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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몇 십 년간 이탈리아에서 태양중심 모델에 관한 새로운 논란이 시작되었다.

이번 논쟁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이론의 대표적인 옹호자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입장을 둘러싼 것이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결국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이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오늘날 이는 일부 교회 관료들이 저지른 명백한 판단 착오로 인식되고 있다.

​처음에 갈릴레이의 의견은 고위 성직자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교황의 총신 치암폴리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도 일부 작용했다. 치암폴리의 권력 실추로 갈릴레이는 교황 측근의 지지를 잃었고, 결국 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유죄 선고까지 받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이 과학 대 종교, 또는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있다.

과거에는 이 논쟁과 관련된 신학적, 더 정확하게 해석학적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올바르게 조명되지 않았다. 이 논쟁에 관심을 가진 학자 상당수가 과학자나 과학 역사가였다.

고도로 복잡했던 시대에 성경 해석에 관한 논쟁의 얽히고설킨 내막을 잘모르는 사람들이 벌였다는 사실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갈릴레이와 그의 비판자들이 벌인 논쟁에서 최대 쟁점은 특정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논쟁에서 조정(accommodation)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점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1615년 1월 발표한 중요한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갈멜 수도사였던 포스카리니(Paolo Antonio Foscarini)는 <피타고라스학파와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관한 서한,Letter on the Opinion of the Pythagoreans and Copernicus>에서 태양중심 모델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포스카리니-

 

포스카리니는 그의 분석에서 어떤 새로운 성경 해석 원리를 내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방식을 제시하고 적용했다.

성경에서 ​부적절하고 부적당하다고 여겨질 만한 속성을 신이나 피조물에 부여하려면 다음 방법 중 하나 이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야 한다.

​[1] 은유나 비교, 비유의 목적을 지닌 것

[2] 우리의 고찰과 판단, 이해, 인식 등의 방식에 맞게 말한 것

[3] 서민의 생각과 보편적인 화법에 맞게 말한 것


(Blackwell, 1991, pp.94~95)

포스카리니가 말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 번째 성경 해석법인 '조정'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해석법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에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포스카리니는 그가 채택한 해석법이 아니라, 그 해석법을 적용한 성경 구절에서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포스카리니는 ​당시까지 많은 이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던 일부 구절에 조정 해석법을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지구가 정지해 있고 태양이 움직인다는 의미로 여겨지던 구절에 대한 것이었다. 포스카리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경은 우리의 이해 방식과 형세에 따라 우리를 고려해서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내용이 우리와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인간의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고방식에 맞게 묘사된다. 즉 지구는 멈춰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이 그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를 생각해서 평범하고 보편적인 말투로 얘기한다. 우리에게는 정말 지구가 한가운데 단단히 고정된 상태에서 태양이 그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 그 반대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Blackwell, 1991, p.95)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더욱 신봉하게 된 갈릴레이 역시 포스카리니와 비슷한 성경 해석법을 채택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데 갈릴레이 비판자들은 성경의 몇몇 구절이 갈릴레이의 의견과 반대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10장 12~13절에는 여호수아의 명령으로 태양이 멈췄다고 하는데, 바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한 것이 아닌가?

 

갈릴레이는 <대공비 크리스티나께 드리는 서한, Letter to the Grand Contess Christina>에서 그와 같은 표현은 단지 보편적 화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여호수아가 천체역학의 복잡한 원리를 알았을리 없고, 결국 그는 '조정된' 화법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두 가지 근거로 공식적인 지탄을 받았다.

[1] 성경은 '단어들의 올바른 의미'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직해적인 해석법이 힘을 얻으면서 포스카리니가 택했던 조정된 해석법은 거부되었다.

그런데도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계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해석 방법이라 문제의 성구에 어느 쪽이 적합한가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졌다.

[2] 성경은 '교황 성하와 박학한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과 이해에 따라' 해석해야 했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 중 포스카리니의 해석을 따른 이가 없었고, 따라서 그 해석은 새로운 것이므로 일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포스카리니와 갈릴레이의 견해는 기독교 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주장인 만큼 거부해야 했다.

