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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미키마우스, 구피, 라푼젤, 토이 스토리 캐릭터, 엘사 등과 함께 스퀘어의 오리지널 캐릭터들이 만난다면?

북미에서도 인기가 많으며 전세계적으로 수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킹덤 하츠]

2019.5월에 시리즈 최초의 한글판인 킹덤하츠3 가 출시되면서 이전 스토리들에 대한 정리 유튜브가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전작의 스토리를 모르면 매끄러운 전개를 이해하는데 심대한 영향이 있기 때문에 선행학습이 필요한 게임이다.

 

스퀘어 특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잘 담긴 작품이다. 파판7에서 클라우드, 파판9에서 비비, 니어 오토마타 스토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전매 특허와 같은 컨셉이 킹덤하츠에도 들어가 있다.

한번 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두 번꼬고, 세 번 꽈서 요약 정리 영상을 한번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난해함이 강점이다(?)

자아분열적인 설정들은 '기억', '인간의 마음', '인격', '존재' 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아주 희망찬 디즈니 풍의 게임이다.

조작도 간단하고, 스토리, 그래픽, 음악, 구성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이니 여건이 된다면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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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GameDo 의 깔끔한 정리 Part I

[킹덤하츠 스토리 정리]

스퀘어 사의 노무라 테츠야가 마리오, 젤다의 전설에 감명을 받아 킹덤하츠 제작을 기획함. 디즈니 측에서 세계관과 캐릭터 사용을 허가해 줌.

-> 킹덤 하츠 스토리 구성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락해 줌.

-> 디즈니 세계관에 등장하는 캐릭터끼리는 스토리가 얽히지 않도록 제한을 둠.

-> 동화풍 느낌의 제목을 정함.

2002년 1편 출시 이후 현재까지 본편 + 외전 + 리마스터 포함 총 19개 타이틀이 나옴.

방대하고 스토리가 상당히 복잡한 게임이다.

 

[킹덤하츠1, 2001, PS2]

-소라/리쿠/카이리의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을 그림

 

-데스티니 아일랜드에서 살던 세 친구.

 

-하트리스들이 침략하고 섬이 어둡에 휩싸여 세 명의 친구가 뿔뿔이 흩어짐.

-이후 소라는 트레버 타운에서 자신이 열쇠 모양의 검인 키블레이드를 얻은 걸 알게 됨

 

-미키왕에게 ‘키 블레이드를 가진 자와 함께 하라는 명을 받은 도널드, 구피’와 팀을 먹음

 

-하트리스로부터 디즈니 세계를 구하는 모험을 떠남.

말레피센트의 꼬임에 넘어간 리쿠를 만나게 됨.

-키블레이드가 리쿠를 주인으로 선택하게 됨.

-도널드, 구피도 리쿠를 따르게 됨. (미키왕의 명령에 따라)

-키 블레이드에게 진정한 주인으로 선택된 소라는 전투에서 이김.

 

 

리쿠의 몸에 안셈이라는 어둠의 연구자가 빙의한다.

 

-안셈에 빙의된 리쿠는 마음을 해방하는 키블레이드를 지니게 됨.

 

-마지막 열쇠구멍 앞에서 카이리를 만나는데 카이리의 마음은 이미 빠져나간 뒤다.

-세븐 프린세스의 마지막 맴버가 카이리라고 리쿠는 말해줌.

 

-카이리의 마음은 늘 소라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됨.

-세븐 프린세스: 마음 속에 어둠이 존재하지 않고 순수한 빛의 마음을 보유한 일곱 공주.

: 칠공주의 마음이 모두 모이면 킹덤 하츠로 통하는 어둠의 문을 만들 수 있게 됨.

 

-소라는 안셈에게 승리하지만 카이리의 마음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라는 말을 듣고 카이리를 깨우기 위해 키블레이드로 자신을 찔러 희생하여 모든 칠공주의 마음을 되찾게 하는데 성공한다.

 

-마음을 잃은 소라는 하트리스가 되버리고 만다.

 

-문이 완전해지지만 이 문을 통해 더 많은 어둠과 하트리스가 나오게 됨.

-도망가던 카이리는 하트리스화된 소라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접촉하게 되어 소라는 육체를 되찾게 된다.

 

-세븐 프린세스에게 안셈을 무찌르면 모든 세계가 복원된다는 걸 듣게 되어 엔드 오브 더 월드로 가서 안셈을 무찌르게 됨.

 

-킹덤 하츠에게 어둠의 힘으로 자신을 채워달라고 부탁함.

-이어지는 소라의 일침은 킹덤 하츠의 근본은 ‘빛’이라는 말이었다. 이 빛에 당한 안셈은 소멸하게 된다.

 

-소라의 이야기와는 달리 어둠의 문을 통해 어둠, 하트리스가 쏟아지려 함. 그 때 문 건너편에 있던 미키왕을 만난 리쿠가 함께 문을 닫으며 두 개의 키 블레이드를 통해 어둠의 문을 닫게 된다.

 

-어둠의 세계에 남겨진 리쿠와 미키왕.

-하트리스에게 침략당한 세계는 점차 복원됨.

-소라는 미키왕, 리쿠를 구하기 위해 카이리와 작별하게 된다.

 

 

 

 

[킹덤하츠: 체인 오브 메모리즈]

-2004년 11월 GBA로 출시된 외전.

-1과 2 사이 이야기를 다룸.

-시리즈 중요 적대 세력인 13기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함.

-1편에 비해 많은 수의 오리지널 캐릭이 등장함.

-소라편과 리쿠편으로 나뉘어져 전개됨.

