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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에 쓴 글이니 지금에 와서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를 확장시키고, 새롭게 글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일단 큰 골격은 유지해도 될 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 안녕. 

 

중요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이런 관련 정보들을 잘 알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씨름하면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찾아 두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측면이 많을 것 같아. 특히 넌 진리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에 대한 중요성에도 많이 노출되었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달란트를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민들은 지속적으로 해 보는 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 (너의가는 길을 숙고할 때도 언젠간 응용될 날이 오리라….)

 

일단 전제 자체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가 많아서 언제든지 오류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게 될 말들도 몇 년 후에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고 유지될 거야.)

 

두 번째로는 이와 같은 치열한 고민들은 답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씨름해 나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정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에….)

 

마지막으로는, 어떤 답을 내릴 때는확신하기 보다는, 좀 더신중한 편에 서는 게 좋을 것 같고,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있을 때는 양쪽을 다 공부하고,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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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은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이라고 정의할께. 또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전 존재를 걸어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이와 같은 Base를 깔아 두고, 고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

 

한국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칼빈주의)이 주류인 것 같고, 상당히 보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반적으로는 장로교고신이 보수의 극단에 가깝게 분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이외에도 합동,통합,기장 등다양한 분파가 있을 거구…(‘고신보다합동을 더욱 극단으로 두는 견해도 존재함)

 

한국에서 본격적인 신학을 체계화 시킨죽산 박형룡교수님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교에 있던메이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 자체가 정통신학에 철저히 서 있는 학교였고, 그 이전에 세워진 프린스턴 신학 대학교가 기존의 정통신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한 반발로 태동하게 되었어. 메이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확고하게 정통신학을 지키고 싶어 했었지.

 

그러한 스승을 둔 박형룡 교수님의 가르침은 총신대학교 조직신학과에서 시작되었고, 그 분의 제자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축을 이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정암 박윤선교수님 등 걸출한 분이 많으셨어)

 

 

 

미국에서는 장로교인의 숫자가 미미한 편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독 장로교가 주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열할 때는 성서의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분열을 했었어. (이 부분은 이따가 자세히 언급해 볼께)

 

그 이외에도 일본 강점기 당시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고신이 분리 되어 나가고…..

 

WCC라는 세계 기독교 연합 활동이 있는데, 이 속에서는 모든 교파와 카톨릭까지 손을 잡는 분위기인데 이와 같은 타협을 거부하는 측을 합동이라 분류하고, WCC 참여에 찬성하는 쪽은 통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카톨릭을 어느 정도 포용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쟁점이 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생략할께. 좀 어려워서..)

 

일단 요약을 하자면, 한국에서는 장신대(통합)나 한신대(기장) 쪽은 정통신학(칼빈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프린스턴 대학교 처럼신정통주의 신학에 상당히 열려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아.

(장신대에 계시는 조직신학 교수님인김명용 교수님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전파에 열심이 있어 보이셔)

 

그 이외에 고신이나 합동 등은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높은 우선순위를 주고 있구….

 

그렇다면신정통주의 신학정통신학을 구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신정통주의 신학은 20세기에 활동했던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견해를 많이 따라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아.

(정통신학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칼빈(장 깔뱅)의 계보를 잇는다고 보면 됨. 개혁주의 신학은 대개정통신학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지만, 화란 계열<네델란드>아브라함 카이퍼등의 신학을 같이 융합시켜서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아. 하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학적 견해로는개혁주의의 범위는칼빈정통신학이나, 화란 계열신학모두를 포괄하고도 더 큰 범주를 의미해야 한다고 생각해. , 칼 바르트의신 정통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하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 같아.) (이 견해는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음)

 

여기 까지 논의를 해 놓고, 내 신앙 이야기를 잠깐만 할께

 

 

일단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세퍼에 매료되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견지하려고 했었어.

