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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과학 사이의 논쟁들]

 

갈릴레오 논쟁에 대한 오해

 

 

 

책 제목: 과학의 영혼

 

54page ~58pag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회와 개별적 신자들을 분리하게 되면 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지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근대 초기의 몇몇 과학자들은 개인적으로는 종교적 신념을 굳게 지킨 반면, 정치적 차원에서는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종교적 탄압에 대한 교과서적 사건이 바로 갈릴레오의 경우이다. 이 사건에 대한 표준적 해설은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 [인간의 등정](The Ascent of Man)이라는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갈릴레오를 가톨릭의 종교재판법정(the Inquisition)에 기소된 선과 악 사이의 단순한 대결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역사학자 마틴 루드윅(Martin Rudwick)은 이 시리즈를 과학자 브로노우스키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과학적 승리주의’(scientific triumphalism)의 한 예라고 비난했다. 루드윅은 브로노우스키가 다룬 갈릴레오의 재판은 수집 가능한 역사적 연구 결과를 무시하는 의도적 선택에서 비롯된 모조품(travesty)이었다고 주장한다.

 

 

 

 

 

루드윅이 언급한 역사적 연구 결과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단순한 대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관련된 증거물들을 가리킨다.

 

갈릴레오에 관한 현대 저작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갈릴레오의 범죄](The Crime of Galileo)라는 책의 저자인 조지오 드산티야나(Giorgio de Santillana)는 갈릴레오 사건이 한 유명한 과학자와 종교적 교리 사이의 대결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교회내 지성인들의 다수파는 갈릴레오를 지지한 반면, 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는 세속적 견해, 즉 대학의 철학자들로부터 나왔다고 그는 지적한다.

 

갈릴레오를 로마로 귀한케 해 종교재판법정의 질문에 답하도록 명령했던 교황조차도 한 때 갈릴레오의 지지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사실, 대체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과학으로서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하여 어떤 논쟁도 없었다. 다만 교회의 반론은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위시한 모든 형이상학적, 영적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회적 결과들을 논박했던 것과 관련된다.

 

과학철학자 필립 프랭크(Philipp Frank)가 설명하듯이,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한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이유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법률의 형성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신의 최상의 본질을 충족시키기 위한 윤리적 책무감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객체(object) 또한 그 이상적 본질, 즉 목적이나 형태를 충족하기 위한 내적 몸부림에 의해 움직이는 유사 유기체(a quasi-organic entity)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객체는 밀고 당기는 기계적 힘보다는 윤리적 몸부림에 더 가까운 내재적 경향들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런 내재적 경향들 중 하나가 바로 우주에 있어서 자연적 위치를 향하려는 충동(impulse)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불꽃은 위로 올라가고 바위는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모든 객체가 자연적 위치를 향하여 몸부림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리적 위치는 고상함의 정도와 관련된 것으로, 우주의 중심은 가장 천한 것이고 천상의 영역은 가장 고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연구된 물리적 위계질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물리적 세계에서의 질서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을 포기하는 것에 저항하였던 이유는 이들이 도덕적이고 사회적 삶의 전체적 비전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연관성이 사라지게 될 경우, 성직자들은 도덕성 자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갈릴레오는 그릇되고 위험한 교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메리 헤스(Mary Hesse)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새롭고 위험한 견해들은 그 당시에 교리적으로 이들을 지지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 없이주창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이용 가능한 증거가 이론을 뒷받침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은 비과학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었다. 헤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들(위험한 견해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든 근시안적 견해 때문에 교회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교회 대표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을 지지해 줄 충분한 증거물도 지니지 못한 채 무책임한 공상에 의해 자신들의 세계의 모든 구조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과학철학자 제롬 라베츠(Jerome Ravetz)는 갈릴레오와 로마교회 사이의 대결에 관한 바른 이해는 사회적 요소들을 염두에 두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톨릭의 위계질서는 당시 개신교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하였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공격은 적군에게 탄환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과 교회의 연장자들인 기성세대의 엘리트들과 갈릴레오가 소속되었던 실질적 사고를 지닌 신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생생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에 자신의 작품을 라틴어가 아닌 지역어로 발행하기로 한 갈릴레오의 결정은 기성세대 엘리트들을 향한 공격이었으며, 이는 더 넓은 독자층으로 지적 리더십을 옮기기 위한 폭 넓은 전략이었다.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양측 모두 보기 흉한 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갈릴레오의 세력을 격감시키기 위해 비열한 방법과 인격적 원환을 사용했고, 이에 맞서 갈릴레오는 의도적으로 선동적이며 선전적 글들을 통하여 대항했다.

 

그의 [세계의 두 가지 원리적 체제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the Two Principal Systems of the World)라는 작품에 심플리시오(Simplicio)라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익살꾼이 등장하는데, 이는 한 때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지지자이었던 교황을 살짝 위장하면서 풍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그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 논쟁에 관한 전형적인 개작(retelling)은 갈릴레오가 교회에 대항하였으므로 그가 공론적 무신론자이거나 적어도 불가지론자(agnostic)였음이 틀림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앞에 진실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릴레오가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이 종교적 교리 자체를 의심할 의도가 없었고,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유래된 과학적 체계를 의심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실증주의적 접근은 갈리레오의 견해에 대한 종교적 변호를 단순히 권력에 의해 강요된 편법으로만 인정하고 이를 제외시킨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신자였으며 종교를 세계에 대한 진정한 정보의 근원으로서 과학과 나란히 간주했다는 그 자신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남아있기로 한 갈릴레오의 결정만이 왜 그가 교황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렇게 노력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인 것처럼 보인다고 루드윅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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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박근혜와 종교

 

J: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교야. 2012년 대선 기간 중에 종교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요즘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최태민 등과의 관련성을 보면 일종의 무속 신앙 내지 영세교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 부분은 이따가 좀 더 자세히 나눠 보자.

 

 

 

 

A: 박근혜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던데..

 

J: 맞아. 먼저 청소년기에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성심여자중, 서울성심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천주교 재단인 서강대를 졸업했어. 그래서 율리아나라는 세례명도 받았어.

 

불교와의 인연은 어머니인 육영수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보면 될거야. 그래서 박근혜는 힘든 시기에 불교를 많이 의지했다고 해.

200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에게서 대자행이라는 법명도 받고, 2006년 대구 동화사에서는 신라의 선덕여왕과 같은 선덕화라는 법명도 받았어.

 

그래서 천영식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의 삶의 방식과 사고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택을 방문하면 금강경 등 여러 권의 불교 서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해.

 

개신교와의 인연은 육영수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 만난 최태민 과의 만남을 통해 이어졌는데 이 때 다른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구국십자군 활동 등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1977 5 29 AFKN 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앙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 가정에 화목한 분위기를 이룩해 가면서 동생들의 허전한 마음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지.

 

 

 

박근혜는 박정희가 죽고 청와대를 나온지 2년 뒤인 1981년 개신교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대학원을 한 학기 다녔다고 해.

 

A: 박근혜의 종교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네. 무교라고 하는데 가장 다양한 종교를 의지하는 것 같은데?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

 

 

J: 그러게. 박근혜는 두 부모가 모두 총에 맞아

암살 당하는 등 정신적 트라우마도 상당했을 것이기에 살기 위해 종교에 의지했을 가능성이 커.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주는 의지할 만한 종교를 찾아 돌아다녔다고나 할까.

 

가장 종교적인 무교 대통령’... 박근혜

 

 

 

2012년 제 18대 대선 때는 불교계가 열심히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어. 그 전에 이명박 정부 때 너무 시달려서 3040 정각회, 태고종 보국회, 전국신도회, 대한불교종단진흥회,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회 등이 공개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기 시작했지.

 

반면에 개신교는 조용했어. 대신 한기총은 박근혜에게 대선 기간 중 큰 도움을 주는데 신천지 관련설’, ‘1억짜리 굿 사건을 잠재워 주는 데 한기총의 도움이 컸어. 대선 기간에는 집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박근혜 선거 캠프 쪽에 많은 개신교 인이 포진되어 있긴 했지.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처럼 개신교인을 중용하기 시작하는데 박근헤 정보에서는 사랑의 교회 인맥이 상당수를 차지했어. 이명박 때는 소망교회 인맥이 컸었던 것과 다른 점이지.

 

 

 

대표적인 사랑의 교회 인맥은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를 총괄한 김성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이혜훈 부위원장 등이 있어. 허태열 비서실장, 주철기 외교안보수석도 사랑의 교회 출신이었지. 또 장관 급인 금융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신제윤도 2004년부터 사랑의 교회에 출석했고

 

 

 

 

 

A: 대형교회 파워가 정말 엄청나긴 하나보다.

 

J: 그러게. 교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2000년전 예수가 실현하고자 했던 참된 공동체의 모습과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박근혜는 무교였음에도 청와대 수석비서관 12명 중에 개신교인이 8명에 달했고 불교, 천주교는 1명도 없었어. 초대 내각 인선도 18명 중 종교가 있는 9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4명이었어.

 

특히 황교안 법무부 장관(지금은 총리)은 실제 개신교 전도사라고 해. 사법 연수원 시절 야간 신학대학을 나와 서울 목동 성일 침례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었지. 그는 검찰의 개신교 신자 모임인 검찰 신우회를 주도하는 등 굉장히 개신교 편향된 사람이었어.

 

 

 

A: 요즘 황교안 총리가 자주 언론에 공개되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인 줄은 모르겠는데

 

J: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박근혜 정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쯤에서 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해 보면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종교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라는 점이야. 특히 개신교가 지닌 종교적 위력은 어마어마해. 10만 명에 육박하는 목사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신도들이 적어도 매주 한 차례 일정한 장소에 모여 설교와 교제를 갖는 조직이 한국에 또 어디 있을까?. 군대 그 이상으로 막강한 세력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거기다가 천주교, 불교까지 더해지면 종교 파워는 정말 엄청날 거야.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종교를 배제시켜선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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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명박과 종교

 

J: 이명박은 장로 대통령 만들기 3차전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왜냐하면 이명박은 자신의 종교 성향을 스스럼 없이 드러낸 대통령이거든.

