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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논리정연하고 동의되는 내용이 많아서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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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으면 진보가 된다?

 

조금 놀랐다. 성경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알려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읽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성경 한 번 보지 않은 이들이 무려 68%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매일 또는 한 주에 서너 번은 읽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열에 한둘일 게다.... 이래서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무안하고, 한국교회가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번역과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통이 차마 무색하다.

 

 

한국교회는 정말 보수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히 옹호한다. 어찌하든지 간에 성경을 읽도록 장려한다. 유교의 독서문화와 한국사회의 공부 열풍과 맞물려 개신교회의 성경 읽기 열심은 유별나다. 일주일에 QT를 몇 번 했는지, 성경을 일 년에 몇 번 읽었는가로 신앙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정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성경을 읽으면 더 진보적이 된단다. 미국의 라이프웨이 리서치와 베일러 종교조사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자주 읽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예컨대, 테러리즘과 싸우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과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사회 경제적 정의를 더 추구하며, 검소한 생활을 위해 소비를 줄이자는 것에 보수적 성향의 신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성경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간단히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애굽과 바벨론의 제국에 저항하는 불온한 문서이다. 제국은 말한다.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는 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왕의 통치 권한과 근거가 오로지 그만이 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여 다스린다.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반체제적일 수밖에.

 

계시록은 또 어떤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그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제국이 천국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프로파간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고만장한 로마제국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성경은 진보적이다 못해 급진적이다.

 

그러니 이런 성경을 자꾸 읽으면 기득권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하여, 나는 안 변할 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기성 질서는 몸에 맞지 않다. 테러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 더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고 생리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성경의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고 베풀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안 읽는 반면, 실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가치관과 생각이 성경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 결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처럼 바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경대로 사는 거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보다는 성경대로 산다고 말해야 옳다. 그게 그거다. 성경은 도덕적 사안들, 예컨대, 폭력과 전쟁, 가난과 부, 과학에 대해 진보적 색채를 띠게끔 만든다. 하여, 성경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은 맞다.

 

성경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진보적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보수적일 수 없다.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기를 일삼고, 버젓이 정당화하는 세상을 희년은 정죄한다. 안식년의 하나님은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놀린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뒤집는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눅 1:51) 그분은 모두 빼앗겨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고, 떵떵거리며 살면서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던 부자를 기어이 빈손으로 만든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찬송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권력이 헛되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세상의 가치를 전도한다. 세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성경을 읽으면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이 된다.

 

칼 바르트는 묻는다.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성경 안에는 낯설고(strange) 새로운(new) 세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다. 바르트의 멋진 말을 날 것 그대로 보면 좋겠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그 속의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리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네 생각과 언어를 닥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우리를 개혁한다. 참, 하나님은 너무 진보적이다.

 

하나님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진보적임에 틀림없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탓에 나름 열심히 데모하느라 바빴다. 총학생회도 기웃거리고, 동아리 연합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학습도 얼추 해보았다. 나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운동권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듯싶다. 내 추측이고,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빈 구석이 많다. 그래도 기독교인 비율이 상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나 멀어지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사회 참여에 대해 꽉 막힌 목사이고, 성공과 성장에 목을 매고, 가난한 자보다는 불신자에 더 관심이 많다손 치더라도, 그 설교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번영신학을 떠들어도 성경이 본디 그러하니 정의와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걸 듣고 자라면서 본 현실은 강도 만난 자로 득시글거리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거다. 성경 속의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었는데, 그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들었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과 진보의 상관관계는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을 떠받드는 이들이 갈수록 보수화가 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싶다. 하나는 그렇게 성경, 성경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거의 안 읽거나, 다른 하나는 읽기는 읽되 하나님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게 쉴 새 없이 말하거나 일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고. 소위 바이블벨트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읽으면서 전쟁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논지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 의사나 의지가 없는 성경 읽기는 자기만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나는 절대로 안 변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읽어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굴복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이다. 그러니 그냥 읽으라.

 

또 하나 보탤 것은 읽는다는 행위와 진보와의 관계이다. 본래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조사가 말한 진보라는 것도 기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 독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 읽기는 듣기를 무척 강조한다. 로마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읽는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분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개방적이 되고, 사회적으로 진보적 어젠다에 찬성하는 비율과 비중이 높아진다.

 

 

의외로 성경을 안 읽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아마도 교회 내 문제의 대부분이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난데없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가 보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교회는 갈수록 성경을 안 읽어서 그렇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진보가 아니라도 좋고, 딱히 진보적이 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자. 그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롭고 낯선 일들 말이다. 놀랄 준비하고 성경을 읽자. 성경을 읽고 놀라게 하자.

 

몇 년 전에 올린 글을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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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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