두 번째 논점은 매우 중요하다. 향후 오랫동안 계속된 프로테스탄티즘과 로마가톨릭 간의 치열한 논쟁의 맥락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새롭게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정통 기독교의 회복인지를 따졌던 이 논쟁은 17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 때문에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가톨릭 전통의 불변성이라는 개념은 로마가톨릭이 프로테스탄티즘에 맞서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로마가톨릭을 옹호하는 대표적 인물인 보쉬에(Jacques-Benigne Bossuet, 1627~1704)가 1688년 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교회의 가르침은 언제나 한결같다....복음은 이전의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과거에 언급되지 않았더너 뭔가가 신앙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이단, 즉 정통 교의에서 벗어난 것이다. 거짓된 교의는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언제 나타나든지 즉시 알아볼 수 있다. 새로운 개념이니까..... (Chadwick, 1957, p.20)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러한 주장들은 널리 확산되었고, 포스카리니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제안한 해석법은 전례가 없었고 그 이유만으로도 옳지 않았다.

​이처럼 성경 해석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은 복잡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극도로 정치화된 일촉즉발의 시대에 어떤 새로운 접근법이라도 용인했다가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적법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해 당시의 신학 논쟁은 크게 편향되어 있었다.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이 '바뀌었음'을 인정한다면 필시 프로테스탄티즘 핵심 교의, 즉 이제까지 로마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것'으로 여겨 거부해왔던 가르침을 정통 교의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갈릴레이의 견해가 저항에 부딪힌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신학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특정 성구에 대한 갈릴레이의 해석을 수용한다면 가톨릭의 프로테스탄티즘 비판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특정 성구에 새로운, 새롭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도입했다는 주장에 기초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갈릴레이의 주장이 배척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간단한 분석을 통해 갈릴레이 논쟁의 배경에 성경의 해석과 과거 교의의 전승을 두고 갈등을 빚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교회의 관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행히도 갈릴레이는 이 논쟁의 십자포화와 암류에 휩쓸렸던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과학과 종교] 에서 발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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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5월 발표된 코페르니쿠스의 논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모델은 17세기 초반 20여 년간 케플러의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에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중세 신학자들은 '지구중심설'이라고도 불리는 과거의 모델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구중심설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구를 읽는 데 익숙한 나머지 새로운 관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구 중심설=천동설)
 

따라서 성경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다룬 최초의 글로 인정받은 레티쿠스(G. J. Rheticus)의 <성경과 지구의 운행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Holy Scripture and the Motion of the Earth>과 같이 초기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변론에서는 두 가지 쟁점을 다뤄야 했다.

[1]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결론으로 이끌 관측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2] 오랫동안 지구중심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던 성경과 이 견해가 사실은 부합한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관측 증거는 나중에 케플러가 수정한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이 모델을 본다면? 이 모델에 따라 지구중심의 우주와 완전히 결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태양중심설이 부상하면서 신학자들은 일부 성구의 해석 방법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법은 크게 세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방법을 살펴보고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자.

[1] 성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직해적(literal) 접근법이 있다. 창세기 1장을 직해적으로 해석하면 창조가 하루를 24시간으로 하여 6일에 걸쳐 일어난 것이 된다.

[2] 비직해적, 즉 우의적(allegorical) 접근법으로 성경의 어떤 부분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적절치 않은 문체로 쓰였음을 지적한다. 중세에는 성경에서 세 가지 비직해적 의미가 인정되었다. 이는 16세기의 많은 학자들이 상당히 정교한 표현으로 여겼던 것들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의 도입부는 시적이거나 우의적인 표현으로서, 여기서 신학과 윤리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문자 그대로 지구의 기원을 전달하는 역사적 설명은 아니다.

[3] 조정(accommodation)의 개념에 입각한 접근법이다. 이는 성경의 해석과 자연과학의 상호작용 측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접근법이다. 여기서는 계시(revelation)가 문화 및 인류학적 조건이 부여된 방법과 형태로 일어나 그 결과를 적절히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유대교와 그 뒤에 이어진 기독교 신학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 교부 시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16세기에 와서야 완성된 모습을 갖췄다.

 

이 관점에 따르면 창세기 도입부에 사용된 언어와 이미지는 초기 독자들의 문화적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초기 독자에게 맞게 '조정된' 형태와 용어 속에 표현된 핵심 개념을 추출하여 해석해야 한다.

