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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논리정연하고 동의되는 내용이 많아서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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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으면 진보가 된다?

 

조금 놀랐다. 성경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알려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읽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성경 한 번 보지 않은 이들이 무려 68%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매일 또는 한 주에 서너 번은 읽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열에 한둘일 게다.... 이래서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무안하고, 한국교회가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번역과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통이 차마 무색하다.

 

 

한국교회는 정말 보수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히 옹호한다. 어찌하든지 간에 성경을 읽도록 장려한다. 유교의 독서문화와 한국사회의 공부 열풍과 맞물려 개신교회의 성경 읽기 열심은 유별나다. 일주일에 QT를 몇 번 했는지, 성경을 일 년에 몇 번 읽었는가로 신앙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정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성경을 읽으면 더 진보적이 된단다. 미국의 라이프웨이 리서치와 베일러 종교조사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자주 읽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예컨대, 테러리즘과 싸우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과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사회 경제적 정의를 더 추구하며, 검소한 생활을 위해 소비를 줄이자는 것에 보수적 성향의 신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성경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간단히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애굽과 바벨론의 제국에 저항하는 불온한 문서이다. 제국은 말한다.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는 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왕의 통치 권한과 근거가 오로지 그만이 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여 다스린다.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반체제적일 수밖에.

 

계시록은 또 어떤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그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제국이 천국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프로파간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고만장한 로마제국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성경은 진보적이다 못해 급진적이다.

 

그러니 이런 성경을 자꾸 읽으면 기득권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하여, 나는 안 변할 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기성 질서는 몸에 맞지 않다. 테러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 더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고 생리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성경의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고 베풀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안 읽는 반면, 실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가치관과 생각이 성경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 결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처럼 바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경대로 사는 거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보다는 성경대로 산다고 말해야 옳다. 그게 그거다. 성경은 도덕적 사안들, 예컨대, 폭력과 전쟁, 가난과 부, 과학에 대해 진보적 색채를 띠게끔 만든다. 하여, 성경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은 맞다.

 

성경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진보적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보수적일 수 없다.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기를 일삼고, 버젓이 정당화하는 세상을 희년은 정죄한다. 안식년의 하나님은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놀린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뒤집는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눅 1:51) 그분은 모두 빼앗겨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고, 떵떵거리며 살면서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던 부자를 기어이 빈손으로 만든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찬송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권력이 헛되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세상의 가치를 전도한다. 세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성경을 읽으면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이 된다.

 

칼 바르트는 묻는다.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성경 안에는 낯설고(strange) 새로운(new) 세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다. 바르트의 멋진 말을 날 것 그대로 보면 좋겠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그 속의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리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네 생각과 언어를 닥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우리를 개혁한다. 참, 하나님은 너무 진보적이다.

 

하나님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진보적임에 틀림없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탓에 나름 열심히 데모하느라 바빴다. 총학생회도 기웃거리고, 동아리 연합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학습도 얼추 해보았다. 나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운동권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듯싶다. 내 추측이고,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빈 구석이 많다. 그래도 기독교인 비율이 상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나 멀어지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사회 참여에 대해 꽉 막힌 목사이고, 성공과 성장에 목을 매고, 가난한 자보다는 불신자에 더 관심이 많다손 치더라도, 그 설교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번영신학을 떠들어도 성경이 본디 그러하니 정의와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걸 듣고 자라면서 본 현실은 강도 만난 자로 득시글거리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거다. 성경 속의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었는데, 그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들었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과 진보의 상관관계는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을 떠받드는 이들이 갈수록 보수화가 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싶다. 하나는 그렇게 성경, 성경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거의 안 읽거나, 다른 하나는 읽기는 읽되 하나님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게 쉴 새 없이 말하거나 일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고. 소위 바이블벨트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읽으면서 전쟁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논지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 의사나 의지가 없는 성경 읽기는 자기만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나는 절대로 안 변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읽어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굴복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이다. 그러니 그냥 읽으라.

 

또 하나 보탤 것은 읽는다는 행위와 진보와의 관계이다. 본래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조사가 말한 진보라는 것도 기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 독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 읽기는 듣기를 무척 강조한다. 로마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읽는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분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개방적이 되고, 사회적으로 진보적 어젠다에 찬성하는 비율과 비중이 높아진다.

