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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은 기존의 관점과 N.T. Wright 등의 새 관점을 같이 살펴보고, 제 3의 대안을 제시한 권영경 교수님의 의견까지 잘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띱니다.

 

그러므로 구원(의인됨) 의 "첫 열매" 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제 진입했다는

말입니다. 그 구원(의인됨)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곧 "의인" 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구원(의인됨) 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의인" 의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부과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모든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 ( 즉 "은혜") 로 , 그리고 그것을 "믿음" 으로 "의인됨" 은 윤리적 의무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의" (즉 "은혜") 로 우리가 "의인" 이 되었으므로 , 우리는 "의인" 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인됨" 의 복음을 강해하고는(롬 1:11 , 갈 1:4) ,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가 어떻게 "의인" 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힘주어 가르친 것입니다.

(롬 12:15 , 갈5:6).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사단에게 순종해서 살지 말고 ,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이 윤리적 권면의 부분을 여는 첫 마디(롬 12:1) 의 "그러므로" 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인" 이 되었기 때문에 ,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대" 의 정신과 가치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변하여 좇아야 하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의를 행하라(명령형) , 그러면 의인이 될 것이다(서술형)"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너는 의인이다(서술형) , 그러므로 의를행하라(명령형) " 라고 가르칩니다. 개신교가 인간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 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과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인" 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전반부를 잘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전반부의 구원의 서술은 후반부의 윤리적 명령을 구조적으로 동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 하나님의 "은혜" 를  "싸구려 은혜" (본회퍼 왈) 로 만들고 무효화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 는 요구와 함께 , "그러므로 이제 의인으로 살 수 있다" 는 가능성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기 때문에 , 우리는 숙명의 힘으로 오는 사단의 죄의 통치를 거부할 수 있고 , 우리의 믿음을 유발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게 하고 그 뜻에 순종케 하는 하님의 영(성령) 에 힘입어 하나님께 올바른 순종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시고 힘 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는 "육신의 열매들"(갈 5:19~21) 이 아니라 "의의 열매들" (빌 1:11) 또는 "성령의 열매들"(갈 5:22~23) 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를 "의인" 되게 하는데 , 이 "은혜" 는 "은사" 로 구체화하고 개별화하여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재판석 앞에서 우리가 "첫 열매" 로 받은 "의인됨" 이 재확인되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고전 3:13~15 , 고후 5:10) ,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의인" 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며 "의의 열매들" 을 맺어감으로써 그 최후의 심판석에서 "흠이 없는" 자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고전 1:7~8 , 빌 1:9~11) . 이것은 최후의 심판석에서의 우리의 "의인됨" 의 재확인에 대해 우리의 책임을 강력히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꾸짖으면서 , 그들이 계속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 위협도 합니다.(고전 6:9~10) .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 즉 사단의 통치 아래서 지은 죄에 대해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옮겨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고전 6:11), 계속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속에 머무르지 않고 , 도리어 그곳에서 튀쳐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부과하는 의무-즉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일을 하지 않고 , 도리어 사단에게 돌아가 그의 뜻을 행한다는 뜻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지 않은 자들 , 곧 하나님 나라 속에 머무르지 않은 자들, 그의 통치를 받지 않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때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즉 어떻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인간들을 바라보았을 때 이 점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성령으로 계속 우리를 "의인" 의 상태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곧 하나님의 "의" 로우심) 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자기도 위안을 받습니다(롬8:1~39 , 고전 1:9 , 빌1:6).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로우심" , "은혜") 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 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 의 자세로 "의인" 의 삶을 사는 것 , 바로 이 두 측면들이 서논리적 긴장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간의 논리적 긴장은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긴장의 요소를 풀어 버리려고 하다보면 결국 한쪽을 경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자(안도감)가 없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후자(두렵고 떨림)가 없어서 방종하며 "의의 열매" 를 맺않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정통적인 옛 관점 신학의 견해를 무난하게 잘 따라가는 견해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N.T WRIGHT의 새로운 '칭의'에 대한 논의도 더 다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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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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