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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작가의 [후불제 민주주의]다.

1부: 헌법의 당위

2부: 권력의 실재

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시민 작가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느꼈던 정치,법,권력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짤막짤막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라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나 짧은 챕터 속에 굉장히 중요한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어서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다.

대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국회의원에 대해서, 공무원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은데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알기도 어려웠던 여의도의 풍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왜 [후불제, 민주주의]일까?

저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3.1 운동의 정신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현행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해두었다.

제헌 헌법 전문은 더 적극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선언했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에 건립되었다.

제헌헌법은 1919년에 건립되었던 대한민국을 '민주독립국가'로 '재건'하는 헌법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을 '건국 60주년'으로 규정한 것은 심각하고 중대한 헌법 유린 행위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치적으로 홀대하고 헌법을 휴짓조각처럼 무시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했던 과거의 독재자들도, 적어도 말로는 제헌헌법과 현행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헌법 전문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정권이 헌법의 다른 기본권 조항을 존중할 리가 없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지사들의 희생과 헌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0여 년 동안 꾸준히 비용을 '후불'했다.

1960년 4.19 혁명의 용감한 '형님'과 '언니'들이,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의 시민군 전사들이, 1987년 6월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뒤덮었던 익명의 시민들이 엄청난 수고와 희생을 치렀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대학생들, 종교인과 정치인, 농민과 회사원들이 체포와 구금, 해고와 고문의 위협을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분투했다. 이 모두가 민주공화국에 들어가는 비용을 '후불'한, 위대한 시민 행동이었다.

민주주의는 헌법과 제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의식, 헌법과 민주적 절차에 대한 적절한 이해, 공정한 경쟁 규칙의 수립과 경쟁 결과에 대한 승복, 생각이 다른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민주공화국을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난 60년 동안 이 모든 것을 아주 잘해냈다. 우리는 앞으로도 긴 세월에 걸쳐 '후불제 민주주의'의 비용을 정산해야 할 것이며, 지난 시기 잘해낸 것처럼 미래에도 잘해나갈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후불제 민주주의'로 대한민국을 정의 내린다.

유시민 작가의 논리 정연하고, 정의와 상식에 입각한 글들은 상당 부분 공감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호소력이 가득하며,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의 눈물 어린 정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이 책은 유시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자유와 정의가 공존하는 민주주의가 그려져 있다. 그의 책을 기존에 잘 읽어 왔고, 정의와 상식, 따뜻한 배려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겐 추천하는 책이다. 책의 저자가 꿈꾸는 '소명'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사실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다.

과거 지구 행성에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인간 일반의 관점에서 보면, 노력에 비해 너무나 큰 것을 받았다. 50년 전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반도 국가 대한민국의 남쪽에서 태어난 것이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다.

100년 정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나는 왕권 국가 질서와 신분제도의 벽에 갇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전이 벌어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났다면 나이 50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휴전선 북쪽에서 태어났다면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박탈함으로써만 존립할 수 있는 국가체제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나는 특별한 육체적, 정신적 불편 없이 태어나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나쁘지 않은 재능을 상속받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공부해 좋다는 대학을 나왔다. 유럽 유학도 했다. 큰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소득을 얻으며 살았고, 내게는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과 형제자매가 있다.

젊은 시절에 포악한 권력에 대들었다가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죽지도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징역을 오래 살지도 않았다. 게다가 40대에 벌써 국회의원을 두 번 하고 장관까지 했다. 수십만 년 호모사피엔스의 역사에서 이만 한 행운을 누린 인간은 정말로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행운이 그저 우연히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 대부분이 내가 아는 또는 알지 못하는, 동서고금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선한 뜻을 실현하려고 분투한 덕분에 마치 우연인 양 내게 찾아왔다.

자유를 위해 투쟁한 동서고금의 선지자와 투사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있었다. 국립대학이 있었다. 출판 산업과 방송 산업이 있었다.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랬기에 나의 삶도 그렇게 펼쳐질 수 있었다.