세 번째 접근법은 16~17세기에 신학과 천문학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가로 유명한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자연과학이 인정받고 발전하는 데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공헌했다.

(장 칼뱅)


[1]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2]앞서 설명한 '조정'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과학 연구 발전을 가로막던 큰 장애물을 없앴다.

그의 첫 번째 ​공헌은 특히 창조의 질서를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물리적 세상과 인체 모두 신의 지혜와 개성을 입증하는 증거다. 따라서 ​칼뱅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장려했다.

 

자연세계를 신학보다 더 깊이 탐구하면 창조의 질서와 창조주의 지혜를 밝힐 증거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뱅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새로운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칼뱅이 두 번째로 크게 기여한 것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성경 직해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성경의 주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교과서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신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능력에 맞추어 '적절히 조정'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계시가 일어나려면 신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인간이 한정된 능력으로 수용할 수 있게 단계를 낮춘, 즉 '조정된' 신의 모습이 계시를 통해 전달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처럼 신 역시 인간의 눈높이에 맞게 스스로 굽히고 낮춘다.


​계시는 신이 보여주는 겸손의 행위인 것이다.

과학 이론화에 관한 이 두가지 관점은 특히 17세기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의 저술가 라이트(Edward Wright)는 길버트(William Gilbert)가 쓴 자기학 관련 논문 (1600)의 서문에서 성경 직해주의자들에 맞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다.

​성경은 물리학을 다룬 책이 아니며, 성경의 화법은 '유모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보통 사람의 이해력과 말투에 맞게 조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Hooykaas, 1972, pp.122~123).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칼뱅에서 비롯된 것인만큼 칼뱅은 자연과학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과학과 종교] 에서 발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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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첨예한 요즘 분위기에서 둘 간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책입니다. 과학사에서 잘못 알려진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보기도 하고, 맥그라스 특유의 논리를 바탕으로 섯부른 이분법적 접근이나 굴드 식 NOMA 개념을 거부하는 책입니다. 평소 맥그라스의 저서를 좋아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책이 될 것이며 이 책을 입문서로 시작해 개론서들을 찾아 읽으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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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근대에 인류가 세 가지 '자기애적 상처'(narcissistic wound)를 입었고, 각각의 상처는 인간의 자긍심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단언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퍼옴)​


첫 번째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 있음을 알려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입힌 상처였다.

두 번째 상처는 심지어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지 않음을 입증한 다윈주의였다.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한정된 영역에서도 주인이 아님을 밝히는 프로이트 본인이 입힌 상처라고 그는 당당히 밝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혁명적 전환은 전자가 가져온 고통과 상처를 가중시키면서 인류의 위치와 중요성에 관한 철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프로이트의 견해가 갖는 종교적 의미는 이 책에서 나중에 다시 조명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상처' 중 첫 번째인 코페르니쿠스 혁명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세계관을 뒷밤침하는 일련의 확립된 신념들이 존재한다.

중세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태양과 다른 천체(달, 행성 등)가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는 믿음이었다. '지구 중심적' 우주관은 자명한 사실로 간주되었다.

성경도 이러한 믿음을 근간으로 해석했다 .많은 성경의 해석에 지구중심적 가정이 적용되었다.

현재 사용 중인 언어 대부분도 지구중심적 세계관을 여전히 반영한다.

예를 들어 현대 영어에서도 '해가 오전 7시 33분에 떠올랐다.'고 말하는데, 여기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태양계의 지구중심 모델이 참이냐 거짓이냐는 일상생활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중세 초기에 가장 널리 받아들였던 우주관은 2세기 상반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Claudios Ptolemaeos)가 구상한 것이었다. 그는 <알마게스트,Almagest>에서 달과 행성의 운행에 관한 기존의 개념을 집대성하면서 다음 가정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

2. 모든 천체는 원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

3. 회전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그 중심 역시 또 다른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형태를 띤다. 본래 히파르코스(Hipparchos)가 주창했던 이 중심론은 '주전원'(epicycle), 즉 원 운동 위에 원 운동이 부여된다는 개념에 근거한다.

행성과 항성의 움직임이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관측되면서 이론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주전원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모순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무렵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이 모델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에 있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대체한단 말인가?

