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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에배 사건-

 

 

 

유신 이후 1979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받아낸 진술서 말고는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 25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6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1, 2, 4호 발동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 1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일곱 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 2차 인혁당 사건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런데 1974 5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우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무려 열네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라고 쓴 독자 광고도 기억난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 12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강신명, 김대중, 윤형중,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이희승, 이태영, 김영삼, 홍성우, 함세웅, 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 2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 에 찬성률 73.1% 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 % 에 찬성률 91.5% 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1975 4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김용원,이수병, 우홍선, 송산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 없이 사형시켜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레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화장해버렸다.

문정현 신부는 시신을 지키려고 경찰에 맞섰다가 차에 깔렸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발매된 [악마기자 정의사제] 책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발동-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 5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번ㅂ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학생의 집회, 시위, 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 해임, 해산, 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이런 조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 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양인응, 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김윤환, 이세기 교수를 해직했다.

교수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옹,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 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1975 8 17이리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뿐만 아니라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시위 주동자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1975 4 11, 서울농대의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5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한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첫 시위를 벌였다 

80명이 체포되었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가을 축제 행사 끝에 시위를 벌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1977년에는 한신대, 서울대, 감신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전북대, 국민대 등에서 반정부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까지 이 대학들과 더불어 계명대, 영남대, 강원대, 경희대, 부산대, 동아대, 전남대, 한국외대, 마산대, 경남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등장)

 

중앙정보부는 1979 3월 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명숙,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김세균, 신인령 등과 대학교수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 목사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농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뒤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다.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 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 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 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7 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역량을 키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농이라고 부르는 단체다.

 

 

<함평 고구마 사건>

 

-YH 무역 사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 8월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 YH 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 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YH 무역 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꾸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상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남민전 사건-

 

(김남주 시인 그리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정부는 치밀한 정치공작을 벌여 법원으로 하여금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리게 했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본회의장 주변에 무술경위를 배치한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희 의원들끼리 모여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것이 1979 10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수사진행 상황을 전격 발표했다. 무려 77명을 구속한 대형 조직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공안당국은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자택의 강도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것이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히고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 남민전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재문, 신향식 등이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려 한 것을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다.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다. 일부 인사가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었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 관련 단체 등장)

 

1979 10 16, 부산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다음 삼삼 오오 무리를 지어 거리로 나왔다. 종종 있었던 학생시위였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퇴근길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부산 시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해 버렸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끓어 오른 것이다. 공안당국은 부산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핵심 고리가 6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양서협동조합이라고 판단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소위 부림사건은 바로 이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동연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시위가 낮 밤 없이 계속되자 정부는 10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했다. 부산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확산된 마산지역 시위는 더 크게 불붙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을 투입했지만 10 19일 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군과 경찰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무려 1600여 명을 체포했다.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 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 10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만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 5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 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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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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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 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산업화 세력이 종북주의이념공세를 벌이고, 민주화세력이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에 빨갱이 마녀사냥의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막판에 허정과 송요찬 등 야권 후보들이 사퇴해 윤보선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는 민주화 이후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 반북,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부는 호남을 중심으로 흉년이 든 농촌에 원조 밀가루를 대량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가동하고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오로지 부정선거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남에서 압승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왔던 선거구에서도 이겼다.

도시에서 전반적으로 지기는 했지만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시민계층과 진보적 청년층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만약 내가 그 때 젊은 유권자였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쿠데타 주모자를 뽑기도 싫었겠지만 윤보선 후보도 지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경제적 자주, 자립이라는 공약을 미국원조를 거부하는 반미주의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편들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후보는 미국 원조자금이 52% 를 차지한 6000억 환 규모의 1961년도 추가경정예산을 경제적 대미예속이라고 비판했다. 1959년 시설부문 미국 원조 2 800만 달러 가운데 공업화를 위한 시설의 비중이 2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원조 총액의 30%를 차지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가경제가 몰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막대한 기업부채 규모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민족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모두 타당한 현실인식이었다.

