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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지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한기총이나 NCC가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0년 이후 상황이지요. 교계연합기구의 등장 이전에는 각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역할을 상징적으로 했지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나, 고신이나 합동 측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기총이나 NCC가 마치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같이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들의 모임이지요. 장로들도 별로 관여하지 않고 더욱이 일반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양희송: 그리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연합기구들은 그 구조상 아래로부터 위임의 절차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 중간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대표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강영안: 가톨릭의 경우에는 위에서 위임을 하지요. 교황에서 추기경으로,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각 본당 신부로 내려옵니다. 일종의 위임이고 명령이며 권면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는 그런 구조 자체도 없잖아요. 위아래 소통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편의상 한기총이나 NCC를 통로로 삼아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쉬웠지요.

목사들도 나름의 통로로 교단의 목소리를 내봐야 들리지 않으니까 연합의 이름으로 교회의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한기총을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했더니, 방송국에서 그 프로그램 마지막에 한기총 대표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목사님들이 다 선수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사님들이 모두 선수가 되어 공도 차고, 운동장을 누빈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는 주요 역할을 목사님들이 맡으려 해요.

마치 현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대단한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선수가 아니라 성도들을 키워 내고 양육하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벤치에 앉아서 코치 일을 보아야 해요. 선수로 뛰는 것은 성도들이에요.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영역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목사들의 영역을 중심에 그렸죠.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영역 등 각 분야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성도 그룹이 해당 분야에 의견을 내고, 필요할 경우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시민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선수로 키워서 전문 분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개념이 너무 넓기는 한데, 그때 교회는 목사만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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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제 고민과 제안을 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데 쓰여 온 '교계(church society)'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생각을 그동안 소위 '교계 지도자(church leader)'들이 대변해 왔습니다.

 

특히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나 N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같은 교계연합기구가 그런 역할을 해왔지요.

 

 

 

 

그런데 이런 구조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 논란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한기총이나 NCC 말을 듣고 '한국 개신교는 이런 입장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교계 대표가 한국 개신교를 대변하고, 또 대표할 수 있다고 보는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이 논란 때 한기총과 NCC 둘 다 사학법에 반대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사운동 단체에서는 사학법 찬성 입장을 발표했거든요.

기독교사들은 당시 교계 정서에 역행하더라도 그 법이 사립학교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성도들의 절대 다수는 학부모들인데, 이 층에서도 사학법 찬성 입장이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사학 운영자가 교계 지도자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그들이 삭발식을 거행하는 등 강경한 반대 입장을 드러내면서 마치 한국 개신교 전체가 사학법 반대 입장인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목회자가 한국 교회를 과잉 대표하는 경우라고 봅니다.

그것은 목회자들 스스로 감당 못할 과도한 짐을 지는 불행한 일이고, 성도들은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은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론 왜곡 현상을 겪는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저는 '교계'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기독교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과 그룹의 한 부분이고, 이들은 목회 전문가로서 분명한 입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교육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교육 전문가, 사학 운영자, 교사 집단, 학부모 집단 등 한국 개신교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그룹 중에서 교육과 관련 있는 이들의 발언을 먼저 경청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서의 사학법 논란을 제대로 다루려면, 이런 여러 집단을 취재해서 그들이 같은 입장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이런 단일한 입장'이라고 보도할 수 있겠지만,만약 의견이 엇갈리면 '개신교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고 알려야 옳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전문적인 목회 영역을 넘어서, 자기가 대변할 수 없는 주제나, 위임받지 못한 의사에 대해 과잉 대표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를 목회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상정한다면 전혀 갈등이 없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앞서 말씀하신 개혁주의 전통이 '기독교 사회' 개념에 잘 부합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럴 경우 큰 원이 기독교 사회가 되는 셈인데, 그러면 그 핵심에는 무엇이 와야 하는지 궁금한 겁니다.

