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경계선에 선 신학자'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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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평전이다.

 

폴 틸리히.

 

칼 바르트 , 몰트만 등과 함께 현대 신학자의 거성으로 꼽히는 사람이다.(그의 신학적 견해에 동의하진

않는다. 무신론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그의 지적인 깊이와 노력은 존경할 만 하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살짝 넘어 버린 느낌이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목해 볼 필요는 있다.)

-> 그리고 세상을 살아 보면, 그의 이야기가 좀 더 와닿는 시점들이 있곤 하다.

-> 칼 바르트의 1차 서적도 도전 했었으나, 너무 양도 많고 힘들어서 포기했는데 틸리히 책도 어마어마하게 난해하다. 그래서 늘 2차 서적이나 달고 산다. 

 

(여담이지만, 칼 바르트와 동갑내기고 둘 다 목회자 자녀고, 둘 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했으며, 둘 다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둘 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폴 틸리히는 미국으로 건너오고, 칼 바르트는 원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간다.)

(폴 틸리히가 미국으로 건너간 사건이 아인슈타인이 유럽에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로 넘어온 사건에 비견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의 '1차 서적'은 너무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나와 같은 초심자들은 이와 같은 '2차 서적'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인물에 대해 알아 가면 좋을 것이다.

 

 

책은 아주 쉽고 잘 쓰여 있다.

 

아들과 아빠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 거무죽죽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려진 책 표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읽을 만 하다. (책을 정말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풀 틸리히라는 사람이 워낙 다재다능하고 ,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더욱 많은 노력이 요구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20세기의 그 어떤 신학자보다 더 보편적인 신학을 전개하려 했으며 , 기독교가 세속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더욱 씨름하고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계선상의 신학자' 라고 이야기 한다.

 

모 교회 목사님들은 칼럼 등을 통해 '폴 틸리히' 를 이단이라고 배격하고 있다고 한다.

 

그 분들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폴 틸리히의 주장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소위 보수적인 , 근본주의 적인 , 경건주의 적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굉장히 파격적이고 , 쇼킹하고 , 일탈을 하는 듯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쇼킹한지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다.

 

그는 이야기 한다.

 

기독교의 '이신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다는 교리) 교리를 단지 죄인 뿐 아니라 의심하는 자에게까지 확장시킨다.

 

즉 ,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 뿐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를 의심하는 자에게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데 , 이는 모든 진지한 의심 속에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으며 , 이 추구 속에서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세상을 10년 이상 더 살다 보니, 그의 은혜가 진짜 은혜롭게 들리는 순간들도 있다.)

 

(이건 약과다.그를 이해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러한 말에 충격 먹으면 그의 저서를 읽을 수 없다..;;;;;;)

 

그리고 , 그는 인간 실존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실존주의' 가 유용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왜냐하면 , 그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철학이 현대인들의 상황을 그 무엇보다 예리하고 깊이 있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쉐퍼를 추종했을 때는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많이 경계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실존주의'를 포용하는 방향이 좀 더 성경적이고, 실재하는 삶과도 더 일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깊은 영역까지 들어가면 충돌하는 지점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늘 경계선 위에서 중도를 고민하던 치열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풋내기 시절에는 그의 사상을 재단하기 바쁘고, 옳으냐, 그르냐 평가질하고 판단하기 쉽상이었으나 세상 만사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의 치열한 고민의 지점이 인간이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진리'에 가까운 지점일 지도 모르겠다는 고민도 든다.)

 

 

그래서 , 기존의 기독교적 용어인 '죄' , '심판' , '구원' 등을 실존주의 도움을 받아서 , '소외' , '단절' , '치유' 등의 용어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했다나?

 

그의 훌륭한 점은 내면 깊은 곳의 영적 공허로 괴로워 하는 지성인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세상과 맞닿은 신학을 하려고 했던 현실 지향적인 신학자.

(그러다 보니 많은 무신론적 철학자들도 이례적으로 기독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를 존경했었다.)

 

-> 올바른 신앙 고백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며 교회 안을 향한 신학을 지향했던 칼 바르트와 대조적으로 폴 틸리히의 신학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언어를 끝까지 고민하는 교회 밖을 향한 신학이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는 정말 다양한 개념들을 창조해 낸 신학자인데 , 새로운 용어들만 열거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원리'  '카톨릭적 내용' 이라는 개념이 꽤나 신선했는데 ,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잡아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라는 그의 주장은 아주 신선하다.

 

진보 신학과 보수 신학의 치밀한 '균형' 을 이야기 하는 말이기도 하며 ,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 사이의 치밀한 '균형' 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 워낙 논란이 많기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상당히 그럴싸한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하지만 , 우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가 일본을 다녀온 후 , 불교 속에 나타나는 신적 계시에 주목하는 가운데 ,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계기가 있었다는 말을 보면, 경계선상의 넘어서는 안될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다.

 

이 신학자는 글로 표현하기가 좀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워낙 창조적인 사역을 많이 했던 사람인지라 , 그저 각자가 공부하며 알아가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일단 , 우리의 절대적 기준인 '성경' .. 그리고 그 '성경' 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 을 기억하면서 , 이와 같은 '신학' 들을 알아 가되 , '신학'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이와 같은 영역들을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의 이론의 문제점을 논하기에 앞서서 ,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 '세상과 맞닿는 신학' , '세상 속에 녹아드는 신학' 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알면 알수록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심을 잃지 말되(즉 , 우리가 지닌 절대적 기준을 무시하지 말되) , 너무 완고하게 굳어져서 , 독단적이고 앞뒤가 꽉꽉 막힌 사람은 되지 말자.(하나님의 성품을 잃지 말자.).

 

그가 말했던 프로테스탄트 원리 , 카톨릭적 내용의 오묘한 조화를 떠올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단단히 각오하고 이 책을 펴길 바란다.  

 

참고로 현재 대구 시온성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남성민 목사님이 뉴스 엔조이에 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 관련한 서평 쓰신 글이 있는데 참 좋다. (꼭 가서 읽어보자. 해당 내용을 잠시 발췌해 본다.)

(2019.1.15에 올린 글)

 

틸리히는 <문화의 신학>의 마지막 글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에서,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문화적 형식으로 계시적 진리를 현대인들에게 전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책임을 현대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올바른 제시 방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틸리히의 의도는 결국 그것을 하자는 것이고, <문화의 신학>이 보여 주는 모든 작업은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이 기독교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시된 기독교 메시지, 제시된 복음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결단 문제이고, 또 찬성하도록 결단케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일 것입니다.9) 인간의 열심,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소통함에 있어서, 인간 능력의 한계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힘써야 할 노력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오늘날의 부흥주의적 신학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뉴스앤조이] 한국의 지성들은 왜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없을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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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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