 

 

 

-김종필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 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한일합병조약을 포함해 1910년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제강점기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배상과 징용 조선인의 미지급 임금 등 대일청구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 해역 50~60해리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요구를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합법적이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강점기 수탈에 대한 배상을 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떠난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고, 한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 들어 미국이 새로운 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한국을 묶으려 했다. 장면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성과를 토대로 1961년 말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한 끝에 1962년 가을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이 합의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1964 3월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5.16 이후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였다. 집회시위는 전국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정부투쟁이라기 보다는 당당한 대일외교를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1964 3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을 면담했고 다음 날 전국 대학생 대표들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학생 대표들을 대통령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마침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수천만 달러의 창당자금을 제공한 의혹이 불거졌다.

정권 실세들이 국유지를 부정 불하해 거액을 챙긴 사건도 터졌다. 여기에다 중앙정보부가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학생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이 부패한 친일세력으로 보였다. 5 20일 서울대 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레식이라는 규탄집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이념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공격했다.

 

 

 

-6.3 항쟁, 인혁당 사건-

 

그러자 정부는 대화를 포기하고 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거리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라고 판사를 협박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며 중앙정보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 사태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 8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 변란을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인혁당 사건>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 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 6 22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 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약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의 비준 절차가 진행된 여름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정부는 대학교를 미리 폐쇄하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비판적 언론인을 테러, 납치, 폭행하면서 언론보도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다시 군 병력을 투입했다. 9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학생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6.3투쟁은 1.49 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와 언론통제, 대학과 재야인사에 대한 감시체계를 대폭 강화했지만 학생운동과 야당, 재야 또한 투쟁 역량을 비축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공병단 파견을 시작해, 1965년 수송단과 공병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거쳐 1966년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0만 명 이상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다.

주둔 병력이 최대 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한미 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가 3000명의 병력을 비전투 임무를 주어 이라크에 파병한 2004년에는 전국적인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베트남 파병은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반대여론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고, 세계 평화와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6 9 [경향신문]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핵심은 일본 미쓰이물산이 울산 한국 비료 공장건설사업과 관련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과 삼성 관계자들은 현금 대신 대량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온 다음 이것을 처분해 정치자금과 공장 건설비, 한국비료 운영비로 쓰려고 모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설탕이 아니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과자와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자랐다. 정경유착과 밀수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이창희 씨가 총대를 메고 대신 구속되었다.

야당은 밀수 재벌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효창운동장에서 야당이 연 규탄대회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한 장준하 선생을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대학가는 정부와 재벌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집회로 끓어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리턴매치를 벌인 1967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4년 전보다 훨씬 큰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부와 공화당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전국을 돌면서 개발공약을 쏟아냈으며 일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온갖 빌미를 잡아 야당 후보를 구속하고 선거운동원을 구금했다. 공화당 조직은 막걸리, 고무신, , 밀가루, 현금을 집집마다 돌렸다.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고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 넣은 사례도 숱하게 드러났다. 도처에서 야당 참관인을 폭행해 내쫓았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후보 표를 무더기 무효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74% 130석을 차지했다.

 

 

 

-동백림 사건-

 

부정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규탄집회와 거리시위가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별로 휴업과 조기방학 조처를 내렸지만 시위는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그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 세칭 동백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해 북한을 오갔던 임석진 박사가 조선일보 독일특파원 이기양 기자 실종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신의 행위를 고백한 데서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을 한국으로 유인하거나 대사관에 모은 후 강제 압송했다.

<동백림사건>

1967 78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정하용, 황성모, 최창진 등 대학교수와 정규명 등 유럽 유학생, 장덕상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무려 66명을 검찰에 송치하고 23명에게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를 씌웠다. 신민당 6.8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의 장준화 의원과 부완혁 집행위원도 엮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1970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 반면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가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식어버렸고 선거무효를 주장하면서 장외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원내로 복귀했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 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 1.21 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 20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 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작업 그리고 촛불집회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2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먼저 내부의 개헌반대론자들을 회유, 고립시켜 공화당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3선 개헌안을 채택하게 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위,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신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앙정보부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일부 야당의원들의 3선 개헌 지지성명을 이끌어냈고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대학 문을 열지 않았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긴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촛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 9 14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대학이 다시 시위 열풍에 휩싸였고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0 17일 개헌 국민투표에는 77.1 퍼센트의 유권자가 참여했고 65.1 퍼센트가 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리고 김대중의 등장-

