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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의 [Mere Theology] 책 Ch4. 를 보면 이 둘의 신학을 비교해 둔 부분이 나온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 여정은 내가 신학을 바라보는 여정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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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3년 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을 보면서 모든 세상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희열과 기쁨에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헤아려본 슬픔]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존 비버슬루스(John Beversluis)의 논평

 

"[헤아려 본 슬픔]은 고통스러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고통, 죽음, 위태로운 신앙을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스가 그동안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질문, 그의 이전 신앙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했던 그 질문에 대해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는 상태로 남겨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발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 같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좀 더 실존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썼던 [순전한 기독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썼던 [네 가지 사랑]은 나를 전율하게 했고, 루이스가 고통을 합리주의로 적절히 버무려 놨던 [고통의 문제]는 내 신앙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그가 고통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나서 썼던 [헤아려본 슬픔]은 나의 영혼을 움직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지닌 역설적인 면모는 쟈크 엘룰의 세계관처럼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힘이 숨어 있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면 그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생생한 '실존적 신학'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활용한 논리 정연한 '신학'이 부정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의 루이스도 이후의 루이스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며 실존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서 궁극적으로 온전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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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면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마틴 루터의 이율배반적 세계관이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를 읽을 때 느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율은 대단하다. 세상을 승리할 것만 같은 십자가의 힘에 전율한다. 그러나,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삶의 무대에서 책의 메시지는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마틴 루터 또는 쟈크 엘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척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매꿔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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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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