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강영안: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 거리(Zeitabstand)' 는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가다머-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 교회 현실은 정말 상상력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힘들 거예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게 소명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동시대와 시대적 거리 두기가 아닌가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볼 수 없어요.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얘기해 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극히 소수만이 근대의 문제를 깨달았어요.

데카르트나 칸트를 보면 근대를 형성한 사람이면서도 근대의 문제를 동시에 본 철학자들이 아닌가 해요.

독특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큰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근대를 형성하면서 그 한계를 벗어날 다른 면을 드러내지요. 그렇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양희송: 현실의 교회 구조에서 일차적으로 거리두기는 누구의 역할일까요?

강영안: 신학자들이지요. 목회자는 현장에 워낙 깊숙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떨어져 있으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지요. 목회자들의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상상력의 눈이 열리고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달리 신학자는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신학자들이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받는 이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눈을 잃어 버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가 해요.

양희송: 우리 현실에서 그 과제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원인이랄까, 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강영안: 글쎄요, 그것이 뭘까요? 신학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교단 신학자라는 점이에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교회 정치로 부터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 발을 빼고 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신학자라는 본질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가 지적하는 점인데 신학자들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과 달리 한 '기관'에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기관이 교회인데, 일반 교인들과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칸트는 지적했지요. 대중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그런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일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수단이나 충고를 신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이죠. 신학자들의 연구나 발언도 교회 현실이나 사회문화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조하고 발언하기 보다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이것이 칸트의 진단이에요.

양희송: 신학자들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군요? (웃음)

강영안: 신학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가 지적한 또 다른 두 직업,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도 동일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과 대학 교수들은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의사들은 환자들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법대 교수들은 변호사나 판사를 키워 내고, 변호사나 판사는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단 말이죠.

중세 대학의 세 중심 대학, 중심 학부(faculty)인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영혼의 질병, 사회 질병, 신체적 질병, 이렇게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칸트는 이제 그런 비판적 역할을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인문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봐요.

칸트가 말년에 저술한 <학부간의 논쟁> 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양희송: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법학이나 의학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의 공적 역할 수행자로 여겨지는데, 신학은 종교 분과 혹은 특정 종교의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축소되면서 그만큼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잖아요.

강영안: 배제되었죠. 그건 계몽주의 문화의 소산이에요. 사실 계몽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아니, 계몽주의가 한참 유행할 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공적 역할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했거든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먹혀 들어갔습니다.

​칸트가 활동한 18세기 말만 해도 프로이센 제국에서 경건주의파 출신 목사들의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빌헬름 2세 치하에 종교 검열이 생기고 종교 문제에 심한 억압이 있었지요. 지금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역할이 공적 영역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인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지요. 영적 문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가, 심리상담가가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초래한 현상입니다.

양희송: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비판과 방향 제시 기능을 하려면, 교단 신학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로 종교적 영역에 관심사를 국한시키고, 기독 철학자나 기독 인문학자들이 공적 영역에 기독교 담론을 제공하는 구조로 힘을 기울여야 할까요?

강영안: 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 인문학자들과 기독 사회과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좀 더 확대한다면 기독 학자들이 교회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독교 전통과 세속 문화 전통을 모두 고려한 뒤 나오는 온당한 목소리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대학 신학부가 있거든요.

그 경우 왜 교회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이 경우에는 교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교단 신학의 경우, 교회와 너무 밀착해서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고, 교단 신학과 관계없는 일반 대학의 신학자들의 경우, 교회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발휘할 공통의 바탕(common basis)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해요.

​.........

동시대와 거리를 두려면 교회에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에 몸을 담아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 두기를 해야 현실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말씀에 합당한 교회를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빈들의 소리에 그치겠지요.

신학자나 기독 학자들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믿어요.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철학적 논의를 시도한 예를 지난 세기에서 찾자면 두 전통이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카이퍼 전통(Kyuper tradition)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와 네델란드 중심으로 한 이 전통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카이퍼 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이어베이르와 폴른호븐과 그 후예들이 이 작업을 했어요. 경제학 분야에서는 봅 하웃즈바르트, 기술 철학 분야에서는 반 리슨과 스후르만, 에술 분야에서는 한스 로크마크르 등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등장한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나 존 밀뱅크(John Milbank)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카이퍼나 도이어베이르트 전통은 사실 철학을 중심으로 경제학, 미술, 기술철학 등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고 신학이 토대가 아니에요.

오히려 철학이 토대에 있죠. 그런데 급진정통주의는 신학 자체가 모든 영역을 성찰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성경 연구나 기독교 전통 연구에 머물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영성 등 전통적으로 신학적 성찰에서 제외된 영역 전체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 점에서 카이퍼 저너통과 급진정통주의는  비슷한 데가 있어요.

...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