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오해

  1. 책 제목: 과학의 영혼

  2. 저자: 낸시 피어시&찰스 택스턴

    52page~54page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에게 기독교가 근대과학의 등장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서 놀라움과 불신의 반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정은 아직 학교로부터 대중문화나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가지 못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하여 내가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회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통된 오해들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종교적인 논쟁들은 교회가 과학을 반대한다고 말하며 자주 사실을 과장해 왔다. 특히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개신교 교회의 모든 교단들, 즉 루터란, 칼빈주의자, 성공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반성경적이라고 매도하는데 경쟁적이었다.”는 전면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사실은 루터가 [탁상담화](Table Talk)에서, 그리고 칼빈이 행한 설교에서 여기 저기 언급하였던 사실을 제외하고는, 종교 개혁자들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논쟁 자체를 무시하였다. 더군다나 이러한 언급들의 진위여부마저도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루터의 경우, [탁상담화]는 이 담화의 참여자들의 기억에 의해 그 담화가 있은 뒤 몇 년 후에야 기록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루터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얕잡아 보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한다.

 

화이트는 칼빈의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칼빈은 시편93:1을 언급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대하는데 앞장섰으며,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위에 올려놓겠는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칼빈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며, 발행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도 코페르니쿠스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

 

진실은 신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답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의 가치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치명타를 입혔던 것처럼 기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지위를 우주의 중심적 무대라는 고상한 위치에서 강등시켰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역사학자 존 랜달(John Herman Rendall) [현대 지성의 성립](The Making of Modern Mind)이라는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인류를 우주의 목적이며 그 중심적 존재라는 교만한 위치에서 끌어내려 그를 끝없는 우주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작은 행성계의 자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고 주장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맞서서 자신들이 지닌 안정된 우주론이 무너지지 않도록 저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헌들은 이러한 묘사를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채택된 중세의 우주론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우주론에서 우주의 중심이 곧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악마의 장소였다.

 

우주의 중심에 지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지구, 그리고 천체의 순서로 점차적으로 더 고상한 행성들이 자리 잡았다.

 

 

 

사물에 대한 이런 착안을 통해 볼 때, 인류의 중심적 위치는 보완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위치의 상실 또는 강등(demotion)도 아니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기에 그의 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주장은 그의 이론이 인류를 원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렸다는 것이었다.

 

중세 우주론에서 인간의 의미는 지구의 중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호의(regard)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 가치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협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견해에 불과하다. 이 견해는 우리 시대의 고뇌(angst)를 역사 속으로 되돌려 읽고 있는 것이다

 

96page ~99page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1543)의 작품들은 과학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초석과도 같았다. 그의 태양중심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메우스로부터 주어진 지구 중심적 천문학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록에 의하면, 이는 어떤 실험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커니는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을 종교적 회심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비물질적인 수학적 개념이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플라톤 *

 

 

많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상징이 태양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태양의 빛과 따스함이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지구상에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는 태양신비주의(sun mysticism)와 관련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가르쳤지만,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태양의 위치가 마땅히 신적 상징으로서의 위엄과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대한 이런 신비주의적 견해가 코페르니쿠스에게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열어준 것처럼 보인다.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확실히 신플라톤주의적 태양신비주의의 흔적을 담고 있다

 

모든 자리의 한복판에 태양이 왕자에 자리한다. 가장 아름다운 이 신전에서 어떤 위치가 이 발광체로 하여금 이보다 더 훌륭히, 한꺼번에 모두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그가 등불로, 정신으로,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로 불리는 것이 옳다. …. 이제 태양은 왕적 보좌에 앉아서 자기 주위를 맴도는 그의 자녀들인 행성들을 다스린다.

 

같은 인용문에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가시적 신’(the Visible God)으로 지칭하는 문헌을 인용한다.

 

신플라톤주의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적 행성체계론에 박차를 가했는지 또는 이것이 그에게 과거의 지구 중심적 체계에 대항하여 자신의 새로운 체계를 지지할 수 있는 논증자료들(당장 사용할 만한)만을 제공했는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확실히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동시대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데 있어서 신플라톤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6세기 전반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하면서도 실험적인 반대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지구가 어둡고, 비활동적이며, 무겁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듯이) 움직이지 않는 질량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천상의 별들은 빛의 접촉점이므로 빛과 불로 구성된 물체들이 그 주된 요소들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관찰에 대항해 지구가 실제로 별들과 같은 천상체로서 태양주의를 궤도를 따라 회전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태양 중심론(heliocentric theory)은 상식에 근거한 또 다른 반대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태양 중심론이 맞다면, 공중에 던져진 물체가 지구로 다시 떨어질 때는 처음 던져진 곳과 약간이라도 다른 곳에 착륙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물체가 공중에 머무르는 동안 지구가 회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신기하게도 유효한 이론이었다.

 

지구의 회전은 코리올리스 효과(Coriolis forces)를 가져오는데, 이는 푸코의 진자(Foucault pendulum)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 덴마크의 저명한 천문학자 타이코 브라헤(Tycho Brahe)는 대포알이 지구의 회전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쏘아 올려질 경우, 이 대포알은 더 멀리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구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운동량만큼의 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도가 더해진다.). 또 다른 유효한 주장에 대해서도,, 갈릴레오가 초기 형태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해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8장을 참고할 것).

 

또한 반대자들은 만약 지구가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면, 하늘에 박힌 별들도 그 궤도의 반대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위치가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유효한 주장이었지만, 그 차이가 너무 작아서 1838년까지는 관측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는 이처럼 수량적이며 논리적이었는데 반해, 당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위한 실증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역사학자 홀(A. R. Hall)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천상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사실,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주장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모두 철학적이었다. 커니는 신플라톤주의적 가정(assumption)에 대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공리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적절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가정을 근거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또한 동일한 이유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에 불과했다.”

 

이런 주장들을 넘어 코페르니쿠스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은 자신의 체계가 수학적으로 더 간단하다는 것 뿐이었다. 이는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주전원(epicycle)의 수를 80에서 34로 줄일 수 있었다. 이는 괄목할 만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수학이 자연의 진리에 대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호소력 있는 주장이었다.

 

 

실증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모든 과학적 진보를 종교와 신비주의를 극복한 합리성의 승리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종교와 신비주의는 분명히 코페르니쿠스의 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천문학 이론을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교리와 연관시키는 것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의 많은 추종자들 역시 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2장의 조르다노 부르노의 견해를 참고할 것)

 

더군다나 태양중심설에 대한 반대는 단지 교리와 반계몽주의(obscurantism)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유는 당시 지배적인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에 근거한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백년 후 갈릴레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은 신플라톤주의 전통 바깥에 머물렀던 과학자들에 의해 부인되었고, 뉴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을 위한 물리적 구조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논쟁은 전적으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