저는 그 핵심에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고 보는데, 이 자리에 어떤 물리적 기관이 놓일 수 있는가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역을 비워 놓는 것이, 그러니까 그 영역이란 하나의 기관으로 대변될 수 없다고 설정해 놓는 것이 개신교적 신앙고백에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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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무현과 종교

 

J: 노무현은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는데 종교 활동에 열심이 있진 않았어.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 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고 답했고, “확실하게 믿느냐?” 고 재차 묻자 노무현은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어.

 

최초의 반미 사건인 부산 미문화원 사건 때 만난 송기인 신부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성실하게 교리반에 참여하진 않았었다.

 

노무현은 왜 성당에 안 나오냐고 다그치는 신부에게 신부님이 성당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어.

 

개신교인이 아닌데도 개신교가 가장 지향하는 많은 면모를 갖춘 대통령이 아니었나 싶어.

 

 

 

A: 그거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J: 그러게. 사람마다 해석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요즘 시국에는 노무현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아무튼 노무현의 삶의 이력에는 천주교보다 불교가 더 많이 등장해.

 

청년 시절 고시공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절에 머물기도 했고, 불교 경전도 탐독했으며 권양숙 여사도 평소 불심이 깊었지. 또한 대통령 재임시절 해인사를 세 차례나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어.

 

 

 

A: 아마 극우(보수) 개신교는 노무현을 엄청 싫어했지?

 

J: 말도 못했지. 그들의 반정부 집회는 김대중 정권이 아닌 노무현 정권 때 본격화 되었어.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최대 정적은 개신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지.

 

 

 

 

 

A: 왜 극우 개신교는 노무현을 싫어했지? 단순히 야당 소속이라서?

 

J: 일단 4대 개혁입법(국가 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서였어.

 

특히 극우 개신교는 1. 국가 보안법 폐지 2. 사립학교 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어.

 

국가 보안법 폐지는 자신들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건드는 심각한 사안이었고, 사립학교법 개정은 개신교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사고 속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 ‘반공 전체의 포기라는 도식이 있었어. 즉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두 소멸해 버려서 자신들의 주도권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 여겼던 거지. 이걸 막기 위해 조갑제를 위시한 극우 언론들과 손을 잡고 한기총도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한기총+조갑제의 놀라운 연합 전선이었지.

 

 

 

A: 국가보안법 폐지는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 만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데 사립학교법 개정도 반 정부 시위에 중요 역할을 한 거야?

 

J: 오히려 사립학교법 개정은 극우 개신교들이 반 노무현 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노무현 정보는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장 친인척의 이사 비율 축소 30개 조항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추진했어. 이를 지켜본 극우 개신교는 정부의 개정안이 사학의 설립 정신을 훼손해 결과적으로 재산권 행사를 어렵게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

 

 

 

2005년 당시 개신교는 중학교 123, 고등학교 165개의 많은 사학을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일부 목사들은 삭발 투혼을 하기도 했고, 학교 폐쇄 등 강경 조치로 맞서기도 했어. 20016 12월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목사와 성도 3000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해 .

 

이 때 극우 개신교는 구체적으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2007년에 시행될 선거(대선과 총선) 때 그 복수를 하겠다며 사립학교법 재개정을(그 쪽에서 재개정을 요구했어) 반대한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여 나가. 당시 한기총이 1차 낙선 대상자 5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해찬, 장영달, 정세균, 유기홍, 최재성 의원이 여기에 속해 있었어.

 

 

 

A: 교회가 뭔가 이상한데?....

 

J: 본인들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나봐.

 

 

               -분향소를 찾은 한기총 임원진-

 

 

그 이외에도 종교 단체 기부금 내역 공개, 종교인 과세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극우 개신교들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엄청 이를 갈았어.

 

 

 

김지방의 [정치교회]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개신교계 인사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니 정치권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교회의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해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된다. 대형 교회 목회자를 비롯한 개신교계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 기독교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A: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신교 소속이 아닌 대통령이 꼭 반기독교 정권일까?

