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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정희와 종교

 

J: 박정희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부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정책도 있었어. 그런 그도 15~16세까지는 집에서 500m 떨어진 상모교회를 다녔고 주일학교 선생으로도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어. 1967년에는 6.25 전쟁 때 파괴된 상모교회의 건축을 위해 비용 380만원 중 100만원을 헌금했고, 육군 공병대 트럭을 보내 1개월 간 교회건축을 돕기도 해. 대체로 무교로 살아온 그이지만 1970년 후반 박정희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전도를 받고 개신교 교회 출석을 고려할 만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어.

 

 

 

A: 박정희를 전도하려던 사람이 있었어?

 

J: 대표적으로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를 들 수 있지. 김준곤 목사의 반공 사상’, 그리고 박정희 정부로부터 특혜를 입어 얻게 된 ’….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할 만큼 할 말이 많으니 일단 생략할께..

 

 

 

박정희의 집권 초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규제 강화’, ‘형평성 차원에서 불교 지원을 종교 정책의 기본 틀로 삼았어. 왜나하면 이승만 집권 당시 개신교에 편향된 정책이 많다 보니, 이를 폐지하고자 했어. 결국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분명 다시 군대로 복귀하기로 국민들과 약속했음에도 그 약속을 어겼던 터라 박정희는 초조했을 거야. 국민들 눈치도 봐야 하고….

 

더군다나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진 정국이다 보니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적대감을 의식한 것으로 보여.

 

 

 

A: 예를 들어 어떤 부분에서 개신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거지?

 

J: 일단 중등교육 평준화 조치를 시행해서 학생 선발권을 없애 버려서 미션 스쿨의 개신교적 영향력이 약해지게 만든 점이야. 또한 주일 국가 행사도 이승만 집권 때는 없었다면 이를 다시 부활시켜서, 의사, 간호사 국가고시나 새마을운동 관련 행사, 예비군 소집도 일요일에 많이 했어. 그리고 주목례로 바뀌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라는 것도 추가되어 버렸어.

 

 

 

A: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선 어땠어?

 

J: 일단 불교는 여러 혜택을 입었어. 군종제도, 형목제도를 개신교가 독점하고 있다가 불교도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석가탄신일도 1975년도에 국가공휴일도 지정되었어. 또한 불교재산과리법도 재정해 주고, 새마을 운동 일환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기도 했으며 세계 불교지도자 대회도 지원해 줬어.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미국 유학파도 아닌, 토종 대통령이다 보니 민족 주체정 확립을 위한 측면에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많았어.

 

 

 

A: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좁 문화 보존의 필요성의 측면에서 불교를 지원했다면, 불교 이외의 종교들은?

 

J: 그 부분이 지적을 꽤 받았었어.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진행된 미신타파 운동의 영향으로 전통 종교들은 푸대접을 받았지. 나중에 무속신앙은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 전통문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지만….. 아이러니 한 건 자신의 딸이 참으로 요상한 짬뽕 종교인 영세교 교주 최태민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점이지

 

 

 

J: 5.16 쿠데타 세력 속에는 불교 신자가 다수 있었어. 대표적으로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두 차례나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불교계 핵심 인물 중 하나였어. 불교 신자는 장면 정부 시절 7%에 불과했는데 박정희 집권기에는 19.1%로 대폭 높아져.

 

 

 

당시 쿠데타에 참여한 군 지도부들 가운데 불교 신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게 영향을 미쳤을 거야. 박정희 집권 당시 국회의원 중 개신교 비율은 10%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승만 집권 당시 20% 넘겼던 걸 보면 대통령의 종교가 사회지도층의 종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A: 박정희가 개신교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왜 어느 순간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과 결탁하게 된 거지?

 

 

 

J: 박정희는 워낙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이다 보니, 개신교를 이용하고 싶어 했어. 정권 기반이 취약한 그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서 명맥을 유지했고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지지도 얻고 싶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혁명 공약 6개항 가운데 1~2순위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였어.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반공’, ‘친미가 절실했는데 이 두 가지를 가장 잘할 만한 거대 집단은 역시 개신교였어.