-소라는 리쿠, 미키왕을 구하는 여정 중 13기관 검은 코트 일행이 있는 망각의 성에 도착함.

-이 성을 오르면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함.

-그러나 성을 오를수록 예전 기억을 잃기 시작함. 카이리는 점점 나미네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하고, 리쿠는 1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소라를 괴롭힌다.

-레플리카 프로젝트로 만들어낸 리쿠의 레플리카들이 자꾸 나타나 방해를 했던 거다.

-검은 코트 일행을 무찌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소라.

 

 

 

-13기관의 목적: 소라를 이용해 자신들이 속한 기관을 무너뜨리려는 것

: 일행 중 한명인 액셀의 배신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액셀의 도움으로 소라는 기억 속 나미네와 만나는데 나미네는 기억을 조작하는 마녀였으며 기관 명령 때문에 소라 기억을 조종했던 거임.

-나미네는 소라의 기억을 되찾아 주려 하는데 성에서의 기억은 다 잃어야 했다.

-그래서 소라는 깊은 잠에 빠져 든다.

:성에서의 기억을 잃는다 = 나미네라는 인물도 잃는다는 것.

-리쿠 편: 리쿠는 성의 지하에서 눈을 뜬다. 리쿠의 마음 속에 남은 안셈이 어둠을 인정하라며 조종을 시도함.

-미키왕의 도움으로 마음 속 안셈을 이겨낸 리쿠는 성을 오르기 시작함.

-지금까지 성에서 만난 안셈은 어둠을 이겨내는 힘을 리쿠에게 주려던 디즈였음을 알게 됨.

-리쿠는 자신의 레플리카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미네를 만남.

-나미네는 리쿠가 지닌 어둠의 기억을 소라처럼 잃게 해줄 수 있다고 제안하지만 리쿠는 스스로 어둠과 싸우기로 결심하며 나미네의 도움을 거절함.

-잠들어 있는 소라를 지키려 하고, 자신과 남은 어둠과 싸우기 위해 미키왕과 리쿠는 여행을 떠난다.

[킹덤하츠 358/2DAYS]

-2009년 닌텐도 DS로 출시됨 / 킹덤하츠 2 이후에 나온 작품. 체인 오브 메모리즈 전과 후 이야기르 다룸.

-13기관의 13번째 맴버인 록서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룸.

-노바디라는 존재를 다루고 있다.

-노바디: 하트리스가 되어버린 사람의 소멸되지 않은 육체와 혼을 뜻하며 마음은 없지만 인격은 존재한다.

 

-록서스: 1편에서 카이리를 깨우기 위해 하트리스가 된 소라에게서 탄생한 노바디다.

 

 

-roXas (SORA), Xemnas(Ansem)

(록서스라는 이름은 SORA의 철자 배열을 바꾸고 X를 추가한 거다, 13기관의 리더 젬나스도 안셈의 노바디로서 철자 배열 바꾸고 X를 추가한 거다.)

-13기관 목적: 하트리스에게서 해방된 마음들을 모아 인공적인 킹덤하츠를 만들고 그 힘을 빌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여기서 말하는 킹덤 하츠: 사람의 마음으로 이뤄진 킹덤하츠.

(13편에서 안셈이 만든 킹덤하츠와는 다른 개념이다.)

-> 이걸 이루려면 소라의 키 블레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체인 오브 메모리즈에서 소라를 노렸던 거다.

-록서스와 액셀은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14번째 맴버인 시온(Xion)이 등장함.

: 13기관 맴버들처럼 노바디가 아닌 록서스를 카피하기 위한 목적의 레플리카

: 록서스의 복제판

: 소라의 노바디여서 키블레이드를 사용 가능했던 록서스. 그래서 키블레이드를 쓰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온을 창조한 것임.

: 그러나 소라가 잠이 들면서 록서스의 본체인 소라의 기억을 흡수하게 된 시온(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소라의 기억을 복원하는데 차질이 생긴 나미네

-소라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리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나미네

-리쿠를 만난 시온은 자신이 카피 능력이 있는 인형에 불과함을 알게 됨.

-소라의 기억을 알게 된 시온: 시온이 완전한 소라가 될 수도 있다는 것.: 13기관은 록서스보다 소라 그 자체가 되어가는 시온의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하여 록서스를 제거하려 함.

-시온은 록서스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원래 기억인 소라에게 돌려 주기로 함.

: 록서스와의 전투에서 일부러 패배하며 소멸되는 시온. -> 기억은 원래 주인인 소라에게 돌아감.

-시온은 록서스에게 킹덤하츠를 기관에게서 해방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시온이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건? 시온을 이루고 있던 건 소라의 기억이였기 때문에 시온의 인격은 곧 소라의 기억 자체여서 그렇다.

(인물들에 따라 시온의 외형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데 록서스에게는 카이리로 보이고 엑셀에게는 처음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보임)

-소라의 기억이 다시 돌아간다는 건 시온이라는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걸 의미함.

-소라의 기억으로 이뤄진 관계라서 시온이라는 존재 자체는 없던 거다.

-시온의 유언대로 기관으로 향하는 록서스

-소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록서스가 소멸되면 기억도 사라지며 소라도 깨어날 수 없으므로 리쿠가 막아섬.

-록서스에게 패배하는 리쿠는 어둠의 힘을 빌려 록서스를 저지하게 된다.