16세기 들어 지구중심 모델은 태양 중심 모델, 즉 태양을 중심에 놓고 지구는 그 주위를 도는 많은 행성 중 하나라고 보는 관점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는 기존 모델과 완전한 결별을 뜻하며, 지난 1000년 간 인류의 실재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임이 분명하다. 이 사고의 전환을 흔히 '코페르니쿠스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라 부르며, 이것이 자리잡기까지 세 명의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폴란드 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동심원을 그리며 회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 뿐 아니라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퍼옴)


그러므로 항성과 행성이 움직이는 듯 보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조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모델은 차츰 버거워진 프톨레마이오스 모데렝 비해 단순하고 정밀하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모든 관측 데이터를 설명하지는 못했고, 이 이론을 받아들이려면 수정이 필요했다.

덴마크 학자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는 코펜하겐 인근 섬의 관측소에 있으면서 1576년부터 1592년까지 행성 운동에 관한 일련의 정밀 관측을 실시했다.

이 관측 자료는 케플러(Johann Kepler, 1571~1630)가 수정한 태양계 모델의 토대가 되었는데, 그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가 사망한 뒤 브라헤가 보헤미아로 이주할 때까지 브라헤의 조수로 일했다.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는 행성인 화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원형 궤도를 그리며 돈다고 가정하는 코페르니쿠스 모델로는 실제 관측된 화성의 운행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09년 케플러는 화성 운행의 일반 원칙 두 가지를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1] 화성이 타원형 궤도로 회전하며, 이 때 태양은 두 초점 중 하나다

[2] 화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선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1619년경 그는 이 두 원칙을 나머지 행성에 확대 적용해 세 번째 원칙을 밝혀냈다.

[3] 행성의 공전 주기(행성이 태양 주위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은 행성과 태양 간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케플러의 모델은 코페르니쿠스의 개념을 상당히 수정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획기적인 새 모델은 개념이 정밀하고 단순한데도 행성의 궤도가 원형이라는 잘못된 가정 때문에 관측 데이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이 가정은 유클리드 고전 기하학에서 유래한 듯하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 고전 철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원은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형태지만 타원은 왜곡된 형태였다.  왜 자연이 기형적인 기하학 구조를 사용하겠는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과학과 종교] 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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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설명하는 수학의 힘을 사람들이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은 뉴턴의 연구 덕분이었다.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의 친숙한 운동(대포알의 궤도)부터 멀리 떨어진 하늘의 운동(행성궤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자연현상을 단일한 수학 공식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단순했다!

너무나 우아했다!

뉴턴이 과학계 최초의 슈퍼스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극적 돌파구는 성경적 통찰을 통해 열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부패의 영역인 지구와 불변하고 영원한 곳으로 여겨지던 하늘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둘이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지구상에서 작동하는 물리학의 원리를 별과 행성 같은 하늘의 천체들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사실상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듯 유서 깊은 지적 전통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의 창조 개념을 숙고한 결과였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으므로 모든 자연현상이 단일한 기본 계획을 따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주를 설계한 단일정신이 한 묶음의 기본 원리를 활용해 연관된 현상들을 다스릴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뉴턴은 그러한 생각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했고, 결국 하늘이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주는 통합된 코스모스다. 우주 어디서나 동일한 수학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뉴턴은 신학을 과학 안에 엮어 넣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 신학을 옹호했다.

그는 과학의 '본업'이 기계적 인과관계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 '기계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 제 1원인', 곧 인격적 창조주에게까지 마침내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턴은 이러한 추론의 몇가지 사례를 제시했는데, 태양계의 절묘한 균형을 설명하려면 "맹목적이거나 우연적인" 자연의 원인만으로는 부족하고, "역학과 기하학에 대단히 능통한" 지적 원인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뉴턴이 볼 때는 그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물인 중력 개념조차도 하나님의 증거였다.

중력은 질량과 전충성(물질이 공간을 메우는 성질) 같은 물질의 고유한 특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뉴턴은 중력을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사실 하나님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절대시간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속이었다. 절대공간은 "무한부터 무한에 이르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였다.

뉴턴 물리학이 본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계몽주의 이론가들이 손을 썼고, 뉴턴의 새로운 과학도 세속화의 부식 과정을 거쳤다. 볼테르는 뉴턴의 연구 결과를 유럽 대륙에 소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성경적 시각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대신에 그는 뉴턴의 물리학을 끌어다 계몽주의의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했다.

