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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모건 스콧 펙

출판  열음사

발매  2007.03.20

 

 

스캇 펙 박사의 명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이 팔린 저서.

 

 

우리의 인생은 '정신의 성숙' 을 이루기 위한 여정으로서 실패한 게 아니다. 이렇게 끝나 버린 게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남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함축적인 메시지만 이해하고 있어도 이 책은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해 줬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전반적으로 훌륭한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로서 스캇 팩의 '인간의 내면 성찰' 능력 이라든지,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솜씨'는 역시 '스캇 팩'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그가 얻게 된 '소중한 지식' 들이..

 

내겐 참 많이 공감이 되고,새롭게 배우거나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8년 전에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세계관 자체에서 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가 정의 내리는 '사랑'. 그가 주장하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 그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내겐 좀 위험해 보인다. 성경과 잘 매치가 안 된다고나 할까.(정확히 조사하진 못했지만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스캇 팩 박사님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딱히 논란이 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사람의 정신을 다루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우를 잘 따라가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프로이트 등의 유물론자들의 사고가 은연 중에 깔리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입으로는 '하나님' 을 말하지만, 그 '단어'는 그저 하나의 term으로서 '하나님' 을 의미하는 것이지, 만유를 창조하시고 ,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살아계신 '실존적 하나님' 을 의미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러한 '신식학' 을 경고한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은 8년 전에는 쉐퍼의 세계관을 많이 동조했었기에 이와 같이 추론했었지만, 지금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좀 더 관대한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공부하고 이 분에 대해 논하고 싶다.

 

 

[8년 전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부분들]

<아직도 가야 할 길>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남긴 , 훌륭한 기독교 의학자이자 영성

 상담자로 알려져 있는 스캇 팩 박사님.

 

저는 아직 <아직도 가야할 길> , <영혼의 부정> 밖에 보지 않은 상태구요. 앞으로 더욱 부지런히 그의 저작들을 읽어 보려 합니다.(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도 진보가 없습니다.;)

 

참 ,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최근에 옥성호 집사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에서 심리학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들을 우려하는 내용과 더불어 스캇 펙이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정확히 어디에 적혀 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 이 집사님은 스캇 펙은 기독교인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설명해 두고 있습니다.)

 

2권의 책만 읽은 상태에서 제 생각은 그는 훌륭한 심리학자 , 유망한 정신과 의사라는 칭호를 받을 만은 하겠지만 , '크리스천' 인지는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지금에 와서는 옥성호 집사의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고 있고, 스캇 팩 박사가 나중에 크리스천으로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스캇펙의 고백>

 

나는 대체로 별 볼일 없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형편없는 학생이란 점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양육에 대한 두 번째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여태 껏 신약성서를 요한 계시록까지 읽어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더구나 구약성서는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했다.

 

나는 구약성서의 다니엘서가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많은 초등학생들이 알고 있듯이 다니엘은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이유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다니엘서를 읽어 본 일도 없었다.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귀엽게 넘어가 주겠지만 ,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 기독교적 마인드를 지닌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이런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것을 '정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렇게 '진리' 에 대한 열망이 없고 ,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 주장하는 영혼의 개념 , 내세의 개념 , 하나님에 대한 지식 등이 과연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 봤을 때 ,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진다.

 

 

<그가 말하는 심리학>

즉 신학과 심리학의 문제에 종속된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문제가 분리되어 온 것은 실상 허울 뿐이다. 나는 이미 생존적 , 정신적 고통을 심리적 , 영적 현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모든 논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독자들이 나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신학적인 차원과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두 가지를 통합하는 노력을 경주해 보라는 것이다.

 

 

투철한 직업 정신은 인정해 주겠지만 , 이런 면에서 보면 심리학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심리학이 추구하는 '자기 발견' , '자아 사랑' , '긍정적 마인드' 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 , '십자가 은혜' , '인간의 죄의 깊이' 등에 대한 개념 습득에 매우 큰 장애물이 됨을 고백해야 겠다. 분명 [베전2:9] 등에서 말하듯이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는 존재임에 틀림 없지만 , 인간이 '자신의 죄의 본질' 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100% 불가능하다. 이건 '거듭난 이들' 의 수 많은 증언들이 크나큰 근거가 되어 줄 것이며 성경적으로도 이건 매우 정확한 진실이다. 하지만 , 스캇 펙 박사는 영혼과 정신을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해 버림으로써 , 심리학과 신학도 함께 묶어 버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심리학'은 전반적으로 '신학'과 함께 '인간 이해'를 위한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 준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그의 '진화론 적 사고' 가 큰 역할을 하는데 , 단순히 '진화론' 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유신론자이면서도 진화론을 믿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이 '진화론적 사고' 가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극히 일부만 언급해 보겠다. 

