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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루이스의 자유의지론에 힘을 실어 주고 있으며,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설명체계로서는 루이스가 쉐퍼를 압도해 보인다. 하지만, 루이스의 이론이 온전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한다. 연옥의 존재 등에 대한 그의 개념은 성경적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소 힘을 잃기 때문이다.

 

[변증적 고려 사항]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저자: 스콧 버슨&제리 월즈 지음

 

162~167page

 

 

 

앞서 세 장에서 우리는 쉐퍼와 루이스의 구원론적 체계를 상세히 살펴보며 공통적인 기반과 분기점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파악했다.

 

그러면 이 모든 내용이 변증적 과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제 우리의 구원론적 연구를 다섯 가지의 변증적 고려 사항들을 통해 결론짓고자 한다.

 

 

 

  1. 양립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 그리고 선하심을 훼손한다.

 

약한 경정론이나 양립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그것들이 문제가 될만한 의미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첫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다.

 

모든 행동과 생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결정론적 뜻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둘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선택받은 자에게는 제 2원인에 의한 행실에 대해 점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입장에 근거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시거나,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있다.

 

셋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실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정해 놓지 않으셨나?

 

만일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하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면, 완전한 사랑과 전적인 선하심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이 그분의 구원 선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아직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제대로 보여 주는 유일한 자유론이다.

 

 

 

 

  1.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의지론적 자유관을 반영해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데 정말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일관되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쉐퍼의 형법적 모델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것은 세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자유의지론적 구원은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무조건적인 예정과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

 

둘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구원을 위해서는 단회적인 회심이 아닌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신앙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만약 구원이 회심 때에 결정되었다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역인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서 인간의 자유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셋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변화의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이중적 행위라는 관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이는 이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무덤 너머의 정결 과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반드시 내포한다.

 

 

대부분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 교리는 중세에 모금 수단용으로 쓰이던 비성경적인 사상을 연상케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형법적 모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교리는 전적으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의를 전가해 주시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를 용서하시며,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변화할 것을 약속하셨다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연옥의 교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변화론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루이스의 사후 정화론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다. 만일 구원이 무엇보다 변화에 관한 것이고, 이 변화의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면, 정화의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 죽은 이들에게 무덤 너머에서도 진행되는 변화의 기회가 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즉 루이스는 면죄부, 혹은 전통적으로 면죄부와 연루된 비성경적 개념들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변화론적 구원론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고 갔을 뿐이다.

 

 

따라서 연옥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성경해석적 토대에서만 답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자료들을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적 자유와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성경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시켜 준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정화론도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죽음의 순간에 변화를 완수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화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더 이상의 정화 과정도 불필요할 것이다.

 

 

 

 

  1. 우리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논리적 일관성 기준에 다른 신앙의 체계를 맞추려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의 진술을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쉐퍼의 역설적인 입장에서 본 것처럼 이는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논리와 질서,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진실하지만 총체적이지 않은 진리를 구현하는 자기 일관성을 갖춘 체계를 소유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의 문제에 관해 더욱 철저하게 생각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긴장점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루이스를 따라 잠정적 불가지론의 진영으로 따라가거나, 아니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을 재고해야 한다.

 

역설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의지론적 자유를 보존해야 할 필요가 드러난 마당에, 우리는 독자들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미해결의 바다에 던지기에 앞서 성경의 내용과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관한 대안적 체계를 탐구할 것을 권한다.

 

 

 

[1]신학적 진솔함은 변증의 필수이다.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오로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이러한 교리를 불신자들에게 감추려는 시도에는 뭔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다.

 

이는 쉐퍼가 안고 있던 문제다. 만일 정말로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내어 버리기로 하셨다면, 우리는 쉐퍼의 방법론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교리에서 함축하는 내용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쉐퍼는 다른 신념 체계 안에 있는 대화 상대자들에게도 솔직함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분명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동일한 기준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쉐퍼로 하여금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나눌 수 없게 했던 바로 그 본능적 요인이 이러한 교리가 의심스러움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이나 경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신앙 체계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나눌 수 없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우리는 조직 신학과 목회 신학을 이원화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쉐퍼는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적 자유의 긴장 관계라는 모순된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회적인 상황에서 그의 전략은 바뀌었다.

 

완벽한 균형대신, 쉐퍼는 미심쩍은 내용을 지닌 신념들을 간과하면서 더 안전한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루이스는 목회적 혹은 영적 조언이라는 기치 아래 자신의 실용적 제안을 정당화했다.

 

특별한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차원에서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믿는 바를 왜곡하면서까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면밀함을 갖추지 못한 목회적 조언을 제시하는 것도 정당하다 볼 수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이시라면, 우리의 목회 신학과 조직 신학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쉐퍼는 분명히 이 점에 부응하는 주장을 했다. “만일 내가 나의 지적인 무결성을 유지하고 나의 인격적, 영적, 그리고 지적인 삶의 통합성을 지키려면대답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한 사람의 신학적 무결성을 진단하는 방법은 그 신학의 내용들이 막상 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진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살해를 당했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하나님이 그러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가 신앙을 버릴 때, 우리는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갖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며 어떻게 해서든 그 분의 품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비극적 죽음이 일어나거나 불신자가 신앙을 거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날 때 우리의 사상에 걸림돌이 생기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야만적 행위나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무조건적 저주 같은 모든 일을 결정해 놓으셨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이러한 예상 결과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조직 신학을 적용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가 등장한 현대 사회에는 이와 같은 상식적인 주장도 때론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

 

[2]변증학은 체계적 사역이다.