 

J: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아.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과 가치관, 걸어온 길, 내뱉는 말들이 진리에 가까운지, ‘진리로부터 먼지가 더 중요한 바로미터가 아닐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볼 필요가 있겠지? 중요한 것은 단지 개신교 소속이라고 해서 그 정권이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게 그 동안 보여왔던 개신교의 민낯이라는 거지. 그게 옳았다면, 그 열매도 한번 주목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당시 사립학교법 논란에는 강의석 사건도 있었어. 미션스쿨에 다니던 강의석 군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서울특별시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해 개신교계는 그 학교를 종교적 목적으로 세웠는데 고교 평준화 조치로 인해 학생 선발권이 없어지다 보니,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 교육이 안되고 있다고 주장했어.

 

어찌 되었든 법원의 판결은 미션스쿨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사립학교법 문제로 날카로워진 개신교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

 

 

 

A: 노무현 집권 당시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참 많았지?

 

J: . 무려 18차례나 있었어.

집권 초기에는 반공’, ‘친미를 중심 이슈로 잡았고, 중반에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중심 이슈였어. 나중에 말기가 되니 모든 이슈를 다 섞어서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와는 근간 자체가 매우 다른 집회였지.

 

2002 6월 여중생인 심미선, 신효순이 미군 차량에 압사당한 후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 극우 개신교는 미국의 한국 포기는 다시 남한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어.

 

 

 

A: ‘반공 이데올로기가 어마 무시하게 파급력이 세구나.

 

J: 거의 게임에서 말하는 치트키 수준이었지. 그나마 시대가 발전해 가면서 새로운 의식을 지닌 시민들이 많아져서, 이젠 더욱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편이야.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겠지만….

 

 

 

당시 극우 개신교가 벌였던 집회를 주도하던 목사들 중 한사랑 교회 김한식 목사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했어.

 

김홍도 목사는

 

대한민국은 간첩 천국이며 더 이상 간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 교회가 친공, 친북, 좌경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 다음 사립학교법 재개정문제를 놓고 시위할 때는 극우 개신교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노무현 정부를 압박했어. 한나라당 역시 보수 개신교가 자신들의 당을 지지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지.

 

 

 

도올 김용옥은 이에 대해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신정정치를 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며 경고하기도 했었어.

 

 

 

A: ‘반공도 중요 키워드지만, ‘친미도 역시 중요한 극우 개신교의 입장이었나 봐.

 

J: 아무래도 선교사 파송 시절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입어 온 게 개신교이다 보니…. 6.25 때는 물자도 대주고 얼마나 고마웠겠어?  더군다나 미국 유학파 신학도들의 비중은 64.5 퍼센트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식 신학과 사상, 인맥이 계속 제자들에게 대물림 된 측면도 있었어.

 

최근에 세대 교체기를 맞이한 대형교회의 후임 목사들도 미국 유학파가 많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도 그렇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2007) 정부가 마지막으로 손봐야 할 대상으로 1. 재벌, 2. 대형 교회 3. 강남 부자 가 거론되기도 했었다. 재벌은현대’, 대형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라는 이름까지 거론되어 조용기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 해명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어.

 

 

 

당시 김홍도 목사는

 

내가 반공운동을 하고 좌파정권을 자꾸 까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도 알고 교인들도 아니까이건 좌파사상을 가진 정권이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거예요. 전에는 없었어요. 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지.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가장 미워합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어.

 

 

 

A: 본인이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잘못해서 구속 당했던 거 아닌가?

 

J: 그러게. 본인들이 자주 쓰는 전략이라 민주주의 세력들도 속이고, 조작하고 가두는 방법을 쓸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 같은데, 씁쓸하지.

 

극우 개신교는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개신교 독자 세력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2004년 제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정당투표제가 있어서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 가능케 되었어.

 

 

 

17대 총선에서는 14개의 정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국민통합21, 가자희망 2080, 공화당, 구국총연합, 한국기독당, 노년권익보호당, 녹색사민당, 민주노동당, 민주화합당, 사회당)이 정당 등록을 마쳤어.