나는 이 행운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더 큰 행복으로 채우는 것이 그 선한 의지와 분투를 대하는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내가 아는 또는 알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의 행운을 위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힘닿는 만큼 하는 것이, 내 삶을 더 큰 행복으로 채우는 비결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일을 내가 잘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으로 해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세상을 둘러보면 원치 않는 세상의 변화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변화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세상의 변화는 내 소망이 다수의 소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다수의 생각과 그에 따른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소망을 다수의 소망과 일치하도록 바꾸어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 다수가 나와 같은 소망을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면서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견디고 노력하면서 마침내 내 소망과 다수의 소망이 일치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분명 '기다리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기 위해 '옳다 여기는 방향'으로 힘차게 달렸으나 세상 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저자의 완숙해진 고백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유시민 작가의 스토리 텔링을 믿고, 그의 정치 행보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은 유익함에 재미까지 더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책 추천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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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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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1987년 체제라고 하자. 19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19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식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 규정, 결선투표가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1 3김의 시대, 대통령 5년 단임규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자 ‘13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 단임 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그 취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 128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까지 넣어두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모두 결선투표제는 도입하지 않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은 ‘13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적 사행심을 충족시키는 방안이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이 높은 정당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정당이 유리하다. ‘13은 각자 대구, 경북, 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선투표를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1차 투표 순위가 어떻게 되든 양김 가운데 한 사람과 노태우 후보의 맞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김종필은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표가 잘 나뉘기만 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조직하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거리시위에 참여해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본대를 형성했던 시민들은 ‘13이 합의한 1987년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의 후위였던 야당의 두 지도자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1987년에 개정한 현행 헌법에 큰 문제가 있는 아니다.

권력구조 관련 조항을 제외하고 보면,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분명하게 보장한 민주적 헌법이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독과점 폐해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

 

 

 

-‘양김 분열, 노태우 당선-

 

1987 10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무려 17년 만에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국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내게 이 선거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양김이 후보 단일화를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싼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 씨가 추종자들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시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어떻게든 대선에는 한 사람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총재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인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이 양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면서까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양김은 끝내 거부했다. 평민당에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두 지도자는 각자 출마해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야당이 분열되었고 재야가 분열되었으며 국민도 결국 분열되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를 획득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득표율은 8.1% 였다.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같은 세력의 정권으로 보면, 55.1%의 유권자가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전두환 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 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 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의 후회, 이인제의 의도치 않은 선한 역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4수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본당김종필과 권력을 분점한 탓에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서도 독자 출마를 해서 무려 500만 표를 분산시켜준 이인제 후보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범인 김현희를 선거일 직전에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들어와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도배함으로써 거센 북풍을 일으켰다. 정부여당은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공무원들이 시청, 군청 지하 강당에서 밤새 현금을 봉투에 담는 작업을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때 마포대교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포대교를 도보로 건너 여의도에 가서 조직책에게 돈 봉투를 받은 다음 다시 걸어서 마포로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야당 후보들도 각자 구할 수 있는 만큼 돈을 구해서 썼다.

그러나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되었다. 노 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이, 그리고 북풍에 휘둘리고 부패선거를 용인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가 만든 대통령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1988 4 26일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었다. 그러나 광주, 전남,전북은 단 한 석도 없었다. 평민당은 70석을 얻어 제 1야당이 되었지만 수도권과 광주, 전남, 전북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통일민주당은 주로 수도권과 부산, 경남에서 59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는데 대부분 충청지역 의석이었고, 영남,호남에서는 한 석도 없었다. 여야 4당 득표 기반은 1987 12월 대통령 선거 때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 내내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등의 지역으로 갈라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등장-

 

그런데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지역구도는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되었으며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김종필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헤어져 자민련을 만들었으며 잠시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국민의 정부 권력을 공유했다. 새누리당은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보수정당을 모두 통합한 정당이다.

 

 

 

 

 

-진보 당의 변천사-

 

평민당은 재야세력을 흡수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하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열린 우리당이 창당된 2004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국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쳤고, 2014년에는 안철수 박사의 조직과 통합해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정당은 박정희 시대 신민당의 전통을 물려받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재야 인사들의 국회 입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정치 진입의 주요 통로는 김대중당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3위로 낙선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1987 12,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해 다음 해 총선에서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런 방식으로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출신 신인을 영입했다.

이해찬, 임채정, 한명숙, 장영달, 박영숙, 심재권, 우원식, 김민석, 신계륜,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호인회 등이 모두 이런 경로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김영삼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노무현, 김광일 등이 1998년 통일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인기가 치솟았던 1994년에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와 학생운동 출신 심재철, 손학규 등을 영입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에 반발해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이부영, 김부겸, 제정구 등을 받아들였다. 2000년 제 16대 총선 때는 김영춘, 원희룡, 고진화 등 소위 386 세대 학생운동 리더 일부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 3당의 등장-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은 아직도 현실정치에 안착하지 못했으며 다른 제3당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한겨레 민주당, 1992년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과 이기택 씨의 꼬마민주당’, 2008년 등장했던 문국현 대표의 창조한국당, 2010년 지방선거에 나선 국민참여당 등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균열시키려 한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제3당 시도 역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우리 정치는 여전히 198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4 6.4 지방선거를 보수-자유주의 양당체제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

 