 

C.S 루이스는 성공회 소속이라서 정통신학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내가 볼 때는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반면에 프란시스 쉐퍼는 극도의 보수주의는 아니였다지만,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20세기에 이 두 사람처럼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애 쓴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내겐 두 사람이 정의의 사도로 보였어. 지금도 존경하고, 좋아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고)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가 누누히 비판했던 게 바로칼 바르트였어. 내가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의 수 많은 번역서들을 읽고 나서 내렸던 잠정적 결론은, ‘칼 바르트는 기독교에 아주 위험한 짓을 범한 잘못된 신학자구나!! 였어.

 

또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일명문화 선교라는 용어를 주창해 냈고, 그의 제자들인 오스 기니스나 낸시 피어시(‘완전한 진리의 저자)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장을 들을 수 있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정통신학(또는 개혁주의)에 기반을 둔 칼빈주의 신학자, 목회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물론,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에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을터.)

 

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칼빈주의적인특정 세계관 운동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런 논의나 고민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해 버리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으로 세상 속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거라지만, 관계를 맺게 될존재들은 결국 세상(문화)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건 자체적인 모순이 있어 보여.

è  (물론, 이런 모종의 movement 복음과 혼동하는 시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일꺼야. 가령, ‘창조과학같은 경우는 근본주의 계열의 문자 해석과 방법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theory 중 하나인데, 마치 이 창조과학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구원을 잃어 버릴 것처럼 이야기 하는 분들은복음과 자신들의신념을 착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이 관점에 힘을 실어 줄거야)

 

(일단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입장과 중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리처드 니버가 쓴 <기독교와 문화>를 읽어 보면, 크리스천이 문화(세상)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5가지로 분류를 해 둬.

 

그 중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은 5번째에 해당되구

 

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분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누리며 살아가던 중 큰 문제에 봉착했었는데, 그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5번째 견해가 논리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데 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어.

(이건 모 대학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시는손화철 교수님’, ‘양희송 교수님도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었고, 다른 수 많은 교수님들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어.)

 

작은 예를 하나만 들자면, 군대에 들어가서 프란시스 쉐퍼에게 열심히 배운 데로, 모든 문화를 변혁시켜야 겠다고 각오를 했었어.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미술, 역사 등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인 문화가 세워질 수 있다는승리주의적인 견해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어. 세상 속에 들어가서 내 믿음 하나 지켜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세상은 전혀 그리스도적인 문화에 관심이 없었어….(딱히 이게 바로그리스도적 문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빈약했고, 그게 뭔지 알려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 때 느꼈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아무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Useless 하게 보였어.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신음하던 중, 오직 하나님만이 한 영혼을 바꾸실 수 있고,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은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사역’(고전2:2)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인격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쟈크엘룰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이 분이 서 있는 입장은 기독교 세계관의 4번째에 해당되었어. 이 지점에는 마틴 루터나 사도 바울도 서 있었는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다분히 역설적인 것이다!! 라는 관점이었어.

 

이 영역은 실제로 세상 속에서 살아 보니 공감이 되고 인정이 되는 부분이었어.

마치 우리의 삶은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순간의무게 중심을 찾아 내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또한 내가 어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의 세밀한 균형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살 수 없으며,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관점이었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정말 그러하더라구…..

 

 

 

분명 논리상으로는창조-타락-구속이 맞아 보였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지만, 그 모든 게 타락의 범위 안에 들어갔으며, 마지막 때에 온전하게 구속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문화가 사실 선한 건데,(ex) , 노래, , 연극, 영화, 정치, 경제 등 등) 지금 그와 같은 선하던 것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방향을 바로 잡아 주면 그본질’(구조)는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화될 것이다라는 관점. (이게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5번째 세계관)

 

è  이 관점의 맹점은 누가 기준점이 되어서 방향을 바꿔줄 것이며, 그 방향이라는 걸 어느 정도까지 바꿔 줘야 창조 본연의선함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 그리고 그 본질(구조) 자체가한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을까? 라는 질문을 남겼어.