 

 

 

6.25 전쟁 이후로 뿌리 까지 반공주의가 체화되어 있고, 미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개신교의 미국 인맥은 상당했거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반고 이데올로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 ‘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등 다양하게 불릴 수 있는데,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선 아무리 뭘 잘못해도 간첩 조작 사건 일으키고, 빨갱이만 만들어 주면 다 용서되는 시대였어. 요즘도 이 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분단 국가의 난제로 남아 있지.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너희 공산당이지??’ 이런 위압을 주면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했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의 간첩 조작 사건은 현대 사회에도 보수가 집권할 때마다 발생하고 있지.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국정원 개입이 드러나고 있고, 워낙 뿌리 깊은 난제들 속에 암암리에 활약하는 국가 조직 단체이다 보니, 극우 정권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나눌 이야기가 많아.

 

 

 

 

 

A: 개신교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했다는 역사적 정황을 이젠 알겠어. 그럼 그들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변호한 건가?

 

J: 개중에는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정의평화를 위해 싸운 목회자들도 분명 계셨을 거야. 그러나, 오늘은 소위 기독교 주류 세력들의 정권 타협의 측면만을 나눠 볼께.

 

 

 

J: 개신교는 5.16 쿠데타 직후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데, 지지의 근거는 결국 반공이었어. 더군다나 개신교는 박정희의 10월 유신(1972)과 긴급조치 발령 (1974,1975) 등으로 민주주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구국기도회를 열어 사회 분위기를 반공 쪽으로 몰고 갔어.

 

 

 

A: 구국 기도회…. 지난번 11월 촛불 집회 때도 서울역 앞에 촛불 시위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때 차에도 구국 기도회 비슷한 말이 써 있던데….

 

 

       -5.16 쿠데타 당시 모습-

 

 

J: 그렇지. 극우 기도회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깊구나.

 

1975 7월에 열린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선 CCC 대표 김준곤 목사가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등 반공을 체제 유지에 적극 활용해.

 

 

 

그런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기독교가 진리의 핵심 전제로 받아들이다 보니, 베트남 파병 때도 파병군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의 십자군으로 묘사하며 파병 찬성, 대대적 환송 예배를 드리게 되지.

 

 

 

박정희 정권에겐 개신교 만큼 든든한 후원자도 없었을 거야.

 

베트남 파병 지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지지’ , ‘주한미군 철수 반대 시위등 개신교는 정말 열심히 그 정권이 유지되는 걸 도왔어.

 

 

 

 

 

 

 

A: 그 당시의 흉흉했던 시대 상황도 이런 불행한 사태에 일조를 했겠다..

 

J: 물론이야.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박명수는 이렇게 말했어.

 

 

 

“1960년대 국제 정세는 강력한 냉전체제 가운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인도차이나반도는 공산화의 위협 가운데 있었다. 여기에 김일성은 간첩을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정부의 군사적인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정신무장이 필요했고 또한 종교적인 힘이 필요했다. 대한민국 종교 가운데 반공 이념에 가장 투철한 종교는 기독교와 천주교였다…. 특히 기독교는 철저한 반공의 보루였다. 4.19 이후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보던 기독교는 박정희의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J: 박정희의 군부 독재 정권과 개신교의 유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 임마누엘 중대와 2. 구국십자군 창설 일거야.

 

 

 

베트남 파병 시기에 백마부대 내에 개신교인들로만 구성된 임마누엘 중대’ , ‘다윗 중대’, ‘요호수아 중대등이 만들어졌던 사건

 

그리고 파병 이후에 구국십자군이 창설되어 목사들이 직접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몇 주 전 [그것이 알고 싶다] 를 봤으면 잘 알고 있을 거야.’

 

 

 

A: ? 구국십자군이라면…… 박근혜의 정신적 지주인 최태민!!!!

 

J: 그렇지. 구국십자군은 최태민이 총재로 있던 대한구국선교단의 산하 단체야. 최태민 같은 사이비 교주도 반공이라는 키워드로 군부 독재 정권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니,. 어느 덧 권력의 심장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악용되고, 개신교가 정권에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사이비 종교, 국가 권력에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반공 이데올로기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논리 무시, 확률 무시하고 0.000001% 라도 정권에 반하는 말과 행동과 분위기를 풍기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북한을 다녀오고, 북한에 헌신한 빨갱이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지. 더군다나 이 만능요술봉 이데올로기사이비 종교’, ‘기만’, ‘부패’ , ‘부정을 다 암묵적으로 허용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같아.