 

당시 첫 기독교 정당인 한국 기독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사람은 최수환 장로, 박영률 목사인데 최수환 장로는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었어. 박영률 목사는 한기총 총무를 지냈고…..

 

창당대회에서 CCC 대표 김준곤 목사는 전국 개신교 인구가 25퍼센트이고, 투표율이 약 50퍼센트 정도가 될 것이므로 개신교인들이 90퍼센트 정도만 투표하면 전체 유효표 가운데 약 50%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그러나 까놓고 보니 당선자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A: 사실 기독교의 정당 활동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었지? 아마?...

 

J: .. 북한은 원래 개신교의 주류가 있던 곳이었으니까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남한의 교세가 확 커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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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대중과 종교

 

J:김대중은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고 나서 장면의 권유로 천주교인이 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어.

 

A: 토머스 모어??.. 세례명이 멋진 걸?

 

 

 

J: 그러게.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어. 40년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투옥과 납치(박정희가 지시한) 속에서도 천주교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지.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 때 납치 당할 당시에 대한 간증을 2007 CBS TV 개국 5주년 특별 대담에 출현해서 나눠준 적이 있어. 한번 들어볼까?

 

 

 

“1973년 납치되었을 때 물에 던져지기 직전이었다. 당시 하나님을 생각하진 않았다. 곧 죽는구나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에게 살려주십시오. 나는 우리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 때 기도도 정치적으로 했다. (웃음).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나를 묶었던 정보부 요원들이 비행기다!” 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옥중서신에 잘 담겨 있다.

 

 

 

나는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 외부적 환경이 얼마나 가혹하든,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소망으로 일관할 결심이다.”

 

 

 

이 기회를 나의 영적 심화와 지식 향상의 기회로 삼으며 건강의 유지에 힘써서, 앞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도구로 쓰이는 데 좀더 쓸모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마음먹고 있다.”

 

 

 

참고로 김대중의 아내인 이희오 여사는 개신교 신자였고 서울 신촌에 있는 창천 감리교회에서 오랜 기간 장로로 시무했었지.

 

 

 

A: 최초의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집권이었으니 극우 개신교 단체들이 경계를 잔뜩 했겠는걸?

 

J: 맞아. 극우 개신교는 김대중 집권 기간에 처음으로 정부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때까지는 극우(또는 보수) 개신교는 늘 권력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말이야.

 

극우 개신교 집단은 김대중 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권력과의 투쟁을 시작해. 이러한 갈등이 절정을 이룬 건 역시 노무현 정부 때였어.

 

 

 

A: 그 당시 TV를 틀다 보면 공중파 방송에서 목사들의 비리가 보도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

 

J: 맞아. 김대중 정부 들어오면서 표현의 자유, 문화적 발전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 오던 목사들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해.

 

고여서 썩어가고 있던 물을 드디어 들춰내기 시작한 것이지.

 

예를 들어 김대중 취임 초기인 1998 4 MBC [시사 매거진 2580] 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공금 횡령과 불륜 의혹 사건을 직접 보도해.

 

 

 

A: 김홍도 목사는 대표적인 극우 기독교 목사였지?

 

J: 맞아. 그 이외에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JMS 라는 이단을 취재하고, MBC [PD 수첩]에서는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사건이 보도되지.

[PD 수첩]은 이런 분위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2000년 한국 대형 교회를 방송하며 광림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대형고회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이런 모습이 극우 개신교 내부에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은 김대중 정권이 정치 보복을 하며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지.

 

 

 

A: 자신들의 도덕적인 부패에 대해서는 한치의 반성도 없나 봐?

 

J: 그러게. 너무 잘못 거꾸로 가다 보니, 도덕적 감수성을 잃어 버린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죄책감이 너무 심해져서 죄책감이 수치심을 유발했고 그 수치심을 교묘하게 가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걸수도 있고

 

 

 

A: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개신교가 변화해 온 양상, 그리고 그 개신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있으니, 김대중 정부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기도 해. 개신교와 정치 권력의 협력 관계가 깨진 이유에 대해 좀 더 정리를 해 보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J: 일단은 대형 교회 목사들의 비리를 공중파 방송으로 보도했던 점, 두 번째는 KNCC 계열의 진보 성향 인사들이 김대중 정부 입각에 도움을 줬고 극우(보수) 개신교가 이 때 소외감을 느낀점도 중요한 포인트야.

