 길을 달리 가는 기독교 내의 다른 분파들에 이단의 철 방망이를 후려쳐야 했는데, 그 근거로 주로 마약 사용을 제시하는 겁니다. 마약을 사용한 종교적 엑스터시, 황홀경을 모두 불법화하고 참여자는 최대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런 이단 재판이 중세 말 마녀사냥의 시초라 볼 수도 있습니다.

-> 저자의 개인 의견인 건지, 정말 역사적 근거가 있는건지 애매한 주장들.... 대개 술이나 마약을 기독교에서 금하고자 할 때 성경의 특정 구절을 근거로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후 마약에 관한 지식은 이교도의 것으로 배척당했고,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당시 12만 권의 마약 관련 지식이 담긴 책들을 깡그리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에 책의 가치라는 게 얼마나 컸을지, 특히 마약 관련 책은 당시 모든 의학 지식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민중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을 불태워버린 거죠.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지정한 황제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입니다. 더러운 승자의 기록 같으니!

-> 마약을 아끼는 저자의 절절한 감정이 묻어나 있네요.


기독교는 차츰 고통을 잊는 용도로 사용되던 마약조차 금지하기 시작합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신이 내린 처벌이기 때문에 신앙과 회개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아프니까 청춘이다' 가 아니라 '아프니까 넌 죄인이다'가 된 겁니다. "지금은 아프지만, 네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이 고통도 사라질 거야." 이런 식으로 제 1차 대힐링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ㅋ ㅋ )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에 새로운 문화가 없다더니, 힐링이 대세였던 게 21세기 대한민국만은 아니었던 거죠.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오후 지음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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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서구적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공동체 강조가 쉽게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쉽게 찾을 수 있고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서 늘 간과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개체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살아남아 있었다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 주는 태도인 '관용', 요즘 똘레랑스(Tolerance) 라고 부르는 그것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다양성' 보다는 '동질성'만 잔뜩 강조하고, 포용력이나 인내심은 점점 잃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영안: 재미난 지적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성의 변질이라고 봐야겠지요. 성숙한 개인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이지, 그것이 없으면 그냥 집단이지요.

​동질성을 강조할수록 집단성이 강화됩니다. 타자성이, 심지어는 이질성이 어우러져서 색깔을 낼 때라야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집단성(collectivity)는 공동체(community)와 다르다는 논의가 있었음)

기독교 신앙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듯, 한 하나님,한 성령, 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색깔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나 직업이나 처한 상황은, 죄가 아닌 한 '선의 씨앗(seed of goodness)'이 될 수 있고, 선을 확장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입니다.

다른 색깔이나 다른 모양을 배제해 버리고 완전히 동질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그런 의미의 공동체는 생명을 자라고 번성하게 하기보다는 질식시키고 죽인다고 봐요.

공동체의 강조는 살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죽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양희송: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가 급속하게 규모를 키우던 때의 전형적인 전도 방법이나 집회 방식은 한 가지 모델을 빈도를 늘리거나 강도를 높이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 같은 전도 책자로 단순하고 정형화된 내용을 복음의 핵심으로 전도해 왔고, 대형 집회나 부흥회 등은 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스케일로 개최하고 정서적 일체감이 강하게 고양되도록 했지요. 그런 것이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대중 정서의 밑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공동체 내부를 규율하는 방식과 바깥을 대하는 태도에 뿌리 내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개체성을 중요한 특질로 재발견하고 그것을 고양시킬까 하는 질문이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강영안: 시간 순서로 보면 개체성 확립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그 개체는 개체로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개체를 성장시켜 주는 요소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본다면 개체성 강조에만 머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야죠.

​그런데 개체성도 여러 색깔, 여러 모양이 있고 여러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텐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에게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경(Creed)' 즉 신앙고백이 있어요. 모든 기독교 전통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Apostles' Creed)' , 아타나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Nicene-Constantinople Creed)' 이 있습니다.

 

 

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기독교에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톨릭도 있고, 그리스 정교회도 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Reformed) 교회가 있고,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교회도 있지요.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요소는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의 일치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로 다르게 형성되고 성장했지만 하나의 교회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희송: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는 것이 교회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은 같은 듯하나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이 달라지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정치적 사안이나 문화적 취향에서 견해가 갈라지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로 비약하고 밥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서로 다른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강영안: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통이 형성된 것, 색깔이 다르거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오른쪽에 있거나, 왼쪽에 있거나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에 대해, 정교회에 대해 형제자매라 이야기해야 하지요.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우울한 일들을 많이 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문제에 대해 입장의 양극화를 경험했잖아요.

이라크 파병을 할 것이냐,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봐야 할 거냐, 촛불 시위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등,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심한 양극화를 보였습니다. 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구체적 사안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는 교회에 의견 차이가 생기면 공의회(Council)를 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을 열어서 의견 차이를 조정하고 하나의 교회로 나아가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때 함께 심사숙고할 자리가 없습니다. 노회와 총회는 사실상 일반 성도와 무관한 회의가 되었거든요. 목사와 장로들 모임이고, 성도들이 관심 두고 묻는 물음은 안건으로 올라가지 않아요.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교회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숙고하고 결정하지 않아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난관이나 결함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공교회성'(Catholicity)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공교회성은 내가 속한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이 교회와 저 교회가 다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거죠.