è  그리고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인 N. T. Wright(‘톰 라이트라고 불리는)는 이와 같은정통 신학창조-타락-구속이라는 그림 자체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어. ‘성경이라는 장대한이야기’(Narrative)를 이와 같이 단순한 구조로 환원시켜 버리는 건, ‘성경의 놀라운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참신한 주장이야. , ‘창조-타락-구속도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흐름이긴 하지만, 성경은 그 이외에도 더욱 섬세한 역사적 맥락과 상징적 맥락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고 있기에 보다 더 넓은 관점이 요구된다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참신한 세계관 적 견해가 있지만

 

결국 이 4번과 5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만 남게 되더라구….

(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토록 찬양하고 열광하던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논리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칼 바르트의 주장도 들어보기 위해 김명용 교수님이 쓰신 <칼바르트의 신학> 을 읽게 되었어.

(또한 쉐퍼가 경계하던 실존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마틴부버, 사르트르 등의 글을 읽어보게 되었어. 그리고 학부 시절에 <실존치료>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쉐퍼의 주장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그 이후에 쉐퍼가 많은 사역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었어.)

 

è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지니는 위험성에는 철저히 동의를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사고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깊이 있고, 진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이건 단지 지식적인 차원이나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사고가 얼마나 귀하게 쓰이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영역이었어.

(간혹,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변증론에 익숙한 사람들이실존주의를 지독히 경계하는 발언들을 많이 해. <창조과학>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 중에도 마냥실존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만 말해 둘께)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신학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등에서 주장했던 내용의 연장선 상에 있었어. , 칼빈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어 보였어. 그래서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지….. 칼빈의 교리가 워낙 체계적이고, 성경에 잘 기반하고 있어서 누구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는 없었어. 하지만, 칼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칼빈의 교리 중 성경적이지 않아 보이는 영역들을 잘 수정하고, 발전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è  일단 칼 바르트는 구원 받을자와 버림 받을 자가 모두 예정되어 있다는 칼빈의이중 예정론등을 반대했었어.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버림 받을 자 예정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었지.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이 칼빈과 다른 의견을 보였는데, 칼 바르트의 의견이 와닿는 게 많더라구)

 

(오히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칼 바르트에 가까웠고, 내가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더욱 잘 서술해 주는 신학이라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그의 이론에서 동의가 안 되는 몇 가지가 있긴 했어. 특히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 라는 개념은 난 아직은 와닿지 않더라구.. 하지만, 거의 모든 영역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의 맹점을 잘 수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어떤 목사님들은 유독칼빈주의 신학에 서서 설교를 많이 하시는데, ‘계시의 정지라든지,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 시대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회신을 통해 입장을 밝힌 바 있었지)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해야 한다는 Rule 이 있거든. 그 신앙고백 1장에서 말하고 있는게계시의 정지이고……..그런 목사님들은 그 틀에 충실했을 뿐……. (수 많은 분파로 나뉘어진장로교측에서 자신들의 연합을 추진할 때,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합의점이 바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해.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이신이승구 교수님의 글과 논문을 근거로 볼 때..)

 

하지만, 말이 거창하게 들려서 그렇지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바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속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다시 해 보게 되었어. (무엇보다도 정통 신학이 그토록 강조하는성경’(Scriptura)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다는 근거들이 무수히 적혀 있지)

 

다행인 것은 황영호 목사님이나 윤진규 목사님 김형겸 목사님은 이런 영역에서 상당히 열려 있기 때문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가질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 신학교수로 재직 중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에게 여쭤 봤을 때,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계열 신학자) 그는 감리교에서 가지고 있는 웨슬리안 사대행이라는 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를 이야기 하더라구

(그가 답해 준 관점이 내가 동의하고 있고,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방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è  위에서도 언급한 N. T. WRIGHT(톰 라이트) 교수님은, 웨슬리안 사대행,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루트인성경’, ‘전통’, ‘이성’, ‘경험중에서 마지막 범주인경험의 범주를 비판하긴 해. (하지만, 이 영역은 가장 많은 위험성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이론과 실재를 연결시킬 만한 더욱 매끄러운 Categorization(범주화)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연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우리가 정통신학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온전한 진리를 끊임 없이 찾아가지 않으면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사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어.