-소라에게 기억이 돌아가며 완전히 소멸해 가는 시온

-이후 소라를 만나 동화되는 록서스

-록서스와 시온의 희생으로 소라는 기억을 완전히 회복하고 1년간의 잠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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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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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에배 사건-

 

 

 

유신 이후 1979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받아낸 진술서 말고는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 25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6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1, 2, 4호 발동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 1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일곱 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 2차 인혁당 사건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런데 1974 5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우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무려 열네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라고 쓴 독자 광고도 기억난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 12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강신명, 김대중, 윤형중,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이희승, 이태영, 김영삼, 홍성우, 함세웅, 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 2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 에 찬성률 73.1% 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 % 에 찬성률 91.5% 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1975 4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김용원,이수병, 우홍선, 송산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 없이 사형시켜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레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화장해버렸다.

문정현 신부는 시신을 지키려고 경찰에 맞섰다가 차에 깔렸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발매된 [악마기자 정의사제] 책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발동-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 5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번ㅂ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학생의 집회, 시위, 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 해임, 해산, 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이런 조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 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양인응, 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김윤환, 이세기 교수를 해직했다.

교수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옹,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 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1975 8 17이리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뿐만 아니라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시위 주동자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1975 4 11, 서울농대의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5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한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첫 시위를 벌였다 

80명이 체포되었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가을 축제 행사 끝에 시위를 벌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1977년에는 한신대, 서울대, 감신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전북대, 국민대 등에서 반정부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까지 이 대학들과 더불어 계명대, 영남대, 강원대, 경희대, 부산대, 동아대, 전남대, 한국외대, 마산대, 경남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등장)

 

중앙정보부는 1979 3월 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명숙,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김세균, 신인령 등과 대학교수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 목사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농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뒤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다.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 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 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 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7 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역량을 키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농이라고 부르는 단체다.

 

 

<함평 고구마 사건>

 

-YH 무역 사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 8월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 YH 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 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YH 무역 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꾸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상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남민전 사건-

 

(김남주 시인 그리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정부는 치밀한 정치공작을 벌여 법원으로 하여금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리게 했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본회의장 주변에 무술경위를 배치한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희 의원들끼리 모여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것이 1979 10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수사진행 상황을 전격 발표했다. 무려 77명을 구속한 대형 조직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공안당국은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자택의 강도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것이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히고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 남민전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재문, 신향식 등이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려 한 것을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다.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다. 일부 인사가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었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 관련 단체 등장)

 

1979 10 16, 부산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다음 삼삼 오오 무리를 지어 거리로 나왔다. 종종 있었던 학생시위였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퇴근길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부산 시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해 버렸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끓어 오른 것이다. 공안당국은 부산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핵심 고리가 6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양서협동조합이라고 판단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소위 부림사건은 바로 이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동연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시위가 낮 밤 없이 계속되자 정부는 10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했다. 부산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확산된 마산지역 시위는 더 크게 불붙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을 투입했지만 10 19일 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군과 경찰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무려 1600여 명을 체포했다.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 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 10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만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 5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 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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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 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산업화 세력이 종북주의이념공세를 벌이고, 민주화세력이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에 빨갱이 마녀사냥의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막판에 허정과 송요찬 등 야권 후보들이 사퇴해 윤보선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는 민주화 이후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 반북,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부는 호남을 중심으로 흉년이 든 농촌에 원조 밀가루를 대량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가동하고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오로지 부정선거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남에서 압승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왔던 선거구에서도 이겼다.

도시에서 전반적으로 지기는 했지만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시민계층과 진보적 청년층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만약 내가 그 때 젊은 유권자였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쿠데타 주모자를 뽑기도 싫었겠지만 윤보선 후보도 지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경제적 자주, 자립이라는 공약을 미국원조를 거부하는 반미주의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편들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후보는 미국 원조자금이 52% 를 차지한 6000억 환 규모의 1961년도 추가경정예산을 경제적 대미예속이라고 비판했다. 1959년 시설부문 미국 원조 2 800만 달러 가운데 공업화를 위한 시설의 비중이 2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원조 총액의 30%를 차지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가경제가 몰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막대한 기업부채 규모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민족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모두 타당한 현실인식이었다.

 

 

 

-김종필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 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한일합병조약을 포함해 1910년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제강점기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배상과 징용 조선인의 미지급 임금 등 대일청구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 해역 50~60해리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요구를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합법적이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강점기 수탈에 대한 배상을 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떠난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고, 한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 들어 미국이 새로운 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한국을 묶으려 했다. 장면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성과를 토대로 1961년 말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한 끝에 1962년 가을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이 합의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1964 3월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5.16 이후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였다. 집회시위는 전국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정부투쟁이라기 보다는 당당한 대일외교를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1964 3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을 면담했고 다음 날 전국 대학생 대표들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학생 대표들을 대통령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마침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수천만 달러의 창당자금을 제공한 의혹이 불거졌다.

정권 실세들이 국유지를 부정 불하해 거액을 챙긴 사건도 터졌다. 여기에다 중앙정보부가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학생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이 부패한 친일세력으로 보였다. 5 20일 서울대 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레식이라는 규탄집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이념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공격했다.

 

 

 

-6.3 항쟁, 인혁당 사건-

 

그러자 정부는 대화를 포기하고 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거리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라고 판사를 협박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며 중앙정보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 사태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 8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 변란을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인혁당 사건>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 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 6 22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 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약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의 비준 절차가 진행된 여름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정부는 대학교를 미리 폐쇄하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비판적 언론인을 테러, 납치, 폭행하면서 언론보도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다시 군 병력을 투입했다. 9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학생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6.3투쟁은 1.49 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와 언론통제, 대학과 재야인사에 대한 감시체계를 대폭 강화했지만 학생운동과 야당, 재야 또한 투쟁 역량을 비축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공병단 파견을 시작해, 1965년 수송단과 공병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거쳐 1966년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0만 명 이상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다.

