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지라르는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 등에서 발견되는 과도하고 급진적이고 위험한 '해체'보다는 인류 문명의 오래된 '축적된' 지식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해체(deconstruction)라는 말은 파괴(destruction)뿐 아니라 건설(construction)도 파함한다. 이 데리다의 해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시작'(andere Anfang)을 연상케 한다.​

​......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속하는 또 다른 학자인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2005년 지라르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했던 수락연설에 대한 답변에서 그를 '인문학의 새로운 다윈'(nouveau Darwin des sciences humaines)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어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인문학의 새로운 다윈"이란 제목으로 지라르의 학문적 여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지라르는 '기독교의 헤겔'이나 '인문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라르는 다른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과 함께 논의를 해나가면서도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독창적인 연구를 지속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 해독하려고 했던 신화의 수수께끼를 마침내 풀었고, '문화의 기원'을 희생양 메커니즘 속에서 해명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지라르는 문화의 기원을 해독한 '인문학의 다윈'이요, 문명사적으로 유대-기독교 전통을 다시금 비판적으로 변증하는 '기독교의 헤겔'과 같은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의 문명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이후의 새로운 거대담론을 제시한다.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진지한 연구로 인해 때때로 스캔들로 인식되어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항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에 지라르 자신의 주도로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열린 '비평언어와 인간과학'(The Language of Criticism and the Sciences of Man)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에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루시엥 골드만(Lucien Goldmann) 등이 참여했다.

 

이 대회는 미국에서 프랑스 철학과 이론을 유행시킨 분수령이 되었으며, 데리다도 이 대회를 출발점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서 발표한[인간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는 해체주의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학술대회의 논문들은 [비평언어와 인간과학:구조주의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도 당시 이 학술대회를 조직한 주도적인 인물로서 지라르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61년, 자신의 모방적 욕망이론과 희생제의적 폭력과 박해에 대한 연구 성과로 출판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라르는 자신을 '구조주의자' 혹은 '후기구조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용감하게 저항했으며, 기존의 아카데믹한 영역들을 기꺼이 넘나들고자 했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서 인간과학(les science de l'homme)의 많은 영역들, 곧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신화와 종교의 영역들까지도 폭넓게 섭렵하였다.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이병완이 바라본 김대중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에서 발췌-

 

 

 

 

[김대중의 나라]

 

박정희 시대가 서구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19세기적 부국강병의 가치를 지향했다면, 김대중 시대는 20세기적 국리민복의 가치가 발현된 시기였다.

 

김대중 시대를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1971 4,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이후 2003 2, 15대 대통령 임기 종료 때까지 30여 년을 그의 시대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시기상 1970~1980년대는 김대중 시대와 박정희 시대가 중첩되어 때론 투쟁하고 경쟁하는 두 축이 되어 우리 사회의 전 영역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왜 김대중 시대인가. 그가 1971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후 한국의 정치는 영구지권을 향한 강권 독재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실질적 대립구도로 전개되었다.

그 이후 전개된 치열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1971년 대선에서 나타난 강력한 민의가 정치적 기반이 되고 추동력이 되었다.

 

민주화 투쟁기에 있어서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재야라는 큰 줄기가 있었지만 김영삼 세력은 1990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민주주의의 대의를 저버렸다는 평가를 외면할 수 없다.

민주화 투쟁세력이 민주화를 억누르던 집권세력과 야합한 셈이다.

 

이 시기 30여 년을 김대중의 시대로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김대중이 단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중심이자 상수였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유, 인권, 평화, 평등이라는 당대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해 온 한국의 대표적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부터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의 당위적 명제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일관된 논리와 주장을 집요하게 펼쳐왔다.

 

냉전체제의 지속과 안보독재가 펼쳐지고 있는 국내외 상황에서 그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끈질긴 접근은 실로 대단한 통찰과 용기였다. 그의 한반도 정책은 당시로선 금기의 벽에 도전한 것이었다.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종식시키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북 화해, 교류, 평화통일론] [, , , 중 한반도 주변 4강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은 사실상 역대정권의 한반도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고, 마침내는 그의 집권 기간 중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구체화 된다.

 

그가 [다중참여 경제론]으로 제창한 경제정책은 경제문제에 사회적 요소를 결합시킨 새로운 접근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관치경제, 개발경제, 재벌 경제 체제의 횡포와 모순을 시정하고, 보완, 개선하려는 이론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 중소기업 육성, 주식의 대중화, 경영 전문체제의 확대, 기업경영에 종업원 또는 노조대표의 참여 기회 부여 등 시장경제에 서구 사회주의적 요소를 절충한 내용이었다.

 

한국정치에서 남북문제 등 한반도 정책과 경제 사회정책에 일관된 이론과 논리를 제시하고 발전시켜 정치에 접목시킨 정치 지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철학과 정책 논리는 유신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심지어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였던 김영삼 정권하에서까지 [색깔론]이라는 정략적 이념 논쟁의 희생을 감내했지만 우리 사회에 진보적 민주 개혁세력의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 냈다.

 

또한 그의 대통령 재임중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의 완성과 기초 생활보장 등 사회안전망의 구축, 전교조, 민노총의 합법화, 의약분업 정책의 실시 등은 극심한 우편향적 사회에 좌, 우 균형의 가치를 접목시킨 역사적 조치들이었다.

 

물론 1971년 이후 대권 4수의 과정에서 빚어진 시대적 실패와 실책, 대통령 재임중 야기된 가신 정치의 행태와 친인척 비리 등은 비판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서 인권, 평화, 통일에 대한 시대적 헌신, 분단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IMF 외환위기 극복과 IT 산업의 획기적 발전 등 김대중 시대 30년의 큰 산맥에 비추어 보면 한점의 오점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이병완이 바라본 이승만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에서 발췌-

 

[이승만의 나라]

이승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 시대를 살았던 이 땅의 대중들이 공유했던 가치, 다시 말해 그 시대를 함께하며 공통으로 추구했거나 추구됐던 삶의 방식과 태도, 환경을 규정한 표현을 우리는 찾지 못한다.

해방, 분단, 전쟁,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어진 이승만 시대를 한마디로 혼란과 혼돈, 그리고 가난이었다고 규정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 전적인 책임을 이승만과 이승만 정권에 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정치, 경제, 사회, 국제적 환경과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협박과 [반일, 반공, 통일]의 구호를 통치수단으로 12년을 군림했음에도 이승만 시대는 분단도, 전쟁도, 혁명도 막지 못했다.

[일제시대가 차라리 나았다] 는 서민들의 자조와 울분 속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외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2. 민주주의 3. 시장경제를 이식한 헌법 체계가 그에 대한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지키거나 지키려 노력했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차라리 이승만 시대의 가장 큰 업적은, 후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된 공교육제도의 완성이며, 이를 통해 그의 재임중 96%에 이른 의무교육 취학률에 있다 할 것이다.

 

어찌됐든 분명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국가에서 민중의 끓어오르는 기쁨과 열정을 수렴하지 못한 채 세계 역사상 첫 학생혁명에 의해 추방된 국가원수였다는 사실이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