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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지가 10년도 훨씬 넘은 것 같다. 기독교적 열정이 충만한 상태로 새파랗게 어린 시절 쓴 글이긴 하다. 요즘 다시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실로 궁금하다. 그냥 일반 책 감상평이 아닌 기독교적 색채가 가미된 노골적인 끄적임으로만 넘겨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봐도 유신론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기이하게 느껴지는 책이긴 하다. 무신론자가 읽으면 명작의 느낌이 나는 책인 걸까? 현학적이고, 애매한 해석들은 세계관과 상관없이 여전히 난해하고,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지 않을까?)

 

 

이 책은,  기독교인으로서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만한 책인 것 같다.

 

격변하는 유럽의 분위기 속에서 , 기독교의 몰락을 예견 하였고 , 유독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많이 표출하고 있는 니체.  이 저서에서는 특히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책 자체로 보자면, 사실 , 문체가 그렇게 어려운 느낌은 아닌데 ,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므로 각별히 주의해서 봐야 할 책이다. (내 이해력 문제일지도..)

 

그리고 ,  비유 중에서도 특히 직유(simile) 보다는 은유(metaphor) 를 많이 사용해서 ,  도대체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곰곰히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당나귀니. 낙타라느니..불의 개라느니개미라느니..

 

은유를 그렇게 잘 쓰는 사람 같진 않다. 그냥 자기 생각하기에 좀 비슷한 feeling 을 주는 사물이나 생물체를 가져다 쓴 느낌? (다행히 책 아래에 그 상징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어서 ,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 책 자체는 꽤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현 기독교 , 국가 등에 대해 회의적인 소리를 할 수 없기에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 의 입을 빌려서 , 소극적으로 이야기를 시도하는 책. 그러나 , 내용 자체는 전혀 소극적이지 않고 공격적이며 대범한 책이다.

 

자신이 마치 이 시대의 초인  이라도 되는 듯 , 어찌나 강력한 자신감을 표출하던지

 

 

일단 그가 이야기하는 기독교인과 기독교의 신에 대해서 들어보자.

 

 단 한 번의 도약으로 , 단 한번의 필사적인 도약으로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권태. 더 이상 의욕적이려 하지 않는 권태 , 그것이 모든 신들과 배후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허구를 만들어내고 신을 갈구하는 자들 중에는 병적인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사리가 분명한 자와 정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덕을 몹시 미워한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신은 가상의 것이다.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인해 신은 죽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들어보면 , 요즘 시중에 판매되는 반기독교 서적들과 동일 선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약한 자들이나 , 또는 한번의 요행을 바라는 이들이   이라는 가상의 개념에 의존한다고 이야기하는 다분히 뻔한 논증.

 

그러나 루터파의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는 어려서부터 작은 목사 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예수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품었다.

 

그래서 그가 성직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

 

 그들은 흉악한 적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찬 것은 없다. 그러나 나의 피는 그들의 피와 통하고 있다. 라고.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해 봤을 때 이미 그 당시부터   ‘기독교’ 가 세상에 보여준 행태가 그닥 좋진 않았나 보다.  분명 그의 ‘논증’ 자체는 그닥 날카롭지 않은데 , 한 사람을 실족하게 만든 책임이 어쩌면 기독교 전체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개신교가 헛다리 짚고 있는 건 비슷했나 보다) 

 

니체는 왜 이리도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져야만 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면 이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했는지 들어보자.

 

 인생은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허약함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가 씩씩하고 힘센 당나귀인 것이다.

 

초창기에 쇼펜하우어에게 큰 감명을 받았던 , 그는 염세주의 사상 등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 그 희망 없음 , 그 어두움에 반기를 들고 , 다시 일어나기를 다짐하였고 ,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초인 사상 이었다.

 

결국 , 세상의 부조리 함에는 동의하는 듯 하지만 , 여기서 물러설 순 없고 당당하게 승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 하다.

 

그러면서 , 마치 자신 이 그런 놀라운 역할을 맡을 적임자인 듯 자랑을 늘어 놓는데.