 

 

 

분단 국가이고, 북한이 실제로 간첩을 보낸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고 조심은 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짓밟는 건 부당하지.

 

6.25가 안겨준 트라우마가 워낙 커서, 그 낌새가 조금만 보여도 극도의 공포와 증오가 생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라는 정신병리 현상으로도 이런 이데올로기를 연구할 필요는 있을 거야.

 

 

 

A: 개신교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았다는 점이 충격이야. 최근에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도 개신교의 역사를 배제하고선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데?

 

J: 그렇지. 사람들은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무당에게 휘둘리냐며, 분노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종결하고 다른 문제들도 관심을 옮기지만 그 기저에는 더 근원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배후에는 개신교의 책임과 잘못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

 

 

 

박정희는 또한 개신교를 미국과의 소통의 창구로서 활용했는데 실제로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한국 교회의 거물들이 5.16 쿠데타 직후에 미국을 방문해서 열심히 박정희 군사정권을 옹호해.

 

 

 

김장환 목사는 뉴욕 CBS 텔레비전 존 챈슬러(John Chancellor) 프로그램에 출현해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하는 일은 전혀 탄압받지 않는다. 종교인 가운데 구속된 사람들은 정치적인 활동 때문에 구속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주화 세력에 있던 목회자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버려.

 

 

 

A: 박정희 정권 때 정권 자체의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가만 놔두지 않았었잖아. 그게 어떻게 종교의 자유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탄압하지 않은 게 되는 거지?

 

 

 

J: 그러게. 논리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었지.

 

그 목사들에겐 반공을 지키고 친미를 지키는 게 복음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아니였을까 싶어. 이 중에 한 축이라도 흔들리려 하면 대대적으로 집단 행동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걸 보면다음 세대인 우리들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공감해 주고, 그들의 문제 의식을 경청하며 반영하되 그들이 놓쳐 버렸던 수 많은 영역들에 대한 반성과 각성과 변화 또한 필요할 거야.

 

 

 

A: 극우화된 개신교는 박정희에게 열심히 러브콜을 보냈으니, 이런 저런 혜택도 받았으려나?

 

J: 물론이야.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에 붙어서 이득을 취해 본 경험이 있다 보니 그들은 그 재미를 박정희 독재 시대 때도 누렸어. 일단 당시 군대 내 신앙을 가진 신자가 늘어날수록 사고가 줄어든다는 조사가 나왔고 이를 토대로 전군 신자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걸 활성화 시킨 사람이 박정희야. 초기에는 친불교 정책을 펴더니, 개신교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잘 외쳐 주고, 자신의 체제 유지에 유용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개신교에 아낌 없는 사랑을 부어주지. 물론, 자기 말을 잘 듣는 개신교도에게만

 

 

 

또한 이 시기에 개신교는 대형 전도 집회를 여는데 1973 5월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는 대단했어. 5 16일 대전을 시작으로 19일간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진행된 이 집회에는 연인원 320만 명이 참석했고, 신앙을 가질 것을 결심한 사람만 36000명이 나와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지. 그 다음으로 한국 대학생선교회(CCC)엑스플로 1974 기독교 세계 복음화 대회가 있었는데 연인원 650만명이 참석했어. 이 분위기는 전두환 집권 초반까지 이어여 1980년에 열린 ‘1980 세계 복음화 대성회는 연인원 1600만명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집회 기록을 자랑해.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집회는 군사 정권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어. 당시에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발효로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던 시기였거든. [금서] 목록도 어찌나 많았는지, ‘헉명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다 금서였어. 유시민 씨도 이 일화를 자신의 저서에서 웃프게(웃기고 슬프게) 풀어 놨지.

 

 

 

국가 행사 외에는 빌려 주지 않는 여의도 광장을 장소 이용료 없이 개신교에 제공해 주고, 부흥회 준비를 위해 군 공병대를 투입시켜 주고, 육군 군악대도 동원해서 찬송가를 연주해 주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기간에는 통행금지도 해제시켜 줬으니 박정희 정권의 개신교에 대한 지원은 엄청났어.