 

1971 4 27일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 20,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 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김대중 후보는 미, , ,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 18 100만 명의 청주우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검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김지하 시인이었다. 정부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 [오적]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 [o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 [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를 협박, 회유해 보도록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예비 음모사건>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성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7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관계자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10월 유신 체제 등장 (그리고 김기춘)-

 

그는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개헌안을 공고했다. 정부는 11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 %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것은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에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 , 동에서 하나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되었다.

 

12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 공약 발표도 하지 않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8년에는 똑 같은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다.

따라서 그날 이후 민주화운동은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힘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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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현재]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욕망이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피치자뿐만 아니라 통치자까지, 법률은 만인을 똑같이 구속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국가권력과 피 흘리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

 

 

 

민주화는 전제정치 또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노력과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민주주의와 독재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산업화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경제이론을 활용했다.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투표를 저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개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다수 국민이 원해도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모든 선거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형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보장,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 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 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 노동자 표정두(이상 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 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 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되면서 분신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연속적,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 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 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주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민주화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용공이적단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발표한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왠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 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의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조직에는 국민협의회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이 붙는다.

줄이면 국본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시위 장소와 시간,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가 실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 없이 동원한다.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한다. 경찰 병력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 틈 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준다.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들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 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 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MGM 사의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 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로 가는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위 진압 능력에 관한 한 군이 경찰보다 나을 게 없다.

유일한 차이는 총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1964 6.3 사태나 1979년 부마민중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 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혁명 때는 경찰관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인물 몇몇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1987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불법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 투석, 화염병 투척, 야간시위 등 시위대의 모든 행위가 실정법 위반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그것을 최고의 법인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든 것은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가 된다.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은 곧바로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 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 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검찰총장(채동욱)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중국 정보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자백] 참고)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집권탕의 행태를 용인한다.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며 상당 기간 동안 제법 큰 격차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식과 행태가 좌우한다.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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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IMF 가 남긴 후유증 양극화- : 현 정권까지의 흐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거시경제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약자를 몰락시키며 약자가 사라져 생긴 시장의 공백은 더 강한 자가 차지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경제위기는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현저한 약화였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되었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양극화다.

양극화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더 온건하게는 격차의 확대라고 한다.

 

IMF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그룹이 여럿 해체되었다. 그러나 삼성, LG, SK, 현대차, 롯데, 한화, 한진, 동양, 대림, 효성, 코오롱, 두산, 대상, 한솔, 금호, 동부, CJ 그룹 등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공장 일을 내 일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산업화시대의 구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평생고용이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고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한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 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권 기간에 한국 사회는 양극화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진보정권은 국민경제를 대체로 잘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각각 5년간 평균 4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1998 7335달러였던 것이 2007년에는 22000달러에 다가섰다.

물가상승률도 3%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낸 덕분에 2007년 말에는 25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가 쌓였다. 실업률은 3% 대로 내렸고 달러 환율은 900원 수준으로 외환위기 이전과 비슷해졌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 경제 신인도 역시 외환위기 이전인 A등급을 회복했다. 종합주가지수는 노무현 정부 때 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그러나 국민의 실제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간단한 통계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 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우리의 소득분배 통계는 부족한 점이 많다. 정부가 소득분배 관련 데이터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 조사기관과 조사방법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기업이 당기순이익 중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쌓아두는 사내유보를 소득에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언론인들은 종종 서로 다른 종류의 지니계수를 뒤섞어 사용한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 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양극화의 추세를 보려면 같은 대상을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시계열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야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소득분배의 상태를 비교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분배지표는 전국가구가 아니라 2인 이상 도시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분배지표밖에 없다.

 

……..