 

그러나 벗들이여 , 그대들에게 내 마음을 완전히 털어놓겠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민중처럼 사랑과 두려움으로 짜라투스트라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경외를 가지고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 )

 

나는 아부하는 자인가? 나는 평생토록 권력자 앞에서 한 번도 아부해 본 적이 없다. 내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넘쳐 흐르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한 겨울의 침상 속에서까지 마음이 즐겁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진리 를 소유한 자신이 이 세상의 숨겨진 진리  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한다. (진리 를 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 , 그의 마음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그래서 책 전체 중 방랑자 등의 파트가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었다. 단지 , 그가 말한 진리 가 '참 진리'인지는 이견이 있겠지만...)

 

 

또한 자신의  특별한 역할 을 부각시키면서 , 마치 선지자와 같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한다.

 

아, 나의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들려주어야만 할 어떤 말이 , 그대들에게 주어야만 할 어떤 것이 아직도 있을 텐데! 어찌하여 나는 그것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인가? 내가 인색한 자이기 때문일까? 

 

그대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는 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것은 위대한 것을 명령하는 자이다. 위대한 것을 수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위대한 것을 명령하는 일이다. 

 

그대들은 아직 충분히 괴로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했을 뿐 , 이제까지 인간으로 인해 괴로워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 중 누구도 내가 괴로워해 온 그 이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그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 낸 걸출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니체의 이러한 초인 사상  을 흠모했음은, 그리고 그 영향을 제대로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로 초인  이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극단적 버전으로서 과대망상의 현현 아니었을지...)

 

기독교가 어떤 작태를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 대안으로 떠오른  초인  잘못 가던 기독교 보다도 못한 사상이었음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인간에게 구원의 희망 을 부여하는 순간 , 파멸은 시작된다.)

 

계속 되는 그의 감정 표출을 들어 보자.

 

떠도는 구름(삶에 대해 회의적이고 우유부단한 기독교적 세계관)과 그대를 더럽히는 모든 것 이상으로 내가 증오한 것이 있었던가?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내가 가장 미워하는 자는 살금살금 걸어가는 자 , 얼치기들 , 의심 많고 우유부단한 뜬구름 같은 자들이다. 

 

 

지금 이 모든 표현들이  기독교 에 대한 감정 배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 악연인가 보다.

 

하지만 , 그의 진리 에 대한 목마름은 존중한다.

 

우상을 숭배하기보다 차라리 이를 약간 딱딱 거리는 편이 낫다! 나의 본성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특히 정열적이며 김을 내뿜는 모든 습기찬 불의 우상들을 싫어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최근의 리처드 도킨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또는 버드런트 러셀)

 

 거짓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느니 ,  진실 속에서 불행 하겠노라는 그들의 고백은 한결같음이 있고 , 멋지다.

 

그리고 그가 예언한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 들어보자.

 

 그러나 이제 드디어 그날이 , 변화가 , 심판의 칼이 , 위대한 정오  의 시간이 그들 모두에게 찾아오리라. 그러면 많은 것들이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아욕을 건전하고도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이기심을 영예로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자 , 진실한 예언자인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선언하는 것이다. 

 

보라! 오고 있다 , 가까워지고 있다 , 위대한 정오가!

 

마치 , 현대 사회 속에서 만연한 개인주의  , 이기주의그리고 광적인 자아 충족 , 자기 발전  붐과 일맥상통한 듯 하지 않은가. 참으로 세상을 잘 봤다.

 

 

또 들어 보자.

 

선과 악이라고 하는 오래 된 망상이 있다. 지금까지 이 망상의 수레바퀴는 예언자들과 점성가들을 에워싸고 돌고 있었다. 

(여기서 예언자 는 염세주의자를 , 점성가 는 관념적 이상주의자를 의미한다.)

 

오 , 나의 형제들이여 , 별들과 미래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이었을 뿐 파악된 것은 없다. 따라서 선악에 관해서도 이제까지 망상했을 뿐 , 파악된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상대주의 의 만연이 바로 지금 현대 사회가 아니던가? (니체의 예언가적 면모란 이런 것인가?)

 

소위 ,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 절대적 진리 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시대.

 

그의 논증 자체는 매우 어설프지만,(논증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이런 단순한 몇 마디로 자연법  , 도덕률 에 대한 반박이 되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 그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하지만 , 예언자적 메세지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 그의 태도 자체는 비판할 만한 구석이 많다.