주둔 병력이 최대 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한미 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가 3000명의 병력을 비전투 임무를 주어 이라크에 파병한 2004년에는 전국적인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베트남 파병은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반대여론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고, 세계 평화와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6 9 [경향신문]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핵심은 일본 미쓰이물산이 울산 한국 비료 공장건설사업과 관련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과 삼성 관계자들은 현금 대신 대량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온 다음 이것을 처분해 정치자금과 공장 건설비, 한국비료 운영비로 쓰려고 모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설탕이 아니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과자와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자랐다. 정경유착과 밀수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이창희 씨가 총대를 메고 대신 구속되었다.

야당은 밀수 재벌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효창운동장에서 야당이 연 규탄대회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한 장준하 선생을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대학가는 정부와 재벌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집회로 끓어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리턴매치를 벌인 1967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4년 전보다 훨씬 큰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부와 공화당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전국을 돌면서 개발공약을 쏟아냈으며 일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온갖 빌미를 잡아 야당 후보를 구속하고 선거운동원을 구금했다. 공화당 조직은 막걸리, 고무신, , 밀가루, 현금을 집집마다 돌렸다.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고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 넣은 사례도 숱하게 드러났다. 도처에서 야당 참관인을 폭행해 내쫓았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후보 표를 무더기 무효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74% 130석을 차지했다.

 

 

 

-동백림 사건-

 

부정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규탄집회와 거리시위가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별로 휴업과 조기방학 조처를 내렸지만 시위는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그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 세칭 동백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해 북한을 오갔던 임석진 박사가 조선일보 독일특파원 이기양 기자 실종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신의 행위를 고백한 데서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을 한국으로 유인하거나 대사관에 모은 후 강제 압송했다.

<동백림사건>

1967 78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정하용, 황성모, 최창진 등 대학교수와 정규명 등 유럽 유학생, 장덕상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무려 66명을 검찰에 송치하고 23명에게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를 씌웠다. 신민당 6.8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의 장준화 의원과 부완혁 집행위원도 엮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1970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 반면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가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식어버렸고 선거무효를 주장하면서 장외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원내로 복귀했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 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 1.21 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 20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 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작업 그리고 촛불집회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2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먼저 내부의 개헌반대론자들을 회유, 고립시켜 공화당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3선 개헌안을 채택하게 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위,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신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앙정보부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일부 야당의원들의 3선 개헌 지지성명을 이끌어냈고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대학 문을 열지 않았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긴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촛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 9 14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대학이 다시 시위 열풍에 휩싸였고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0 17일 개헌 국민투표에는 77.1 퍼센트의 유권자가 참여했고 65.1 퍼센트가 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리고 김대중의 등장-

 

1971 4 27일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 20,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 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김대중 후보는 미, , ,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 18 100만 명의 청주우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검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김지하 시인이었다. 정부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 [오적]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 [o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 [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를 협박, 회유해 보도록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예비 음모사건>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성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7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관계자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10월 유신 체제 등장 (그리고 김기춘)-

 

그는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개헌안을 공고했다. 정부는 11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 %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것은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에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 , 동에서 하나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되었다.

 

12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 공약 발표도 하지 않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8년에는 똑 같은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다.

따라서 그날 이후 민주화운동은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힘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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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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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현재]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욕망이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피치자뿐만 아니라 통치자까지, 법률은 만인을 똑같이 구속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국가권력과 피 흘리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

 

 

 

민주화는 전제정치 또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노력과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민주주의와 독재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산업화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경제이론을 활용했다.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투표를 저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개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다수 국민이 원해도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모든 선거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형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보장,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 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 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 노동자 표정두(이상 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 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 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되면서 분신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연속적,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 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 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주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민주화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용공이적단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발표한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왠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 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의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조직에는 국민협의회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이 붙는다.

줄이면 국본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시위 장소와 시간,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가 실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 없이 동원한다.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한다. 경찰 병력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 틈 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준다.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들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 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 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MGM 사의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 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로 가는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위 진압 능력에 관한 한 군이 경찰보다 나을 게 없다.

유일한 차이는 총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1964 6.3 사태나 1979년 부마민중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 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혁명 때는 경찰관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인물 몇몇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1987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불법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 투석, 화염병 투척, 야간시위 등 시위대의 모든 행위가 실정법 위반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그것을 최고의 법인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든 것은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가 된다.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은 곧바로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 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 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검찰총장(채동욱)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중국 정보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자백] 참고)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집권탕의 행태를 용인한다.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며 상당 기간 동안 제법 큰 격차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식과 행태가 좌우한다.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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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IMF 가 남긴 후유증 양극화- : 현 정권까지의 흐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거시경제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약자를 몰락시키며 약자가 사라져 생긴 시장의 공백은 더 강한 자가 차지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경제위기는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현저한 약화였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되었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양극화다.

양극화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더 온건하게는 격차의 확대라고 한다.

 

IMF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그룹이 여럿 해체되었다. 그러나 삼성, LG, SK, 현대차, 롯데, 한화, 한진, 동양, 대림, 효성, 코오롱, 두산, 대상, 한솔, 금호, 동부, CJ 그룹 등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공장 일을 내 일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산업화시대의 구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평생고용이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고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한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 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권 기간에 한국 사회는 양극화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진보정권은 국민경제를 대체로 잘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각각 5년간 평균 4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1998 7335달러였던 것이 2007년에는 22000달러에 다가섰다.