 

 

    -1974년도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결국 박정희 정권은 개신교를 통해 반공’, ‘친미체제를 강화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에 협력해 교세를 확장해 나가는 놀라운 공생 관계가 연출된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한국 교회사의 영향으로 메가처치 현상도 대두된 게 아닐까 싶어.

 

 

 

A: 박정희가 했던 여러가지 일들 중에 새마을 운동도 유명하지?

 

J: . 새마을 운동의 단초를 제공해 준 것도 개신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였어.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민들이 동참하도록 해야 할텐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조용기 목사에게 물었고 조용기 목사는 새마음운동을 벌이라고 조언했대.

 

새마을 지도자들이 개신교 농촌운동인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일정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조용기 목사의 조언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 가능해.

 

조용기 목사의 소위 ‘4차원 영성그 당시 표현으로는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도 중요해.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에게 희망을 준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급속도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면이 있었고, 교회들도 번영 신학’, ‘성공 신학에 도취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어.

 

 

 

A: 박정희의 공로 중 하나가 산업화를 성공한 거라고들 하잖아?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을 착취하고 부당하게 대우해서 그 공로마저도 논란이 많지만 말이야…. 이러한 산업화와 개신교도 관련이 있을까?

 

J: .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개신교였거든. 산업화가 되면서 급격히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을 개신교는 부지런히 흡수하면서 개신교의 교세는 성장했고 도시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무너지고, 인간 소외 현상, 빈부 격차 심화 등의 사회 문제가 생기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쉼터 역할을 교회가 자처하게 된 것이지. 또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이러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개신교의 급격한 교세 성장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같은 1세대 메가처치(엄청 큰 초대형 교회)를 탄생시켰어.

 

1970~1980년대에 다른 교회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산업화가 진행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개신교 신도는 62만명에서 자체 추산 1000만명에 육박해서 무려 16배로 성장했어. 교회 수도 5000개에서 35000개로 늘어나 7배나 증가했지.

 

 

 

A: 교회는 이런 부당한 역사 속에서 쭉 정권에 타협만 하고 온거야? 이건 너무 암울한데?

 

J: 결코 그렇진 않았어. 1970년대 들어 국가권력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거든.

 

개신교는 1968년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 위한 도시 산업선교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시작해. 도시산업 선교회는 출범 이후 1970년 전태일의 분신에서부터 1979 YH 노동조합 사건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의 굵직한 노동계 사건과 함께 하며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인권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어.

 

 

 

A: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가 흔들리는 건 눈뜨고 못 봤을 텐데?

 

J: 그랬지. 그는 특정 불순 세력을 잡고자 도시산업 선교회를 공격했고 이 때 인명진 목사, 문동환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이 구속되.

 

 

 

개신교는 1969 7 3선 개헌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1973 4월 남산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3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6 3 3.1 민주 구국선언, 1979 11 YWCA 위장결혼 사건 등에 관여하며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가.

 

 

 

그러다가 1973 4 22일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이유로 내란예비음모죄로 박형규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전도사 등이 실형을 선고 받기도 해.

 

 

 

A: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다른 종교계도 중심이 되어서 1973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했었지? 아마 서명 10일만에 30만 명이 참여해서 군사정권이 긴장했다던데?

 

J: 그랬지. 분명 그들의 행위는 정의롭지 못했거든. 그러다 보니 1974 1월에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 발동을 걸어. 1976 3 1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퇴진 을 요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지 박정희는 종교 지도자 27명을 체포하는데 여기에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서남동 목사, 안병무 목사,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등이 포함되지.

 

 

 

A: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던 개신교가 갑자기 저항 운동을 벌이니 박정희는 골치가 아파겠네.

 

J: 물론 대형교회를 이룬 극우 기독교 목사들은 여전히 정권을 찬양하기 바빴어. 그 와중에 야인처럼 들판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목사들이 출현한 것이지.

 

박정희는 총 9차례 긴급 조치를 발동했는데 이 중 실질적인 조치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나 반대를 금지한 긴급조치 1 (1974.1.8), 민청학력 등 반국가단체 구성을 금지한 긴급조치 4 (1974,4.3), 유신헌법 반대자들의 영장 없는 체포를 가능케 한 긴급조치 9 (1975.5.13) 등이었어.

