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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총선을 앞두고 정청래 의원이 최고위원이던 당시, 주승용 의원에게 한 공갈 발언이 문제가 됐다.

당시 주승용 의원은 최고위언을 사퇴하겠다고 협박하며 문재인의 당대표 퇴진을 수시로 요구했다.

정청래 의원이 사석에서 정말로 사퇴할 거냐고 물어봤단다. 그랬더니 "내가 미쳤냐.

 

최고위원 되려고 얼마나 돈을 많이 썼는데 사퇴를 하냐?"고 했단다. 정청래 의원의 공갈 발언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공갈한 사람이 더 나쁘지 '왜 공갈치느냐'고 한 정청래 의원이 더 나쁜가? 사실 '공갈'이라는 용어는 사전에도 등재된 표준어다.

 

 

 

​다만 '공갈하다'가 표준어이고 '공갈치다'는 그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데, 소위 진보언론의 사설에서 '언어의 품격'을 운운하며 정청래 의원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좌파 언론이 반문의원들의 비민주적이고 패권적인 계파 행동을 문제 삼는 건 본적이 없다.

소위 진보언론은 ​자신들과 신좌파 간 문화와 이념의 차이로 친노와 친문에게 가혹했던 것은 아닌지 한번 성찰의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놓고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지 비난하고 분열하자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언론이 성찰을 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할 생각이다.

그렇게 떳떳하면 한겨레신문의 하어영 기자는 <전국구>에 다시 출연해 내 비판에 반론할 것을 부탁한다.

 

언론인은 남에 대한 비판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인데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는 왜 그리도 인색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민주사회 최고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자신에 대한 비판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 대한 비판을 고깝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성찰의 기회로 삼듯이 말이다.

​정봉주 전 의원이 방송을 하는 도중 내게 이런 글귀를 보내주었다.

 

내 방송이 연대의 시작이 아니라, 더 큰 분열을 가져올까 봐 걱정했더니, 그런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독일 유대인 철학자 장 아메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들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도 공동의 과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려면 그에 대해 침묵하고 망각하는 대신 희생자와 학살자 사이에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드러내고 현실화해야 한다. 진정한 화해란 역사적 실천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현실화함으로써, 더 분명히 말하면 그것의 해결을 통해야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언론과 친노는 서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상대편으로 인해 서로가 상처받았다. 양쪽 모두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된 것이다. 이런 점이 있기에, 그저 침묵하기보다는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드러내 현실화하고 싶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다름을 인정하고 손잡고 싶어서였다.

-[왕따의 정치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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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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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는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다.

 

집단주의는 효율성을 위해 위계적으로 편성되기에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를 낳는다. ​진보언론이 보수언론 못지않게 노무현을 싫어하는 데에는 문화적 갈등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대통령은 권위로 대통령의 존재를 인식시켜줬는데, 노무현은 권위라고는 조금도 없어 진보적 언론인들에게는 우습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노사모와 신좌파는 노무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노무현이 권위적이지 않다고 해서 신좌파 시민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직장 내에서도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친노 왕따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대중과 SNS를 하거나 팟캐스트에 나오는 것조차 싫어하고 욕하는 교수들이 있다. 그 이유는 '교수의 권위를 떨어뜨려 교수들을 단체로 욕 먹인다'는 것이다.

내가 대중과 소통하느라 연구를 게을리한다면 얼마든지 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강의를 하나 면제받을 만큼 연구 실적이 많은 사람 중 하나다. ​내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치평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적 연구에 기초한 연구 결과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권위적인 문화에 젖은 사람은 내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하다. 게다가 교수 한 사람이 교수 집단 전체를 욕 먹인다는 사고는 집단주의저거 발상의 전형적인 예다.

정봉주 전 의원에 따르면, 사실 광고 효과는 정규 라디오 방송이나 TV보다 팟캐스트가 더 높다고 한다.

 

나만 해도 팟캐스트 광고를 듣고 베개, 보험, 중고 자동차 등을 구매하니 광고 효과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문화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팟캐스트에 광고하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왕따 현상은 질투심이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정봉주 전 의원은 민주당이 정청래, 표창원 두 의원을 징계한 심리에는 이들이 친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기와 질투심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에 질투하다가 좀 잘못한 게 나오니까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으로 집중 공격했다는 것이다.

​질투심이야말로 집단주의 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조차 하지 않는다.

 

(필자: 니체가 이야기했던 르상티망도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면 집단주의 문화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겠다.)

 

​김연아에게는 늘 김연아가 경쟁 대상이었다. 자기 스스로를 이기는 게 개인주의자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단주의자들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질투심이 많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집단주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집단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심리학자인 타지펠 교수의 유명한 실험연구가 있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점이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점이 몇 개인지 질문한다.

 

점이 '몇 개 이상'이라고 답하는 사람과 '몇 개 이하'라고 답하는 사람으로 그룹을 나눈다.

 

혹은 그림을 두 개 보여주고 어떤 그림을 더 좋아하는가에 따라 그룹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 다음 실험참가자들에게 상대 집단의 구성원과 자기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 평가를 하라고 하면, 내 집단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이고 상대 집단에 대해서는 비호감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처음 만나 임의적 집단으로 나뉘었을 뿐인데도 자신이 속한 집단 사람들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집단주의 문화가 인간의 DNA에 장착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집단주의가 정치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고, 트럼프와 유럽 포퓰리스트들의 백인 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왕따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집단주의라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을 죽였지만, 지금은 ​죽이지는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친노 왕따도 언어공격과 따돌림을 통해 집단적으로 고통을 주는 아주 부도덕한 행동이다.

학교에서든 정치에서든 왕따 행위는 사회적으로 규제 받고 지탄 받아야 한다. 정부는 필요하면 법적 제재를 통해서라도 이를 엄단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주의가 왕따를 만들어내고 왕따는 이중 잣대를 사용한다. 내 집단에는 호의적으로, 그 외 집단에는 비판적으로 말이다.


진보 언론은 노무현과 문재인이 최고의 권력이었기에 언론으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충실히 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가 1등을 달리던 때, 그에게 진보언론이 휘둘렀던 무딘 칼날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2부에 계속-

-[왕따의 정치학]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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