 

<진화론 적 발언>

우리 뇌의 가운데 부분에 신경세포가 뭉쳐 있는 중추가 있는데 , 이 중추를 자극하면 우울증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생긴다. 그리고 중추에는 분노와 유포리아(행복감) 같은 특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다른 중추들도 위치하고 있다. 이 각기 다른 신경중추들과 마찬가지로 우울 중추도 수천년 간 인간의 진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뇌 속에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정교하게 진화되어 왔다. 어떤 목적일까?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짝을 구하려는 성적 본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짝짓기를 통해 아이를 낳고 이리하여 종족의 보존을 이어 가려는 것으로 , 사랑에 빠져 일시적인 자아 영역의 붕괴를 일으키는 것은 내부의 성적 충동과 외부의 성적 자극 상황에 대한 인간 본능의 전형적인 반응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소 우스꽝 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유전자가 정신을 속이는 하나의 속임수로써 결국은 결혼이라는 덫에 걸리게 만든다. 이런 계략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적인 충동이나 자극에 동성애적이거나 다른 요인-부모의 간섭 , 정신 질환 , 책임에 따른 갈등 또는 자기 훈련 등- 이 끼어 들어 결합을 방해하는 경우가 그 것이다. 반면에 이런 계략 , 즉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은 환상적이고 유아기적 결합과 퇴행이 없었다면 , 행복하든 불행하든 현재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공포감마저 드는 현실 때문에 결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을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신화의 경우 ,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아마도 그 신화에 지독한 거짓말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결혼으로 향한 우리의 음모를 격려하고 또 정당하게 하여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러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 '영적 본성'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듯 하다. 크리스천이 아니다. 정말 심각하게 그에게 제안하고 싶은 건 , '성경' 을 읽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사랑' 이 그저 '신화' 요 , '거짓말' 이 되어 버리다니....후반부에 가면 그는 '낭만적 사랑' 은 '일종의 환상' 이긴 하지만 , 유용하기 때문에 '존속할 가치' 가 있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진화론적 사고' 에 흡수 당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종족 보존' 을 취우선에 두는 비기독교적인 사고. 그리고그의 마음은 '물질주의' 에 찬성하지 않는다면서 , 그가 말하는 '성장해 나가는 영혼' 은 결국 , '진화해 나가는 정신' 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다 뿐이지 , '눈으로는 보이는 듯한 육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 로 충만하게 짜여져 있다. 한 마디로 '말장난' 이 많다는 것이다. 영혼을 인정하고 ,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가 입술로 고백하는 '하,나,님' , '영,혼' , '사,랑' 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도통 일치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쓸 당시 스캇 팩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포인트를 감안해 준다면 너그러이 봐줄 수 있긴 합니다만, 기독교 서적에서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건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 당신들의 목적이라면 그걸 성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확실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첫 번째 생의 목적이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 인간 사회에서는 , 그리고 기존의 심리학에서는 적절한 상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의 영혼을 치료할 때 , 이런 식의 발언을 계속 고수한다면 , 그 영혼은 '하나님' 을 만날 수 없다. '죄의 깊이' 를 인지 하지 못한다면 , '십자가의 은혜' 는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구원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음을 가슴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힘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호세아' 가 말하는 부류의 사람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저와 같은 말을 하며 , "당신의 영혼의 성장을 위해 힘차게 전진하세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답니다.." 라고 이야기 해 줄 때 , 이 모든 핵심적인 메세지에는 '나' 란 존재가 주인공이지 , '하나님' 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캄의 면도날 법칙에 의해 '하나님' 이라는 개념은 그냥 잘라서 없애 버리는 게 더 논리적이다. 굳이 '하나님' 을 끼워 넣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참된 목적이란 오직 정신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입니다."

 

-> 이게 기독교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란 잘못된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 보다는 확대시키고 ,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다. 여기에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 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문제가 사랑을 사랑 아닌 것으로부터 구분해 주지는 않는다. 그 구분은 행동의 목적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목적이 항상 정신적 성장이고 , 사랑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 하나님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주장은 내 힘으로 저러한 궁극적 사랑을 성취해 나갈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그는 '공동 창조자' 라는 표현으로 신과 내가 함께 '공동 사역' 을 해 나간다고 말하지만 , 그의 마인드 속에는 '나는 곧 하나님이 된다' 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 '자신의 정신적 성장' 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이상 그의 주장은 '범신론' 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 라고 했다.

