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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 인생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던 기간은 겨우 아홉 달이지만 그는 내가 살아갈 나라의 토대를 만들어두고 떠났다.

그 토대는 친미주의와 반공주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분단국가라는 것이다. 55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이봉창 의사를 높이 숭앙한다.

미국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조국 광복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고 본다. 게다가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벌을 만들고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으며 12년 장기집권을 한 끝에 독재와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시민을 살상한 죄로 쫓겨났다.

하지만 인간 이승만이 시종일관 악의 화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한때는 멋진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남보다 먼저 읽는 안목을 가졌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장악하는 배짱이 있었다. 개인으로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던 청년 이승만은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언론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만민공동회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구한말의 이승만은 빛나는 열정과 애국심을 가진 청년지식인이었다. 그는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덕분에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될 미국 유학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역사학, 국제법,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 다시 돌아와 한동안 YMCA 전국조직을 구축하는 등 교육운동과 선교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속대상이 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해 교민청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는 외교활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찾는 방안을 모색했으며 무장투쟁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34년에는 일찍이 혼인했던 박승선과 이혼하고 무려 스물다섯 살 젊은 프란체스카 돈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1900~1992)와 결혼했으며 1939년에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로 군림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모대접을 받았다. 당시 국민들은 아직 국제감각이 부족해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아무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 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는데,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04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 정가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41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 조선이 독립할 것임을 예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하라고 미국 정부에 청원하는 한편, 내분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일본군에 쫓겨 충칭으로 피난해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로운 망명객이 아닌 임시정부 지도자로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을 경우 조선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의 행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청원을 거절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행정부가 태평양 전쟁 지원을 받으려고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밀약했다는 주장을 해서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싱턴 조야의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을 접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자 맥아더 장군은 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안했다.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범국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분할점령을 모면했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과 국토가 두 동강 났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1945 12 28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장관들은 조선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중국을 포함해 네 나라가 신탁통치를 하자고 합의했다.

 

이번에도 우리 민족의 뜻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 박사는 즉각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신탁통치에 찬성한 조선공산당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신탁통치와 조선의 완전독립 문제를 다루던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했으며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다음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쫓아내 북조선을 차지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는 분단을 기정 사실로 만들고 남한 단독정부의 권력을 차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 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통해 좌우동거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투철한 반공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을 수는 있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멀리 있지만 소련은 국경을 맞댄 나라였고,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끈질긴 투쟁을 벌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조동조합과 농민단체를 비롯해 이념적으로 잘 무장한 전국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 정치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이 신탁통치체제에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 5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UN 38선 이남지역의 선거가 자유로운 가운데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의 조국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다른 국가가 탄생했다. 1948 8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 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퍼센트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과 그리고 반민특위 이슈]

 

국회 본청 중앙 로텐더 홀을 지나 의원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1999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국회의장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상을 세운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았으니 독재를 한 잘못은 잘못대로 비판하되 그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승만 시대 대한민국이 정통성 없는 국가였다고 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는 당신, 북으로 가라!” 그렇게 소리 지른다.

그럴 일이 아니다. 현대사 5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처음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크게 자랑해도 좋을 일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낸다는 말인가.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정통성을 일부 지니고 출발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정상적인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북한 체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에 살러 가지고 않을 것이다. 통일운동을 하러 북한에 간 사람들 역시 북한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인간적, 정치적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워야 할 국가원수로서 경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극단적인 사례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이다. 국제 축구연맹 (FIFA) 이 본선 티켓 16장 가운데 딱 한 장을 아시아에 배정했고 한국과 일본만 참가신청을 했다. 아직 외교관계가 없어서 선수들이 상대방 국가에 들어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몰수패를 당할 위기에 봉착한 축구계 인사들이 홈경기 허가를 청원하다가 나중에는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할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했다. 대표팀 이유형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출국허가를 받으면서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열린 두 경기에서 한국팀은 1 1무를 거두어 본선에 나갔다.

마흔여덟 시간 동안 비행기를 몇 차례 갈아타고 경기 전날 심야에 겨우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대표선수들은 헝가리에 아홉 골, 터키에 일곱 골을 먹고 탈락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스위스 시민들이 보낸 위문품과 위로편지가 만신창이가 된 대표팀 숙소로 쇄도했다.

 

그런데 그랬던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려고 여러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고문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특고형사의 대표선수였던 노덕술을 구하려고 국회를 짓밟은 사례 하나로 충분하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일제 군대, 경찰, 행정기관의 고위직을 지냈거나, 지위가 높지 않아도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악명이 높았거나, 관직은 없었지만 유명 지식인으로서 일본 왕과 조선총독부를 찬양하면서 징용, 징병과 근로정신대 등에 지원하라고 선동했거나 일제의 침략전쟁 군비조달에 큰돈을 기부한 기업인들이 용의자였다.