 

일부 목사님이성령 체험등에 대한 극도의 경계를 보이시는 이유는 그 분들 스스로가 겪으셨던 아픈 기억들도 큰 이유가 될 것이고, 요즘신비주의 적인 성령 사역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계로서도 그러하셨던 것 같아.

 

(그와 같은신비주의 영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요즘 성행하고 있는예언자 학교등을 수료하여, 자신들이 꾼 꿈이나,  예언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일부 성도들은 부지불식간에 성경 읽기를 등한시 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심상이나 이미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 입장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입장은 이미하나님의 입장 equal하게 되어 버리기에……) <그들의 인식 속에서>

 

 

 

즉 스펙트럼을 그려 보면, 오른쪽 끝에는 완전한 계시의 정지와 이 시대에 더 이상 성경책 이외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는 보수 측의 장로교나 근본주의자가 있다면 그 그래프의 왼쪽 끝에는 오순절, 순복음 계열의 성령파들이 있을 거야. 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을 위험하게 넘어서는특이한 체험이나기사,이적을 무분별하게 강조하곤 할거야

 

우리는 중간 어디 쯤을 견지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구. 그 스펙트럼은 온건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쪽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꼭 이렇게 분류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 소속은 한 쪽 극단이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내고 있는 신앙 생활은 진리에 가까울 가능성도 분명히 있어)

 

참고로 내가 책을 분별해서 읽을 때십자가 복음에 잘 서 있고, 말씀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고 성령님의 역사도 제한하지 않고 민감하게 깨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책들은 대개침례교쪽에 많이 있더라구. (그렇다고 침례교로 옮기자는 말은 아니야…..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신학의 틀에 메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

Ex)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데이비드 플랫 <래디컬>, 여주봉 목사님 <십자가의 복음> , 손기철 장로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 정원 목사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등은, 신앙의 본질이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균형감 있게 잘 말해 주고 있어 보였어. (여기서 손기철 장로님 같은 분들은성령 사역’, ‘치유 집회도 많이 하시기 때문에 한국 정통 장로교에 계신 분들은 매우 경계하고 있어. 그들은, ‘계시의 정지라는 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 체험과 깨달음으로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정원 목사님의 다른 책들은 아직 추천을 잘 못하겠어. 약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하지만 저 책은 상당히 좋아.)

 

 

 

그 이외에도 청교도 신앙을 견지하는 정통신학의 대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성령님의 임재에도 상당히 깨어 계시기 때문에 상당히 좋아하는 분이고(물론 카톨릭을 이단시 여기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힘쓰신에큐메니컬 운동에 함께 하지 않으려 한 점에서 기독교의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분 입장에서는 나름 옳다고 생각한 길을 지키려고 한 결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문일 때가 많아.) 아까 언급한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앙도 참고하기 참 좋은 것 같아. (그 이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등의 삶을 들여다 봐도 성경과 성령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어)

(찰스 스펄전의 설교집은 정말 최고!!!!!!....이런 믿음의 조상이 있어서 너무 다행)

 

말하고 싶은 요지는, 성경에 계시된 구속사는 당연히 완성된 게 맞지만 그와는 별개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고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성경적이라고 난 주장하고 싶어. (이런 고백은 이미 칼바르트의 신학 틀 속에 포함이 되어 버려…)

 

è  보수 장로교 어르신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허용해 버리면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고, 너도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각종 이단을 양산하고, 분별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해….. 이러한 경계도 매우 중요하고 맞는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맞다고 생각해. (이 역시 칼 바르트 신학에 포함된 고백이더라구)

è  종교 개혁 당시에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가 워낙 강조되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성경만을 보려고 했었어. 그러다 보니, 안정성은 뛰어 나고 모가 난 행동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큰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님의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게 되 버리는 문제점이 생기더라구. (사실 그 분들 논리를 따라가면 기도를 할 필요도 없게 됨….. 기도는 철저히 관계성에 속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듣고 구하는 시간이며, 그 분을 만지는 시간인데 이와 같은 논리가 먹혀들 자리가 없더라고……….그냥 성경을 읽고 그 내용에 지식으로 동의해서 끄덕이면 그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여기시는 분도 많아……….만약 이 정의가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면, 바리새인이 저주를 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할 텐데…. 라는 큰 의문을 남겨…)