당시 김대중 정부에 입각한 대표적 진보 인사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소속 김성재 목사와 김상근 목사, 성공회의 이재정 신부를 꼽을 수 있어. 최초로 극우 개신교가 정치 권력의 변두리로 가게 된 거지. 마지막으로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극우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불을 지폈던 점을 들 수 있어.

 

 

 

A: 나도 극우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늘 김대중은 중복 스파이고, 대표적인 예가 햇볕 정책이라고 말하더라고..

 

J: 그렇지. 극우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인 반공을 흔들어 버린 평화적인 햇볕정책은 그들에겐 엄청난 위기였고, 극우 개신교는 좌파 진보주의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을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하게 되.

김대중 정권 때는 보수 언론사들이 사상 초유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사주가 구속되기도 했어. 이러다 보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소위 조중동은 극우 개신교와 연대를 모색하며 반정부 세력을 결집시켜 나가지.

 

 

 

A: 보수 개신교+보수 언론의 만남이 일으킨 시너지 효과는 굉장했어. 많은 정치를 모르는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컴비네이션에 휘둘리기가 쉬웠지.

 

 

 

J: 극우 개신교들은 김대중 퇴임 한달 전에 반정부 집회를 시작해서 노무현 정부 임기 말까지 무려 18차례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어.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월간조선]의 조갑제야.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 언론인이지. 그는 자신의 조갑제닷컴에서 보수세력의 단결을 촉구해.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30% 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 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그것입니다.”

 

 

 

즉 보수 언론+보수 개신교+군대 를 반공 집단으로 잘 묶어 두는 발언이었어.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부 들어 홍보 컨셉을 할 말을 하는 신문으로 바꾸고 강도 높은 정부 비판을 시작해.

 

 

 

A: 군부 독재 시절에는 늘 정권 찬양하기 바쁘던 그 조선일보가?.... 일제 치하에는 일본을 찬양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기사를 올리며 기회주의적 습성을 보여주던 그 언론이?(북한을 찬양하는 신문 기사에 대해서는 조선일보 측에서는 부인을 하고 있는 상태임)

 

J: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김대중의 좌파 정권을 타도하고 싶었던 거지 뭐.

 

김홍도 목사도 거리로 나와 김대중 정부가 싫다기 보다는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고 다 죽게 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합니다라고 외쳤지.

 

이전까지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운동을 눈감아 오던 극우(보수) 개신교들은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합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중성을 보여.

 

 

 

1970~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이끌어온 KNCC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부족한 부분을 대형교회의 지원으로 채우게 되. 그러다 보 KNCC의 진보성은 축소되기 시작해.

 

KNCC가 시들해지자 극우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기총의 위상은 급부상하게 되. 그들은 한국의 보수 세력을 리드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켜가.

 

 

 

 

A: 한국 교회의 주류 입장이 극우화된 느낌을 받는 이유도 한기총과 대형교회가 목소리를 높여서일까?

 

J: 그런 면도 커. 좀 황당한 부분은 한기총은 과거 KNCC가 힘겹게 쌓아둔 민주화 투쟁의 역사마저 한국 교회가 민주정부 탄생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마치 자신들이 그 힘겨운 싸움을 해온 것처럼 포장하는 레토릭을 구사하기 시작하지. 그들은 단순히 진보적인 정치에만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보수 윤리관을 적극 피력하기 시작해.

 

 

 

A: 산업화 이후 시기 때 한국 교회는 1. 민중교회 운동, 2. 교회 성장 운동 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전자는 진보적 성향의 운동이고, 후자는 보수 개신교가 주축이 되었지 아마??