 

 그가 4년간 공식적으로 참여한 개신교 행사만 해도 50회가 넘어. 소위 간증정치라고 불릴만 하지. 그러다 보니 타종교와는 불편할 일이 몇 번 있었어. 대표적으로 서울시장 시절에는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해 물의를 빚기도 했었고….

 

 

 

A: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종교 성향이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자주 말했었지 아마?... 새벽기도 열심히 드리러 다니고…..

 

J: 이명박 대통령은 아무래도 신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 하여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는 절절한 스토리가 있다 보니, 많은 개신교인들이 매력적으로 느낀 것 같아.

 

 

 

A: 맞어. 한 때 6.3 세대라고 불리면서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던 사람인데, 어느덧 나이를 먹어가면서 정치가 보수화 되었다지.?

 

 

 

J: …..2007년 개신교계는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바빴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잔뜩 불만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정말 열심히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극우 개신교계는 노골적으로 이명박 지지 활동을 벌여 나갔는데 4 18일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는 부흥회 설교 자리에서 이명박 지지를 호소하다가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서면 경고를 받아. 5 17일 한기총도 공식 입장을 밝히며, 78일 주일예배에선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신도 3만명 앞에서 이명박을 적극 지지하다가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서면 경고를 받아. 또한 7 27일에 열린 뉴라이트기독교연합 창립식에서 김진홍 목사는 올 연말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실현하자고 강조했고, 최병두 목사는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기독교인을 대표해서 뉴라이트 기독교연합의 지지후보를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어.

 

 

 

A: 이젠 교회가 대놓고 대통령 만들기를 설파하는 구나.

 

J: 그런 셈이지. 소망교회는 이명박이 출석하는 교회다 보니, 대표 기도 시간에도 지지를 호소하다가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서면 경고를 받곤 했어.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보수적 성향의 미래포럼도 성명을 통해 교회가 아예 대놓고 이명박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어.

 

 

               -소망교회 출석 중인 이명박 대통령-

 

 

A: 당시 많은 지방 교회들도 명박사랑가입 신청서를 돌리고, 부지런히 이명박 지지를 시행해 왔었어. 사실 사전 선거운동을 하면 안되는 건데, 이것도 다 문제가 있었던 거구나.

 

J: 응 미래포럼에서도 법무부 장관인 김성호에게 왜 이런 불법을 방관하냐고 말할 정도였지.

 

무엇보다도 이명박의 당선에 일등 공신이 있다면 1. 뉴라이트 2. 한기총일 거야.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건 뉴라이트로서 이 단체는 노무현 정부에 반대하는 30~40대 젊은 인사들이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면서 만든 보수적 시민 단체야.

 

 

 

A: 많이 들어본 단체야. 뉴라이트.~

 

J: 이 단체를 대중운동 반열에 올린 사람이 바로 이명박의 절친인 김진홍 목사야.

그는 이명박과 30년 지기 친구이고, 6.3 한일수교 반대투쟁을 한 6.3 세대였어. 그 당시 이명박도 김진홍도 뜨거운 민주화를 부르짖던 세대였지. 그런데 어느덧 노선이 달라져 버렸어.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며 이명박 지원을 위한 선거운동에 적극 나섰어.

 

또한 대선 기간에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질 때도 이명박을 변론하며 지켜줬지.

 

한기총도 이명박 당선을 위해 엄청 애를 썼어.

그러다 보니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나서 첫 공식 일정이 1. 국립 묘지 들르기 2. 한기총 방문이었어.

 

 

 

A: 한기총이 움직였다면 대형교회들도 나름 큰 역할을 했겠는데?

 

J: 그랬지.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 설교나 강연, 회의자리에서 열심히 이명박을 지지했어.

 

전광훈 목사는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을 많이 썼는데, “만약에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안 찍는 사람은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 버릴거야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의 어록이 되었지.

 

결국 이명박은 개신교계의 지지를 한 몸에 입고 정동영 후보와 무려 531만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뤄. 이는 대통령 선거 역사상 최대의 득표수 차이였어.

 

이 모든 과정은 개신교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견인차 역할을 해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특히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 지역에서도 개신교라는 이름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지지하곤 했지.

 

 

 

A: 개신교의 영향력이 엄청났구나.

 

J: 결국 제 17대 대선 결과는 개신교가 움직이면 집권한다는 속설을 뒷받침해 준 격이지. 개신교는 대체로 보수 성향이 강하다는 조사가 있어. 여기에는 한국에 조직 신학을 보급한 죽산 박형룡 의 신학적인 보수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초창기 주류 목회자들이 모두 보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지.

 

보수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이와 같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적극성을 보인 이유는 세 가지야.

 

1.     이명박이 독실한 개신교 장로 후보여서

 

2.     사립학교법과 국가보안법 문제로 참여 정부(노무현 정권)가 개신교의 공분을 자아내서

 

3.     이명박의 신앙이 가미된 성공 스토리에 감동 받아서.

 

 

 

A: 이명박은 개신교 편중 인사로 말이 많지 않았던가?

 

J: 그랬지. 장관 16명 가운데 개신교가 10, 천주교 2, 무교 4명이었고, 불교 신자는 1명도 없었고, 수석비서관 8명 중 개신교가 4, 무교가 4명이었어. 전체 청와대 비서관 41명 중에 개신교 비서관이 16명으로 39%를 차지하기도 했지. 소위 개신교 코드 인사라 불릴 만 했어. 이명박은 2008 12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에 김양원 목사를, 2011 6월 소망교회 교인인 유영숙을 환경부 장관에 임명했어. 대통령 인수위원회도 개신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경숙, 김형오, 맹형규, 진수희, 강만수 등이 모두 개신교인이었어.

 

현직 목사 신분으로 이명박 정부에 참여했던 김진홍 목사(인수위 민간자문위원), 추부길 목사(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팀장), 박영모 목사(청와대 행정관)도 빼놓을 수 없겠지.

 

 

 

 

A: 상대적으로 불교계는 소외 받는 분위기였지?

 

J: 그랬어. 자잘자잘한 종교 편향 논란이 많았었어. 특히 12월 한나라당이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다가 템플스테이예산을 누락시켜서 불교계를 분노케 하기도 했지.

 

조계종 측은 2012년 역대 정권의 종교 차별 실태를 조사해 [대한민국 종교 차별 사례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는데, 이걸 보면 개신교의 정교분리 위반 사례 270건 가운데 114, 종교 자유 침해 사례 67건 중 36, 종교 차별 훼불 사레 151건 중 54건이 이명박 정부 때 벌어졌어.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개신교가 역으로 종교 차별을 주장하기도 했었다는 점이야. 다른 부분이 아니라 종교에 지원하는 예산 문제에 있어서 너무 불교에만 많은 돈이 들어갔다는 것이지. 이건 그럴만도 한 게 2013년 정부가 불교계를 지원하기 위해 책정한 예산은 714억원이었어.

 

이는 순수한 문화재 보호 예산을 뺀 액수였는데 10.27법난 역사 교육관 지원에 200억원, 템플 스테이에 195억원, 전통사찰 방제시스템에 110억원, 전통사찰 보수정비(105억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29억원), 양주 화엄사지 종합정비(23억원), 불교기록문화 유산 아카이브(20억원), 전통음식 체험관(15억원), 연등축제 활성화(7억원), 해인아트 프로젝트(5억원), 오대산 자연명상센터 조성(5억원).

 

불교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데 반면 개신교를 위해 책정된 예산은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준비 20억원, 세계복음주의 연맹 총회 개최 3억 원 등 23억 정도 뿐이었어.

 

 

 

A: 이건 참 이상하다. 왜 그랬지?

 

J: 그건 나도 모르겠어. 종교 편향으로 인해 집권 초기부터 구설수에 올라서 나름 이미지를 쇄신해 보려고 그랬을 수도 있고…. 개신교는 지원 많이 안 해줘도 자기 말 잘 들어줄 걸 알았던 건가?

 

아무튼 이명박 정부 때는 극우 기독교는 이명박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이었고, 2008년도 소고기 광우병 사태로 반정부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촛불을 든 시민들에 맞서 반대 집회를 열어 대통령 구하기에 나서기도 했던 게 개신교였지.

 

 

 

A: 요즘도 촛불 집회를 반대하는 집회를 보수 교회에서 종종 열곤 하더니, 그 때랑 비슷한 거네.

 

J: 점점 힘이 커지는 개신교는 입법 과정, 정치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데 2011년 이슬람 채권법인 수루크법의 국회 상정을 앞두고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어.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는 정부가 이슬람채권법을 계속 추진할 경우 이명박 대통령의 하야 운동을 벌이겠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으니 그 영향력이 가히 대단했지. 참고로 수루크법은 이슬람 율법상 이자를 받을 수 없는 오일 머니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면제 혜택을 주는 조치를 골자로 하는 법이야. 그 만큼 개신교는 자신이 있었던 거야. 이젠 자신들이 권력에 빌붙는 정도가 아니라, 권력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오죽했으면 이회창 대표가 조 목사는 기독교계가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을 만든 만큼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겠어

 

이회창 대표는 이런 기독교를 향해 오만방자하다고 말하기도 했어.

 

이렇게 개신교의 힘이 커지다 보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서울시장직을 걸고 추진한 무상급식 폐지 주민 투표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대형 교회, 개신교 단체, 개신교 행사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어. 한기총, 조용기 목사, KNCC 까지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으니 개신교 권력의 맛을 찾아 온 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던 개신교 분위기도 이 즈음으로 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어.