뉴턴의 중력 개념이 유물론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우주를 붙드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라 물질 안에 내재하는 힘에 불과했다.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논리적 범주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의 이론은 결국 그가 반박하려 했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흡수되었다.

얄궂게도, 유물론적 세계관은 '뉴턴 세계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뉴턴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세계관인데 말이다. 이 세계관은 우주를 변하지 않는 수학 법칙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로 그렸다. 수학적 모델은 과학뿐 아니라 사회, 정치, 도덕에도 적용되었다. 너무나 간단해 보였다. 갈릴레이는 경사면에서 공이 굴러 내려오는 것을 관찰한 끝에 움직이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를 밝히는 수학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은 떨어지는 물체(일설에 따르면 사과)를 관찰하여 모든 물체에 작용하는 수학적 중력 법칙을 계산해 냈다.

동일한 방법론을 사회과학에 적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몇 가지 단순한 사례를 관찰하면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보편법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역사가에 따르면, 18세기에는 "보편적 물리학의 관점에서 만물이 설명될 때가 멀지 않았다고 많은 이들이 믿었다."

물리학에서 통했던 수학적 방법이 다른 모둔 분야에서도 통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뿐 아니라 인간 본성을 지배할 수단까지 확보하게 될 터였다.

- [세이빙 다빈치]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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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행성이 원궤도로 돈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이 생각을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하늘이 '완전'하고 원이 '완전한' 형태이므로 천체는 원운동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추론했다.

(그리스인들이 과학에서 연역법을 사용한 사례)

 

케플러는 2000년 동안 지배력을 행사했던 원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었을까?

​화성의 공전궤도를 그리다가 어려움을 겪은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케플러가 관찰에 근거하여 내놓았던 가장 정확한 원은 약간 기우뚱한 형태였다. 그가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었다면 그 정도의 사소한 오차는 무시했을 것이다.

원래 물리적 대상은 기하학적 이상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독실한 루터파 교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선이 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정확한 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원이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것임이 분명했다. 이상적인 원에서 제멋대로 벗어난 것으로 대충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신학적 확신에 힘입어 케플러는 6년에 걸친 지적 분투와 수천 쪽이 넘는 과학적 계산 끝에 마침내 타원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나중에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사소한 오차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고마워했다.

그것이 그가 최대의 과학적 돌파구를 열도록 박차를 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주된 목표가 "하나님이 부과하시고 수학의 언어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합리적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릴레이도 케플러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수학적 구조로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확신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갈릴레이 논쟁'의 핵심에 바로 이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흔히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옹호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당시에 태양중심설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측정 도구로만 쓴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태양중심설과 지구중심설(천동설)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만큼 경험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천문학의 주된 실용적 용도는 항해였는데, 두 체계 모두 항해에 활용하기에 무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들어맞기만 하면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사용할 의향이 있었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염려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논쟁에 말려든 이유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유용한 측정 도구일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관건은 수학적 진리의 지위였다. 수학은 물리계에서 무엇이 옳은지 말해 주는가? 이것은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었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주된 적수는 교회 사람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대학교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 수학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핵심 특징이 양이 아니라 뜨거움과 차가움, 젖음과 마름,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질'이라고 보았다. 당시 대학에서는 수학의 지위가 물리학보다 훨씬 낮았다. 수학자 따위가 물리학자에게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라 마라 지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갈릴레이의 적수였던 피사 대학 철학교수의 말에서 당시의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자연은 사실을 수학적 추론의 방법으로 입증하려 하는 이들은 진리에서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수학적 논증으로 자연의 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두 과학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강연 시간에 이 인용문을 읽어 주면 청중들은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오늘날에는 수학 공식을 써서 자연을 설명하는 일이 과학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 수학의 언어로 자연의 책을 쓰셨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도발적인 언사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갈릴레이 이야기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갈등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올바른 자연철학이 무엇인가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벌인 싸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이냐, 갈릴레오의 양이냐?

갈릴레이의 승리는 곧 자연이 수학적 청사진 위에 세워졌다는 생각의 승리였다.