 

1990년에서 1996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 그러다가 1997년 이후 현저하게 악화되었으며 그 경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소득 분배지표와 가처분소득 분배지표의 격차는 지니계수가 0.01에서 0.025 내외로, 소득 5분위 배율은 0.2에서 1.0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진보정권의 복지지출 확대는 가처분소득의 불평등한 분배를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

 

2010년 이후 분배지표가 악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시장소득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부분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등 노동시장 양극화 추세가 완화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 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 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 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 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 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 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 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와 세계 7위 경제 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 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2]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3]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4]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 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릎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 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품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어느 쪽이 먼저일까? 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것도 먼저가 아니다.

이 둘은 선순환(Positive feed-back) 관계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자기중심적 선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를 철폐해야 효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틀리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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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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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선 Freud 에 밀려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 융의 심리학입니다. 혹자들은 융이 Freud의 'Sexuality 강조' 에 대해 반기를 들어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융이 신비주의적인 '영혼 등의 문제' 에 집중하게 되자 서로 마찰이 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융이 초점을 맞췄던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들이 심리학의 폭을 한층 더 넓게 만들어 줬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론이 실제적으로 환자들의 치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론 자체는 공부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이며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성격검사인 MBTI 검사의 기초에 융의 이론이 관여했다는 점만으로도 관심을 가질 명분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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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분석 심리학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 융-

 

 

 

[-학지사-에서 출판한 [성격 심리학] 전공 교재에 있는 내용을 참고해서 정리했습니다.]

 

융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할 정도로 정신분석에 심취했었으나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보다 새롭고 정교한 성격이론을 만들었다. 그의 이론을 분석 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이라고 한다.

 

분석심리학은 정신의 두 측면인 의식과 무의식간의 관계를 확립하고 이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이트로부터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영향을 받은 Jung은 무의식의 개념을 확장하여 자신의 체계적 이론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Jung은 인류 역사를 통해 발달해온 정신과 개인이 속한 문화적 영향을 바탕으로 형성된 타고난 정신적 소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Jung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표현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성격은 무의식의 조건에서 발현되기를 갈망한다.” 고 지적하였다.

먼저, 융의 분석심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융과 프로이트의 주요한 견해 차이를 살펴보자.

첫째, libido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

 

프로이트는 libido를 인간의 생물학적 성에 제한한 에너지로 본 반면, 융은 libido를 성 뿐만 아니라 다른 삶의 에너지를 포함한 정신 에너지로 보았다. 즉 융은 프로이트의 libido 개념을 확장하였다.

둘째,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방향에서 다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이 주로 과거의 사건이나 과정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 반면, 융은 인간은 과거의 사건들 뿐만 아니라 미래에 무엇을 하기를 열망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셋째, 무의식의 개념 정립이 다르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자각 수준에 초점을 맞추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융은 인류의 정신분화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집단 무의식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무의식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1.  융의 생애

 (Carl Gustav Jung, 1875~1960)은 스위스의 정신분석자였으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였다. 융은 1875년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케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내적 경험과 그가 몰두하게 된 생각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주로 혼자서 지내는 상당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스위스의 행복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자신의 내부적 자원에 의지하는 법을 일찍부터 배웠다.

융은 아동기의 많은 시간을 꿈의 의미와 그가 경험했던 초자연적인 환상에 깊이 빠져서 보냈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나무로 2인치 정도되는 인간의 형상을 조각했다.

그는 그 형상을 숨겨놓고 혼자 있을 때 그 형상과 이야기하고 때때로 얘기한 내용을 비밀스런 부호로 기록했다. (일화에 따르면, 융은 베냐민? 이라는 spiritual한 존재의 음성을 듣고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융의 열망은 그를 정신의학의 새로운 분야로 이끌었다. 그는 1900년에 바젤 대학에서 의학학위를 받았다.

쮜리히 대학의 정신병 진료소에 임명되어 정신분열증 연구로 유명한 Eugen Bleuler 밑에서 일했다. 융은 역시 히스테리아와 다중성격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심리학자인 Pierre Janet과 함께 공부했다. 1905년에 융은 바젤 대학에서 정신병리학을 강연했다.