 

A: 어떤 변화가 있었는데?

 

J: 일단 1세대 목사들이 물러나고 후임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해서 1인 카리스마 체제의 목회 시대가 끝났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교회 내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교회 내부 비리에 대한 내부 고발자도 나오며 자체적인 정화 활동도 전보다 많아졌지.

또한 한국 개신교의 성향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6.25 세대가 지나가다 보니 반공성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미국 유학파 젊은 목사들의 약진으로 친미성향은 강화될 가능성이 커졌지.

 

 

 

J: 잠시 역대 개신교 대통령들을 함께 묶어서 이야기 나눠 보자.

지금까지 설명했던 역대 대통령들 중에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은 모두 개신교 장로 출신이었고 이승만은 감리교단, 김영삼은 예장합동 교단, 이명박은 예장통합 교단 출신으로 한국의 Big 3 교단에서 골고루 대통령이 배출되었어.

이승만에게는 KNCC 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가 힘이 되었고, 김영삼에게는 나라사랑협의회가 있었고 이명박에게는 김진홍 목사가 주도하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힘을 실어줬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보수 개신교는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 역할을 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지만 이명박 집권기를 지나면서 이미지와 신뢰도, 교세의 하락을 경험하기도 해.

 

 

 

개신교의 이미지 추락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공중파 방송에서 교회의 비리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면서 서서히 시작되었지.

또한 개신교 특유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으로 인해 무례한 종교’, ‘속 좁은 종교등의 비난도 많이 얻게 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도 이미 친숙해졌지. 혹자들은 김밥천국, 개미지옥!’ 이라 외치며 개신교를 비아냥 거리기도 해.

또한 부산에서 집회를 할 때 범어사가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할렐루야!’ 라고 기도했다고 하니, 당연히 타종교인들이 보기에도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지.

 

 

이렇게 이미지가 추락한 개신교의 교세는 1995년도에 876만명이던게 2005년도에는 861만 명을 기록해 첫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 교회의 숫자도 2002 60785개였던 게 2008년에는 58612개로 줄어들어. 또한 교인들의 고령화도 문제가 되고 있지.

 

 

 

A: 요즘 주변의 몇몇 교회를 다녀봐도 장년층만 북적거리고 청년들의 숫자가 적더라구.

 

J: . 기성세대의 문화와 정치관 도덕성에 회의를 느낀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실정이라….. 개신교 스스로의 책임이 크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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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무현과 종교

 

J: 노무현은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는데 종교 활동에 열심이 있진 않았어.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 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고 답했고, “확실하게 믿느냐?” 고 재차 묻자 노무현은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어.

 

최초의 반미 사건인 부산 미문화원 사건 때 만난 송기인 신부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성실하게 교리반에 참여하진 않았었다.

 

노무현은 왜 성당에 안 나오냐고 다그치는 신부에게 신부님이 성당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어.

 

개신교인이 아닌데도 개신교가 가장 지향하는 많은 면모를 갖춘 대통령이 아니었나 싶어.

 

 

 

A: 그거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J: 그러게. 사람마다 해석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요즘 시국에는 노무현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아무튼 노무현의 삶의 이력에는 천주교보다 불교가 더 많이 등장해.

 

청년 시절 고시공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절에 머물기도 했고, 불교 경전도 탐독했으며 권양숙 여사도 평소 불심이 깊었지. 또한 대통령 재임시절 해인사를 세 차례나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어.

 

 

 

A: 아마 극우(보수) 개신교는 노무현을 엄청 싫어했지?

 

J: 말도 못했지. 그들의 반정부 집회는 김대중 정권이 아닌 노무현 정권 때 본격화 되었어.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최대 정적은 개신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지.

 

 

 

 

 

A: 왜 극우 개신교는 노무현을 싫어했지? 단순히 야당 소속이라서?

 

J: 일단 4대 개혁입법(국가 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서였어.

 

특히 극우 개신교는 1. 국가 보안법 폐지 2. 사립학교 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어.

 

국가 보안법 폐지는 자신들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건드는 심각한 사안이었고, 사립학교법 개정은 개신교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사고 속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 ‘반공 전체의 포기라는 도식이 있었어. 즉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두 소멸해 버려서 자신들의 주도권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 여겼던 거지. 이걸 막기 위해 조갑제를 위시한 극우 언론들과 손을 잡고 한기총도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한기총+조갑제의 놀라운 연합 전선이었지.

 

 

 

A: 국가보안법 폐지는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 만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데 사립학교법 개정도 반 정부 시위에 중요 역할을 한 거야?

 

J: 오히려 사립학교법 개정은 극우 개신교들이 반 노무현 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노무현 정보는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장 친인척의 이사 비율 축소 30개 조항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추진했어. 이를 지켜본 극우 개신교는 정부의 개정안이 사학의 설립 정신을 훼손해 결과적으로 재산권 행사를 어렵게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

 

 

 

2005년 당시 개신교는 중학교 123, 고등학교 165개의 많은 사학을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일부 목사들은 삭발 투혼을 하기도 했고, 학교 폐쇄 등 강경 조치로 맞서기도 했어. 20016 12월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목사와 성도 3000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해 .

 

이 때 극우 개신교는 구체적으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2007년에 시행될 선거(대선과 총선) 때 그 복수를 하겠다며 사립학교법 재개정을(그 쪽에서 재개정을 요구했어) 반대한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여 나가. 당시 한기총이 1차 낙선 대상자 5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해찬, 장영달, 정세균, 유기홍, 최재성 의원이 여기에 속해 있었어.

 

 

 

A: 교회가 뭔가 이상한데?....

 

J: 본인들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나봐.

 

 

               -분향소를 찾은 한기총 임원진-

 

 

그 이외에도 종교 단체 기부금 내역 공개, 종교인 과세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극우 개신교들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엄청 이를 갈았어.

 

 

 

김지방의 [정치교회]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개신교계 인사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니 정치권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교회의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해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된다. 대형 교회 목회자를 비롯한 개신교계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 기독교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A: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신교 소속이 아닌 대통령이 꼭 반기독교 정권일까?

 

J: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아.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과 가치관, 걸어온 길, 내뱉는 말들이 진리에 가까운지, ‘진리로부터 먼지가 더 중요한 바로미터가 아닐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볼 필요가 있겠지? 중요한 것은 단지 개신교 소속이라고 해서 그 정권이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게 그 동안 보여왔던 개신교의 민낯이라는 거지. 그게 옳았다면, 그 열매도 한번 주목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당시 사립학교법 논란에는 강의석 사건도 있었어. 미션스쿨에 다니던 강의석 군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서울특별시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해 개신교계는 그 학교를 종교적 목적으로 세웠는데 고교 평준화 조치로 인해 학생 선발권이 없어지다 보니,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 교육이 안되고 있다고 주장했어.

 

어찌 되었든 법원의 판결은 미션스쿨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사립학교법 문제로 날카로워진 개신교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

 

 

 

A: 노무현 집권 당시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참 많았지?

 

J: . 무려 18차례나 있었어.

집권 초기에는 반공’, ‘친미를 중심 이슈로 잡았고, 중반에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중심 이슈였어. 나중에 말기가 되니 모든 이슈를 다 섞어서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와는 근간 자체가 매우 다른 집회였지.

 

2002 6월 여중생인 심미선, 신효순이 미군 차량에 압사당한 후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 극우 개신교는 미국의 한국 포기는 다시 남한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어.

 

 

 

A: ‘반공 이데올로기가 어마 무시하게 파급력이 세구나.

 

J: 거의 게임에서 말하는 치트키 수준이었지. 그나마 시대가 발전해 가면서 새로운 의식을 지닌 시민들이 많아져서, 이젠 더욱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편이야.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겠지만….

 

 

 

당시 극우 개신교가 벌였던 집회를 주도하던 목사들 중 한사랑 교회 김한식 목사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했어.

 

김홍도 목사는

 

대한민국은 간첩 천국이며 더 이상 간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 교회가 친공, 친북, 좌경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 다음 사립학교법 재개정문제를 놓고 시위할 때는 극우 개신교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노무현 정부를 압박했어. 한나라당 역시 보수 개신교가 자신들의 당을 지지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지.

 

 

 

도올 김용옥은 이에 대해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신정정치를 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며 경고하기도 했었어.

 

 

 

A: ‘반공도 중요 키워드지만, ‘친미도 역시 중요한 극우 개신교의 입장이었나 봐.

 

J: 아무래도 선교사 파송 시절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입어 온 게 개신교이다 보니…. 6.25 때는 물자도 대주고 얼마나 고마웠겠어?  더군다나 미국 유학파 신학도들의 비중은 64.5 퍼센트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식 신학과 사상, 인맥이 계속 제자들에게 대물림 된 측면도 있었어.

 

최근에 세대 교체기를 맞이한 대형교회의 후임 목사들도 미국 유학파가 많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도 그렇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2007) 정부가 마지막으로 손봐야 할 대상으로 1. 재벌, 2. 대형 교회 3. 강남 부자 가 거론되기도 했었다. 재벌은현대’, 대형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라는 이름까지 거론되어 조용기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 해명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어.

 

 

 

당시 김홍도 목사는

 

내가 반공운동을 하고 좌파정권을 자꾸 까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도 알고 교인들도 아니까이건 좌파사상을 가진 정권이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거예요. 전에는 없었어요. 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지.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가장 미워합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어.

 

 

 

A: 본인이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잘못해서 구속 당했던 거 아닌가?

 

J: 그러게. 본인들이 자주 쓰는 전략이라 민주주의 세력들도 속이고, 조작하고 가두는 방법을 쓸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 같은데, 씁쓸하지.