 

(긴급조치 2호는 고등군법회의와 비상보통군법회의 설치를,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 등 민생 부분을, 긴급조치 5호와 긴급조치 6호는 긴급조치 1,2호의 해제를,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 휴교령과 군대 투입을 규정하고 있다.)

 

 

 

긴급조치 1: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긴급조치 4: 민청학련 사건 -> 이 때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 관계자들이었어. 한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 관계자들이 이 두 번의 긴급조치로 42명 구속되었는데 이 중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빼면 모두 개신교 관계자였다고 해.

 

 

 

민청학련 사건은 조사받은 사람만 총 1024명이고 이 중 203명이 구속되고 183명이 실형을 받은 최대 용공 조작 사건인데 이 때 많은 종교인이 구속되었어. 이 사건이 터지자 그 해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교회 협의회(WCC) 중앙위원회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각 나라 교회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해.

 

 

 

A: ~ WCC라면 몇 년 전에 기독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 단체인 걸? 많은 기독교가 WCC를 아주 위험한 세력으로 규정하던데?

 

J: 그 당시 전단지 뿌리고, 카톡 뿌려대던 이들은 다 극우 기독교 세력이라고 보면 되. WCC의 기원이나 의의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부족한 거지.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반공등에도 배치된다고 보니까….. 더군다나 극우 집단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동성애’ ,’낙태 같은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 그거 하나로 전체를 규정해 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지. WCC 단체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거 같다면, 그 단체의 설립 의의를 다시 공부하고 바르고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지, 무조건 악마 집단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그들이 키워온 증오의 신학의 산물이 아닐까?

 

 

 

A: 신학적으로도 논의할 게 많이 나오네?.,.. 최근 몇 년간 기독교 계를 술렁이게 했던 모든 이슈들도 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연결되는 구나?

 

J: 그렇지. 이슬람 포비아, 동성애를 경계하는 호모포비아 등의 사태와 법안 반대 서명운동 등 극우 단체들은 이런 쪽으로 열심을 많이 내. 신학적으로 건전한 길을 지향하고, 기독교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그걸 추진하는 세력들이 지닌 독특한 특성들은 그들의 운동에 동참하는 걸 꺼리게 만들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민청학련 사건은 로마 교황청에게 까지 소문이 전달되었고 교황청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많은 나라에 경악을 일으켰으며”, “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어.

 

 

 

박정희는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개신교를 겨냥해서 1975년에는 KNCC 선교자금 유용 사건을 일으키기도 해. 박정희 정권이 갑자기 KNCC 사무실에 들어와서 재정업무 서류를 압수하고, 김관석 목사와 교회 직원들을 체포해. 세계 식량기구 독일 지부에서 준 8만 달러의 선교비를 착복했다는 이유였는데 세계식량기구는 KNCC 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목사 등 관련자들은 구속되었어.

 

 

 

그 당시 천주교도 1.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2.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3. 함평 고구마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저항 운동에 참가하게 되. 그 전까지는 천주교도 개신교처럼 반공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오늘은 개신교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볼 테니, 이 부분은 생략할께.

 

 

 

즉 박정희 집권 후반기에는 정권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고 보면 되. 소위 진보 종교인의 탄생이지. 이들은 1970년대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며 강력한 체제 저항 세력이 되어갔어.

 

 

 

박정희 정권이 강화시킨 산업화가 기존 극우 기독교 세력의 덩치를 불리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반면 이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과 노동자, 농민의 인권 문제, 장기간의 군부 독재 정권 집권으로 인한 회의 등을 유발시킨 면도 있었어. 산업화의 양면성이지.

 

 

 

그러나 이런 국내적 현상 뿐만 아니라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4차 총회와 1962년부터 4년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진보 기독교인이 많아진 측면이 있었어.

 

 

 

1960년대 당시에 베트남 전쟁, 3차 중동전쟁, 체코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흑인인권 운동 등이 대두되면서 종교계도 각성의 바람이 불었거든.

 

 

 

이러한 두 국제회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보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 국내의 민중신학 등이 태동하게 되지.

 

 

 

참고로 개신교, 천주교와 달리 불교는 1980년대 들어서야 체제 저항적인 진보 종교인이 나타나. 1980년도에 전두환 세력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 사건을 계기로 불교도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지.

 

 

 

A: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

 

J: . 이런 격변의 시기를 지나서 그 다음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가보자.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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