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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물의 발견은 정신병과 인간 본성에 관한 생각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성격, 지성, 문화 자체를 한 자루의 효소로 축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쇼터, [프로작 이전] (200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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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에 잠시 동안 나는 모노아민 산화효소 억제제(MAOI)인 페넬진을 먹었다. 상표명은 ​나르딜​이다. MAOI 는 나에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불안이 줄어들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이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아주 많이 했다.

 

  MAOI가 특정 성분과 결합하면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MAOI를 먹는 환자가 와인 등의 발효주, 오래된 치즈, 피클, 특정 종류의 콩,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여러 약 등 아미노산에서 유래한 티라민 함량이 높은 것을 같이 먹으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심한 두통, 황달, 혈압 급상승, 심한 내출혈을 일으킨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계열 약은 건강 상태가 아주 좋을 때에도 ​건강염려증과 건강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  환자에 따라서는 우울, 불안 치료에 MAOI보다 나은 방법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부작용 때문에 여러 해 전부터 기분장애 치료에 일차적 치료 방법으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MAOI가 내 정신병 치료 역사에서는 카메오 출현에 그쳤지만 불안의 과학 문화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경화학적 정신병 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약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MAOI와 이미프라민 등 삼환계 약물이 등장하며 우울과 불안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MAOI 계열 약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했다. 독일 공군이 영국 도시를 V-2 로켓 미사일로 포격하다가 사용하던 연료가 떨어져서 대신 ​히드라진​이라는 연료로 로켓을 발사해야 했다. 히드라진은 독성이 있는 폭발성 물질이었지만 과학자들은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의학적으로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은 히드라진을 제약회사에서 헐값에 사들였다. 1951년 뉴저지 주 너틀리에 있는 호프만라로슈 사에서 일하던 화학자들이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만든 화합물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가 ​결핵균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임상 시험이 뒤따랐다. 1952년에는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 둘 다 결핵 치료제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 두 항생제에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이 약을 투여 받은 뒤에 일부 환자들이 "​행복감에 빠져" 결핵 병동 복도에서 춤을 추는 일이 있었다고 신문에 실렸다. ​이 보도를 읽은 정신과 의사들은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에 기분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정신과 약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56년 뉴욕 로클랜드 주립 병원에서 여러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들에게 5주 동안 이프로니아지드를 투여하는 연구를 했다. 5주 투약 기간이 끝날 무렵 ​우울증이 뚜렷이 호전되었다. ​이 병원 연구 책임자인 네이선 클라인은 "정신에 활력을 주는" 효과를 보았고 그래서 자기 개인병원의 우울증 환자들에게도 이프로니아지드를 처방했다. 네이선 클라인은 일부 환자들에게서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클라인은 "​정신의학 역사에서 이런 약효를 발휘한 치료제는 이프로니아지드가 처음"​이라고 단언했다. 1957년 4월 호프만라로슈 사는 이프로니아지드를 ​마르실리드​라는 상표명으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 약은 <뉴욕 타임스>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마르실리드는 MAOI 계열 약 1호이자 ​항우울제로 알려진 첫 번째 약​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은 신경과학의 역사가 일천할 때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불꽃"이냐 "국물"이냐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뉴런 사이에서 자극이 전기적으로 전달되느냐 아니면 화학적으로 전달되느냐를 두고 과학계의 의견이 나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약리학 교수 레슬리 아이버슨은 1950년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학부생일 때에는 뇌 안에 화학적 전달은 없고 뇌는 전기 기계와 같다고 배웠다."

 

  19세기 후반 영국 생리학자들이 뇌 안의 화학물질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해 놓았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 약리학 교수 오토 뢰비가 ​처음으로 신경전달물질의 존재를 밝혔다. ​뢰비는 1926년에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신경 끝에서 다른 신경으로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을 중재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  소라진과 밀타운 ​판매가 가속화하는데도 뇌세포 사이에서 자극을 전달하는 물질인 신경전달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실히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이 약을 처방하는 의사들이나 이 약을 개발한 생화학자들이나 약에 왜 이런 효과가 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때 스코틀랜드에서 두 연구자가 발견한 사실이 평형추를 "국물" 쪽으로 강하게 기울게 했다.

 

  1954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독일 신경과학자 마르테 포크트가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다는 증거를 처음 발견했다. ​그해 말 포크트의 동료인 존 헨리 개덤이 여러 변칙적 실험을 통해 이전까지는 소화와 관련된 장내 물질이라고 생각되던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임을 발견​했다.

 

  개덤은 스스로 LSD를 먹어 실험을 했다. 개덤은 48시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고 또 실험실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뇌척수액 내의 세로토닌 대사 물질 함량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개덤은 이런 애매한 결론을 내렸다. 세로토닌은 정신건강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따라서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정신건강 이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의학계나 문화 전반에서 불안과 우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된다.

 


 

p.s 세로토닌의 역사

초기 세로토닌 연구 역사를 간략하게 살피면 이렇다. 1933년에 이탈리아 연구자 비토리오 에르스파메르가 ​위에서 화학물질을 발견하였고 ​이 물질이 장 수축을 촉진하여 소화 작용에 관여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엔테라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7년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고혈압을 연구하던 생리학자 두 명이 혈소판 안에서 엔테라민을 발견했다. 엔테라민이 ​혈관 수축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세로토닌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세로는 라틴어 세룸(serum)에서 나온 말로 '피'를 뜻하고 토닌은 그리스어 토니코스(tonikos)에서 온 말로 근긴장을 가리킨다). ​1953년에 처음으로 뇌에서 미량의 세로토닌이 발견되었지만 연구자들은 위에서 나와 혈류를 타고 뇌로 이동한 잔존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MAOI=모노아민산화효소 억제제=Monoamine oxidase inhibitor

세로토닌=serotonin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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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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