 

극우 개신교는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개신교 독자 세력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2004년 제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정당투표제가 있어서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 가능케 되었어.

 

 

 

17대 총선에서는 14개의 정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국민통합21, 가자희망 2080, 공화당, 구국총연합, 한국기독당, 노년권익보호당, 녹색사민당, 민주노동당, 민주화합당, 사회당)이 정당 등록을 마쳤어.

 

당시 첫 기독교 정당인 한국 기독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사람은 최수환 장로, 박영률 목사인데 최수환 장로는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었어. 박영률 목사는 한기총 총무를 지냈고…..

 

창당대회에서 CCC 대표 김준곤 목사는 전국 개신교 인구가 25퍼센트이고, 투표율이 약 50퍼센트 정도가 될 것이므로 개신교인들이 90퍼센트 정도만 투표하면 전체 유효표 가운데 약 50%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그러나 까놓고 보니 당선자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A: 사실 기독교의 정당 활동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었지? 아마?...

 

J: .. 북한은 원래 개신교의 주류가 있던 곳이었으니까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남한의 교세가 확 커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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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대중과 종교

 

J:김대중은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고 나서 장면의 권유로 천주교인이 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어.

 

A: 토머스 모어??.. 세례명이 멋진 걸?

 

 

 

J: 그러게.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어. 40년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투옥과 납치(박정희가 지시한) 속에서도 천주교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지.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 때 납치 당할 당시에 대한 간증을 2007 CBS TV 개국 5주년 특별 대담에 출현해서 나눠준 적이 있어. 한번 들어볼까?

 

 

 

“1973년 납치되었을 때 물에 던져지기 직전이었다. 당시 하나님을 생각하진 않았다. 곧 죽는구나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에게 살려주십시오. 나는 우리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 때 기도도 정치적으로 했다. (웃음).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나를 묶었던 정보부 요원들이 비행기다!” 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옥중서신에 잘 담겨 있다.

 

 

 

나는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 외부적 환경이 얼마나 가혹하든,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소망으로 일관할 결심이다.”

 

 

 

이 기회를 나의 영적 심화와 지식 향상의 기회로 삼으며 건강의 유지에 힘써서, 앞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도구로 쓰이는 데 좀더 쓸모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마음먹고 있다.”

 

 

 

참고로 김대중의 아내인 이희오 여사는 개신교 신자였고 서울 신촌에 있는 창천 감리교회에서 오랜 기간 장로로 시무했었지.

 

 

 

A: 최초의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집권이었으니 극우 개신교 단체들이 경계를 잔뜩 했겠는걸?

 

J: 맞아. 극우 개신교는 김대중 집권 기간에 처음으로 정부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때까지는 극우(또는 보수) 개신교는 늘 권력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말이야.

 

극우 개신교 집단은 김대중 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권력과의 투쟁을 시작해. 이러한 갈등이 절정을 이룬 건 역시 노무현 정부 때였어.

 

 

 

A: 그 당시 TV를 틀다 보면 공중파 방송에서 목사들의 비리가 보도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

 

J: 맞아. 김대중 정부 들어오면서 표현의 자유, 문화적 발전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 오던 목사들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해.

 

고여서 썩어가고 있던 물을 드디어 들춰내기 시작한 것이지.

 

예를 들어 김대중 취임 초기인 1998 4 MBC [시사 매거진 2580] 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공금 횡령과 불륜 의혹 사건을 직접 보도해.

 

 

 

A: 김홍도 목사는 대표적인 극우 기독교 목사였지?

 

J: 맞아. 그 이외에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JMS 라는 이단을 취재하고, MBC [PD 수첩]에서는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사건이 보도되지.

[PD 수첩]은 이런 분위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2000년 한국 대형 교회를 방송하며 광림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대형고회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이런 모습이 극우 개신교 내부에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은 김대중 정권이 정치 보복을 하며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지.

 

 

 

A: 자신들의 도덕적인 부패에 대해서는 한치의 반성도 없나 봐?

 

J: 그러게. 너무 잘못 거꾸로 가다 보니, 도덕적 감수성을 잃어 버린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죄책감이 너무 심해져서 죄책감이 수치심을 유발했고 그 수치심을 교묘하게 가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걸수도 있고

 

 

 

A: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개신교가 변화해 온 양상, 그리고 그 개신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있으니, 김대중 정부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기도 해. 개신교와 정치 권력의 협력 관계가 깨진 이유에 대해 좀 더 정리를 해 보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J: 일단은 대형 교회 목사들의 비리를 공중파 방송으로 보도했던 점, 두 번째는 KNCC 계열의 진보 성향 인사들이 김대중 정부 입각에 도움을 줬고 극우(보수) 개신교가 이 때 소외감을 느낀점도 중요한 포인트야.

당시 김대중 정부에 입각한 대표적 진보 인사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소속 김성재 목사와 김상근 목사, 성공회의 이재정 신부를 꼽을 수 있어. 최초로 극우 개신교가 정치 권력의 변두리로 가게 된 거지. 마지막으로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극우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불을 지폈던 점을 들 수 있어.

 

 

 

A: 나도 극우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늘 김대중은 중복 스파이고, 대표적인 예가 햇볕 정책이라고 말하더라고..

 

J: 그렇지. 극우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인 반공을 흔들어 버린 평화적인 햇볕정책은 그들에겐 엄청난 위기였고, 극우 개신교는 좌파 진보주의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을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하게 되.

김대중 정권 때는 보수 언론사들이 사상 초유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사주가 구속되기도 했어. 이러다 보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소위 조중동은 극우 개신교와 연대를 모색하며 반정부 세력을 결집시켜 나가지.

 

 

 

A: 보수 개신교+보수 언론의 만남이 일으킨 시너지 효과는 굉장했어. 많은 정치를 모르는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컴비네이션에 휘둘리기가 쉬웠지.

 

 

 

J: 극우 개신교들은 김대중 퇴임 한달 전에 반정부 집회를 시작해서 노무현 정부 임기 말까지 무려 18차례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어.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월간조선]의 조갑제야.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 언론인이지. 그는 자신의 조갑제닷컴에서 보수세력의 단결을 촉구해.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30% 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 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그것입니다.”

 

 

 

즉 보수 언론+보수 개신교+군대 를 반공 집단으로 잘 묶어 두는 발언이었어.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부 들어 홍보 컨셉을 할 말을 하는 신문으로 바꾸고 강도 높은 정부 비판을 시작해.

 

 

 

A: 군부 독재 시절에는 늘 정권 찬양하기 바쁘던 그 조선일보가?.... 일제 치하에는 일본을 찬양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기사를 올리며 기회주의적 습성을 보여주던 그 언론이?(북한을 찬양하는 신문 기사에 대해서는 조선일보 측에서는 부인을 하고 있는 상태임)

 

J: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김대중의 좌파 정권을 타도하고 싶었던 거지 뭐.

 

김홍도 목사도 거리로 나와 김대중 정부가 싫다기 보다는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고 다 죽게 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합니다라고 외쳤지.

 

이전까지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운동을 눈감아 오던 극우(보수) 개신교들은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합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중성을 보여.

 

 

 

1970~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이끌어온 KNCC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부족한 부분을 대형교회의 지원으로 채우게 되. 그러다 보 KNCC의 진보성은 축소되기 시작해.

 

KNCC가 시들해지자 극우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기총의 위상은 급부상하게 되. 그들은 한국의 보수 세력을 리드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켜가.

 

 

 

 

A: 한국 교회의 주류 입장이 극우화된 느낌을 받는 이유도 한기총과 대형교회가 목소리를 높여서일까?

 

J: 그런 면도 커. 좀 황당한 부분은 한기총은 과거 KNCC가 힘겹게 쌓아둔 민주화 투쟁의 역사마저 한국 교회가 민주정부 탄생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마치 자신들이 그 힘겨운 싸움을 해온 것처럼 포장하는 레토릭을 구사하기 시작하지. 그들은 단순히 진보적인 정치에만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보수 윤리관을 적극 피력하기 시작해.

 

 

 

A: 산업화 이후 시기 때 한국 교회는 1. 민중교회 운동, 2. 교회 성장 운동 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전자는 진보적 성향의 운동이고, 후자는 보수 개신교가 주축이 되었지 아마??

 

J: 맞아. 민중교회 운동은 산업화 시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며 현실참여에 비중을 두는 교회 운동인 반면, 교회 성장 운동은 개인의 영성 문제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만져 주는 위로자 역할을 자처했지. 이 두 가지 운동 모두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다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커. , 민중교회운동은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산파 역할을 하며 시민운동을 이끌어 온 반면 교회성장 운동은 메가쳐치를 양산하고, 신학적으로는 교회 성장학’, ‘목회상담학등 교회를 양적으로 키울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는 방향에 힘을 실어주게 되지. 교회성장 운동이 과도해 지면서 한국 개신교회는 세속화’, ‘정치화의 속도도 빨라진 면이 있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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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노태우와 종교

 

J: 그는 최초의 불교 대통령이었어. 생긴 것도 부처를 닮았다는 평이 많았어. 노태우 대통령의 과거 종교 행적은 알려진 게 별로 없긴 해.

 

딱히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려 하진 않았으나 출근할 때마다 차 안에서 금강경 독송 테이프를 듣고 다녔고 스님들에게 천수심경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 겨루어보자고 말하기도 했었지.

 

그의 어머니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는 퇴임 이후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해. 2010년에 하용조 목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나….. 전두환이 퇴임 이후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것처럼 노태우도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셈이야.

 

 

 

A: 그거 참 흥미롭다.