 

 

 

변증적 과제와 조직 신학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변증학을 농구 시합이나 축구 경기와 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는 자가 승리하는 식이다. 이는 단순히 양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변증학은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의 목표는 뒤범벅이 되고 혼란스럽게 널린 조각들을 하나의 일관성 있고 질서정영한 실체로 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는 사람은 조각이 가장 적게 남아 있는 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엄청난 증거 자료들을 단순히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증거들이 어떻게 합리적이고 실존적으로 만족할 만한 실재의 모습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각들을 잘 엮어서 알쏭달쏭한 인생의 퍼즐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일관성과 아름다움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일이 조직 신학과 변증학의 몫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구원론적 비전은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3]최대의 충돌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쉐퍼는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비전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 그는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통합적 관점이 부족하며,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단절된 파편들뿐이라고 지적한다.

 

실재는 책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미미하고 훼손된 부분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는 겨우 각 페이지마다 1인치 정도의 활자화된 내용일 뿐이다. 이 정도로는 어떠한 저자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따름이지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파편들을 일관된 메시지로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쉐퍼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구상했던 방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답의 일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한 정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 간격을 매우고 인생의 부조리함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의 관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파편들을 한데 엮을 때, 실재에 관한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유력한 구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쉐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명료한 이치가 많은 기독교 진영에서는 구름에 가리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본문을 쪼개고 둔갑시키는 성경 비평가들의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은 자연 계시의 파편들과는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구상과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한쪽에서는 신앙과 특별계시의 해체되고 이원화된 병렬 관계로, 다른 한쪽에서는 검증된 사실과 자연계시의 병렬 관계로 대치되었다.

 

그렇기에 쉐퍼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한 것이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비전은 이러한 교리를 집요하게 고수할 때만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쉐퍼에게 있어서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는 분열된 지식 세계와 동강난 세계관으로 치달을 뿐이다.

 

필자들의 구원론 연구를 통해 쉐퍼와 루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균열이 드러났다. 속죄의 성격, 영원한 구원, 예정론, 영혼의 정화, 그리고 역설에 대한 의존 등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일부 주장을 불편하게 여겼음은 확실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미국 IVP 편집인으로 있었던 제임스 사이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이어는 1973년에 신시내티에서 열린 기독교 서점 협회에 쉐퍼와 대동했던 때를 술회한 바 있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유람선과 작은 배들이 유유히 오가고 있는 오하이오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신시내티레즈 팀의 야구 경기가 없는 저녁의 야구장은 강 둑 위에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두 사람은 호텔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는데, 쉐퍼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진중한 성격인 그는 흥겹게 웃는 시간에도 별로 미소를 짓거나 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활용해 소통하는 데에는 능했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이어는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입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창조 기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나 구약의 기적들의 시공간적 사실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오류 가능성 등은 성경무오성 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쉐퍼는 특히 루이스의 [시편 사색]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루이스의 성경관이 갖고 있는 결함을 부각시키면 그의 다른 저작이 갖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변증적 영향력이 위축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잠시 뜸해지자, 사이어는 흥미로은 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다. 그는 쉐퍼와 루이스를 같은 방에 데려다 놓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밖에 몰래 엿듣고 싶다고 했다.

 

쉐퍼의 엄숙한 얼굴에 평소와 달리 밝은 미소가 번졌다. 쉐퍼는 사이어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 우리가 진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루이스는 분명히 전향했을텐데.”

 

추측컨대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가들이 이 중요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이는 비단 사이어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만남이 성사됐다면 그날 밤 신시내티 강변의 야구장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토론은 단지 쉐퍼와 루이스 뿐 아니라, 복음주의 세계를 갈라놓은 큰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다음 장은 사이어의 흥미로운 소원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참고: 이 책의 그 다음 챕터도 쭉 읽어 보시는 게 좋습니다. [굉장히 완성도 높은 책으로서 두 인물들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꼭 정독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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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우익을 담당하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변증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변호에 앞장 섰던 C.S 루이스는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한번쯤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신학을 비교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두 저자를 좋아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쉐퍼의 입장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리고 B.B. 워필드, 제임스 오르, W. H.그리피스 토머스, 캠벨 몰간도 같은 견해)

  1.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속죄

  4. 그리스도께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문자 그대로) 재림.

 

 

루이스의 입장 (순전한 기독교에 따르면)

  1. 성경의 영감과 속죄의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함.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영감을 받았으며 속죄로 인해 타락한 피조물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관한 것은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음.

  2.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반대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4.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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