 

J: 맞아. 민중교회 운동은 산업화 시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며 현실참여에 비중을 두는 교회 운동인 반면, 교회 성장 운동은 개인의 영성 문제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만져 주는 위로자 역할을 자처했지. 이 두 가지 운동 모두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다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커. , 민중교회운동은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산파 역할을 하며 시민운동을 이끌어 온 반면 교회성장 운동은 메가쳐치를 양산하고, 신학적으로는 교회 성장학’, ‘목회상담학등 교회를 양적으로 키울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는 방향에 힘을 실어주게 되지. 교회성장 운동이 과도해 지면서 한국 개신교회는 세속화’, ‘정치화의 속도도 빨라진 면이 있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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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노태우와 종교

 

J: 그는 최초의 불교 대통령이었어. 생긴 것도 부처를 닮았다는 평이 많았어. 노태우 대통령의 과거 종교 행적은 알려진 게 별로 없긴 해.

 

딱히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려 하진 않았으나 출근할 때마다 차 안에서 금강경 독송 테이프를 듣고 다녔고 스님들에게 천수심경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 겨루어보자고 말하기도 했었지.

 

그의 어머니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는 퇴임 이후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해. 2010년에 하용조 목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나….. 전두환이 퇴임 이후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것처럼 노태우도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셈이야.

 

 

 

A: 그거 참 흥미롭다.

 

J: 1987년도는 최초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은 해였는데 6월 민주 항쟁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종교계는 1987년 대선에서는 개입이 훨씬 심해져. 6월 민주 항쟁을 이끈 종교계의 자부심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당시 유력 대선 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었고 각기 불교,개신교,천주교 성향이 있다 보니 당시 대선은 거의 종교 파벌 대선이나 다름 없었지.

 

당시 먼저 가장 열심을 낸 건 불교였어. 지난 정권들에서 받았던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노태우라는 불교 신자를 어떻게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골적인 노태우 지지 기원 법회를 열고, 불교계의 지지를 호소했어.

 

 

 

 

 

A: 노태우도 그런 반응이 싫지 많은 않았겠네?

 

J: 그랬겠지. ‘나라 안정과 불교 중흥을 위한 기원 대법회 11 27일에 열렸는데 당시 노태우는 직접 참석해서 불교 방속국 설립을 공약하며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많이 받아.

 

 

 

A: 우리는 개신교 쪽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 보기로 했으니, 그 쪽은 어땠어?

 

J: 개신교는 민주당 후보로 나온 김영삼 장로를 적극 지지했어.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김영삼 지지대열에 동참했었지. 김영삼 역시 유세를 다닐 때마다 해당 지역 목사, 장로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참여하는 등 개신교 표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

 

 

 

 

 

A: 천주교 쪽은 역시 김대중을 밀었겠지?

 

J: 그랬지. 민주화 운동 세력도 중심이 되었어. 김대중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주교 지지층 확보에 나섰고 말이야.

 

 

 

1987년도 대선은 그야말로 종교적 공방이었어. 노태우는 불교방송국 건립공약, 김영삼은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설’, ‘불교 탄압설’, 김대중은 천주교인의 불당 참배 문제등이 늘 이슈로 따라 다녔지.

 

 

 

A: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

 

J: 당시 노태우는 성난 불심을 달래줘야 할 입장이었는데 7년 전 벌어졌던 10.27법난 사건 때문에 불교계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거든.

 

그래서 노태우는 전통사찰보존법을 제정해서 전통사찰로 지정된 곳만 정부가 관할하고 나머지 사찰은 정부 규제에서 벗어나게 해 줬어. 이로 인해 사찰의 자율권은 확대되고, 사찰의 수리와 보수도 정부가 책임져 주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지.

 

 

 

그리고 노태우 정권에서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이 크게 흔들리는데 그걸 처음 촉발시킨 건 전두환 집권 시절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 평화통일운동과 반미 운동 등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해.

 

 

 

A: 평화통일 운동은 아무래도 야당 출신인 김대중 정권 때부터나 생긴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건가?