 

J: 1987년도는 최초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은 해였는데 6월 민주 항쟁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종교계는 1987년 대선에서는 개입이 훨씬 심해져. 6월 민주 항쟁을 이끈 종교계의 자부심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당시 유력 대선 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었고 각기 불교,개신교,천주교 성향이 있다 보니 당시 대선은 거의 종교 파벌 대선이나 다름 없었지.

 

당시 먼저 가장 열심을 낸 건 불교였어. 지난 정권들에서 받았던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노태우라는 불교 신자를 어떻게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골적인 노태우 지지 기원 법회를 열고, 불교계의 지지를 호소했어.

 

 

 

 

 

A: 노태우도 그런 반응이 싫지 많은 않았겠네?

 

J: 그랬겠지. ‘나라 안정과 불교 중흥을 위한 기원 대법회 11 27일에 열렸는데 당시 노태우는 직접 참석해서 불교 방속국 설립을 공약하며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많이 받아.

 

 

 

A: 우리는 개신교 쪽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 보기로 했으니, 그 쪽은 어땠어?

 

J: 개신교는 민주당 후보로 나온 김영삼 장로를 적극 지지했어.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김영삼 지지대열에 동참했었지. 김영삼 역시 유세를 다닐 때마다 해당 지역 목사, 장로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참여하는 등 개신교 표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

 

 

 

 

 

A: 천주교 쪽은 역시 김대중을 밀었겠지?

 

J: 그랬지. 민주화 운동 세력도 중심이 되었어. 김대중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주교 지지층 확보에 나섰고 말이야.

 

 

 

1987년도 대선은 그야말로 종교적 공방이었어. 노태우는 불교방송국 건립공약, 김영삼은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설’, ‘불교 탄압설’, 김대중은 천주교인의 불당 참배 문제등이 늘 이슈로 따라 다녔지.

 

 

 

A: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

 

J: 당시 노태우는 성난 불심을 달래줘야 할 입장이었는데 7년 전 벌어졌던 10.27법난 사건 때문에 불교계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거든.

 

그래서 노태우는 전통사찰보존법을 제정해서 전통사찰로 지정된 곳만 정부가 관할하고 나머지 사찰은 정부 규제에서 벗어나게 해 줬어. 이로 인해 사찰의 자율권은 확대되고, 사찰의 수리와 보수도 정부가 책임져 주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지.

 

 

 

그리고 노태우 정권에서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이 크게 흔들리는데 그걸 처음 촉발시킨 건 전두환 집권 시절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 평화통일운동과 반미 운동 등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해.

 

 

 

A: 평화통일 운동은 아무래도 야당 출신인 김대중 정권 때부터나 생긴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건가?

 

J: 흔히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틀을 바꿨다고 알고 있지만 최초로 그 틀을 바꾼 건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보는 게 더 공정한 평가일 거야.

 

노태우 대통령은 1988 7.7 선언을 통해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이산가족 생사 확인, 남북교역 문호 개방을 제안했지. 그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고 북한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위험정도로 보았고,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북한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북한을 자극하는 무기로 판단했어. 노태우는 남북관계의 기조를 이념적, 군사적 대결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으로 전환하여 한반도의 국지적 냉전체제를 해체하려고 한 것이지.

 

 

 

A: 많은 극우 개신교 단체들은 김대중이 종북 스파이가 되어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과 친구가 되려고 했다고 맹비난을 하면서 보수 당을 지지하던데, 속내를 알고 보니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거네?

 

 

 

J: 그렇지. 역사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아무튼 노태우 정권 때 평화통일 운동, 반미운동도 본격화 될 만한 정치 토대는 충분했던 거야. KNCC 를 중심으로 한 진보 성향의 개신교 세력이 한층 단단해 지면서 본격적으로 개신교 내에 진보-보수 흐름이 뚜렷해지기 시작해.

 

 

A: KNCC 는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평화 통일 운동에 앞장섰었지?

 

J: . 1985년에 한국 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발표하고 1988년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88통일선언)을 발표하기도 했고…. 88 통일 선언은 통일의 원칙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민중 참여, 인도주의 원칙 이라는 5개의 원칙으로 정리해. 또한 군비 축소, 상호 불가침 선언, 한반도 비핵화지대 구축, 외국 군대의 점진적 철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

 

이 내용은 기존의 한국 교회가 취해 왔던 반공의 입장을 비판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한 셈이였어.

 

극우 개신교 세력들도 이런 흐름을 두고만 보지 않았어. 자신들의 반공’, ‘친미사상을 계속 설파하며 한국 개신교의 진보, 보수라는 두 흐름을 만들어 냈지.

 

 

 

A: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이 친화적이여서 종교계가 평화 통일 운동을 할 수 있게 된거야? 아니면 종교계가 이런 진보 흐름을 만들어 줘서 노태우 정권이 더 힘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하나?

 

J: 아무래도 KNCC‘88통일선언은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1988), ‘한국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남북기본합의서’(1992) 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기본합의서는 KNCC 88통일선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고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면서 발표한 자주평화통일 9개 원칙은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의 토대가 되었지.

 

 

 

A: 보수 단체들은 이 시기 즈음에 한기총을 만들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면서 KNCC 등의 진보 개신교 세력을 막으려 했었어?

 

J: 일단 1989 1월 한경직 목사는 한국 교회 원로(강원룡, 조향록, 지원상)들을 불러 놓고, 그 해12월에 한기총을 창립해. 한기총은 36개 교단과 6개 기관이 회원으로 참여했었지. 한기총 설립을 주도한 세력은 오직 반공에 앞장서 온 북한 출신 목사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많은 북한 출신 목회자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마법-요술봉같은 만능 신학을 우리 개신교 내에 던져줌 셈이야.

 

 

 

A: 한기총을 설립할 때도 정권의 도움을 받았으려나?

 

J: 극우 개신교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늘 정권에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기총의 설립도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지. 노태우 정부가 반정부적인 개신교 진보 세력 KNCC에 맞서 극우 개신교 단체를 키우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어.

 

평화 통일 정책에 있어서는 서로 주고 받은 Spirit 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보 기독교 단체는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을 결의하며 노 정권이 국민이 요구하는 광주사태 해결, 5공 비리 청산, 민주화 실천 등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

 

 이런 분위기가 있다 보니 노태우가 슬쩍 한기총을 키워 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겼던 거지.

 

 

 

이미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진보 종교는 찍혀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보수 교회 세력을 뒤에서 지지해 주는 활동을 해 왔었거든. 이런 분위기가 노태우 정권 때도 알게 모르게 한기총의 설립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자연스레 추론해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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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두환과 종교

 

 

 

A: 전두환은 좋은 평가를 통 받지 못한 대통령 아닌가?

 

J: 그렇지 12.12 쿠데타로 집권했으니, 박정희한테 잘못된 것만 배운 사례지.

 

전두환의 종교 성향은 논란이 많은데 원래는 천주교인이야. ‘베드로라는 세례명도 있지. 그러나 천주교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었다고 해.

 

재미있는 것은 정작 퇴임 후 그는 강원도 백담사에서 생활하고 나중에는 불교 신자로 변해 있었다는 거야. 이 정도면 순례교인가? 10.27법난 사건 일으키던 집권 당시에는 불교와 원수지간이었지만 백담사 은둔 1주년 후에는 불교적인 신앙 고백도 하면서 신실한(?) 불교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

 

당시 백담사 주지였던 도후 스님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천수심경을 달달 외운다. 추울 때도 108배를 거르는 법이 없다.” 고 그의 신앙 생활을 나누기도 했어.

 

 

 

A: 전두환의 종교 정책은 어땠을까?

 

J: 그는 힘에 기반한통치를 했기 때문에 역시 말 잘 들으면 잘해주고, 말 안 들으면 때려주는 군부 독재 스타일을 강화시켰어.

 

기독교 방송에 대한 보도 및 방송광고 금지 조치라는 초강경 조치를 해서 언론을 통제하려 했고, 1983년에는 6.20 사업이라고 해서 3군 본부 이전을 위해 신군부가 종교시설을 강제 철거한 사건도 있었어. 이 때 충남 계룡산 일대의 70여 개 군소 종교 시설을 일시에 없어버리기도 했어. 이쯤 되면 깡패라고 불릴 만도 하지.

 

 

 

이 때 개신교는 또 한번 부끄러운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건 1980 8월 개신교의 전두환 장군을 위한 조찬기도회사건이었어. 이에 대비되는 사건은 1980 10’10.27 법난 사건이지. 당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난관에 봉착한 전두환 정권은 종교계에 도움을 요청해. 이 때 개신교는 조찬기도회를 열어 주면서 정권에 빌붙었고, 불교는 이를 거부해. 불교가 이를 거부하다가 10.27 법난 사건을 당해 끌려가서 모욕도 당하고 고문도 당하고 해.

 

 

 

이런 부분들이 개신교의 부끄러운 면모가 아닌가 싶어. 과거를 제대로 갈무리 하지 못한 채, 그냥 덮어두고 달려 오다가 한국 개신교는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A: 조찬기도회 때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거야?...어떻게 그 정권이 지지 받을 수 있지?

 

J: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이던 정진경 목사는 어려운 시기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 구석구석까지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었어.그 뒤 9 30일에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하 조찬기도회도 있었는데 이 때 개신교 대표자들을 포함해 입법부, 사법부, 정치인 등 1344명이 참석했는데 이 두 번의 기도회는 모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후에 열렸어. 불교계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전두환 정권을 자극했고 이로 이내 철저한 복수를 당하게 되지.

 

 

 

 

이러한 전두환의 타격으로 불교계가 입은 명예의 실추는 엄청났어. 그래서 1977년 발표한 자료에서 불교 신자는 1290만명에서 1982년도에는 750만명으로 뚝 떨어지고 말아.

 

 

 

불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전반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고 봐도 될 것 같아.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해.