물가상승률도 3%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낸 덕분에 2007년 말에는 25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가 쌓였다. 실업률은 3% 대로 내렸고 달러 환율은 900원 수준으로 외환위기 이전과 비슷해졌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 경제 신인도 역시 외환위기 이전인 A등급을 회복했다. 종합주가지수는 노무현 정부 때 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그러나 국민의 실제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간단한 통계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 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우리의 소득분배 통계는 부족한 점이 많다. 정부가 소득분배 관련 데이터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 조사기관과 조사방법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기업이 당기순이익 중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쌓아두는 사내유보를 소득에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언론인들은 종종 서로 다른 종류의 지니계수를 뒤섞어 사용한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 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양극화의 추세를 보려면 같은 대상을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시계열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야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소득분배의 상태를 비교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분배지표는 전국가구가 아니라 2인 이상 도시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분배지표밖에 없다.

 

……..

 

1990년에서 1996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 그러다가 1997년 이후 현저하게 악화되었으며 그 경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소득 분배지표와 가처분소득 분배지표의 격차는 지니계수가 0.01에서 0.025 내외로, 소득 5분위 배율은 0.2에서 1.0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진보정권의 복지지출 확대는 가처분소득의 불평등한 분배를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

 

2010년 이후 분배지표가 악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시장소득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부분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등 노동시장 양극화 추세가 완화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 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 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 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 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 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 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 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와 세계 7위 경제 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 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2]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3]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4]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 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릎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 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품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어느 쪽이 먼저일까? 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것도 먼저가 아니다.

이 둘은 선순환(Positive feed-back) 관계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자기중심적 선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를 철폐해야 효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틀리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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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16 쿠데타]

 

1961 5 16일 새벽, 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장면 정부는 남로당 경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박정희 소장을 중용하지 않았으며, 군 내부에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는 장성도 많았다. 미국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군사혁명의원회 의장으로 내세웠지만 쿠데타의 리더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미국 대사관과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 차례 정보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 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남북분단과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이 유혈내전을 벌이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가 하야를 만류하자 아무 실권도 없는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를 할 테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 6조를 폐기하고 1963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득표율 격차는 1.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 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4.19 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 혁명을 인정했다. 1962 12 26일 공포한 제 3공화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4.19의거이고 5.16은 그보다 더 의미가 깊은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4.19는 민중이 궐기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지만 새로운 권력 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가 주어진 것 말고는 바뀐 게 별로 없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 조직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중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구악일소를 내세운 혁명공약가운데 가장 쉬운 것부터 실행했다.

 

 

자유당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개 쳤던 정치깡패 이정재, 인기배우들을 괴롭혔던 영화계 건달 임화수, 전설적 조폭 두목 신정식, 정치깡패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의 재판이 5.16 쿠데타로 중단되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로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사형수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에서 출발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장면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하나의 역사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복잡하고 상충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다.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 생애-

 

박정희는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 5남중 막내로 1917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난 탓에 소년 박정희는 살가운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중도 진보 성향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둘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1 사건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소년 박정희는 공부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과목과 체육을 잘했다. 어른들의 강권에 떠밀려 김호남과 결혼했지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는 않았다.

1937년부터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1940년 제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다카키 마사오였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당시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 만든 괴뢰국가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고 만주군이 해산되었다.

 

소속이 없어진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 1대대 제2중대장이 되었으며 1946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그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11,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둘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그는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유일하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은인이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그를 구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편을 당해 앞날이 막막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1950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는 쿠데타를 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장면 정부는 친일 전력이 아니라 좌익 전력때문에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제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5.16 이전에도 세 차례나 쿠데타를 하려 했다. 첫 번째는 1960 3.15 선거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 다음은 1961 4 19일이었다.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민주당 정부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혼란이 벌어지면 그것을 빌미 삼아 쿠데타를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날은 별다른 시위가 벌어지지 않자 두 차례 거사일을 조정한 끝에 5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과 관련해 두 사람을 미리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정치 신인 김대중이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청년 사업가 김대중은 정치 입문 8년 동안 세 번이나 낙선한 끝에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불과 이 틀 후 5.16이 터져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었던 이 불운한 30대 정치 신인이 불과 10년 후 강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청년 장교 전두환이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갔다가 1년 후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으며 6년제 대구 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진해로 와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11기생으로 입교했다. 5.16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군단 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는 5 17일 육군본부로 무작정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독대했다. 그런 다음 쿠데타군 실세인 양 육사교장을 압박하고 생도들을 선동해 쿠데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했다. 5 18일 오전 육사생도와 소속 장교, 졸업생 1000여 명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 광장으로 행진했다.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소장을 독대하고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사주한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을 보 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이 때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회라는 육사 출신 장교 사조직을 만들어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대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 역시 없었다.

 

[김대중과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가 남긴 좋은 것들]

 

 

 

4.19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 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박정희 집권 시절,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사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2공화국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 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다른 건 몰라도 경제성장 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고정관념이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년의 불황과 1997년의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수습한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까지 진보정권 10년 동안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 시절과 비슷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수습된 후인 2010~2013년의 상승세는 진보정권 때보다 나을 게 없다. 결국 경제성장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관 그리고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선택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이 과제에 도전했다. 그는 성공한 사례를 알고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유럽을 따라잡는 산업화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독재를 확고히 한 가운데 국가계획에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시 계획경제를 실행함으로써 대량실업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해소했다.