 

나는 장로교 고신교단에 속하는데,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등 국내의 여러 장로교단 간에 공동의 문제를 놓고 숙고할 수 있는 채널이 없습니다.

 

연합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공교회성의 관점을 가지고 연합체들이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처럼 복잡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서 성도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방향 제시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교회적인 의견을 모으고 행동을 유도하는 절차가 없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촛불 시위 등을 접하면서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견해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커지지 않았나 해요.

양희송: 공교회성과 관련해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 공교회성은 내부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집약되고, 대외적으로는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교구체제(Parish system)을 '공간으로 분할하는 경우'와 '사람으로 분할하는 경우'에서 공적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이 꽤 차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공간에 따라 교구를 분할하고, 구심력이 강한 감독제(Episcopal)를 택하는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등은 목회활동 외에 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목회적 관심 범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전통인 침례교, 오순절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교회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러다 보니 교단 난립 문제도 가세해서 한 건물에 교회가 서너 개 들어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기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 바로 옆에 산다 해도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면 목회 대상으로 삼으면 안되지요. 혹은 아무리 멀리 살아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 목회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회중교회적 전통에서는 '교회 안'과 '교회 바깥' 이라는 구분이 가톨릭과는 다른 의미에서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이들은 '교회 바깥'에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은 언제나 '멤버십 확장', 즉 '선교' 아니면 '전도'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이 '구제' 또는 '사회봉사'도 종종 '선교'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관심, 정치 참여 등을 놓고 이것이 '선교냐, 아니냐' 라는 논란이 나옵니다.

'공교회성의 회복'이 모든 교단이나 교회에서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영​안: 기본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무수한 분열을 통해, 엄밀한 의미의 공교회성을 상실했다고 봐야겠죠. 저는 여러 점에서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그 전통 안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이 개신교의 최대 비극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세요. 각 교단 총회와 교단 연합기구인 한기총이나 NCC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이나 NCC에서 공교회성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해요.

칼뱅은 '보이는 교회' 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나눌 때 보편성을 갖는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했거든요.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있고, 전 세계에 확대되어 있는 모든 교회가 결국은 하나의 공교회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그런데 공교회성을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주교체제'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공교회성'은 '우리가 한 분 주님을 모신다'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장로 교회든, 루터교회든, 순복음 교회든 '한 주님을 모시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의식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 결여되어 있고 부족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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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일상적 삶과 관련된 지식을 얻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해요.

적어도 총론적인 훈련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훈련을 하는 신학교가 한국에 한 군데도 없어요. 전통적인 신학 분류 방식에 따른 교육이 아직도 신학교 교육을 지배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 과학과 예술, 정치, 경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폭넓게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신학 교수조차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학 교수들은 전공을 벗어나 통합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각 학문과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사고를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가르쳐도, 구약을 가르쳐도, 교회사를 가르쳐도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것만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교회사는 교리사 중심이거나 교회 사건사 중심에 그치거든요. 주로 교회 지도자 중심이고요.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사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뭐고, 의사의 역할이 뭐고, 간호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런 직업이 언제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지, 왜 화가들은 근대에 와서 일상적 삶의 세계를 그리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지요. 왜 공회나, 교황이나, 사건이나, 지도자만 중심에 놓고 교회사를 가르쳐야 합니까?

사실 이 내용을 가지고 2007년 5월 <목회와 신학> 대담 때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Richard Mouw)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을 위한 커리큘럼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물었더니 풀러신학교에는 '평신도 사역 연구소'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한 것이 커리큘럼에 반영되는지도 물었어요.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전통적인 네 가지 분야, 즉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는 뜻이에요.

이런 분류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가 도입한 방식입니다.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진 방식인데, 지금은 거기에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상담학' 등을 좀 더 붙여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죠.

 

사실 이건 학문적인 분류방식이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커리큘럼 분류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는 대학에 있는 신학대학, 곧 Divinity School 또는 School of Theology 가 아니라, 그야말로 각 교파의 신학교 곧 세미나리(Seminary)인데, 단어 뜻을 보십시오. '세미나리'는 라틴어 세미나리움(Seminarium), 곧 '모판'에서 온 말이에요. 세멘(Semen)은 씨를 뜻하지요. 볍씨나 고추씨를 뿌려서 키워 내는 모판, 이것이 세미나리의 어원이에요.

신학교는 이렇게 보면 일종의 '양성소'예요.

목회자를 키워 내는 양성소. 그런데 이걸 '신학대학원'이라 부르니 무슨 대단한 학문을 하는 곳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슐라이어마허 이후 근대 신학교육은 마치 학자를 키워 내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커리큘럼을 그렇게 짰지요. 신학 교육의 목적, 방법, 과정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키만큼 성숙한 사람, 온전한 사람(엡4:13)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도록 훈련할 수 없습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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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우익을 담당하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변증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변호에 앞장 섰던 C.S 루이스는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한번쯤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신학을 비교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두 저자를 좋아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쉐퍼의 입장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리고 B.B. 워필드, 제임스 오르, W. H.그리피스 토머스, 캠벨 몰간도 같은 견해)

  1.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속죄

  4. 그리스도께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문자 그대로) 재림.

 

 

루이스의 입장 (순전한 기독교에 따르면)

  1. 성경의 영감과 속죄의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함.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영감을 받았으며 속죄로 인해 타락한 피조물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관한 것은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음.

  2.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반대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4.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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