 

특정 교단은 큰 문제다!!! 이런 말은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 심지어 그 분들이 <계시의 정지>를 주창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다 해도 칼빈주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수 많은 강점들과 견고함 또한 높게 보고 있거든. (답이 잘 나오지 않아도 연합은 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칼빈이 주장한 핵심 5대 강령인 TULIP 이라는 교리가 있는데, 그 중 T에 해당하는 Total Deprivity(전적 타락) 같은 부분은, 감리교에서는 반대를 하지만 난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

 

그 이외에도 I 에 해당하는 Irresistable Grace(저항할 수 없는 은혜), P에 해당하는 Perseverence of Saint(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도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고 있어. (결국 가장 근간이 되는 베이스는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에 가까워 보이긴 해)

 

그리고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마지막 신호> 라는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책을 추천하셨는데(영풍 문고에 갔더니 신앙 서적 베스트 셀러에도 올라와 있더라걱정이 된다), 이 책이 말하는프리 메이슨’ , 666 배리칩에 대한 의견들은 정통신학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고, 나도 정통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어.(이와 같은 책을 추천하는 목사님들은 대개하나님의 음성 듣기’ , ‘성령의 기름 부으심등에 매우 익숙한 분이실 가능성이 커. 그래서 개방된 사고 속에서 누군가가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 그들의 논리를 일단 따라가 보게 되고, 결국은 극단적인 예언자적 메시지나 문자적 해석도 충분히 거부감 없이 수용해 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원하는 바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임재하심을 제한하진 말되, 철저히 성경에 기반하여 민감하게 분별하며 하나님께 길을 구해야 하는 섬세한 지점을 찾아 나가는 거…)

(그런데,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의 간증을 직접 듣고 나눠준 어떤 형의 말을 들어보면, 참 진실되고 가슴을 후벼파는 스토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어디까지 문을 열어 놔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만약 저와 같은 고백들이 허용되어 버리면 다른 이단들을이단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매우 빈약해 진다는 위험성이 커서……….일단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수 있고,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에 담아둘 수는 있지만 이 메시지들을복음의 일부로 여기고 마냥 전하기가 위험해 보여)

è  김우현 감독 등처럼 존경하는 분들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할 때가 많으시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긴 힘들 것 같아. 더욱 선명하게 비춰 주실 날이 있겠지……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나, 류대영 교수님이 쓰신 <미국 종교사> 등을 함께 읽어 보면, 19세기에 태동한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요한 계시록 해석법 등을 알게 되고 그 연장선 상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자적 해석, 예언들의 문제점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이나 블로그 카페에 있는 이런 류의 기사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맞는 것 같아……가령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라든지, 적 그리스도는 유럽 어딘가에서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든지…..윌리엄 왕자가 적그리스도라든가……이런 류의 말들은 One of the possibility 정도로는 받아 들일 수 있지만, ‘진리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아 보여………100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이상한 해석이 성취한다 해도 그걸 모른다 해서 우리가 버림 당할 이유도 없고……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해석이 일관되게 하나로 모아지면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해 보겠는데, 워낙 의견들이 다르니………)

 

이런 면에서 정통신학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

 

결론은치열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본질을 살아내고 경험하며 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바르게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자세….

 

그리고 우리가 특정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그 목사님의 철저한 신학에 많이 노출이 될 것인데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마음도 계속 지니면서 열심히 존경해 드리고 좋은 것을 알아가되, 진리의 문제에서는 내적인 씨름을 그치지 않아주길 부탁하며…..(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에 늘 한 몸이라는 연대의식과 친밀한 중보는 잊지 않아야 함)

 

세상은 날로 혼탁해 지고, 영분별 하기가 정말 힘들어 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기 보다는 더욱 경험하고, 알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핵심 이야기]

 

1.     평신도지만, 우리의 첫째 사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 것. 그래서, 장로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과 아울러,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등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가장 성경적인 지점을 찾아 나갈 것.