- [세이빙 다빈치]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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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 대하여

 

 

 

책 제목: 과학의 영혼

 

저자: 낸시 피어시&찰스 택스턴

 

109~113page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전통들은 서로 혼합되어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일종의 하이브리드(hybrid)를 창출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뉴턴(1642~1727)은 얼핏 보기에도 기계론자처럼 보이므로,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물리학을 과학에 대한 기계론적 접근의 전형으로 여긴다. 그의 저작 또한 이런 추정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했다.

 

 

 

뉴턴은 신을 위대한 기술자로 이해했기에, 행성체계의 창조자는 역학과 기하학에 능숙한 존재임이 틀림 없다고 기술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the law of universal gravitation)은 지구상과 천체상의 물체에 동일한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지구상의 물체와 전체상의 물체가 서로 대조되는 물질로 구성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빛에 대한 실험으로 빛은 다양한 중간 매개체를 통과했을 때에도 역학의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는 빛을 영적 상징이라고 이해하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주장을 뒤엎은 것이었다. 그는 빛을 입자들의 흐름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보일의 화학에 관한 견해와 유사한 것이었다.

 

 

 

 

더욱이 뉴턴은 신플라톤주의의 세계영혼(World Soul)에 관한 주장에 강력하게 반박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신으로 간주될 때 범신론에 가까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네럴 스콜리움](General Scholium)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존재는 세상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린다. … 그리고 신성은, 신을 세상의 영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상처럼, 신 자신의 몸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종들에 대한 지배력이다.

 

 

 

결과적으로 볼테르와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뉴턴의 업적을 전혀 다른 기계론적 세계관을 장려하는데 사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적 창조주를 우주라는 태엽을 감은 후에 그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이신론적 시계공으로 축소해 버렸다. 경제학자 존 키네스(John Maynard Keynes)의 말을 빌리면, 뉴턴은 우리로 하여금 냉철하고 무미건조한 이성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친.. 현대과학의 처음이자 가장 뛰어난 과학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뉴턴 자신은 이신론자도 합리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기계적인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기계적인 세계 이상의 것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지적 창조주였다.

 

 

[제너럴 스콜리움]이란 책에서 뉴턴은 가장 아름다운 체계인 태양과 행성, 그리고 혜성은 오직 지적이고 능력이 가득한 존재의 지혜와 지배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광학[Optics]에서는 과학의 임무를 결코 기계적이지 않은 첫째 원인에 도달할 때까지 원인을 결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뉴턴이 생각하기에 과학의 가장 유용한 혜택은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것이었다.

 

 

 

과학은 우리에게 첫째 원인이 무엇인지, 그가 무슨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받아 누리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서로를 향한 우리의 의무만이 아니라 그를 향한 우리의 의무도 자연의 빛에 의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뉴턴이 이룩한 대부분의 과학적 업적의 동기들이 변증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그가 살던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로저 코테스(Roger Cotes)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이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대한 가장 안전한 보호책이 될 것이며, 불경건한 무리들에 대항하는 미사일이 될 것이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뉴턴은 기계론자였는가? 최근 뉴턴의 철학적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많은 양의 글들이 집필되었다. 키네스는 뉴턴의 필사본을 연구한 후, 뉴턴에 대한 표준적 견해와는 달리, 뉴턴이 상징과 마술에 매혹되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왜 내가 뉴턴을 마술사라고 부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 우주 안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수수께끼로 보았는데, 이는 순수한 사고를 어떤 증거에 적용했을 때 비로소 해독될 수 있는 비밀이었고, 신이 세상에 내리신 어떤 신비로운 실마리였다. …. 그는 우주를 전능자가 만들어 놓은 암호문으로 간주했다.

 

 

 

키네스는 뉴턴이 이성의 시대의 첫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마술사였다고 결론지었다. 역사학자 라탄시(P. M. Rattansi)도 비슷한 맥락에서 뉴턴을 신플라톤주의의 전통 위에 올려놓았다. 뉴턴은 신플라톤주의적 전통의 능동적 원리를 채용하여, 이를 이 세상에서 신적 행위의 통로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중력을 능동적 원리의 가장 중요한 실례로 간주했다. 따라서 라탄시는 힘의 개념이 뉴턴에게는 지각의 세계에서 신의 현시로 보였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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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

 

케플러에 대한 오해

 

 

 

책 제목: 과학의 영혼

 

100page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처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른 중요한 천문학자였다. 케플러 또한 피타고라스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저서는 행성의 운행체계가 일련의 3차원적인 기하학적 공식들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비록 나중에 이런 시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이는 숫자와 기하학이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피타고라스적 신념을 케플러가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커니는 케플러가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기하학을 기초로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수학의 정확한 묘사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신뢰는 케플러로 하여금 여러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의 궤도라는 사실을 밝혀내도록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케플러도 부분적으로 태양중심적 천문학에 매료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태양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을 신이 세상을 현존하는 사실을 상징하는 물리적 위치로 생각하였다.