 

 

의외로 성경을 안 읽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아마도 교회 내 문제의 대부분이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난데없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가 보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교회는 갈수록 성경을 안 읽어서 그렇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진보가 아니라도 좋고, 딱히 진보적이 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자. 그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롭고 낯선 일들 말이다. 놀랄 준비하고 성경을 읽자. 성경을 읽고 놀라게 하자.

 

몇 년 전에 올린 글을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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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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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서구처럼 수백 년에 걸쳐 진보와 보수가 형성된 게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갈등을 압축적으로 경험해왔다.

 

이건 순전히 주관적 해석이므로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진보의 역사는 시민권을 향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고, 시민권의 내용도 세 차례에 걸쳐 변화를 겪어 왔다.

제 1세대 시민권은 참정권이었고, 제2세대 시민권은 경제적 권리(복지권)이었다. 유럽에서는 전후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복지국가가 정착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복지권을 헌법 개정 조항으로 포함시키려다 갑자기 서거해 아직 시민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3세대 시민권은 자치권이다.

소수민족이나 문화를 지키기 위한 시민권인데 이를 헌법에 규정한 나라는 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제 3세대 시민권을 프랑스 68혁명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19세기와 20세기는 ​더 많은 보통사람이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에서 유산 계급으로, 유산 계급에서 평민으로,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과 젊은이들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참정권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 왔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됨과 함께 투쟁 없이 미군정에 의해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몇 차례 굴절됐고, 급기야는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그 참정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참정권을 향한 투쟁이 4.19, 5.18 그리고 6.10으로 이어졌다.

 

투쟁을 통해 드디어 참정권을 획득한 건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내세운 개헌운동의 승리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제1세대 시민권을 향한 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1987년의 6.10 항쟁은 화이트칼라가 가세함으로써 성공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중운동이라기보다는 지식인, 대학생, 중산층 위주의 제1세대 시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그랬듯이 경제권을 향한 노동자 정당의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 제1세대 운동에서 진보적이었던 유산계급은 보수화된다.

열린우리당은 탈지역주의 정치개혁을 소명으로 내걸고 창당했기에 영국의 자유당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의 자유당과 참여정부는 달랐다.

 

노무현은 2002년 대선에서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탈지역정당인 열린우리당의 탄생과 과반수 의석 달성, 노무현 정부의 정치개혁으로 한국민의 정치만족도는 2002년 말 아시아 최하위(25%)에서 2004년 초 1등(75%) 이 되었다.

정치개혁을 1년 만에 거의 완성했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를 의제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제2세대 시민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장본인이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1980년대 후반에도 노동자의 인권을 변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정동영은 노무현이 의제화한 제2세대 시민권을 2007년 대선에서 의제화하지 못했다.

 

그는 탈지역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을 깨고 이도 저도 아닌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는데, 선거에서 대패했고 신당은 정당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2012년 총선에서 혁신과 통합이라는 재야 시민단체 세력과 통합하면서부터 노동 분야 전문가를 대폭 공천했으며, 대선 후보가 된 문재인은 복지, 재벌개혁 등 좌파적 경제 공약을 대거 내걸었다.

 

민주당이 경제적 진보정당의 색채를 띠면서 호남의 기득권 정치인과 전문가 출신의 중도 정치인(박영선, 김한길, 변재일 등)이 안철수와 한 편이 되고, 비교적 진보적인 친노/민평련이 연대하는 본격적인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같은 호남 정치인들은 새누리당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교체를 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믿기에 보수화 행보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호남에서의 분열은 민주당이 제2세대 시민권인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자 세대 간 이념 갈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역사에서 살펴봤듯이, 제1세대 시민권에서 진보적이었던 자유당이 제2세대 시민권 운동이 등장하면서 몰락하거나 보수당에 흡수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중도보수정당이었지만, 2012년 이후 세계화와 양극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적 민주화와 제2세대 시민권을 향한 시대적 과제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호남을 중심으로 했던 60대 이상 민주화 세력이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서 보수화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중도보수적인 안철수와 호남 정치인들이 국민의당으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단지 문재인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념 갈등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호남 출신이었기에 민주당에 몸담았던 것이지 민주당이 경제적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라서 온 게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교수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 보수적으로 변화한 이유 역시 단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화 이후의 필연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와 독재의 균열이 사라지자 민주화운동을 했던 일부 유산 계급이 보수화된 것이다.