결말은 침략전쟁 패배로 인한 체제붕괴였지만, 단기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두드러진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박사와 달리 전 남로당원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사회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봉착한 첫 과제는 인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중화학 공업을 신속하게 육성해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포위당한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사적 소유를 일부 허용하는 가운데 국가전략산업을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절충형의 신경제계획(NEP)을 실시했다.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생산수단과 토지를 완전히 국유화하고 생산과정을 집단화하는 등 전면적인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소련은 1941 6월 유럽 동부전선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 24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과 제휴해 독일과 싸웠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막바지에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협공했다. 차르체제의 러시아군과 달리 소련군은 중화기로 무장한 현대적 강군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소련공산당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매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 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헤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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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박정희의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 8000여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 전문대 이상 대학 학력자가 24%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1970년대에는 중동지역이 외화 획득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공사로 시작한 중동 건설 붐은 남광토건, 신한기공, 대림산업의 요르단,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쿠웨이트 건설수주를 거쳐 1976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항만공사로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1979년 중동지역에 파견된 한국 노동자 수는 10만 명에 육박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 부산에 7, 경주에 4,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고 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리고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물가인상을 유발함으로써 현금과 예금을 보유한 국민을 착취하고 부채가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1972년의 8.3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것은 실패한 화폐개혁보다 더 노골적인 사유재산 침해 행위였다. 과도한 사채 규모와 높은 금리 때문에 부도 위험에 빠진 기업이 늘어나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 대출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박정의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즉각 무효화하고, 채무자가 사채를 신고하면 3년 거치, 5년 분할로 시중 사채이자의 3분의 1 수준인 월 1.35 % 의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채권자가 원할 경우 사채를 출자로 전환해주고 2000억원의 특별자금을 조성해 기업의 단기성 대출금을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바꾸어주도록 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조처였다. …. 채권자의 사유재산을 빼앗고 거기에 국민의 세금을 얹어 기업에 제공한 8.3 긴급조치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벌의 등장, 전경련의 탄생-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5.16 직후 군사혁명정부는 재개 서열 10위권 기업인들을 모두 구속했다. 일본에 출장을 간 덕에 체포를 면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지지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방침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시기에 만든 불합리한 세법 아래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한 기업인과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을 구별해야 하며, 경제인을 처벌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면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사정부의 종용을 받고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1961 6 27일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그는 법대로 세금을 냈다면 살아남은 기업이 없었을 것이며, 그런 환경에서도 큰 기업을 일군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속되어 있던 기업인들은 조국근대화사업에 협력하기로 맹세하고 모두 풀려났으며 각자 일정액의 추징금을 납부했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났을 때 기업인들에게 벌금을 물리기보다는 공장을 지어 정부에 헌납하게 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제안을 수용해 정부가 기업에 투자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국가기간산업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이 계기가 되었다.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다. 그 후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조금 지나면 대통령이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삼성그룹의 역사-

 

삼성그룹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병철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업과 운수업을 했다. 이승만 정부 때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며 한국전쟁으로 대구에 피난해 있으면서 제조업 진출을 준비했다. 가장 먼저 제일제당을, 그 다음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그는 소비재 독과점 공급자의 지위를 활용해 벌어들인 돈으로 국내은행 주식의 절반을 취득해 금융업 기반을 만들었다. 5.16 이후에는 일본 자본을 끌어와 울산에 한국비료를 세웠으며 동양방송, 용인자연농원 등 미디어와 레저산업에 도전했다. 1970년대에는 전자산업, 조선업, 플랜트사업, 석유화학, 방위산업에 손을 뻗었고 생명보험, 백화점, 호텔사업에도 진출했다.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은 1983년에 착수했다. 미국과 일본 기업에서 기술을 도입해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64KD 램과 16KS 램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웨이퍼를 수입해 회로를 입히고 절단해 중간재를 만드는 단순 공정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전후방 연관기술을 개발해 반도체 결정을 키우는 데서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데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 기업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집적기술을 확보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은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등 중화학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자공학 등 최첨단 수출산업 분야로 주력업종을 빠르게 교체했다.

이건희 회장 체제로 넘어온 뒤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삼성그룹은 하드웨어산업 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 이동통신기기, 문화콘텐츠, 의료서비스와 의료기기,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산업 등으로 계속해서 주력업종을 교체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나라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소득분배에 신경을 쓰다보면 경제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소득분배가 되도록 균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을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의 소득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 것은 UN 이었다. UN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 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1961 2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정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요강을 발표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서둘러 작성했지만 집권 민주당과 내각에서 사회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만 계획경제를 싫어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공공재와 국가기간시설을 비롯해 꼭 필요한 만큼만 하겠다면서 계획을 밀고 나간 끝에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군사정부의 손에 넘어갔다.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소비재 경공업 뿐만 아니라 철강, 자동차, 금속,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과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반도체, 이동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수출입을 합친 금액이 국내총생산과 맞먹을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다. 주요 산업을 거의 모두 소수의 재벌이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나 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에 불과하며 고용안정성과 근로환경도 현저히 나쁘다. 기업은 사실상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 외국자본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대기업들은 생산시설 일부를 외국으로 옮겼고 부품과 중간재를 외국에서 조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심화되었다.

 

국민경제가 이룩하려면 활주로와 연료가 있어야 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대한민국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자본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업화를 하려면 공장건물, 기계, 원료와 중간재 같은 실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해버리고 농지를 초지로 바꾸어 농업자본가에게 임대한 소위 인클로저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소비재산업에 앞서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을 먼저 육성했다. 시장 경쟁이라는 사회적 강제나 물질적 부를 향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혁명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 국가자본을 쌓았다. 냉전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념적,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는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생산물의 처분에 관한 권한을 자본가가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 행사한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초점은 단기간에 대량의 국가자본을 축적하는 데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주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또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을 위한 것이었다. 1 5개년 계획(1962~1966)의 핵심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국가기간산업 확충,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농업생산력 제고, 수출 증대, 기술 진흥이었다.