 

-> 그에게는 한 영혼의 구원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는 이미 '기독교인' 이 아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 되고 싶겠지만 , 애석하게도 '잘못된 지식' 을 가지고 있기에 '기독교인' 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에 부합되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정신과 영혼을 제대로 구분 못 한다면 프로이트 등의 트릭에 평균치 이상의 영향을 받아 버린 건 아닐까?

 

"아이가 셋 있는 서른 다섯 살의 부인이 있었다. 독재적이고 남을 무시하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한 그 부인은 날이 갈수록 남편에게 의존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이런 의존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남편은 그들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켜 보려는 부인의 모든 시도를 막았다. 하지만 그 부인은 용감하게 남편의 반대와 이웃의 비난을 무릅쓰고 남편과 이혼해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모험 덕에 그 부인은 자기 일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주인이 된 듯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는 그 가련한 여인의 단호한 결정에 박수를 쳐야 마땅하지만 , 이 행동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인가?.. '나의 자아' , '나의 인생 여정' 에 큰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 결국 '이제껏 감당해 본 적 없는 어려움' 앞에 쉽사리 도피해 버리는 나약한 영혼을 양산해 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버지가 개입하신 일이었으며 , 심지어 아이가 셋이나 있다. 3자가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 힘들어도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그녀가 눈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힘을 구하며 , 위로를 구할 때 하늘 아버지가 그녀를 더욱 강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세우시며 , 그 남편마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터인데........

(그녀의 '고통' 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발언을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 이게 성경적으로 맞는 경로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비기독교인이면 할 말이 없지만 , 기독교인이 이런 지침을 조장한다는 건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남아나는 가정이 도대체 몇 가정 되겠는가?)

 

"어떤 정신 치료자들은 환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치료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치료자이며 성적인 욕구에 대한 이해심이 적어서 그럴 것이라고 여겨진다. 더욱 깊이 생각해서 환자의 정신적인 성장이 성적 관계를 가짐으로써 진전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 나는 서슴지 않고 그런 관계를 가질 것이다.

 

->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정신의 성장' 으로 두다 보니 , 이런 끔찍한 결론 도출도 주저함 없이 하기에 이른다. 환자를 사랑하고, 포용해 주는 듯 한 느낌.... 참 따뜻한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칭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건 인정하자.(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낮은 점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들이 바로 모든 종교는 하나로! 를 외치며 '다원주의 신앙' 을 조장하는 것이다. '진리의 토대' 가 없다시피 하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을 정하고 , 어떤 주장을 함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 또는 그 '기준' 이 너무 세속적이어서 , '진리' 에 위배된다.

 

그 외에도 기적적인 '질병의 치유' 대한 그의 발언. '범신론의 냄새' 가 다분히 느껴지는 글을 아무 거리낌 없이 인용하는 태도. 때론 프로이트보다 융을 지지하면서 그가 말하는 '무의식' 의 개념을 거의 '신' 의 자리에 올려 놓는 그의 태도.

 

"사실 무의식은 모든 면에서 의식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현명하다"

 

라는 둥의 발언을 하고 , '집단 무의식' 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그 2가지 근거는 너무 빈약한 그대....

 

"우리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이 질문에 접근하더라도 ,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은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은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 스캇 펙은 꼭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서 , 뒷 문장에서 한 발 물러선 말들을 하면서 안전망에 들어가는 경우가 참 많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의 형상' 을 닮아가는 '은혜로 구원 받은 죄인들' 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나도 곧 신이요!' 라는 범신론에 아주 가깝다. 단지 이 문장만 봐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 그가 하는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 앞으로 봐도 , 뒤로 봐도 '범신론' 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  그때야말로 "자, 일은 끝났어. 나는 목적을 이룬 거야" 라고 말하며 쉴 수는 절대로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고 , 더욱 현명해지도록 밀고 끌어올려야 한다. 이 믿음을 따른다면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한 끝 없는 노력을 죽는 순간까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책임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이 된다는 가능성을 인간들이 끔찍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영혼의 개념.....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내 힘" , "내 의" 를 신의 경지에 까지 올리려는 시도를 해 나가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 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서 인간은 '하나님이 된다는 가능성' 을 끔찍해 한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적 마인드를 계속 깔고 봤을 때는 , '정말 성경을 안 본 사람이구나. 뭘 정말 모르는 구나'라고 밖에 말 못 하겠다.(스스로도 인정했다.)

또는 기독교인 뿐만 아니고 , 일반인들의 마음도 치유해 줘야 하기에 그 두 가지 세계관을 뒤 섞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비 논리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차라리 이 책을 썼을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껍질 뿐인 기독교식 포장은 안 했으면 더 고 퀄리티의 작품이 탄생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 이 개념 자체가 "나의 행동 , 나의 의" 를 극대화시키는 발언이다.