 

J: 흔히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틀을 바꿨다고 알고 있지만 최초로 그 틀을 바꾼 건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보는 게 더 공정한 평가일 거야.

 

노태우 대통령은 1988 7.7 선언을 통해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이산가족 생사 확인, 남북교역 문호 개방을 제안했지. 그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고 북한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위험정도로 보았고,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북한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북한을 자극하는 무기로 판단했어. 노태우는 남북관계의 기조를 이념적, 군사적 대결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으로 전환하여 한반도의 국지적 냉전체제를 해체하려고 한 것이지.

 

 

 

A: 많은 극우 개신교 단체들은 김대중이 종북 스파이가 되어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과 친구가 되려고 했다고 맹비난을 하면서 보수 당을 지지하던데, 속내를 알고 보니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거네?

 

 

 

J: 그렇지. 역사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아무튼 노태우 정권 때 평화통일 운동, 반미운동도 본격화 될 만한 정치 토대는 충분했던 거야. KNCC 를 중심으로 한 진보 성향의 개신교 세력이 한층 단단해 지면서 본격적으로 개신교 내에 진보-보수 흐름이 뚜렷해지기 시작해.

 

 

A: KNCC 는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평화 통일 운동에 앞장섰었지?

 

J: . 1985년에 한국 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발표하고 1988년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88통일선언)을 발표하기도 했고…. 88 통일 선언은 통일의 원칙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민중 참여, 인도주의 원칙 이라는 5개의 원칙으로 정리해. 또한 군비 축소, 상호 불가침 선언, 한반도 비핵화지대 구축, 외국 군대의 점진적 철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

 

이 내용은 기존의 한국 교회가 취해 왔던 반공의 입장을 비판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한 셈이였어.

 

극우 개신교 세력들도 이런 흐름을 두고만 보지 않았어. 자신들의 반공’, ‘친미사상을 계속 설파하며 한국 개신교의 진보, 보수라는 두 흐름을 만들어 냈지.

 

 

 

A: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이 친화적이여서 종교계가 평화 통일 운동을 할 수 있게 된거야? 아니면 종교계가 이런 진보 흐름을 만들어 줘서 노태우 정권이 더 힘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하나?

 

J: 아무래도 KNCC‘88통일선언은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1988), ‘한국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남북기본합의서’(1992) 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기본합의서는 KNCC 88통일선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고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면서 발표한 자주평화통일 9개 원칙은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의 토대가 되었지.

 

 

 

A: 보수 단체들은 이 시기 즈음에 한기총을 만들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면서 KNCC 등의 진보 개신교 세력을 막으려 했었어?

 

J: 일단 1989 1월 한경직 목사는 한국 교회 원로(강원룡, 조향록, 지원상)들을 불러 놓고, 그 해12월에 한기총을 창립해. 한기총은 36개 교단과 6개 기관이 회원으로 참여했었지. 한기총 설립을 주도한 세력은 오직 반공에 앞장서 온 북한 출신 목사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많은 북한 출신 목회자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마법-요술봉같은 만능 신학을 우리 개신교 내에 던져줌 셈이야.

 

 

 

A: 한기총을 설립할 때도 정권의 도움을 받았으려나?

 

J: 극우 개신교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늘 정권에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기총의 설립도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지. 노태우 정부가 반정부적인 개신교 진보 세력 KNCC에 맞서 극우 개신교 단체를 키우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어.

 

평화 통일 정책에 있어서는 서로 주고 받은 Spirit 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보 기독교 단체는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을 결의하며 노 정권이 국민이 요구하는 광주사태 해결, 5공 비리 청산, 민주화 실천 등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

 

 이런 분위기가 있다 보니 노태우가 슬쩍 한기총을 키워 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겼던 거지.

 

 

 

이미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진보 종교는 찍혀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보수 교회 세력을 뒤에서 지지해 주는 활동을 해 왔었거든. 이런 분위기가 노태우 정권 때도 알게 모르게 한기총의 설립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자연스레 추론해 볼 수 있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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