또 한 갈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소위 기층운동또는 민중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러 대기업 노동조합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연맹, 전교조와 언론노조 등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 토대 위에서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전국 농민회총연합 탄생을 도왔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빈민운동단체와 영세상인단체가 탄생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요구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선거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한 그들은 민중당 실험을 거쳐 민주노총과 전농을 조직적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당선자와 13%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내부의 노선투쟁과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문제로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등 여러 군소정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운동의 발전-

 

세 번째 갈래는 시민운동이었다. 첨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실천약사회,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정신대문제협의회,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어린이보육공동체, 빈곤층자활운동단체, 마을공부방 등 민주화 이후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자생적 시민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88년 시민들이 주주가 되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것도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의 첫 세대 주역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 흐름을 체현한 대표적 인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환경운동연합 최열 의장을 거명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화 운동-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참여운동은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동반했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공안통치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 3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이었다. 그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 인사들을 만났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공안통치로 기울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북한 방문 사건, 전대협->한총련-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것처럼,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NL 계열이 주도권을 쥔 학생운동은 반미자주화투쟁의 일환으로 통일운동을 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의 북한 방문사건이었다.

그는 일본과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1989 6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을 평양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살벌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대협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편되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유서대필사건-

 

1990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국회는 개헌의석을 확보한 민자당의 독무대로 변했다. 정부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노태우 정부는 힘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1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는 시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렸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한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민통련->전민련->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 이창복)을 거쳐 1991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에 사실상 해소되었다.

 

 

 

2008년의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 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소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현재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와 민주화 운동-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 12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 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 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김영삼의 사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법률 개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파업을 하면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타격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도록 성의를 다해 교섭해야 한다. 만약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 경영에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이유로 파업행위를 처벌한다면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 지식인, 농민, 대학생, 시민들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한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화 운동-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 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도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일어난 부안사태였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사용 후 핵연료가 포함된 저장 시설인지 아니면 중저준위 방사선폐기물만 저장하는 시설인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안 군수는 부안 군민과 인접 시, 군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유치 신청을 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정책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된 부안 핵폐기물 저장시설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시위대와 경찰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재공모 절차를 거쳐 주민투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시에 방폐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칠례 FTA 와 한-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대로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범국본은 범국본대로 헌법상의 기본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 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박근혜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

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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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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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현재]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욕망이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피치자뿐만 아니라 통치자까지, 법률은 만인을 똑같이 구속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국가권력과 피 흘리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

 

 

 

민주화는 전제정치 또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노력과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민주주의와 독재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산업화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경제이론을 활용했다.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투표를 저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개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다수 국민이 원해도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모든 선거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형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보장,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 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 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 노동자 표정두(이상 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 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 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되면서 분신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연속적,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 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 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주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민주화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용공이적단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발표한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왠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 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의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조직에는 국민협의회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이 붙는다.

줄이면 국본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시위 장소와 시간,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가 실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 없이 동원한다.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한다. 경찰 병력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 틈 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준다.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들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 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 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MGM 사의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 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로 가는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위 진압 능력에 관한 한 군이 경찰보다 나을 게 없다.

유일한 차이는 총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1964 6.3 사태나 1979년 부마민중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 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혁명 때는 경찰관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인물 몇몇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1987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불법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 투석, 화염병 투척, 야간시위 등 시위대의 모든 행위가 실정법 위반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그것을 최고의 법인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든 것은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가 된다.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은 곧바로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 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 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검찰총장(채동욱)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중국 정보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자백] 참고)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집권탕의 행태를 용인한다.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며 상당 기간 동안 제법 큰 격차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식과 행태가 좌우한다.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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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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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많이 자른 존 스토트 목사님의 견해입니다.

(더 풍성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성경적으로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현 시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용성은 두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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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지금까지 고안된 것 중 가장 지혜롭고 안전한 정부 형태다. 이는 그것이 우리 인간됨의 역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창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즉, 인간의 존엄성)

 

그것은 사람들의 동의 없이 그들을 통치하기를 거부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그들에게 책임 있는 역할을 부여할 것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타락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즉, 인간의 부패성).

 

그것은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권력을 분산시켜 인간들을 각자의 교만과 어리석음에서 보호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것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불의를 향하는 인간의 성향은 민주주의를 필요하게 한다."

 

가톨릭 철학자 리처드 노이하우스(Richard Neuhaus)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타락한 창조 세계에 적절한 통치 형태다. 그 세계에서는 교회를 포함해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과 제도가 불완전하게 파악한 초월적인 목적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겸손의 필연적 표현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불만족스럽다. 하나님 나라 외의 모든 체제는 불만족스럽다. 민주주의의 임시성과 불완전성을 불평하는 것은 정치적 건강을 나타내는 표시다.

 

세상을 정돈하는 진정 만족스러운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내려는 열망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며, 그 열망을 정치적 영역에 쏟아붓는 것은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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