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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5월 발표된 코페르니쿠스의 논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모델은 17세기 초반 20여 년간 케플러의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에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중세 신학자들은 '지구중심설'이라고도 불리는 과거의 모델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구중심설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구를 읽는 데 익숙한 나머지 새로운 관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구 중심설=천동설)
 

따라서 성경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다룬 최초의 글로 인정받은 레티쿠스(G. J. Rheticus)의 <성경과 지구의 운행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Holy Scripture and the Motion of the Earth>과 같이 초기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변론에서는 두 가지 쟁점을 다뤄야 했다.

[1]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결론으로 이끌 관측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2] 오랫동안 지구중심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던 성경과 이 견해가 사실은 부합한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관측 증거는 나중에 케플러가 수정한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이 모델을 본다면? 이 모델에 따라 지구중심의 우주와 완전히 결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태양중심설이 부상하면서 신학자들은 일부 성구의 해석 방법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법은 크게 세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방법을 살펴보고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자.

[1] 성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직해적(literal) 접근법이 있다. 창세기 1장을 직해적으로 해석하면 창조가 하루를 24시간으로 하여 6일에 걸쳐 일어난 것이 된다.

[2] 비직해적, 즉 우의적(allegorical) 접근법으로 성경의 어떤 부분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적절치 않은 문체로 쓰였음을 지적한다. 중세에는 성경에서 세 가지 비직해적 의미가 인정되었다. 이는 16세기의 많은 학자들이 상당히 정교한 표현으로 여겼던 것들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의 도입부는 시적이거나 우의적인 표현으로서, 여기서 신학과 윤리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문자 그대로 지구의 기원을 전달하는 역사적 설명은 아니다.

[3] 조정(accommodation)의 개념에 입각한 접근법이다. 이는 성경의 해석과 자연과학의 상호작용 측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접근법이다. 여기서는 계시(revelation)가 문화 및 인류학적 조건이 부여된 방법과 형태로 일어나 그 결과를 적절히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유대교와 그 뒤에 이어진 기독교 신학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 교부 시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16세기에 와서야 완성된 모습을 갖췄다.

 

이 관점에 따르면 창세기 도입부에 사용된 언어와 이미지는 초기 독자들의 문화적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초기 독자에게 맞게 '조정된' 형태와 용어 속에 표현된 핵심 개념을 추출하여 해석해야 한다.

세 번째 접근법은 16~17세기에 신학과 천문학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가로 유명한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자연과학이 인정받고 발전하는 데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공헌했다.

(장 칼뱅)


[1]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2]앞서 설명한 '조정'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과학 연구 발전을 가로막던 큰 장애물을 없앴다.

그의 첫 번째 ​공헌은 특히 창조의 질서를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물리적 세상과 인체 모두 신의 지혜와 개성을 입증하는 증거다. 따라서 ​칼뱅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장려했다.

 

자연세계를 신학보다 더 깊이 탐구하면 창조의 질서와 창조주의 지혜를 밝힐 증거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뱅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새로운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칼뱅이 두 번째로 크게 기여한 것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성경 직해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성경의 주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교과서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신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능력에 맞추어 '적절히 조정'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계시가 일어나려면 신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인간이 한정된 능력으로 수용할 수 있게 단계를 낮춘, 즉 '조정된' 신의 모습이 계시를 통해 전달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처럼 신 역시 인간의 눈높이에 맞게 스스로 굽히고 낮춘다.


​계시는 신이 보여주는 겸손의 행위인 것이다.

과학 이론화에 관한 이 두가지 관점은 특히 17세기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의 저술가 라이트(Edward Wright)는 길버트(William Gilbert)가 쓴 자기학 관련 논문 (1600)의 서문에서 성경 직해주의자들에 맞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다.

​성경은 물리학을 다룬 책이 아니며, 성경의 화법은 '유모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보통 사람의 이해력과 말투에 맞게 조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Hooykaas, 1972, pp.122~123).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칼뱅에서 비롯된 것인만큼 칼뱅은 자연과학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과학과 종교] 에서 발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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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행성이 원궤도로 돈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이 생각을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하늘이 '완전'하고 원이 '완전한' 형태이므로 천체는 원운동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추론했다.

(그리스인들이 과학에서 연역법을 사용한 사례)

 

케플러는 2000년 동안 지배력을 행사했던 원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었을까?

