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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한국 현대사 훑어보기]

 

[나의 한국 현대사] 요약-유시민 저, 2014년 발간-

 

 

 

 

 

알아둬야 할 내용이 많아서 대부분 그대로 발췌했고, 복지,경제,문화의 변천사 등은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내용, 국가와 정부가 정의와 진실을 져버렸던 사건들 중심으로 기록을 남깁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기를 좀 더 중점적으로 발췌했고 그 이후의 사건들은 상대적으로 짤막하게 남겼습니다.

근현대사 전체를 균형감 있게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 전체를 1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간첩조작, 안보관련 내용은 나중에 여건이 되면 다른 책 몇 권의 내용과 함께 묶어서 글로 남기고 싶어서, 이번엔 제외시켰습니다)

 

 

 

이 쪽 분야 책은 통 읽어본 게 없어서 비교가 어렵긴 한데, 유시민 씨 글이 개인적으로 맛깔나게 잘 읽히고, 특정 인물의 부정, 부패를 조목조목 서술하다가도 그 인물이 행했던 좋은 점들에 대한 부분도 나름 제시를 해 주면서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서술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혹자들은 유시민 씨도 분명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성과 색깔이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래서 이 책으로 한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글 좀 맛깔나게 잘 쓰고, 역사 서술이 훌륭한 명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게 좀 알려 주세요)

 

 

일단 이런 류의 책을 볼 때 꼭 명심해야 할 중요 전제를 기억합시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에드워드 H. [역사란 무엇인가] –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 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어떤 역사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은 소수의 사실만이 요행히 그 운명의 집행을 잠시 유예받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 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8대 대통령 선거 분석]

 

2012 12월 박근혜 후보는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열여섯 곳의 광역시도 중에서 서울, 광주, 전남, 전북 네 곳에서만 졌다.

 

-경기도와 대전, 제주도는 적은 격차로 이김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 강원, 충북, 인천에서는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일종의 세대전쟁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청년들은 압도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함.

 

-유신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40대는 문재인 후보를 조금 더 지지함

 

-박정희 시대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50대와 이승만 정부도 겪었던 60대 이상 고령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

 

 

 

2012년 대선의 실체는 역사전쟁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대별 투표성향은 한국현대사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젊은 유권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지도 않지만 격렬하게 미워하지도 않는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옛날의 독재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문재인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한 것은 문화적으로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 서 고령유권자들이 과거의 독재를 지지했다고 해석할 수도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공로를 인정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철권통치와 인권유린까지 옹호하지는 않는 게 보통이다.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 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과 해방공간의 혼란, 참혹한 전쟁과 절대빈곤의 고통을 견뎌내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대한민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노후를 맞았다.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2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로 2012년 대선 결과를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론]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하나는 5.16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 신문 사주와 고위간부들, 법원과 검찰과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 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 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현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

 

그들은 [근대화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을 자처하지만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는 [유신잔당], [5공잔재세력], [특권세력], [냉전세력] 또는 [수구꼴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행사해왔다. 그런데 1998 2월부터 2008 2월까지 정치권력 하나를 빼앗긴 적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들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 가운데 [산업화세력]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호불호의 감정과 가장 멀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하나는 4.19, 5.18과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 라고 부르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소통하며 가끔 오프라인에서도 대규모로 결집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 규탄 촛불집회],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집회] 같은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지속적으로 연대하거나 물질적 이익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심하게 다툰다. 정치에서는 2014년 현재 새정치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거대 자유주의 정당과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녹색당 등 작은 진보정당들이 이 세력을 대표한다.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현상은 2012년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분류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민주화세력에 속했지만 산업화세력의 품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만큼 그쪽에 넣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자.

2014년 현재 국민들의 전직 대통령 선호도는 둘로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40대 이하에서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합이 압도적으로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합이 훨씬 높다.

지역별, 연령별 호감도 분포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박근혜, 문재인 후보 지지도 분포와 거의 비슷하다.

 

 

 

 

 

산업화세력을 보수, 민주화 세력을 진보라고 할 경우 대한민국 국민은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한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빨랐던 탓에 생긴 현상이다.

서유럽에서는 300여년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래서 절충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큰 차이가 세대 대립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1959년 전후]

 

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연합(UN), 실제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그 아이를 구해주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와 같았다. 우리는 미군정의 감독과 보호를 받으면서 정부를 세웠으며 미군은 북한의 침공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우리는 미국의 후견과 지원을 받으면서 산업화를 이루었다.

미국을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냈으며 부시 대통령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 파병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미군은 60년 넘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에 대하여..]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내전인 동시에 동서냉전의 개막을 알린 국제전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 6 25일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주석의 동의를 받고 소련 스탈린 수상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김일성은 한 달 안에 [통일전쟁]을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인민군의 총공세를 죽기 살기로 막아내는 동안 유엔군이 상륙했다.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났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왔다. 결국 1953 7,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군사정전협정에 조인했다. [6.25에 대하여..]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명이었다.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 증가율이 3%를 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760만명이었다.