 

 

 

A: 개신교는 박정희 정권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건가?

 

J: ‘반공 이데올로기도 있겠다, 이미 권력의 맛도 봤겠다. 극우 기독교 주류들이 노선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했나 봐.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메시지가 그들의 행동 근거가 되어준건지 의심스럽지?.... 그들은 여전히 반공’, ‘친미덕분에 전두환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 근거는 1980 8 12일에 열린 1980 세계 복음화 대성회가 열렸다는 거야. 연인원 1600만명이 참석해 세계 최대 집회로 기록된 이 집회는 전두환 정권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행사였지. 당시 1회에 30초를 초과할 수 없는 광고 지침이 있었는데 관영 텔레비전 방송으로 40~50초짜리 광고를 내보내고, 광고료도 25%만 내고 집회 광고를 할 수 있게 해줬지.

 

 

 

전두환 집권 때는 개신교도, 천주교도 대형 종교 집회가 잔뜩 있었어. 그 말은 두 종교가 전두환 정권에게 타협했었음을 의미하지.

 

 

 

전두환은 불교계에도 대형 종교 집회를 하라고 종용했었으나 당시 송월주 스님은 이를 거부해.

 

말이 호국기도회지 전두환 장군을 위한 충성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요청은 10.27 법난 사건 한달 전에 발생한 일이니, 전두환은 불교를 한 번 때려줄 기회를 벼르고 있었던 셈이다.

 

 

 

A: 유독 한국 개신교는 군사 정권과 결탁이 많이 되어 있네.

 

J: . 그러다 보니 군사 용어도 개신교에 잔뜩 들어 왔어. ‘총동원 전도주일’, ‘영적 전쟁’ ‘구국 기도회’, ‘새벽 기도 특공대…. 더 무서운건 용어만 군사적인 게 아니라 개신교의 의식 속에서 이런 군사주의 문화가 침투해 들어왔다는 거야.

 

목회도 투쟁적이고, 교회 생활도 전투와 같아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를 양성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 담임 목사님의 말 한 마디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율이 되기도 하고 말이야.

 

 

 

여담이지만 전두환은 천주교의 집회도 많이 지원해 주고,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한국 방문에 엄청난 호의를 베풀며 지원을 해. 전두환이 천주교적 종교심이 생겼다기 보다는 자신의 군사정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싶었던 거지.

 

 

 

A: 전두환 집권기에 민족 종교들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되기도 했었다지?

 

J: …. 특히 전두환은 무속 신앙을 종교의 반열에 올리며 토착 문화의 지위를 부여해. 1985년에는 한국 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시켜 과거 유사종교 혹은 신흥종교라는 이름으로 냉대를 받아오던 무속 종교들을 민족 종교라는 이름으로 공인하기도 해.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사이비 종교나, 기존의 무속 신앙 등이 융합, 변형 되면서 차근차근 힘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지.

 

 

 

A: 전두환 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 때 개신교는 어떤 위치에 있었던거야?

 

J: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종교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자연스럽게 이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해. 5.18 당시 광주 지역에는 종교계만큼 조직화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거든. 광주 기독교연합회(개신교)와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천주교)가 연대한 사회선교협의회가 중심을 이뤘어.

 

 

        -5.18 민주화 항쟁과 전두환-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는 식으로 대응했고….

 

5 30일 한국 기독교 청년협의회(EYC)의 농촌 분과장인 김의기가 5.18 학살에 항의하며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69일에는 성남주민교회 김종태가 서울 신촌에서 항의성명서를 발표하고 분신자살을 해.

 

이외에도 많은 종교계의 노력이 있었으나 신군부의 대대적인 탄압, 종교계 내부 이슈로 인해서 종교계의 조직적 저항운동은 어느덧 사그라들어.

 

천주교는 대형 행사 두 번을 준비하느라 전두환 정권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는 분위기였고, 불교는 10.27법난 사건에 대한 수습으로 정신이 없었지.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이 되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이슈화 되면서 야당과 종교계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해.

 

 

 

A: 지금까지의 종교계의 저항 운동을 정리해 본다면, 1970년대 종교계에서 진행된 저항운동의 중심축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이었다면 1980년대에 와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중심이 되면서 반미자주화 운동이 되어갔다고 보면 되려나?

 

J: 중요한 지점이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군대의 주둔을 허용했던 미군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도 일어나고 말이지. ‘반미 자주화 운동분위기가 생겨난 게 사실이야. 당시 미문화원 방화 사건도 고신대 신학생이 주도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신학계 내부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고 봐야겠지.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가 되면서 종교계가 한국 사회의 평화통일 운동을 주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

 

 

 

특히 5.18 민주화 운동은 개신교에 상당한 충격을 줬어. 당시 극우 개신교 주류의 근간은 반공’, ‘친미였는데 5.18 이후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반미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거든.

 

 

 

당시에도 5.18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도 상당했었으나 민주화에 앞서 평화통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어. 선민주주의, 후 통일을 하자는 주장이 선 통일, 후 민주주의로 바뀌기 시작했고 대북 정책의 기조도 반공에서 평화통일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이 때 개신교를 필두로 한 종교계의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문익환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목사 등이 북한을 방문하며 한국 사회의 평화 통일 운동을 주도했지.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던 기존의 극우 개신교인들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해. ‘반공을 매개로 대북관계를 주도해오던 자신들의 입지가 진보 성향의 평화 통일론자들로 인해 좁아질 것을 우려한 것이지. 그래서 그들은 진보 성향의 KNCC 에 맞서 보수 기독연합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1989년에 만들게 되지.

 

 

 

A: 한기총이 이렇게 태동하게 되었던거야?

 

J: ‘반공 이데올로기’, ‘개인의 야욕이 뒤섞여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

 

 

 

 

 

최초의 반미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때 교육원장이던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었는데 그가 했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국가의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곧 국가라거나 또는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져 공산화되고 만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두려워 모든 국민이 정부가 시키는 말만 반복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공산독재국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때 최기식 신부는 범인 은닉죄를 적용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의 실형을 선고 받아.

 

 

 

A: 우리 나라 역사는 정말 격변의 시기가 많다.

 

J: 그랬지. 박정희의 시대를 지나왔더니 전두환의 횡포가 이어졌으니….. 그렇게 1970~1980년대 종교계의 저항운동은 1987 6월 민주 항쟁으로 마침내 꽃을 피워. 6월 민주항쟁이야말로 종교계가 일궈낸 현대사 최고의 사건이었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한 성명이 천주교에서 먼저 터져 나왔어.

 

 

 

이를 알게 된 종교계와 재야 시민 단체들은 2 7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 3 3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갖고 진상규명을 요구해.

 

 

 

그런데 전두환은 4.13 호헌 조치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펴 버리지. 이 때 천주교 사제 571명이 단식 투쟁에 돌입하고 사회 각계각층이 호헌 반대지지 선언을 내놓게 되.

 

 

 

그러다가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축소,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하게 되고, 6월 민주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본부’(국본)이 만들어져. 이 때 종교계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문익환 목사가 국본의 고문으로 참여하고 박형규, 오충일, 금영균 목사가 지도부로 참여했고 대변인은 인명진 목사가 맡았어. 천주교, 불교 인사들도 있었고

 

 

 

A: 6월 민주 항쟁 당시에 부산 쪽에는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씨 등이 있었죠? 서울에는 유시민 씨도 있었겠네?

 

J: 그랬지. 우리에게 이름이 익숙한 야당 정치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어.

 

종교계와 함께 국본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역시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지도부에 참여했었어. 23개 단체가 연대해 만들어진 민통련은 1980년대 재야 세력의 구심체 역할을 했는데 이 단체의 고문은 함석헌 목사, 김재준 목사, 지학순 주교였고, 상임의장은 문익환 목사, 사무처장은 황인성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가 맡았어.

 

또한 종교인이 지도부에 많다 보니 종교 시설을 집회 장소로 많이 이용하기도 했지. ‘명동성당’,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향린교회등이 여러 행사에 사용되었고….

 

결국 1987 6월 민주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커다란 성과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게 나중에 개신교가 권력화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해.

 

 

 

 

 

해외 교회들도 종교계 저항운동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는데, 개신교는 WCC, 미국교회, 천주교는 로마교황청, 파리외방전교회, 미국의 메리놀선교회 등이 열심히 도움을 줬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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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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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정희와 종교

 

J: 박정희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부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정책도 있었어. 그런 그도 15~16세까지는 집에서 500m 떨어진 상모교회를 다녔고 주일학교 선생으로도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어. 1967년에는 6.25 전쟁 때 파괴된 상모교회의 건축을 위해 비용 380만원 중 100만원을 헌금했고, 육군 공병대 트럭을 보내 1개월 간 교회건축을 돕기도 해. 대체로 무교로 살아온 그이지만 1970년 후반 박정희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전도를 받고 개신교 교회 출석을 고려할 만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어.

 

 

 

A: 박정희를 전도하려던 사람이 있었어?

 

J: 대표적으로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를 들 수 있지. 김준곤 목사의 반공 사상’, 그리고 박정희 정부로부터 특혜를 입어 얻게 된 ’….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할 만큼 할 말이 많으니 일단 생략할께..

 

 

 

박정희의 집권 초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규제 강화’, ‘형평성 차원에서 불교 지원을 종교 정책의 기본 틀로 삼았어. 왜나하면 이승만 집권 당시 개신교에 편향된 정책이 많다 보니, 이를 폐지하고자 했어. 결국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분명 다시 군대로 복귀하기로 국민들과 약속했음에도 그 약속을 어겼던 터라 박정희는 초조했을 거야. 국민들 눈치도 봐야 하고….

 

더군다나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진 정국이다 보니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적대감을 의식한 것으로 보여.

 

 

 

A: 예를 들어 어떤 부분에서 개신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거지?