​화성의 공전궤도를 그리다가 어려움을 겪은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케플러가 관찰에 근거하여 내놓았던 가장 정확한 원은 약간 기우뚱한 형태였다. 그가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었다면 그 정도의 사소한 오차는 무시했을 것이다.

원래 물리적 대상은 기하학적 이상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독실한 루터파 교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선이 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정확한 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원이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것임이 분명했다. 이상적인 원에서 제멋대로 벗어난 것으로 대충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신학적 확신에 힘입어 케플러는 6년에 걸친 지적 분투와 수천 쪽이 넘는 과학적 계산 끝에 마침내 타원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나중에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사소한 오차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고마워했다.

그것이 그가 최대의 과학적 돌파구를 열도록 박차를 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주된 목표가 "하나님이 부과하시고 수학의 언어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합리적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릴레이도 케플러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수학적 구조로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확신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갈릴레이 논쟁'의 핵심에 바로 이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흔히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옹호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당시에 태양중심설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측정 도구로만 쓴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태양중심설과 지구중심설(천동설)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만큼 경험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천문학의 주된 실용적 용도는 항해였는데, 두 체계 모두 항해에 활용하기에 무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들어맞기만 하면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사용할 의향이 있었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염려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논쟁에 말려든 이유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유용한 측정 도구일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관건은 수학적 진리의 지위였다. 수학은 물리계에서 무엇이 옳은지 말해 주는가? 이것은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었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주된 적수는 교회 사람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대학교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 수학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핵심 특징이 양이 아니라 뜨거움과 차가움, 젖음과 마름,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질'이라고 보았다. 당시 대학에서는 수학의 지위가 물리학보다 훨씬 낮았다. 수학자 따위가 물리학자에게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라 마라 지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갈릴레이의 적수였던 피사 대학 철학교수의 말에서 당시의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자연은 사실을 수학적 추론의 방법으로 입증하려 하는 이들은 진리에서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수학적 논증으로 자연의 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두 과학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강연 시간에 이 인용문을 읽어 주면 청중들은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오늘날에는 수학 공식을 써서 자연을 설명하는 일이 과학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 수학의 언어로 자연의 책을 쓰셨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도발적인 언사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갈릴레이 이야기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갈등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올바른 자연철학이 무엇인가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벌인 싸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이냐, 갈릴레오의 양이냐?

갈릴레이의 승리는 곧 자연이 수학적 청사진 위에 세워졌다는 생각의 승리였다.

- [세이빙 다빈치]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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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

 

케플러에 대한 오해

 

 

 

책 제목: 과학의 영혼

 

100page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처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른 중요한 천문학자였다. 케플러 또한 피타고라스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저서는 행성의 운행체계가 일련의 3차원적인 기하학적 공식들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비록 나중에 이런 시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이는 숫자와 기하학이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피타고라스적 신념을 케플러가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커니는 케플러가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기하학을 기초로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수학의 정확한 묘사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신뢰는 케플러로 하여금 여러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의 궤도라는 사실을 밝혀내도록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케플러도 부분적으로 태양중심적 천문학에 매료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태양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을 신이 세상을 현존하는 사실을 상징하는 물리적 위치로 생각하였다.

 

그는 태양만이 가장 고귀한 신에 어울리는 것으로, 신은 이를 자신의 물질적 거처로 삼고 기뻐하며 천사와 함께 거한다. 단지 태양만이 그 위용과 능력에 근거해 그 주어진 목적과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며 신의 거처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 고 보았다.

 

 

 

 

길버트(Gilbert)의 자기학(magnetism)에 관한 저술들에 영향을 받은 케플러는 지구를 거대한 자기장(magnetic field)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력(magnetic attraction)의 개념을 행성체계 전체에 적용했는데, 이를 통해 태양을 거대한 중심 자석(great central magnet)으로 보았다.

 

이는 후대에 뉴턴이 주장한 중력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었다. 물리학자 제럴드 홀튼(Gerald Holton)은 케플러의 체계에서 태양은 3가지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태양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수학적 중심부이다.

 

둘째, 태양은 행성들을 그들의 궤도 내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힘이 작용하는 물리적 중심부이다.

 

셋째, 태양은 신의 신전 역할을 담당하는 형이상학적 중심부이다. 홀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3가지 역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과학적 업적은 그의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 입장들과 분리된 채로 이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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