반민특위는 동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지위와 활동내용을 기준으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에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장선 젋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분개한 국회는 정부가 체포한 국회의원들을 석방하라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그러자 군중 수백 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와 반민특위의 공산당을 숙청하라고 외쳤다. 반민특위는 이 난동사건을 일으킨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친일파는 곧바로 역습을 펼쳤다.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이 서울 중부경찰서 병력을 데리고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장 오세윤을 체포하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의 권총을 빼앗았다. 강원도와 충청북도 등 다른 지역 특경대원들도 지역 경찰 병력에 무장을 해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 경찰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 9000명은 전원 사표를 내겠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국회는 반민특위를 원상복구하고 특경대를 습격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특경대 습격을 지시했다고 한 데 이어, 반민특위활동이 민심을 해치고 있어서 특경대를 해산하겠다는 담화문을 낸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항일무장투쟁을 해서 자기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 것처럼 선전했고, 가랑잎으로 나룻배를 짓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거나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어쨌든 사실이었다.

북한 권력자들은 친일행위자들이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된 사실을 자기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소재로 삼았다.

남조선은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은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라면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는 것도 정당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2013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주이념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반민특위 해산 이후 65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2005 12월 국회가 친일재산환수법을 제정했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이 민족을 배신해서 얻은 토지를 되찾겠다는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3년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자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동상 건립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처벌을 모면한 친일반민족행위 용의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다음 자연사의 축복을 받았다. 결국 친일행위자에 대한 응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부와 국회, 권력기관은 물론이요, 경제계와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 뿐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과 함께 그 일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친일문학론]으로 지식인 사회의 일제 잔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친일인명사전] 발간 계획을 세웠던 임종국 선생 빈소에서 설립 발의가 이루어졌다.

1989 11월의 일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훼손소송과 발행금지가처분소송, 심각한 재정난을 모두 이겨내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까지 강만길, 백낙청, 윤경로, 염무웅, 최병모 등 200여 명의 역사학자와 지식인, 변호사, 종교인들이 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1000여 명의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10만명의 국민모금 참가자들의 돈을 모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반민특위가 적용했던 것과 거의 같은 기준에 따라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의 이름과 직위, 활동 내용을 수록했다.

 

 

 

 

 

[김일성]

 

1912년 평양 근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고 어머니 강반석은 모태 기독교인이었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만주군벌 부대, 조선인 유격대가 함께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조선 민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37년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이 조국광복회와 손잡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큰 충격을 준 보천보 사건에서부터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신문이 홍비’(공산당 강도)가 일으킨 이 범죄를 제법 크게 보도했다. 온 나라에 입소문이 돌았다. 김일성은 1940년대 초 일본 관동군의 공세에 밀려 소련으로 퇴각했다 광복이 되자 북한으로 돌아와 이미 조직되어 있던 인민위원회를 장악했다.

 

민족의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 6 26일 경교장에서,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정황이 많았지만 안두희는 입을 다문 채 죽었고 배후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 대륙은 1949 10 1일 마오쪄둥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깃발 아래 들어갔다.

소련과 동유럽에 이어 중국까지, 지구 표면 절반이 붉은 깃발에 덮인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열전에서 막 벗어난 지구촌은 이념적 상호비방과 경쟁적 군비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4.19 혁명-

 

국가 정통성의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과 광업, 전력 등 일제 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때문에 분단 직후 산업기반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게다가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빠르게 정비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70년대 초까지 경제적으로 북한에 뒤졌다.

 

 

 

국가정통성의 세 번째 요소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며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처음에는 국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국회를 탄압해 지지기반을 잃게 되자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했고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러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없애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한 표 부족으로 부결되자 소수점 이하를 떼버리고 찬성률을 반올림해 가결을 선포하는 기괴한 반칙까지 저질렀다.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4.19 혁명이었다.

 

 

 

 

-3.15 부정선거-

 

이미 12년을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선거일은 1960 3 15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문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였다.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는 장면 후보에게 졌다. 연로한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는 만큼, 자유당은 무슨 짓을 해서든 이기려고 했다.

그래서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조직까지 총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오늘의 선거문화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투개표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 2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 학생의거.

 

3.15선거는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으며 3인조, 5인조로 함께 투표하면서 누구를 찍는지 서로 확인하게 했다.

야당 투표 참관인을 내쫓고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이기붕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내무부 공무원과 경찰이 개입했다.

부정선거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득표율이 100%에 육박했고 이기붕의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곳도 허다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긴급 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조정했다.

 

민주당은 3.15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 11,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탈취해 경찰서장실 앞에 터뜨리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부정선거와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학교 학생시위였다.

4 18일 오후 고려대학교 학생 3000 여 명이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는 당시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대한반공청년당 깡패들이 대오를 지어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종로 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습격했다. 그들은 각종 흉기를 마구 휘둘러 유혈이 낭자한 참극을 벌였다.

이날의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해마다 4 18일에 수유리 일대를 뛰는 마라톤 행사를 한다.

 

4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4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하면서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은 4 28일 새벽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주한 미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5 7월 세상을 떠났다.

 

1960 4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 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자유당이 사라지자 정치의 중심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당내 노선투쟁과 권력다툼으로 옮아갔다. 장면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군사정변에 무너졌으며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4.19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권력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바꾼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4.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득했다. 다음 인용문은 이 혁명을 촉발한 청년학생들의 정신적 각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19 선언문-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씁니다. 저도 생명을 바치더라도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이 남긴 편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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