인간 마음에 대한 융의 호기심은 곧 프로이트의 연구와 연관되었다. 융은 1900년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읽은 후에 프로이트와 서신왕래를 시작했다. 1907년에 프로이트를 만나 13시간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1909년에 프로이트를 따라 미국에 갔으며 클라크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1911년에 융은 프로이트의 후원을 받아 국제정신분석학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분석, 무의식, 리비도에 대한 융의 해석과 이론은 프로이트의 입장과 달랐다.

융이 무의식의 심리학’(psychology of unconscious)을 발간한 후에, 그와 프로이트 사이에 불하가 생겨나게 되었고, 1914년 그들은 결별하였다. 그런 후에 융의 이론과 실제는 분석심리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13년에 융은 내적 혼란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것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로이트처럼, 그는 자신의 정서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꿈 해석을 통한 자기분석을 하였다.

이 기간은 융으로 하여금 성격이론에 대한 독특한 접근으로 이끈 창조력과 성장의 시간이었다. 융은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인류의 상징과 신화를 평가했다.

융의 분석심리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기본적인 차이는 libido와 연관된다. 프로이트는 libido를 성적 에너지라고 주장했고 반면에 융은 일반적인 생활 에너지로 간주했다.

두 번째 차이는 성격에 있어서 어린 시절의 영향에 대한 프로이트의 결정론적 견해에 있다. 융은 성격은 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고 미래의 목표와 열망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었다.

집단적 무의식의 요소를 융은 원형(archetypes)이라고 불렀다. archetypes에는 영웅, 부모, 죽음, 탄생과 부활, 일관성, 아이들, , 악마 등이 포함된다. 어떤 archetypes은 성격과 분리된 체계로 확인되었다. 잘 알려진 대표적인 archetypes으로는 persona(페르조나) 혹은 외부로 드러난 적응 성격,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혹인 양성적 성격, 그림자(shadow) 혹은 인간 본성의 동물적인 부분, 무의식의 모든 부분으로 구성된 자기(self) 등이 있다. 자기는 만다라라는 원이 상징으로 표현되며 일관성과 평정을 위해 노력한다. 자기는 성격의 통합, 자기실현, 조화를 위한 노력을 한다.

융은 심리적 유형’(psychological types, 1921)이라는 책에서 보여준 내향성과 외향성이라는 성격 지향성에 대한 설명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또한 네 가지 심리적 기능으로 사고와 감정, 감각과 직관을 제안하였다. 과학적인 심리학이 융의 이론에서는 무시되었을지라도 융의 연구는 이러한 성격 특징의 일반화에 기여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BTI 성격 유형 검사는 융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답니다.)

융은 생애 마지막을 개인치료, 여행, 독서, 공부를 위해 바쳤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의 관찰은 자신의 계속적인 자기반성과 결합되었고, 막대한 양의 책과 강연을 낳은 결과를 초래했다. 융의 많은 저술은 반유태인적 기질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포함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성격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세계의 독자들을 계속해서 매혹시키고 있고 흥분시킨다.

 

 

 

2.  주요 개념

 여기에서는 융이 제안한 주요한 개념인 정신의 구조, 정신에너지의 원리, 원형(Archetypes)을 살펴 보고자 한다.

 

정신의 구조

융은 전체적 성격을 정신으로 보았다. 융은 인간이 전체적 성격을 갖고 태어났으며 일생을 통해 이러한 타고난 전체성을 분화하고 통합해 간다고 보았다.

 

전체적 성격인 정신의 수준을 크게 의식(conscious)과 무의식(unconscious)으로 구분하였다. 더 나아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과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 세분화한 후 집단 무의식을 중심으로 그의 분석심리학을 확립하였다.