 

그는 태양만이 가장 고귀한 신에 어울리는 것으로, 신은 이를 자신의 물질적 거처로 삼고 기뻐하며 천사와 함께 거한다. 단지 태양만이 그 위용과 능력에 근거해 그 주어진 목적과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며 신의 거처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 고 보았다.

 

 

 

 

길버트(Gilbert)의 자기학(magnetism)에 관한 저술들에 영향을 받은 케플러는 지구를 거대한 자기장(magnetic field)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력(magnetic attraction)의 개념을 행성체계 전체에 적용했는데, 이를 통해 태양을 거대한 중심 자석(great central magnet)으로 보았다.

 

이는 후대에 뉴턴이 주장한 중력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었다. 물리학자 제럴드 홀튼(Gerald Holton)은 케플러의 체계에서 태양은 3가지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태양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수학적 중심부이다.

 

둘째, 태양은 행성들을 그들의 궤도 내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힘이 작용하는 물리적 중심부이다.

 

셋째, 태양은 신의 신전 역할을 담당하는 형이상학적 중심부이다. 홀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3가지 역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과학적 업적은 그의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 입장들과 분리된 채로 이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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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오해

  1. 책 제목: 과학의 영혼

  2. 저자: 낸시 피어시&찰스 택스턴

    52page~54page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에게 기독교가 근대과학의 등장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서 놀라움과 불신의 반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정은 아직 학교로부터 대중문화나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가지 못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하여 내가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회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통된 오해들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종교적인 논쟁들은 교회가 과학을 반대한다고 말하며 자주 사실을 과장해 왔다. 특히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개신교 교회의 모든 교단들, 즉 루터란, 칼빈주의자, 성공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반성경적이라고 매도하는데 경쟁적이었다.”는 전면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사실은 루터가 [탁상담화](Table Talk)에서, 그리고 칼빈이 행한 설교에서 여기 저기 언급하였던 사실을 제외하고는, 종교 개혁자들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논쟁 자체를 무시하였다. 더군다나 이러한 언급들의 진위여부마저도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루터의 경우, [탁상담화]는 이 담화의 참여자들의 기억에 의해 그 담화가 있은 뒤 몇 년 후에야 기록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루터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얕잡아 보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한다.

 

화이트는 칼빈의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칼빈은 시편93:1을 언급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대하는데 앞장섰으며,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위에 올려놓겠는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칼빈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며, 발행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도 코페르니쿠스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

 

진실은 신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답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의 가치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치명타를 입혔던 것처럼 기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지위를 우주의 중심적 무대라는 고상한 위치에서 강등시켰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역사학자 존 랜달(John Herman Rendall) [현대 지성의 성립](The Making of Modern Mind)이라는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인류를 우주의 목적이며 그 중심적 존재라는 교만한 위치에서 끌어내려 그를 끝없는 우주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작은 행성계의 자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고 주장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맞서서 자신들이 지닌 안정된 우주론이 무너지지 않도록 저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헌들은 이러한 묘사를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채택된 중세의 우주론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우주론에서 우주의 중심이 곧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악마의 장소였다.

 

우주의 중심에 지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지구, 그리고 천체의 순서로 점차적으로 더 고상한 행성들이 자리 잡았다.

 

 

 

사물에 대한 이런 착안을 통해 볼 때, 인류의 중심적 위치는 보완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위치의 상실 또는 강등(demotion)도 아니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기에 그의 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주장은 그의 이론이 인류를 원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렸다는 것이었다.

