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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가 행위 구원론자인가?]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92~96PAGE

 

 

 

 

 

루이스는 쉐퍼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마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완전한 겸손으로 우리의 죄악 된 선택들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즐길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루이스는 천국을 죄 사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천상의 디즈니랜드로 제시하기보다, 오직 정화와 적절한 준비를 갖춘 자들만이 천국 도시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 읽었던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바울의 일관된 입장과 사복음서에 제시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은혜는 서로 양자택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루이스는 속죄론을 그 열쇠로 제시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수렁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너무 심각해서 단순한 개선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총체적인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시려고 끈질기게 일하셨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원한다면 내가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나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밖의 다른 것은 없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너희는 나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완성할 것임을 명심하여라. 너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고생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죽음 뒤에 어떠한 상상조차 못할 정화의 과정이 오더라도, 내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희가 진실로 완전해지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절을 읽고 루이스의 구원론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전혀 맞지 않다. 이 구절에서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성부의 형상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그분이 내리시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셨고 종국에는 완성하실 거룩하신 의사에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두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분명히 신뢰를 수반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 

 

 

(필자: 아르뱅주의니, 4차원 복음이니 해서 한국 기독교는 행위를 집어 던지고 구원티켓을 획득한 이후 세속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예배도 안 빼먹고, 헌금도 잘 하니 신실한 성도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참 복음이 아니다) 

 

 

루이스가 인간의 의지나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호감을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을 치료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구원의 열쇠는 기꺼이 항복하고, 회개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품과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반역자들이다. 따라서 출발점은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적의 영토에서 빠져나온 뒤에 하나님의 진영으로 귀순해야 한다.

 

탈출로에는 지뢰, 철조망, 포탄의 파편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은 다음 세계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께서는 이 길 혹은 다른 길, 이생 혹은 다음 생에서도 우리가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를 반드시 귀환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시 말해 회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는 사실상 죄인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중심적 기질들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찾으려 할 때에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정화의 과정은 무덤을 지나서도 지속될 것이다.

 

 

 

[개인 기도]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연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아들아, 사실 너에게서 악취가 나고 네 낡은 의복에서 진흙과 오물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너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아무도 그런 것들로 너를 비난하지 않고 너를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쁨에 동참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성결케 되고, 변화되며, 완전해질 때까지 이와 같은 성품 형성의 과정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타락한 인간은 완전한 회개와 복종을 행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하여 겸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루이스는 이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를 지적한다.

 

오직 나쁜 사람만이 회개할 필요가 있지만, 오직 선한 사람만이 완전하게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러나 그 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으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회개와 복종, 죽음을 경험하실 수 없다. 그분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루이스는 성육신을 이상적인 해법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회개자가 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인간의 속성을 받아들이심으로 완전한 겸손 가운데 회개하시고, 복종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으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속죄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행의 모델이나 도덕론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진짜 이유는,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믿음이 수반된다. 속죄는 법적인 형벌의 행위라기보다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속죄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회개를 이루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복종,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극복하시고 완전한 겸손으로 구원에 이르셨다. 완전한 겸손은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유일한 성품이다.

 

 

 

이처럼 구원을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구상하는 것은 루이스의 저작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그는 우리의 성품 형성과 궁극적인 구원을 가로막는 유일한 것이 내키지 않는 태도라고 못 박았다. 루이스는 구원이 비록 우선적으로는 과정이지만, 결정과 항복을 요구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빨간 작은 도마뱀의 간섭 때문에 천국 생활에서 주눅이 든 한 혼령을 그리고 있다. (욕망을 상징하는)이 도마뱀은 그의 귀에 대고 절망적인 말들을 속삭인다.

 

도마뱀은 그에게 자기가 없이는 행복하게 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이상 살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천사가 나타나 도마뱀을 침묵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 그 혼령은 동의한다. 그러다 그는 천사의 그 말이 도마뱀을 없애자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러자 혼령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도마뱀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소. 어쩌면 내가 저 녀석을 잘 다룰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는 지금 당장 죽이는 것보다는 찬찬히 두고 지켜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천사는 그에게 그런 점진적인 과정은 이러한 경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설득한다. 천사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내놓는다.

 

나는 네 의지가 없이는 저 녀석을 죽일 수가 없네. 허락해 줄 수 있겠나?” 결국, 극적인 갈등을 거친 다음 그 혼령은 천사에게 도마뱀을 죽이도록 허락한다. 천사가 일을 수행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도마뱀이 눈부신 종마로 변신한 것이었다. 또한 그 혼령 역시 화려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 말을 타고 천국의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놓는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저열하고 가장 상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굴복한다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욕망은 그것이 죽었을 때 떠오를 갈망의 풍부함과 에너지에 비교하면 가난하고 빈약한 불평의 하소연이다.”

 

 

 

이는 마치 죄가 그 매혹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파괴와 비참함을 대표하듯이 참된 성품 형성은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과 성취를 대표한다는 중대한 원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을 누리려면, 완전한 도덕적 변화는 타협할 수 없는 선행조건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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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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