 

 그대,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 , 용기 있는 자들이여! 그대 , 솔직한 자들이여! 오늘날 건전한 불신감을 가져라. 그리고 그대들의 근거를 비밀에 부쳐라. 왜냐하면 오늘날은 천민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천민들이 맹목적으로 믿게 된 것을 , 누가 타장한 이유를 제시하며 뒤엎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 기독교인들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건 , 리처드 도킨스와 꼭 같은 모양새다.  얼마나 말이 안 통했으면 ,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 아무튼 이런 태도는 매우 좋지 않다.    합리성 논증 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수년 더 살아보니, 사실 대화로 해결될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와 도킨스 등의 토론을 보면 결국 서 있는 토대가 다르다 보니 토론을 해도 평행선 달리기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도 아얘 단절하는 것보단 나은 자세로 본다. 이전에 알빈 플란팅가와 모 학자의 토론도 참고할 만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비밀한 지식  을 지닌 것마냥 , 쉬쉬하고 다니며 비난이나 퍼붓고 있는 모습은 , 현대 사회의  이단 들과 다를바가 없다.

 

마음 문을 열고 , 대화를 시도하자. 그리고 ,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려면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배웠어야 했다.

 

엉뚱한 부분들을 언급해 보겠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재앙이 내리리라 , 그대 , 지금 웃는 자들이여! 라고 말했던 자의 말 , 바로 그 말이 아니었던가?

 

그 자신은 이 지상에서 웃을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 그것은 그가 찾는 방법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조차도 웃을 이유 몇 가지 쯤은 찾아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리들도 또한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 웃는 자들도! 그러나 그는 우리를 미워하고 조롱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통곡하고 복수심을 불태우도록 하겠다는 저주의 말을 했다. 

 

사랑과 공의 의 조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언 아니던가?

 

 

도킨스도 버드런트 러셀도 다른 모든 서적들도 구약에 쓰여 있는 무시무시한 심판 에 대해서 ,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실수 있냐고, 하지만 , 완전한 도덕 , 완전한 선을 수호하시는 하나님이  를 묵인할 순 없지 않는가?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심판이 있어야 사랑하는 자들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원흉이 우리 에게 있었으니 , 그에 따르는 심판  은 정당하다.

(이론적으로 맞긴 한데, 착하게 살고 정의롭게 살려 해도 손해 보고 공격 받고, 몸이 병들면 신에 대한 원망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 하다.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 아닐런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심도 있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니체도 역시 내게 큰 감동을 주진 못한다. 반대편에 서 있더라도 더욱 깊은 사유를 했었더라면 , 대화할 맛이 날텐데 말이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공포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원죄도 , 원덕도 , 지식이라 불리는 나의 도덕 또한 공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공포  도덕성 을 끌어 오는 논증은 , 이미 그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이런 부분들도 더 풍성한 논증을 하지 못한 니체에게 아쉬움을 표하고 싶다. 그러면서 , 계속 기독교 의 대안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는 니체의 시도는 다소 애잔하기까지 하다. 초인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보고 (신이랑 비슷한 느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 신선하고 맑은 동양의 공기  도 동경해 보고(쇼펜하우어도 동양의 사상에 눈을 돌렸었는데 , 니체도 동양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었다. 가령 윤회, 해탈 등에 대한 비스무리한 개념들을 논했었다) , 자신은 기독교 에서 말하는 참 구원 따윈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는 니체의 모습은 다소 치기어리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그대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쁨과 악의에 들떠 있는가! 그대들은 마침내 다시 어린아이들처럼 되었다. 말하자면 경건해졌다.

 

그대들은 마침내 기도를 한다든가. 사랑하는 신이여!  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다시 어린아이들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 이 어린아이의 방에서 떠나라! 이제 온갖 어린아이다움이 있는 나의 동굴 밖으로 나가 그대들의 어린아이다운 방종과 마음의 소란함을 가라앉혀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 그대들은 결코 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이미 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왕국을 원한다. 

 

하지만 , 왜 이 일갈이 이리도 처연하게 들리는지....

 

니체의 삶이 이러한 그의 호언장담  을 무색하게 만드니

(그 고독함 , 그 끔찍한 정신병..)

 

 

결국 ,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니체처럼 살 것인가? 그래서 그와 같은 사람  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  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살 것인가?

 

결국은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게 우리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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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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