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의로운 사람 #요셉 #타인을 배려하는 것'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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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다. 이점은 한나 아렌트 이전, 무려 2500년 전 동아시아 사람, 공자가 말한 바 있다. 

 

흔히들 공자라고 하면 어짊, 곧 인으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꿰려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충과 서라고 한다. 그것은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스승이 재가하였다.

 

먼저 공자가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퍼뜩 알아차린 제자인 증자가 "예"라고 반응한다. 그러자 공자는 일어서서 나간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선문답에 나머지 제자들이 증자에게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증자 왈,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이인편> 15장)

 

충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서는 '헤아리다', '용서하다' 등의 뜻을 지녔는데,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저기서 충과 서를 각기 다른 두 단어로 볼 것인지, 하나로 볼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 중이다.

 

'전심과 진심을 다하여 남을 헤아리고 베풀라'고 풀이해도 되고, '매사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남의 몸과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맞게 베풀며 살라'는 말로 풀어도 되겠다.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면 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할 테니 그것을 행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할 터이니 마땅히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황금률(마7:12)과 닮았다. 공자에게서도 생각은 과학적 합리성에 있지 않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하는 마음에 있었다.

 

 

내게,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은 요셉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닌, 예수의 육친 요셉 말이다. 그는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간음이었다. 파혼은 물론이고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으로 자신의 무죄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마을 어른들에게 끌고 가야 했다.

 

그런데 그는 "생각"한다(마 1:20). 요셉의 생각은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규칙을 따르는 사고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느라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돌을 던지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원래 의미에 맞게 사랑하는 방법에 골몰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잘못을 무작정 덮지도 않지만, 그를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요셉의 생각함은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을 때의 생각함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말씀의 영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지성이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은 대부분 무신론자 아니면 불교 계통이다. 기독교인의 활약이 없지 않지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췄으면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 지수가 높고 공부도 잘해서 문제를 척척 잘 푸는 것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의 사유 방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바란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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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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