 

J: 일단 중등교육 평준화 조치를 시행해서 학생 선발권을 없애 버려서 미션 스쿨의 개신교적 영향력이 약해지게 만든 점이야. 또한 주일 국가 행사도 이승만 집권 때는 없었다면 이를 다시 부활시켜서, 의사, 간호사 국가고시나 새마을운동 관련 행사, 예비군 소집도 일요일에 많이 했어. 그리고 주목례로 바뀌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라는 것도 추가되어 버렸어.

 

 

 

A: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선 어땠어?

 

J: 일단 불교는 여러 혜택을 입었어. 군종제도, 형목제도를 개신교가 독점하고 있다가 불교도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석가탄신일도 1975년도에 국가공휴일도 지정되었어. 또한 불교재산과리법도 재정해 주고, 새마을 운동 일환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기도 했으며 세계 불교지도자 대회도 지원해 줬어.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미국 유학파도 아닌, 토종 대통령이다 보니 민족 주체정 확립을 위한 측면에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많았어.

 

 

 

A: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좁 문화 보존의 필요성의 측면에서 불교를 지원했다면, 불교 이외의 종교들은?

 

J: 그 부분이 지적을 꽤 받았었어.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진행된 미신타파 운동의 영향으로 전통 종교들은 푸대접을 받았지. 나중에 무속신앙은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 전통문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지만….. 아이러니 한 건 자신의 딸이 참으로 요상한 짬뽕 종교인 영세교 교주 최태민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점이지

 

 

 

J: 5.16 쿠데타 세력 속에는 불교 신자가 다수 있었어. 대표적으로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두 차례나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불교계 핵심 인물 중 하나였어. 불교 신자는 장면 정부 시절 7%에 불과했는데 박정희 집권기에는 19.1%로 대폭 높아져.

 

 

 

당시 쿠데타에 참여한 군 지도부들 가운데 불교 신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게 영향을 미쳤을 거야. 박정희 집권 당시 국회의원 중 개신교 비율은 10%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승만 집권 당시 20% 넘겼던 걸 보면 대통령의 종교가 사회지도층의 종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A: 박정희가 개신교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왜 어느 순간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과 결탁하게 된 거지?

 

 

 

J: 박정희는 워낙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이다 보니, 개신교를 이용하고 싶어 했어. 정권 기반이 취약한 그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서 명맥을 유지했고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지지도 얻고 싶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혁명 공약 6개항 가운데 1~2순위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였어.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반공’, ‘친미가 절실했는데 이 두 가지를 가장 잘할 만한 거대 집단은 역시 개신교였어.

 

 

 

6.25 전쟁 이후로 뿌리 까지 반공주의가 체화되어 있고, 미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개신교의 미국 인맥은 상당했거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반고 이데올로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 ‘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등 다양하게 불릴 수 있는데,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선 아무리 뭘 잘못해도 간첩 조작 사건 일으키고, 빨갱이만 만들어 주면 다 용서되는 시대였어. 요즘도 이 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분단 국가의 난제로 남아 있지.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너희 공산당이지??’ 이런 위압을 주면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했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의 간첩 조작 사건은 현대 사회에도 보수가 집권할 때마다 발생하고 있지.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국정원 개입이 드러나고 있고, 워낙 뿌리 깊은 난제들 속에 암암리에 활약하는 국가 조직 단체이다 보니, 극우 정권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나눌 이야기가 많아.

 

 

 

 

 

A: 개신교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했다는 역사적 정황을 이젠 알겠어. 그럼 그들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변호한 건가?

 

J: 개중에는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정의평화를 위해 싸운 목회자들도 분명 계셨을 거야. 그러나, 오늘은 소위 기독교 주류 세력들의 정권 타협의 측면만을 나눠 볼께.

 

 

 

J: 개신교는 5.16 쿠데타 직후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데, 지지의 근거는 결국 반공이었어. 더군다나 개신교는 박정희의 10월 유신(1972)과 긴급조치 발령 (1974,1975) 등으로 민주주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구국기도회를 열어 사회 분위기를 반공 쪽으로 몰고 갔어.

 

 

 

A: 구국 기도회…. 지난번 11월 촛불 집회 때도 서울역 앞에 촛불 시위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때 차에도 구국 기도회 비슷한 말이 써 있던데….

 

 

       -5.16 쿠데타 당시 모습-

 

 

J: 그렇지. 극우 기도회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깊구나.

 

1975 7월에 열린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선 CCC 대표 김준곤 목사가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등 반공을 체제 유지에 적극 활용해.

 

 

 

그런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기독교가 진리의 핵심 전제로 받아들이다 보니, 베트남 파병 때도 파병군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의 십자군으로 묘사하며 파병 찬성, 대대적 환송 예배를 드리게 되지.

 

 

 

박정희 정권에겐 개신교 만큼 든든한 후원자도 없었을 거야.

 

베트남 파병 지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지지’ , ‘주한미군 철수 반대 시위등 개신교는 정말 열심히 그 정권이 유지되는 걸 도왔어.

 

 

 

 

 

 

 

A: 그 당시의 흉흉했던 시대 상황도 이런 불행한 사태에 일조를 했겠다..

 

J: 물론이야.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박명수는 이렇게 말했어.

 

 

 

“1960년대 국제 정세는 강력한 냉전체제 가운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인도차이나반도는 공산화의 위협 가운데 있었다. 여기에 김일성은 간첩을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정부의 군사적인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정신무장이 필요했고 또한 종교적인 힘이 필요했다. 대한민국 종교 가운데 반공 이념에 가장 투철한 종교는 기독교와 천주교였다…. 특히 기독교는 철저한 반공의 보루였다. 4.19 이후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보던 기독교는 박정희의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J: 박정희의 군부 독재 정권과 개신교의 유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 임마누엘 중대와 2. 구국십자군 창설 일거야.

 

 

 

베트남 파병 시기에 백마부대 내에 개신교인들로만 구성된 임마누엘 중대’ , ‘다윗 중대’, ‘요호수아 중대등이 만들어졌던 사건

 

그리고 파병 이후에 구국십자군이 창설되어 목사들이 직접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몇 주 전 [그것이 알고 싶다] 를 봤으면 잘 알고 있을 거야.’

 

 

 

A: ? 구국십자군이라면…… 박근혜의 정신적 지주인 최태민!!!!

 

J: 그렇지. 구국십자군은 최태민이 총재로 있던 대한구국선교단의 산하 단체야. 최태민 같은 사이비 교주도 반공이라는 키워드로 군부 독재 정권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니,. 어느 덧 권력의 심장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악용되고, 개신교가 정권에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사이비 종교, 국가 권력에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반공 이데올로기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논리 무시, 확률 무시하고 0.000001% 라도 정권에 반하는 말과 행동과 분위기를 풍기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북한을 다녀오고, 북한에 헌신한 빨갱이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지. 더군다나 이 만능요술봉 이데올로기사이비 종교’, ‘기만’, ‘부패’ , ‘부정을 다 암묵적으로 허용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같아.

 

 

 

분단 국가이고, 북한이 실제로 간첩을 보낸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고 조심은 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짓밟는 건 부당하지.

 

6.25가 안겨준 트라우마가 워낙 커서, 그 낌새가 조금만 보여도 극도의 공포와 증오가 생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라는 정신병리 현상으로도 이런 이데올로기를 연구할 필요는 있을 거야.

 

 

 

A: 개신교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았다는 점이 충격이야. 최근에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도 개신교의 역사를 배제하고선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데?

 

J: 그렇지. 사람들은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무당에게 휘둘리냐며, 분노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종결하고 다른 문제들도 관심을 옮기지만 그 기저에는 더 근원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배후에는 개신교의 책임과 잘못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

 

 

 

박정희는 또한 개신교를 미국과의 소통의 창구로서 활용했는데 실제로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한국 교회의 거물들이 5.16 쿠데타 직후에 미국을 방문해서 열심히 박정희 군사정권을 옹호해.

 

 

 

김장환 목사는 뉴욕 CBS 텔레비전 존 챈슬러(John Chancellor) 프로그램에 출현해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하는 일은 전혀 탄압받지 않는다. 종교인 가운데 구속된 사람들은 정치적인 활동 때문에 구속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주화 세력에 있던 목회자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버려.

 

 

 

A: 박정희 정권 때 정권 자체의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가만 놔두지 않았었잖아. 그게 어떻게 종교의 자유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탄압하지 않은 게 되는 거지?

 

 

 

J: 그러게. 논리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었지.

 

그 목사들에겐 반공을 지키고 친미를 지키는 게 복음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아니였을까 싶어. 이 중에 한 축이라도 흔들리려 하면 대대적으로 집단 행동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걸 보면다음 세대인 우리들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공감해 주고, 그들의 문제 의식을 경청하며 반영하되 그들이 놓쳐 버렸던 수 많은 영역들에 대한 반성과 각성과 변화 또한 필요할 거야.

 

 

 

A: 극우화된 개신교는 박정희에게 열심히 러브콜을 보냈으니, 이런 저런 혜택도 받았으려나?

