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아니라 에밀 크레펠린이라고 하는 학자도 많다.

정신분석학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고, ​크레펠린의 정신병 분류 체계는 프로이트주의보다 먼저 이룩되었을 뿐 아니라 또 그 뒤까지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1890년 프로이트가 빈에서 개업할 무렵, 서른네 살의 내과 의사였던 크레펠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정신의학 교수직을 맡는다.

크레펠린은 재직하는 동안 여러 정신병 증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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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펠린은 레지던트들과 함께 병원에 오는 환자마다 한 장씩 카드를 만들어 증상과 1차 진단을 적어 넣고 각 카드를 '진단 상자'에 넣었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진단을 수정할 때마다 환자 카드를 상장에서 꺼내 바뀐 내용을 추가했다. ​

환자가 퇴원할 때에는 기질과 최종 진단을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카드가 수백 장이 모이자 크레펠린은 휴가를 내고 이것들을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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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어떤 진단이 부정확한지,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크레펠린은 이렇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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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증상과 진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일이 오늘날에야 특별할 것 없어 보이겠지만 크레펠린 이전에는 ​정신병을 이렇게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류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었다.

(사실 예외로 점성학자들의 작업이 있긴 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점성학자들은 의학 기록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천체의 정렬에 따라 증상을 도표로 만들어 그 상관관계를 밝혀서 진단과 치료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록 덕에 체계적 관찰보다 직관에 의존하던 의사들보다 점성학자들이 병의 진행을 오히려 더 잘 예측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점성학자가 의사보다 더 잘 맞는 약을 내어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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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체계 없이 자의적으로 진단이 내려지곤 했다.

크레펠린이 이런 자료들을 모은 까닭은 증상을 구분해 각 정신병의 특징이 되는 증상 모둠을 확인하고 병의 발전 경과를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정신병이 의학적 병인지 사회심리적 '적응' 문제인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크레펠린은 정신의학은 의학의 하위 분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홍역이나 폐결핵처럼 구분해서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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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펠린은 카드에 모은 증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아 1883년 정신의학 교과서를 출간했다.

여러 해를 거치며 여러 차례 수정한 [정신의학 개론(Compendium der Psychiatrie)]은 지금까지 나온 정신의학서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899년 6차 개정판이 나왔을 무렵에는 정신병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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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이 크레펠린의 생물학적 정신의학을 주변부로 몰아낸 20세기 중반에조차 크레펠린 체제와 프로이트 체제가 나란히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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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DSM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에는 병들을 질병 모둠에 따라 여러 범주로 나누었다.

크레펠린의 19세기 정신의학 교과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병을 설명하는 용어는 대체로 정신분석학적이었다. 그래서 ​DSM 초기 두 판에는 의학과 정신분석학 용어 체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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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