 

호남인들은 모두 진보여야 한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이라고 본다.

 

​호남인들 중에도 기득권 세력이 있다.

 

우리의 소선거구 선거제도는 지역주의 토호 세력에는 큰 행운이다.

 

호남의 의원들은 공천만 받으면 천년만년 당선될 수 있다. 호남에서 민주당 다선의원이 보수화되는 건 당연하고, 때마침 등장한 국민의당은 민주당에 비해 경제적 쟁점에서 더 보수적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이념적 분열을 거치면서 지역주의가 약화되는 것이므로, 호남의 분열은 사실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을 안타까워하거나, 서로 간에 원망하고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선거 역사에서 진보/보수라는 이념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한 건 1997년 대선 이후 2000년 총선에서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호남의 한이 풀리면서 호남인들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이탈한 것이다. 고소득, 고학력, 성공한 호남 출신 수도권 유권자들이 이익 투표를 하면서 한나라당을 찍기 시작했다.

 

더는 민주당을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지역주의의 약화는 2000년 총선 때 시동이 걸렸다.

서구에서는 20세기에 좌우 대립이 있었다.

영국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에 일부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등장해 복지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면 좌파, 경제적 자유(사유재산권)를 추구하면 우파가 되었다.

​경제 문제가 정당을 가르는 핵심 균열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68혁명이 일어났다. 68혁명은 경직되고 비인간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표출했다.

20세기의 자본이냐 노동이냐 하던 경제적 균열은 둘 다 물질주의 뿐이다.

물질주의는 빈곤과 전쟁 등을 겪은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68세대는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풍요 속에서 자란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배고픔과 전쟁의 위협을 모른다. 이들에겐 물질이 더는 중요하지 않기에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기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 싸우면서 똑같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을 혐오했다.

​권위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유럽의 신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경제가 풍요로워 질수록 인간은 개인주의적으로 변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온도가 올라갈수록 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져 고체에서 액체,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과 같다. 68세대에게는 물질보다 자아실현과 정의 같은 가치관이 더 중요했다.

예컨대 인권과 일상 속에서의 민주주의, 환경, 생태, 여성 등의 가치를 높이 사고 이를 위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이 물질 이후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탈물질주의자라고 부른다. 유럽은 1968년 이후 30년간 혁명적 변화를 거치며 21세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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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이 원내에 진입하면서 경제 균열이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자, 진보언론과 지식인은 영국처럼 자유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사라지면서 민노당이 제1 야당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 우리당에 가혹하게 굴었다. 불행히도 한국은 분단과 6.25를 겪은 나라다. 빨갱이, 좌파 기피증이 민노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가로막았다. 이것이 우리가 유럽과 달리 제2세대 시민권을 성취하기도 전에 건너뛰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세계 최강의 IT 국가가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인터넷은 시민에게 정보를 주며 정보는 곧 권력이다. 제2세대 시민권을 확립하기도 전에 권력을 가진 시민들이 제3세대 시민권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게 노사모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한 노사모가 한국 탈물질주의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인터넷을 활용해 대통령이 되었는데, ​미국의 오바마는 2008년에야 이를 벤치마킹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가 미국보다 6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우파는 노무현을 좌파라고 공격했고, 좌파는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노 대통령은 "그럼, 참여정부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거냐"고 한탄했다.

 

그랬더니 좌우 언론은 노 대통령도 스스로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인정했다며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시민들은 양쪽의 공격이 다 부당하다고 느꼈다.

노무현은 분명히 공공성을 추구했으면서도 세계화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탈권위주의적인 그의 모습이 좌우 정치인 누구보다 진보적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무현 왕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우파, 좌파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인 노무현과 좌파 언론이 갈등을 보이는 이유는 좌파 언론이 노무현만큼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 언론이 20세기 경제적 평등이라는 구좌파 이념을 추구한다면, 노무현은 21세기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탈물질주의 이념을 추구했다.