공공재 공급과 국가기간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장면 정부의 계획과 다를바 없었다. 이것은 비행기를 띄울 활주로를 닦는 작업에 해당했다.

 

2 5개년계획(1967~1971) 목표는 식량 자급, 삼림녹화, 화학, 철강, 기계공업 건설, 7억 달로 수출, 고용 확대, 국민소득 증대, 과학기술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 등이었는데 핵심은 화학,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1 5개년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가장 큰 난관은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 투자에서 이윤 획득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축적된 자본이 없었으므로 밖에서 들려오는 것 말고는 단기적 해결책이 없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 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산업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산업화의 성공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국민들에게는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김형욱, 김재규, 김성곤 등 음습한 정보공작 정치의 책임자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고위 경제관료들이다. 경제개발계획 입안과 집행을 총괄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1964~1967), 박충훈(1967~1969), 김학렬(1969~1972), 태완선(1972~1974), 남덕우(1974~1978), 신현확(1978~1979)이었다. 산업정책과 수출정책을 담당한 상공부장관은 박충훈(1964~1967), 김정렴(1967~1969), 이낙선(1969~1973), 장예준(1973~1977), 최각규(1977~1979)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국내 명문대학과 외국에서 공부했고 공직을 마친 다음에도 안락한 노후를 보냈다. 비밀결사를 만들고 거리시위를 조직해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이 수배, 도피, 체포, 고문, 투옥으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숱한 무용담과 인생 드라마를 남긴 것과 달리 그들의 인생에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산업화 초기의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남긴 기록에는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절반을 넘기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수출제일주의, 10년이 넘는 대규모 장기계획, 산업기계, 조선과 운송기계, 철강, 화학, 전자 등 5대 산업의 집중 발전 등이 선언의 핵심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위원장을 맡았으며 100억 달러 투자재원 조달계획에 따라 첫 3년 동안 31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동원했다. 오원철 경제수석, 김정렴 상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주역이었다.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을 증강하고 국군을 현대화하는 데도 필요한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업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참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나라 안팎에서 100억 달러를 동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한국 경제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했다. 국제 경제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이 돈을 찍어낸 탓에 달러 가치가 폭락하자 미국 정부는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 제도를 전격 중단해버렸다.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축으로 한 전후 국제 금융질서가 무너져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1973년 가을,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 대한 원유 공급을 거부하는 원유 무기화전략을 썼다. 1배럴에 2달러 수준이던 국제 원유가격이 단숨에 다섯 배 이상 뛰어올랐고 국내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계속해서 대규모 정부차관을 들여와 기업에 배분했다. 해외 국가채무 규모가 급증하자 나라 안팎에서 외채망국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원유가격 폭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 국가의 건설 붐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면서 속도를 냈고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올랐다.

 

4 5개년계획(1977~1981) 한복판에 10.26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4 5개년 계획 목표에 자력성장 구조 확립,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등과 더불어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을 포함시킨 것을 보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한국 경제가 이미 이륙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륙을 할 때는 추진력과 가속도가 중요하지만 이륙한 후 순조롭게 비행을 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경제정책과 관련해 처음으로 형평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4 5개년 계획 첫해인 1977년에 우리 경제는 100억 달러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조기에 달성했지만 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했고 생필품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내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다시 한번 물가가 폭등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정부가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율 10% 의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소비자물가는 더 높게 치솟았다. 민심이 사나워질 수 밖에 없었다.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에 형평을 포함시킨 것은 시의적절했지만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물가 폭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10.26 사태와 5.18에 이어 1980년 여름 이상저온 현상이 한반도를 덮쳐 농업마저 대흉작을 기록하자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계획 시행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산업화 이후 첫 번째로 맞은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후에도 세 차례 더 수립되었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1982년에 시작한 제5 5개년 계획의 목표에서 성장이 빠졌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제6, 7차 계획에는 자율, 경쟁, 개방, 국제화, 기업경쟁력 강화 같은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그런 목표들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적 계획경제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했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지구촌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세를 형성했다. 국내 대기업과 재벌들이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재원을 조달해 기업에 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1997년의 외환위기와 함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위협과 폭력이 항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는 것, 국민들이 국가의 목표를 자신의 개인적 목표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면 정부가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산업화의 성공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재벌과 정부의 관계 변화-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정부가 이고 재벌이 이었다. 정부의 사업허가와 자금을 배정받아야 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바쳤다.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3저 호황과 고도성장기를 거쳐 재벌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정부가 권력으로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게 되었다. 재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선거자금을 제공했다. 집권세력에게는 많이, 야당에게는 보험차원에서 적게 주었다. ‘삼성 X파일사건에서 보듯 삼성그룹 같은 재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과 검사를 포함해 국가권력 행사와 관련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돈으로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자본 권력이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포획한 것이다.

 

……….

 

1995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로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 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 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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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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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전개를 상당히 맛깔나게 잘하며 명실상부 유물론적 다위니즘의 선두주자인 리처드 도킨스. 그가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은 수사학적인 면이 강하고,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보이나 일반적으로는 대중들에게 재미있게 읽힐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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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인간 존재의 비밀이 풀렸다!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복잡함 을 인정한다.

 

이 책은 격정으로 쓰여진 글이다.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간혹 적용됨을 인정하면서 다른 더 많이 적용 가능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저자는)

 

신념을 철통같이 지키는 사람이다.