 

중세 우주론에서 인간의 의미는 지구의 중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호의(regard)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 가치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협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견해에 불과하다. 이 견해는 우리 시대의 고뇌(angst)를 역사 속으로 되돌려 읽고 있는 것이다

 

96page ~99page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1543)의 작품들은 과학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초석과도 같았다. 그의 태양중심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메우스로부터 주어진 지구 중심적 천문학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록에 의하면, 이는 어떤 실험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커니는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을 종교적 회심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비물질적인 수학적 개념이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플라톤 *

 

 

많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상징이 태양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태양의 빛과 따스함이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지구상에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는 태양신비주의(sun mysticism)와 관련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가르쳤지만,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태양의 위치가 마땅히 신적 상징으로서의 위엄과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대한 이런 신비주의적 견해가 코페르니쿠스에게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열어준 것처럼 보인다.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확실히 신플라톤주의적 태양신비주의의 흔적을 담고 있다

 

모든 자리의 한복판에 태양이 왕자에 자리한다. 가장 아름다운 이 신전에서 어떤 위치가 이 발광체로 하여금 이보다 더 훌륭히, 한꺼번에 모두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그가 등불로, 정신으로,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로 불리는 것이 옳다. …. 이제 태양은 왕적 보좌에 앉아서 자기 주위를 맴도는 그의 자녀들인 행성들을 다스린다.

 

같은 인용문에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가시적 신’(the Visible God)으로 지칭하는 문헌을 인용한다.

 

신플라톤주의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적 행성체계론에 박차를 가했는지 또는 이것이 그에게 과거의 지구 중심적 체계에 대항하여 자신의 새로운 체계를 지지할 수 있는 논증자료들(당장 사용할 만한)만을 제공했는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확실히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동시대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데 있어서 신플라톤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6세기 전반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하면서도 실험적인 반대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지구가 어둡고, 비활동적이며, 무겁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듯이) 움직이지 않는 질량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천상의 별들은 빛의 접촉점이므로 빛과 불로 구성된 물체들이 그 주된 요소들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관찰에 대항해 지구가 실제로 별들과 같은 천상체로서 태양주의를 궤도를 따라 회전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태양 중심론(heliocentric theory)은 상식에 근거한 또 다른 반대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태양 중심론이 맞다면, 공중에 던져진 물체가 지구로 다시 떨어질 때는 처음 던져진 곳과 약간이라도 다른 곳에 착륙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물체가 공중에 머무르는 동안 지구가 회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신기하게도 유효한 이론이었다.

 

지구의 회전은 코리올리스 효과(Coriolis forces)를 가져오는데, 이는 푸코의 진자(Foucault pendulum)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 덴마크의 저명한 천문학자 타이코 브라헤(Tycho Brahe)는 대포알이 지구의 회전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쏘아 올려질 경우, 이 대포알은 더 멀리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구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운동량만큼의 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도가 더해진다.). 또 다른 유효한 주장에 대해서도,, 갈릴레오가 초기 형태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해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8장을 참고할 것).

 

또한 반대자들은 만약 지구가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면, 하늘에 박힌 별들도 그 궤도의 반대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위치가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유효한 주장이었지만, 그 차이가 너무 작아서 1838년까지는 관측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는 이처럼 수량적이며 논리적이었는데 반해, 당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위한 실증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역사학자 홀(A. R. Hall)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천상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사실,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주장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모두 철학적이었다. 커니는 신플라톤주의적 가정(assumption)에 대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공리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적절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가정을 근거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또한 동일한 이유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에 불과했다.”

 

이런 주장들을 넘어 코페르니쿠스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은 자신의 체계가 수학적으로 더 간단하다는 것 뿐이었다. 이는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주전원(epicycle)의 수를 80에서 34로 줄일 수 있었다. 이는 괄목할 만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수학이 자연의 진리에 대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호소력 있는 주장이었다.

 

 

실증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모든 과학적 진보를 종교와 신비주의를 극복한 합리성의 승리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종교와 신비주의는 분명히 코페르니쿠스의 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천문학 이론을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교리와 연관시키는 것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의 많은 추종자들 역시 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2장의 조르다노 부르노의 견해를 참고할 것)

 

더군다나 태양중심설에 대한 반대는 단지 교리와 반계몽주의(obscurantism)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유는 당시 지배적인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에 근거한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백년 후 갈릴레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은 신플라톤주의 전통 바깥에 머물렀던 과학자들에 의해 부인되었고, 뉴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을 위한 물리적 구조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논쟁은 전적으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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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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