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 밖에 되지 않았다. …. 당시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총생산(GDP) 19억 달러, 1인당 GDP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 터키는 우리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 달러를 웃돌았다.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의 10%나 되는 2억 달러의 해외원조를 받으면서 전쟁고아를 돌볼 능력이 없어 대거 유럽과 미국에 입양시켰다. GDP가 물질적 생활수준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 거래와 자급자족 경제활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 대열에 있었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1959년 가난했던 전후 대한민국…]

 

 

 

열세 살이 넘어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 명이었다. 부끄러워서 감춘 사람도 있었으며 국한문을 혼용한 신문과 책을 읽지 못하는 [독해문맹]은 더 많았다. 한이 맺힌 부모들은 굶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교사들은 개천가 자갈밭에 천막을 치고 피난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 진학률이 15% 도 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도 보수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관리직, 전문직, 사무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과 생산직, [3D 일자리]는 대학을 가지 못한 85%의 몫이었다.

 

[1959년 교육받지 못했던 대한민국..]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사회주의 혁명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 전통이 거의 없었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났다. 소련 사회주의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결합했고 중국 사회주의는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흘렀으며 북한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개인숭배로 나아갔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 경력, 공산당 당원 자격, 소련 점령군의 후견, 대중적 명성, 연대조직의 지지, 육체적 활력 등 여러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교조주의를 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교조인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 관념론이다. 3대째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무덤 속의 마르크스가 안다면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북한]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1959 7 31,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의원으로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실시한 1952년 제 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 표를 얻어 2위를 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엔 보장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 성취] 1호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직전 별세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대신해 이승만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 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유효표의 25%가 넘는 216만 표를 얻었다.

 

조봉암 선생은 1954 3월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글에서 군사적 무력통일과 더불어 선거방식에 의한 정치적 통일도 검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진영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을 뿐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반대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1959 9 11일 강력한 가을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다.

최대 풍속 초속 85m의 대형 태풍 사라였다. 영남지역을 집중 타격한 사라는 사망, 실종자 849, 부상자 2533, 이재민 40만명, 선박 파손 9329, 유실 경작지 2000 제곱킬로미터, 재산 피해액 1700억 원이라는 대재앙을 안겨주었다.

정부는 태풍의 진로와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이어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신속하게 전파할 수단이 없었다. [이승만이 집권했던 그 시절…]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서민들은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대자본의 중소협력업체 수탈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 대형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장악 현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1959년도의 경제와 2014년도의 경제]

 

 

 

2014년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다.

1953년의 정전협정은 6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다. 남북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황을 종료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 당국자들은 1972 [7.4 남북공동성명], 1991 [남북기본합의서], 2000 [6.15 공동선언], 2007 [10.4 공동선언] 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에 합의했다.

한때 우리 국민은 금강산과 개성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우여곡적이 있었지만 개성공단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포격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문서는 사실상 모두 효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한다. 남한의 반북단체들은 북한의 체제와 권력자를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낸다.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인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난민촌 정서] 역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 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 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 1.21 사태와 1983년 아응산 테러사건을 비롯해 정전협정 발표 이후 60여 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굳건히 유지되는 독재체제와 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1959년도의 분단상황과 2014년도의 분단상황]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른 한국 근현대사 분석]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해 도시로 달아났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 자기 존중, 존엄, 정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무척 유익하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variability 가 있음을 나타내주는 예시]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20세기 지구촌에는 많은 신생국이 있었다. 그 나라 국민들도 똑 같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모든 신생국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환경과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 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폐허에서 출발했다. 40여 년간 제국주의 수탈에 시달린 끝에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으며  정부 수립 직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대한민국에는 도덕적,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지배층이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양반계급은 망국과 함께 무너졌으며 3.1 독립투쟁의 힘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은 조선왕조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거나 협력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혁명이 아니라 망국이 봉건체제를 해체한 것이다. 수많은 민족지사가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40여 년의 간난신고를 이겨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은 기업인들이 있었지만 해방공간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일제하에서도 봉건적 특권을 유지했던 지주계급은 토지개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사회였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해방공간의 권력이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민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민주공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물론 그런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 누구나 국가에 대해 자유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광복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원리를 배웠다. 현실성이 있든 없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4.19 혁명을 일으킨 최초의 주역이 고등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쥔 20세기 문명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한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승만 시대 전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정부 수립 13년째였던 1960 4.19혁명으로 터져 나왔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은 반공잘살아보세였고 국가 목표는 수출 100억 달러‘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달성이었다.

전국이 공사장 먼지와 굴뚝 연기로 뒤덮였고 걸신들린 부동산 투기 열풍이 온 나라를 달구었다. 거대한 소비재산업과 중화학공업이 형성되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그라운드 제로대한민국을 질주했다.

그 욕망의 탁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중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냈고 그 욕망의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역사 래프팅을 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4.19의 외침에는 자유데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그 원망과 분노에 화답함으로써 무려 25년 동안 독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 1987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김대중, 노무현의 진보정권 10년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현대사가 서로 다른 욕망의 전차가 부딪쳐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개략적인 대한민국]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4.19 5.16 의 의의]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queville) (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옳은 말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정부의 수준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 달리 표현하면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독재국가에서는 정부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낙관적 믿음이었을 뿐이다.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독재자의 발밑에 놓여 있다면 그 체제는 누구의 수준을 반영하는가?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포함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였다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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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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