 

"나는 오랫동안 원죄라는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해 왔다. 나는 섹스를 특별히 죄악시하지 않았다. 그 밖의 다양한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종종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탐닉했고 그 결과 복통에 시달리곤 했지만 , 죄의식 따위가 주는 고통 때문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 미안하지만 , 그는 십자가의 놀라운 은헤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고집과 아집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주장해도 그건 본질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할터....

 

"그는 창세기를 신화로 보고 있으며 아담과 하와의 잘못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문을 묻지 않은 게으름 때문이란다. 그래서 원죄가 있다면 그건 '게으름' 이라고 주장하는데 아주 황당한 주장이다.

 

"나는 앞에서 게으름이 바로 원죄이며 , 우리 속에 병든 자아의 형태로 존재하는 악마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에 , 그 자리가 너무 공허하며 , 그러기에 그 분을 하나의 '인격체' , '실존' 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 은 '특정 대상' 이 아니고 , '불순종' 이라는 개념은 '특정 대상' 에게 적용하는 것이기에 ,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악이란 영적 성장을 촉진할 목적으로 자아를 확대하는 것을 회피하는 정치적 권력 행사-노골적이거나 은밀히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로 본다.

 

-> 그가 말하는 '영적' 은 성경이 말하는 '영적' 과 다르다. 그저 '육적인 정신의 성장' 을 촉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개념들은 다 싸잡아서 '악' 이라고 정의 내린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 도 이 '악' 과 밀접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태가 심각하다.

 

<그가 말하는 은총,은혜>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나 자신의 내부이다.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라. 이 말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마주 보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어제도 ,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충격적이네요.

 

"독자들이 무의식이 곧 신이라는 개념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결코 이단적인 개념이 아님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 또는 성신이라는 기독교적 개념과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 당신은 틀렸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설령 당신이 초자연적인 신의 음성을 실제로 들었다던 몇 번의 고백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한 '기적' 의 영역을 어떻게든 물질 또는 정신의 영역으로 예속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 결국 성령님 마저 , '무의식' 이라는 감옥에 가둬 버리는 군요.

 

"나는 영적 성장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데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 신이 아는 만큼 인간도 알게 되는 것이다."

 

-> 마틴 루터가 울고 가고 , 칼빈이 기가 막혀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해서 ,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넘사벽' 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심각한 신학적 오류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동물의 개념>

"내가 다른 동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영혼을 갖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들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동물은 영혼이 있을 것이다."

 

-> C.S LEWIS 도 동물의 구원을 언급한 적이 있지만 , 자신의 '희망 사항' 이 '비 성경적' 임을 잘 알고 그냥 '혹시 그러면 좋겠다' 정도로 이야기 했었는데 , 스캇 펙은 노골적이다. 진화론적 사고는 이러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그 기본 토양이 되어 준다.

 

<육체의 부활>

 

"나는 중도적 입장의 크리스천임에도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편이다. 내 생각에 이 교리는 육체와 영혼을 혼동하고 있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매체이다. 즉, 물질이다. 우리의 영혼은 혼이다. 그리고 혼은 육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법칙을 따른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물질주의자들에게는 육체가 없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상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욕을 먹는 이유는 , 그는 자신이 자신 있어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고 , 자신이 없어하는 '십자가' , '천국과 지옥' , '말세' , '은혜' 에 대한 개념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아 버리는 특성이 있다.(아얘 알려고 하질 않는다). 스캇 펙도 '하나님의 상상의 초월성' 은 익히 잘 알고 있어서 능수능란하게 인용하며 쓰고 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이 '부활' 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계시는지를 먼저 돌아봤어야 했다. 영혼과 혼의 개념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 왜 특정 인들이 '육체의 부활' 을 주장하는지 , 그 이유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주의' 에 물들어서 그런 걸까? ㅅ사실 그런 이들은 '부활' 자체를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나면 ,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쓴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관한 한 나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다."

 

"영혼의 창조는 하나의 실험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의 여러 실험이 처음에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예감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해 이젠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을 실패한 실험이라고 부른다. 비록 우리가 그 실패한 실험을 통해서 성공했을 때만큼 무엇인가를 얻을지라도 그 실험은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실패한 실험들은 우리들에게 계획을 다시 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영혼의 창조에 관한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결국 하나님의 '창조' 는 불완전했기에 , 실패의 구석이 있으며 이러이러한 연유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은 가 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리처드 도킨스 , 버드런트 러셀 등은 덩실덩실 춤을 추겠지만 , 그는 하나님을 모른다. 접근하는 방법이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다. '특정 현상' 을 보고 , '그 현상을 일으킨 존재' 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 '현상을 일으킨 존재' 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 '그 특정 현상' 을 설명해 내는 게 기독교 아닌가? '믿음' 의 힘은 이 때 발휘되는 것이고 말이다..