​탈물질주의의 요체는 탈권위주의적이며, 이들을 유럽에서는 신좌파라고 부른다.

​신좌파는 좌파의 아류가 아니라 우파(시장)와 좌파(국가)를 모두 배격하고 제3의 영역에서 합리적 개인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자유당이 아니라 신좌파였던 노무현은 우파 언론뿐만 아니라 구좌파 언론과도 이념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의 정체성을 찾아 주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21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왕따의 정치학]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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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동일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서 좌는 진보이고 우는 보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단지 20세기에 한해서 그랬을 뿐이다.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자본주의(우)가 보수고 사회주의(좌)가 진보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된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우)가 진보고 공산주의(좌)가 보수다.

좌와 우는 20세기의 경제체제 중 어느 쪽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정해지지만 진보와 보수는 다르다.

즉 기존 체제가 무엇이든 이를 지키고자 하면 보수, 변화를 원하면 진보가 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놓고 갈등을 빚었던 것처럼, 유럽의 왕실과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대헌장'​으로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는 본래 영국 왕 ​존의 실정을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왕에게 귀족의 권리를 다시 확인시킨 봉건적 문서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서 또다시 왕권과 의회가 대립하게 되자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9년에 공포된 '권리장전'으로 압축되는데 이로써 의회의 입법권,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의 금지, 의회 내의 언론 자유 등 국민과 의회의 권리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유럽에서도 투표권이 귀족에서 평민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표면적으로는 평민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르주아(유산)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재산의 규모나 교육, 나이의 정도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표의 수가 다르게 배분되었기에 남성 유산 계급의 전유물이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보수당인 토리당이 귀족과 대지주의 권한을 지키려 했고, 진보당인 휘그당은 산업과 상업으로 성공한 유산 계급으로서 신분제 폐지와 자유로운 무역을 주장했다.

휘그당의 후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자유당이다.

자유당은 19세기 중반 이후 자유무역 구현, 선거법 개혁, 공장법 제정 등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노동당​이 대두하면서 이들 일부는 보수당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내분을 거듭하다 졸지에 몰락했다. 자유당의 몰락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역사적 우연이라는 주장도 있고 리더십의 부재와 내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입헌 민주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화가 진행되는데, 나는 자유당이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이 투표권을 획득하면서 새로운 진보 세력으로 등장하자, 보수화된 자유당 일부가 보수당으로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정당의 재연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자본가가 보수가 되고 노동자가 진보가 되는 20세기의 특수한 현상이 시작됐다.

보수를 우, 진보를 좌로 보는 개념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처음 탄생했다고 한다.

 

 

 


​자코뱅 클럽은 프랑스 전국에 지부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혁명을 주도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혁명 이후 이는 자코뱅파와 지롱드파로 분리되는데 둘은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실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지주, 사교계에 진입한 도시 상공 부르주아 계층으로 해외 망명 은행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반면 민중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온건공화파인 지롱드파는 1791년 12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입법의회를 장악했다.

 

 

이들은 1792년 4월부터 심해지던 경제위기로 민주의 불만이 거세지자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들은 반혁명파를 응징하고 정정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하고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지자 각지에서 반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롱드파는 이를 수습하지 못했고, 결국 1793년 민중봉기로 추방되었다.

반면 ​자코뱅파는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등 하층민이 지지 기반이었다. 자코뱅당은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설치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이들은 농민에게 토지 무상분배를 시행했으며, 서구 체계 최초로 식민지를 포함한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코뱅당을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높이 평가했다. 이 시기 우연히 자코뱅파가 국민공회에서 왼쪽에 앉고 지롱드파가 우측에 앉게 된 게 죄파와 우파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19세기 말 영국의 자유당은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이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유산 계급의 사유 재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노동당이 등장해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진보적인 의제를 제시하면서 자유당은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 당시 많은 진보 지식인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19세기 영국의 자유당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노무현만 때리면 당시 제 3당이던 민노당이 제1 야당이 되는 줄 알았다고, 민노당 출신 박용진 의원이 2012년 '국민의 명령'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19세기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노무현은 21세기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이 점에소 소위 진보 지식인과 언론이 노무현 뿐만 아니라 노무현의 지지자인 친노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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