2.     균형과 긴장을 철저하게 유지하기. 진리는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시대 속에서 민감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중요할 것 같아. 가령,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성령 사역자들의 활동들을 보면 분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고, 권장할 부분도 많지만 워낙 질병 치유나 눈에 보이는 기적에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과 그 분의 인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구…. 그런 류의 운동은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반대 극단에 있는 것처럼 율법에 너무 메여서 성경 속문자에 머물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모종의 교리적 틀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 같아. 극단은 늘 위험하며, 양 극단이 과도하게 변질되었을 때 각종 이단이 양산되었음을 기억하며

3.     프란시스 쉐퍼와 C.S 루이스가 했던 역할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 지금에 와서는 쉐퍼의 핵심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긴 하지만, 그가 세상과 소통하려 했으며 기독교는 논증이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철저한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른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비하면 정말 많이 열려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높이 살만한 것 같아. 여전히 두 사람을 존경하고 있고, 알아가는 중.

è  세상과의 소통을 잃어 버리면, 기독교가 아무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려줘서 빚을 많이 진 분들.

4.     그리고 내가 칼빈이니, 칼 바르트니 어려운 신학자들 이름을 언급했지만 정말 중요한 건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그 신학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고 그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신학을 조금씩 공부해 보니 이미 내가 했던 경험들이 신학의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 결국 역사 속에 하나님이 심어 두신 신학자들의 활동들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런 측면에서 신학은 중요해 보여…)

5.     한국에서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하는 분들도 인터넷을 포함해서 꽤 있는 것 같던데,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틀에서 바라볼 때 자유주의라는 것 뿐이지, 실제로 독일에서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들이 구분되는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성경 무오설부분인데, 정통신학 측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니 오류가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성경을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분석하려 했던고등 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어. 그들이 성경이라는 신령한 경전을 인본주의적으로 비평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었지. 여기서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데, 모든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다는 쪽은 요즘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고등비평에서 말을 굳이 안 해도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어도 분명오류가 있기에….. 그런데오류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이 하도 오해를 많이 해서 그냥불일치’(discrepancy)가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즉 내용의 오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4복음서 등에 흔히 등장하는 시간의 오류, 인물의 오류 등 단어에 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더라구칼 바르트는 이런 영역에서 열려 있었어. , 인간의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내시고자 했기에 단어나, 연대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고 주장했던 게 칼 바르트였어. (지금에 와서 보면, 이 고백이 가장 맞아 보이는데 정통 신학 하시는 분들은 그걸 납득할 수 없나 봐,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너무 훼손되어서 그런 허점이 있는 경전을 진리라고 주창하기가 힘들어 질까 봐 두려워 해. 계몽주의를 거쳐서 과학적이고 분석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들의 비판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내 놓은 타협안은 성경의 사본들에는 이런 글자의 불일치가 많지만, 성경 원본에는 결코 그런 불일치가 있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요즘 하고 있어. (그래도 꽤 깨어있는 장로교 신학자 분들이 지지하실 듯) ->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면, 모든 사본이 하나 같이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완벽히 일치하는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말은 원본 또한 그와 같이불일치를 내포한 채 기록되어져 있었기에 그걸 필사한 사본이 조금씩 틀린 게 아니냐고 해석하는 게 일단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맞는 말인데, 이런 류의 비평을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그 분들은 말씀하고 있어.

 

참 중요한 이슈들이 많아. 나눌 말이 많지만 이 정도만 나눠 둘께.

늘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지점을 찾기 위해 씨름하며 기도하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함께연합해야 하기에, 바른 지점을 주장할 때도 늘분열을 조장하는 글과 말과 행동은 지양하자.

마지막으로 어떤 입장이 되었든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점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모든 논리는 뒤집힐 수 있다는 점. 분명히 피력해 두고, 글을 마칠께.

