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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부버의 대표 저서인 [나와 너]는 유럽 대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프롬, 베르쟈예프, 만하임, 데일리, 니버와 같은 철학자, 교육학자, 신학자 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책이 두껍거나 글이 많지는 않지만 쉽진 않다. (왜 깊이 있는 책은 늘 어려울까)

(언어 장벽만 없으면 원서로 읽는 게 최고인 듯 하다.)

 

쉬운 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책이다.

 

 

일단 나-그것(I- it) 으로서의 만남이 아닌 나-너(I - Thou) 로서의 실존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그의 고백은 서로를 대면하는 방식이 피상적이 되어가고, 객체화 되어가는 이 시대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말해 두겠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 보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자.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기독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귀결점과도 유사하다. 나우엔도, 투르니에도 궁극적인 지점에서 '만남'을 강조했었다)

-> 실제 삶을 살아보면 그 '관계', '만남'이 가장 큰 인생의 장애물인 것도 사실이다. 도저히 사랑하거나, 용납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타자를 용납해 보려는 시도.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지점을 받아들일 때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도 가능해질 것이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믿지 않으며 만나지 않는다. 그는 맺어짐을 모르며 오직 밖에 있는 열에 들뜬 세계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기의 열병같은 욕망밖에는 모른다. 이용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의 고대의 이름을 붙여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은 여러 신 중의 하나로 변한다. 이 같은 사람이 '너'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여'라는 뜻이다."

 

 

(이 시대는 진정한 만남이 결여되어 가고 있다. 수 많은 군중 속에 소속되어 있지만 각각의 실존은 고독하기 짝이 없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 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좇는 불나방 무리와 같은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참다운 '만남'을 갈망하게 된다.)

 

"예수가 말하는 '나'는 얼마나 강력하고 거의 압도적이며 그 얼마나 정당한 것일까! 왜냐하면 이 '나'는 절대적 관계의 '나'이며, 그 관계 속에서 예수는 그의 '너'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자신은 오직 아들이고 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라고 말할 때의 그 '나'는 언제나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절대적인 차원으로 올라가 있던 성스러운 근원어인 '나'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영원한 너'는 아름답다. 이 개념 속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대입해서 읽어보면 참으로 멋진 고백이 나온다.

 

"모든 낱낱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는 틈바구니다. 낱낱의 '너'를 통하여 저 근원어는 영원한 '너'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영원한 너와의 관계를 위해 '나'란 존재를 포기하지 말아라고 그는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자기 부인'이라는 개념을 해석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설명이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관계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너'와 '나' 사이에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기해야 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저 그릇된 자기 주장의 충동, 즉 의지할 수 없으며, 엉성하고, 지속성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관계의 세계로부터 사물을 소유하는 것에로 인간을 도피하게 하는 자기 주장의 충동인 것이다."

 

 부버의 '신 관념'에 대한 설명은 그의 '만남'에 대한 '실존의 참 의미'에 대한 해석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멋진 해석들을 도출해 낸다.

 

"신을 '그' 또는 '그것'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언제나 비유(Allegorie)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을 '너'라고 부른다면, 그때에는 우리들 유한한 인간이  세계의 완전한 진리를 올바르게 말한 것이 된다."

 

-> 이는 마치 "진리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진리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수정해 주는 기독교적 도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진리는 사물이나 개념이 아닌, 인격이다. 

실존적 고뇌, 고립으로 방황하는 인간

 

"이 세상에 있는 참된 관계는 배타적이다. 관계에서 배제된 타자는 그 관계에 뚫고 들어와 배제된 데 대한 복수를 한다. 오직 신에 대한 관계에서만은 무조건적인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하나가 되며, 그 안에 만물이 포괄된다."

 

"사람은 그의 삶을 '신과 맺는 참된 관계'와 '대상 세계와 맺는 '나-그것의 관계'의 둘로 나누어 놓고 한편으로는 신에게 진실로 기도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 세계를 이용하면서 살 수는 없다. 세계도 이용하여야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진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다만 자기의 짐을 벗으려는 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그 기도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을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리고 초라한 다락방의 창을 내다보며 그리움에 젖어 '이름 모를 자'를 부르는 무신론자는 결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인보다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참된 만남을 갈망하는 신비주의자, 열린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서 더 큰 희망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타슈를 섬기던 기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러한 부분에서 문자적 해석과 보여지는 틀을 중시하는 보수 기독교에서는 '실존 철학'을 매우 싫어하지만, 이와 같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귀하고 멋진가?

(이것이 쉐퍼의 한계이며,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점 아닐런지..)

 

이 책의 말미에는 역자의 후기가 담겨 있다. 이 속에서 부버의 사상에 대한 몇 가지 깔끔한 정리를 들어보도록 하자.

(부버의 말 자체는 상당히 어렵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해설서를 같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부버는 예언자다운 형안으로 고도의 기술 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해 버리는 데 있으며, 이미 사람이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자에 대한 여러 가지 확실한 설명을 갖춘 '체계'의 평원에서 휴식한 적이 없다. 아니, 내가 가는 앞길은 언제나 좌우에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좁디좁은 바위등성이뿐이었다. 이와 같은 등성이에 있는 자는 절대자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아니, 이 등성이에서 확실한 것은 다만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과 만난다는 것 뿐이다."

 

결국 그는 '만남"(Meeting)이라는 것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부버를 '만남'의 철학자, '관계'의 철학자, '대화'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마틴 부버

 

그가 [나와 너]를 6년여에 걸쳐 쓰는 동안 그의 철학은 '신비주의' 에서 '실존주의'로 이행하면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데 반해,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그것'의 관계는 인간의 객체적인 경험 - 지식 세계의 것이요. '나-너'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험 - 인격 세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나-그것'이 아닌 '나-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인 행위를 힘써야 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성이 상실되어 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다 '그것'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것'의 존재가 나쁘거나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관찰, 지식의 획득, 종교적 교리 설정, 철학적 인식 등에서는 '나-그것'의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Googling

 

결국 '나-너' 의 세계와 '나-그것'의 세계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가 아닌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세계이다.

 

단지, 너무 많은 영역에서 '그것'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점에 대해 우리는 '나-너'의 관계 회복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버는 '나-너'의 관계는 결국 '나-그것'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너'를 더욱 강하게 끌고 가서 '영원한 너'를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곧 하나님이다.

 

그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나-너'의 관계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혹시 '나-그것'의 관계로만 점철되어 있진 않은가? '나-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그리운 이들이라면 '영원한 너'를 만남으로써 그 참된 관계들도 지켜 나가는 행복을 누려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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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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