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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13년 전에 읽고 썼던 글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 보니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인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유신론자가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끼는 이질감을 감안해서 해석된 글입니다.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들여다 본다면 상당한 수작이 될 수도 있을 책입니다.

 

사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등 걸출한 대중 서적들을 읽어도 전반적인 과학계의 전제는 무신론을 지향하고 있다 보니 이 책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현 시대 학문의 Mainstream 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신론,기독교의 신학을 기반으로 바라볼 때 이 책이 풍기는 느낌은 대략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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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진실된 감정 만으로 '사랑' 을 유지시킬 수 없다. 우리에겐 '사랑을 할 만한' 일종의 '기술' 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 심리학이 '진리'를 가로막는데 , 나름 기여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고의 전제는 역시 유물론적인 부분이 가득차 있고 , 영혼과 정신을 명확히 분류해 내지 못했을 때 범하게 되는 문제점들이 나타나 있다.

 

사실 ,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책이다.

 

특히 '신에 대한 사랑' 의 part 는 다분히 비판할 거리로 가득 차 있는데 , 몇 부분 매우 살짝 건드려 보자면..(유신론자인 내가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신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가 내 이름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말은 , 신은 유한하지 않고 사람이 아니며 '존재' 가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엥?). 이 문장의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그들에게 '나의 이름은 이름이 없다는 것' 이라고 말하라.' 헛되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쓸데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 궁극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전혀 말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도 동일한 목표 , 곧 신은 아버지이고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하는 지식] 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 , 즉 성경에서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리는 것은 출애굽기의 기본 주제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또는 I AM) 라고 밝히셨으며 , 6장에서는 '여호와' 라고 밝히신다. 이 이름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 스스로 결정하시는 주권적인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고 나서 34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악... 을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죄하지는 아니하고(34:6~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영광을 설명하는 이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일곱절 후 하나님은 모세와 나눈 똑같은 대화 가운데서 , 자신의 이름이 '질투' 라고 밝히심으로 이름에 대한 계시를 요악하고 마무리하셨다.

 

'하나님의 이름' 이란 여호와 , 주님 , 역사의 통치자 , 의의 수호자 , 죄인들의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름이 알려지고 , 존귀히 여겨지고 , 찬양을 받도록 하신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 에리히 프롬 *

 

그 외에도 그는 (유물론적) 다위니즘을 '진리'로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에 , 모든 종교의 발달을 역사적 , 문화적 측면을 무시한 채 , 진화 심리학적 측면에서만 다룬다. 그러면 이런 식의 논증을 할 수 밖에 없다.

 

'신은 전제적 부족장의 형태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 , 자신이 요구해 온 원리에 의해 자기 자신도 속박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다. 더 나아가 신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신의 원리 , 곧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원리의 상징으로 변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가 기독교가 믿는바이다.

 

그리고 그는 도교적인 , 범신론 적인 , 뉴에이지 적인 영역을 긍정적으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발언을 하게 된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애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듯 ,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그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 관념속의 신을 상정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불가지론적인 입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단순한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의견을 동의하는 저자..

 

"그러므로 내가 신으로 변하고 신이 나를 신 자신과 하나로 만든다면 , 살아있는 신에 의해 우리들 사이의 차이는 없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신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 마치 신은 저기 있고 그들은 여기 있어서 신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신과 나 - 우리는 하나이다. 신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신을 나에게로 데려온다. 신을 사랑함으로써 나는 신에게 침투한다."

 

->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위험하기까지 한 발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심리학 책을 보면 , 유물론적 사고 , 자연주의 견해 , 무신론적 진화론 등이 세상에 미친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요약한 부분을 보자.

 

 ."이제 사랑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가 된다. 사랑은 하나님이 준 능력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안이한 대답을 하기에는 현대의 사회와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교묘하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는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성숙에 있다 

 

-> 에리히 프롬이 지닌 인지도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내린 결론을 고민해 볼 영역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모든 인간을 물질적인 개체로 여기는 그에게는 '정신' 의 영역도 도구적으로 접근해서 조작해야 하는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사랑을 기술적으로 다룬다면, 프롬이 꿈꾸던 세상이 만들어질까?

 

혹 그런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그 모습이 프롬이 결론 내린 세상의 본질인 걸까? 

 

아마도 훗날 여유가 된다면 학문의 폭을 넓히고 나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접해 본다면 새로운 강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이 책에 대한 찬사와 좋은 리뷰들을 했을 것이니, 그 글들도 함께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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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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