다윈주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쉬워서 무지한 비평가의 좋은 표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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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 ?

1)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2)    작은 과정들의 누적에 관한 이론

 

다윈주의가 단순했다면 진작 발견되었어야 한다.[19세기 중엽이 되기 이전에..]

 

다윈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

 

1)    다윈주의는 무작위적인 우연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생각이 너무 만연되어 있다.

 

(복잡성은 우연과 반대이므로 다윈주의=우연 으로 봐 버린다면 다윈주의는 반박하기 쉽게 되는 게 당연하다)

 

저자의 강조: 다윈주의는 우연이 아니다.

 

2)    뇌 자체가 굉장히 긴 시간 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한다.

 

저자의 강조: 잘 조율된 회의론 , 주관적인 확률론 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몇 십년 간만 작동해서라나.[어려움..]

 

3)    인류가 창조적인 설계자로서 거둔 찬란한 성공 때문에 복잡하고 고상한 건 미리 계획되어 정교하게 설계 되었으리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게 됨.

 

다윈과 월리스-> 원시적인 단순함에서 복잡한 설계가 만들어 짐을 제시함.

 

책의 목적: 우리의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것.

 

 

<1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인간은 복잡한 사물이다.

 

물리학: 단순한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대상이 단순하긴 해도 난해하고 어려운 수학으로 인해 어려워 보이는 학문이다.

 

(생물학적 대상)가 물리학 교과서를 쓰게 만들었으니..(생물학의 우월성? )

 

우리와 다른 복잡한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고민해 보자.

 

우리가 지닌 몸도 사실은 엄청나게 복잡해도 비행기와 같은 기계다.

 

망원경과 눈을 비교하는 것 또는 시계와 생물을 비교하는 건 오류다.

(눈과 생물에서 일어날 수 있는.유니크한 변수를 고려치 않은 거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시계공=맹목적인 물리학적 힘

 

è  즉 다시 말하면 이 시계공 자연선택 이다. 이 녀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연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철학자 흄이 한 일->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증거로서 자연 세계에 대해 계획이란 말을 사용하는 논리를 비판함 (하지만 계획이란 말을 대신할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않았다)

 

복잡하며 설계되었음이 확실한 물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복잡성의 필수 조건

 

1)    불균일한 구조

 

Ex) 어떤 물체를 둘로 잘라서 두 내부구조가 균일하면 안된다.

 

2)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은 필요 조건은 되지만, 이것 만으로는 복잡하다고 말할 충분조건 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연성이라는 수학적인 개념을 적용해 보자

 

3)    구성 요소들이 순전히 우연을 통해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방법으로 배열되어야 한다.

(, 사전에 규정된 어떤 성질, 즉 단순한 우연만으로는 매우 얻기 힘든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물에 있어서 사전에 규정된 어떤 성질은 일종의 능숙함 이다.)

 

무생물(이 책에서는 인공적인 기계는 생물로 간주한다.설계된 녀석들이므로.그러므로 인공적인 기계는 제외한)은 단순히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따르지만, 생물은 좀 다르다. 물론 생물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무엇이나, 물리학의 법칙에 반하는 생명력 따위란 결코 없다.

 

è  단 어떤 생물 전체의 행동을 이해할 때 , 물리학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문제가 있다.

(죽은 새를 하늘로 던지면 기본 물리 법칙인 중력의 법칙에 의해 포물선을 그리며 뚝 떨어지지만.산 새를 하늘로 던지면 그 법칙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하늘로 박차 올라갈 것이다.)

 

, 설계된 기계나 생물이 작동하는 법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성 성분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아 봐야 한다.

 

주장: 그러므로 만약 이해하지 못한 복잡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더 단순한 것의 차원으로 환원시킬 때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단계의 부품들의 동작을 설명할 때 그것을 구성하는 더 작은 부품(그 당시에는 그 부품의 내부 구조를 묻지 않고 그런 것이려니 할 것이다.) 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어느 모로 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만큼 단순한 것에 이를 때까지 양파 껍질 벗기듯 그 단계를 낮추어 간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너무 짧아서 대부분은 그것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죽는다.

(물리 학자들은 기본 입자나 소립자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이 양파 껍질 벗기기를 시도할 수도 있다지만)

 

일반적인 우리 들이 이 모든 것을 이러한 세부적인 수준까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만족할 만한 설명이란: 다루기 쉬울 정도로 적은 수의 상호 작용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 방식= 단계적 환원 주의

 

요즘은 환원 주의를 나쁜 사조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환원주의자는 없다.(모든 사람이 반대하지만 상상 속에만 있는)

 

존재하지 않는 환원주의자

 

è  복잡한 물건을 무턱대고 가장 작은 부분의 입장에서,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그 작은 부분들의 총합으로 설명한다.

 

단계적 환원주의자

 

è  복잡한 전체를 설명할 때, 처음 단계에서 단지 한 단계 낮은 부품들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복잡한 물건이란?

 

è  그것이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물건. (이러한 것은 일회적인 우연으로는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의 생성 과정을, 우연히 생겨날 정도로 충분히 단순한 최초의 물체가 점차적으로, 누적적으로 , 단계적으로 더 복잡한 물건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앳킨스-> 적절한 물리적인 조건만 갖추어지면 복잡한 것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함. 그러고 나서 매우 개으른 창조주가 해야 할 최소한의 설계 작업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 물리화학자가 내린 결론은 창조주는 극히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과제= 궁극적인 기원과 궁극적인 자연법칙을 밝혀내는 것

생물학자들의 과제= 복잡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눈의 복잡함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 1장을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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