 

[성경 무오설]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글을 올려 줄께!

 

-기존에 우리가 들어 왔던장로교적 틀을 약간 벗어난 관점을 전개하고 있지만,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로이드 존스, 칼빈, 성 어거스틴 등이(최근에는존 파이퍼 목사님) 보여주는 탄탄한 신앙적 고백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두 지점을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좀 더 기도하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칭의라는 이슈를 놓고 현대 신학자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부분들도 양 측의 의견이 모두 팽팽하기 때문에 답이 내려질지는 잘 모르겠음.(무엇보다도 가장 큰 target이 되었다는 점에서장로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정통신학의 정통성 또한 일견 증명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진리를 분별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정죄와 판단을 일삼진 않았는지…. 우리가 특정 교파의 흐름에 너무 익숙해 진 나머지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는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너무 단순히 여겼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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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나의 사귐]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해요?’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예수님은 잠잠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란다.’ … 나를 잡으렴…. 나를 만지렴…. 나를 보렴…..나를 받아 들여 주렴……네가 나와 같이 걸어가게 될 때, 네 마음 속의 수 많은 질문들은 사라질 거란다……..미래를 주도하고픈 너의 욕망은 사라지고, 모든 주도권을 내리게 되기에 참된 자유와 평강 속에서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단다. 무언가를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무거운 의무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고, 그저나의 생명과 나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내가 곧 길 그 자체며, 내가 곧 생명 그 자체란다…….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다시 관계를 맺자꾸나…….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난 너와 관계 맺을 수 있단다……. 가자꾸나함께….난 분명한 목적과 뜻과 의중을 지닌 인격체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고, 구체적인 계획도 있단다. 그러나내가 원했던 건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으며, 지금 이순간너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을 열망했단다. 네가 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을 난 확신한단다. 넌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고,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내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시편39: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27: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를 고백하게 될 거란다.

 

그저 기도할 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계속 함께 할 것을 확신하며

 

샬롬!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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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출판 IVP

발매 2014.04.03

 

 

 

 

  이 책은 Mere Theology 를 표방하며, 신학의 강력한 효능과 기능을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 주는 책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고, 사변적 논쟁에만 쓰인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면서 기독교 신학의 목적, 위치, 타당성을 바르게 세워준다.

 


 

 그와 같은 밑작업을 한 후에 그는 독특한 전개를 해 나가는데 조지 허버트의의 시를 통해서 '신학을 렌즈나 창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얻어낸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는 십자가, 고난, 신학적 당혹감이라는 제목으로 마틴 루터와 C.S 루이스를 숙고하는데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으로 '고난'을 묵상하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본 슬픔]을 통해서 '고통'의 실존적 차원까지 서술해낸다.

 


 

 예를 들어 C.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를 읽을 때 그는 이성적으로 빛이 임하는 걸 경험하긴 했찌만 실존적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에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면서 그 결핍된 부분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맥그라스는 말한다.  루이스 스스로도 표면적 인간이 아닌 '깊이 있는 인간'을 다루는 사람으로 변모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우면서도 약간 무난하다. [워낙 훌륭한 논의를 많이 해 와서 그렇다]

 


 

 그 이후에 '자연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part2 의 문화와 관계를 맺는 챕터가 시작되는데 여기부터 맥그라스의 진가가 드러난다.

 


 

 '자연과학' vs '신학'이라는 잘못된 대결구도를 바르게 지적해 주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시작하는데, 아마 이런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신학자가 아닌가 싶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리고 창조와 진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다루고, 뒤에서는 [신 없는 사람들]에서도 언급되었던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한 설명을 추가적으로 하면서 현재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잘못된 대결 구도를 타파하고자 한다.

 


 

 이 책은 초반에는 참신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빛나며 약간은 뻔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책에 비하면 상당히 밋밋한 감이 있다), 후반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논의, 그리고 맥그라스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논의를 해 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한다.

 


 

 '자연과학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공격적인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해 관심이 가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신학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으니 사실 모든 평신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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