 

J: 물론이야.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에 붙어서 이득을 취해 본 경험이 있다 보니 그들은 그 재미를 박정희 독재 시대 때도 누렸어. 일단 당시 군대 내 신앙을 가진 신자가 늘어날수록 사고가 줄어든다는 조사가 나왔고 이를 토대로 전군 신자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걸 활성화 시킨 사람이 박정희야. 초기에는 친불교 정책을 펴더니, 개신교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잘 외쳐 주고, 자신의 체제 유지에 유용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개신교에 아낌 없는 사랑을 부어주지. 물론, 자기 말을 잘 듣는 개신교도에게만

 

 

 

또한 이 시기에 개신교는 대형 전도 집회를 여는데 1973 5월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는 대단했어. 5 16일 대전을 시작으로 19일간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진행된 이 집회에는 연인원 320만 명이 참석했고, 신앙을 가질 것을 결심한 사람만 36000명이 나와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지. 그 다음으로 한국 대학생선교회(CCC)엑스플로 1974 기독교 세계 복음화 대회가 있었는데 연인원 650만명이 참석했어. 이 분위기는 전두환 집권 초반까지 이어여 1980년에 열린 ‘1980 세계 복음화 대성회는 연인원 1600만명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집회 기록을 자랑해.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집회는 군사 정권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어. 당시에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발효로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던 시기였거든. [금서] 목록도 어찌나 많았는지, ‘헉명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다 금서였어. 유시민 씨도 이 일화를 자신의 저서에서 웃프게(웃기고 슬프게) 풀어 놨지.

 

 

 

국가 행사 외에는 빌려 주지 않는 여의도 광장을 장소 이용료 없이 개신교에 제공해 주고, 부흥회 준비를 위해 군 공병대를 투입시켜 주고, 육군 군악대도 동원해서 찬송가를 연주해 주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기간에는 통행금지도 해제시켜 줬으니 박정희 정권의 개신교에 대한 지원은 엄청났어.

 

 

    -1974년도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결국 박정희 정권은 개신교를 통해 반공’, ‘친미체제를 강화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에 협력해 교세를 확장해 나가는 놀라운 공생 관계가 연출된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한국 교회사의 영향으로 메가처치 현상도 대두된 게 아닐까 싶어.

 

 

 

A: 박정희가 했던 여러가지 일들 중에 새마을 운동도 유명하지?

 

J: . 새마을 운동의 단초를 제공해 준 것도 개신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였어.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민들이 동참하도록 해야 할텐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조용기 목사에게 물었고 조용기 목사는 새마음운동을 벌이라고 조언했대.

 

새마을 지도자들이 개신교 농촌운동인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일정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조용기 목사의 조언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 가능해.

 

조용기 목사의 소위 ‘4차원 영성그 당시 표현으로는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도 중요해.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에게 희망을 준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급속도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면이 있었고, 교회들도 번영 신학’, ‘성공 신학에 도취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어.

 

 

 

A: 박정희의 공로 중 하나가 산업화를 성공한 거라고들 하잖아?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을 착취하고 부당하게 대우해서 그 공로마저도 논란이 많지만 말이야…. 이러한 산업화와 개신교도 관련이 있을까?

 

J: .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개신교였거든. 산업화가 되면서 급격히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을 개신교는 부지런히 흡수하면서 개신교의 교세는 성장했고 도시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무너지고, 인간 소외 현상, 빈부 격차 심화 등의 사회 문제가 생기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쉼터 역할을 교회가 자처하게 된 것이지. 또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이러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개신교의 급격한 교세 성장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같은 1세대 메가처치(엄청 큰 초대형 교회)를 탄생시켰어.

 

1970~1980년대에 다른 교회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산업화가 진행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개신교 신도는 62만명에서 자체 추산 1000만명에 육박해서 무려 16배로 성장했어. 교회 수도 5000개에서 35000개로 늘어나 7배나 증가했지.

 

 

 

A: 교회는 이런 부당한 역사 속에서 쭉 정권에 타협만 하고 온거야? 이건 너무 암울한데?

 

J: 결코 그렇진 않았어. 1970년대 들어 국가권력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거든.

 

개신교는 1968년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 위한 도시 산업선교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시작해. 도시산업 선교회는 출범 이후 1970년 전태일의 분신에서부터 1979 YH 노동조합 사건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의 굵직한 노동계 사건과 함께 하며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인권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어.

 

 

 

A: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가 흔들리는 건 눈뜨고 못 봤을 텐데?

 

J: 그랬지. 그는 특정 불순 세력을 잡고자 도시산업 선교회를 공격했고 이 때 인명진 목사, 문동환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이 구속되.

 

 

 

개신교는 1969 7 3선 개헌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1973 4월 남산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3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6 3 3.1 민주 구국선언, 1979 11 YWCA 위장결혼 사건 등에 관여하며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가.

 

 

 

그러다가 1973 4 22일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이유로 내란예비음모죄로 박형규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전도사 등이 실형을 선고 받기도 해.

 

 

 

A: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다른 종교계도 중심이 되어서 1973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했었지? 아마 서명 10일만에 30만 명이 참여해서 군사정권이 긴장했다던데?

 

J: 그랬지. 분명 그들의 행위는 정의롭지 못했거든. 그러다 보니 1974 1월에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 발동을 걸어. 1976 3 1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퇴진 을 요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지 박정희는 종교 지도자 27명을 체포하는데 여기에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서남동 목사, 안병무 목사,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등이 포함되지.

 

 

 

A: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던 개신교가 갑자기 저항 운동을 벌이니 박정희는 골치가 아파겠네.

 

J: 물론 대형교회를 이룬 극우 기독교 목사들은 여전히 정권을 찬양하기 바빴어. 그 와중에 야인처럼 들판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목사들이 출현한 것이지.

 

박정희는 총 9차례 긴급 조치를 발동했는데 이 중 실질적인 조치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나 반대를 금지한 긴급조치 1 (1974.1.8), 민청학력 등 반국가단체 구성을 금지한 긴급조치 4 (1974,4.3), 유신헌법 반대자들의 영장 없는 체포를 가능케 한 긴급조치 9 (1975.5.13) 등이었어.

 

(긴급조치 2호는 고등군법회의와 비상보통군법회의 설치를,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 등 민생 부분을, 긴급조치 5호와 긴급조치 6호는 긴급조치 1,2호의 해제를,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 휴교령과 군대 투입을 규정하고 있다.)

 

 

 

긴급조치 1: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긴급조치 4: 민청학련 사건 -> 이 때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 관계자들이었어. 한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 관계자들이 이 두 번의 긴급조치로 42명 구속되었는데 이 중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빼면 모두 개신교 관계자였다고 해.

 

 

 

민청학련 사건은 조사받은 사람만 총 1024명이고 이 중 203명이 구속되고 183명이 실형을 받은 최대 용공 조작 사건인데 이 때 많은 종교인이 구속되었어. 이 사건이 터지자 그 해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교회 협의회(WCC) 중앙위원회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각 나라 교회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해.

 

 

 

A: ~ WCC라면 몇 년 전에 기독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 단체인 걸? 많은 기독교가 WCC를 아주 위험한 세력으로 규정하던데?

 

J: 그 당시 전단지 뿌리고, 카톡 뿌려대던 이들은 다 극우 기독교 세력이라고 보면 되. WCC의 기원이나 의의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부족한 거지.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반공등에도 배치된다고 보니까….. 더군다나 극우 집단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동성애’ ,’낙태 같은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 그거 하나로 전체를 규정해 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지. WCC 단체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거 같다면, 그 단체의 설립 의의를 다시 공부하고 바르고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지, 무조건 악마 집단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그들이 키워온 증오의 신학의 산물이 아닐까?

 

 

 

A: 신학적으로도 논의할 게 많이 나오네?.,.. 최근 몇 년간 기독교 계를 술렁이게 했던 모든 이슈들도 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연결되는 구나?

 

J: 그렇지. 이슬람 포비아, 동성애를 경계하는 호모포비아 등의 사태와 법안 반대 서명운동 등 극우 단체들은 이런 쪽으로 열심을 많이 내. 신학적으로 건전한 길을 지향하고, 기독교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그걸 추진하는 세력들이 지닌 독특한 특성들은 그들의 운동에 동참하는 걸 꺼리게 만들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민청학련 사건은 로마 교황청에게 까지 소문이 전달되었고 교황청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많은 나라에 경악을 일으켰으며”, “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어.

 

 

 

박정희는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개신교를 겨냥해서 1975년에는 KNCC 선교자금 유용 사건을 일으키기도 해. 박정희 정권이 갑자기 KNCC 사무실에 들어와서 재정업무 서류를 압수하고, 김관석 목사와 교회 직원들을 체포해. 세계 식량기구 독일 지부에서 준 8만 달러의 선교비를 착복했다는 이유였는데 세계식량기구는 KNCC 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목사 등 관련자들은 구속되었어.

 

 

 

그 당시 천주교도 1.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2.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3. 함평 고구마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저항 운동에 참가하게 되. 그 전까지는 천주교도 개신교처럼 반공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오늘은 개신교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볼 테니, 이 부분은 생략할께.

 

 

 

즉 박정희 집권 후반기에는 정권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고 보면 되. 소위 진보 종교인의 탄생이지. 이들은 1970년대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며 강력한 체제 저항 세력이 되어갔어.

 

 

 

박정희 정권이 강화시킨 산업화가 기존 극우 기독교 세력의 덩치를 불리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반면 이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과 노동자, 농민의 인권 문제, 장기간의 군부 독재 정권 집권으로 인한 회의 등을 유발시킨 면도 있었어. 산업화의 양면성이지.

 

 

 

그러나 이런 국내적 현상 뿐만 아니라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4차 총회와 1962년부터 4년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진보 기독교인이 많아진 측면이 있었어.

 

 

 

1960년대 당시에 베트남 전쟁, 3차 중동전쟁, 체코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흑인인권 운동 등이 대두되면서 종교계도 각성의 바람이 불었거든.

 

 

 

이러한 두 국제회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보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 국내의 민중신학 등이 태동하게 되지.

 

 

 

참고로 개신교, 천주교와 달리 불교는 1980년대 들어서야 체제 저항적인 진보 종교인이 나타나. 1980년도에 전두환 세력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 사건을 계기로 불교도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지.

 

 

 

A: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

 

J: . 이런 격변의 시기를 지나서 그 다음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가보자.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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