 

또 충격적인 고백을 들어 보자.

 

"성인 사도 바울은 '죄악의 신비성' 을 '인간 악의 신비'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더욱 큰 신비는 인간의 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선에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보통의 인간들은 그냥 우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점잖고 영웅적이라고 생각된다."

 

-> 이웃을 격려해 주고 , 높여 주는 용도로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견해' 가 참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 이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의' 가 아니다. 그도 역시 '인간' 이기에 , '자신의 죄의 깊이' 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저 수건이 가려진 상태로는 '십자가' 가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 그 놀라운 은혜를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며 ,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 가치' 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고전2:2] 에 없는 것이다. 그 선하심을 한 번만 맛 봐도 , 자신의 활동에 , 자신의 고백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될텐데.....

 

 

스캇 팩의 이 저서가 일반 심리학으로 분류되면 좀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워낙 기독교의 개념을 잘못 '활용'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보니, 일반 심리학으로 넣기에도 애매하고, 기독교 심리학 저서로 보기에는 아주 낮은 점수 밖에 줄 수 없는 저서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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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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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실체에 상응할 정도로 내면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폴 투르니에를 추천해 주고 싶다.

 

특히 기독교적 베이스를 지니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회복을 고민하고 있다면 그의 견해에 동의를 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번 쯤 투르니에라는 다리를 건너 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필자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만나뵌 적은 없지만 나름의 빚을 졌다고 볼 수도 있는 분이다.

 

기독교+상담학+심리학+신학+의학 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 폴 투르니에가 지닌 놀라운 통합성과 전체성, 섬세함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투르니에에 입문하기에 가장 좋은 저서로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투르니에를 알아가는 것에 덧붙여서 기독교 상담가 게리 콜린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간접 기회를 제공해 주는 묘한 책이다.  

 

(그는 '코칭'(Coaching)이라는 참신한 상담 기법을 들고 나타나서, '기독교 상담학' 영역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상담학과 관련된 공부를 한다면 꼭 한번 거쳐 가야 하는 큰 산이라고나 할까요?)

 

투르니에는 모든 진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의 진리와 성경의 진리

는 서로 반대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전제를 믿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손 치더라도 이를 실제 삶 속에 적용하고, 글로 남기고 이론화 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할 텐데, 투르니에 이 민감하고도 어려운 작업을 해낸다.)

 

투르니에의 이와 같은 전제는 수 년 전 이슈가 되었던 옥성호 집사의 책과 정확히 대치된다. 필자는 투르니에가 심리학을 이해하는 깊이와 지식의 폭, 그리고 그의 삶으로부터 나타난 열매를 통해 빗대어 봤을 때 '옥성호 집사'의 의견보다는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러나 옥성호 집사의 관점도 부분적으로는 고민해 볼 수 있는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은 같이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읽어 보고 비평도 해보고, 나름의 분석도 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필요하다. Kohut의 self psychology 관점에서라면 인간은 모두 자신의 '수족같은 자기'인 자기대상(selfobject)이 필요하며, Melanin Klein 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Object relation(대상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여 인간에게 집중을 하다 보면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 말년의 폴 투르니에 -

 

 

하지만 투르니에는 여기서 영성 심리학의 파워를 여지없이 강조하는데, 이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인간을 다시 바라보도록 종용한다.

 

기존의 일부 기독교 상담학이 성경 구절을 몇 개 가지고 와서, 마치 훈계하듯이 지침을 제시하거나 상처받은 영혼들을 정죄하는 관점을 고수했었는데, 투르니에가 강조하는 통합적이며, 섬세한 균형을 유지한 상담학은 인간을 회복시키는데도 큰 유익이 있다. 그의 다른 저서 제목이 [인간 회복]이라는 점은 의미 심장하다.

 

심리학과 기독교가 하나로 만나서, 깊은 공명을 일으키게 만들고자 했던 투르니에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마른 땅에 단비와 같은 지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폴 투르니에가 쓴 다른 책들을 열심히 찾아보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더욱 듣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전인적 치유'를 주창했던 그의 비전에 걸맞게, 인간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영,혼,육을 통합적으로 치료하는 그의 섬세함은 정신건강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에게 상당한 도전정신을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를 알고 싶다면 , 이 책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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