의식(conscious) : 우리가 직접 알고 있는 정신의 부분이 의식이다. 의식은 자아(Ego)에 의해 지배된다. Ego는 비록 정신 전체 속에서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의식에 이르는 문지기라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Ego를 통해 자신을 외부에 표현하고 외부 현실을 인식한다. 의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인 태도와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태도는 의식의 주인인 자아가 갖는 정신적 에너지의 방향이다. Ego가 외부 대상에 지향하는 방향이 수동적인가 능동적인가에 따라 성격 태도가 결정된다. 능동적인 태도를 외향성(extraversion)이라 한다. 외향성은 의식을 외적 세계 및 타인에게 향하게 하는 신경 태도이다. 내향성(introversion)은 의식을 자신의 내적 주관적 세계로 향하게 하는 성격 태도이다. 융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두 가지 성격태도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둘 중 어느 태도가 지배적이냐에 따라 태도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둘째, 의식의 기능은 주관적 세계와 외부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 융이 제안한 정신적 기능의 구성요소는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이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그가 제안한 정신의 반대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 차원(사고~감정)과 비합리적 차원(감각~직관)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기능 중 어느 것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기본적인 성격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융은 심리적 태도와 기능을 조합하여 여덟 가지 심리적 유형인 외향적 사고형, 외향적 감정형, 외향적 감각형, 외향적 직관형, 내향적 사고형, 내향적 감정형, 내향적 감각형, 내향적 직관형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타고난 성격유형을 검사하는데 현재 많이 쓰이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이러한 융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 personal unconscious 는 의식에 인접해 있는 부분으로 쉽게 의식화될 수 있는 망각된 경험이나 감각경험으로 구성된다.

개인무의식의 자료는 개인의 과거경험으로 비롯된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personal unconscious는 프로이트의 전의식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무의식까지 포함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Personal unconscious 은 의식되었지만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거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망각되었거나 억제된 자료의 저장소이다. 즉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또는 의식에 머물 수 없는 경험은 모두 개인무의식에 저장된다.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 융이 제안한 독창적 개념으로 분석심리학의 이론 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Collective unconscious는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사람들이 역사와 문화를 통해 공유해 온 모든 정신적 자료의 저장소이다.

융은 인간의 정신적 소인이 유전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collective unconscious는 인류역사를 통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정신적 소인인 수없이 많은 원형(archetypes)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단무의식은 직접적으로 의식화되지는 않지만 인류역사의 산물인 신화, 민속, 예술 등이 지니고 있는 영원한 주제의 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정신에너지의 원리

융은 전체적 성격을 정신이라고 불렀으며, 정신에너지인 libido를 통해 지각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소망하는 심리적 활동이 수행된다고 보았다.

융에게 libido는 전반적인 인생과정 에너지’(life process energy)로 프로이트의 성적 충동은 그러한 에너지의 한 측면이었다.

여기서는 융이 제안했던 정신에너지가 기능하는 세 가지 원리인 대립(opposition), 등가(equivalence), 균형(entropy)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형(Archetypes)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구성하고 있는 인류 역사를 통해 물려받은 정신적 소인이 원형(archetypes)이다. 원형은 형태(form)를 가진 이미지 혹은 심상이지 내용(content)은 아니다. 상징은 원형의 내용이며 원형의 외적 표현이다.

Archetypes은 꿈, 신화, 동화, 예술 등에서 나타나는 상징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Archetypes은 인간이 갖는 보편적, 집단적, 선험적인 심상들로 융의 analytical psychology에서 성격의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지적한 것처럼 archetypes의 수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 악마, 부모, 대모, 현자, 사기꾼, 영웅, 지도자 등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형성해 온 수 없이 많은 원초적 이미지가 archetypes이다.

여기서는 융이 언급한 대표적인 archetypes인 페르조나(persona), 아니마와 아니무스(anima & animus), 그림자(shadow), 자기(self)에 대해서 알아보자.

페르조나(persona) : persona는 환경의 요구에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적응의 archetypes이다. persona는 개인이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가정하는 자신의 역할을 의미한다. Persona는 가면을 뜻하는 희랍어로 개인이 사회적 요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내 놓는 공적 얼굴이다.

우리는 persona를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거나 자신을 은폐시킨다. 겉으로 표표현된 persona와 내면의 self가 너무 불일치하면 표리부동한 이중적인 성격으로 사회적 적응에 곤란을 겪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anima & animus) : 융은 인간이 태어날 때 본질적으로 양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양성론적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이론적 입장을 반영한 개념이 anima & animus이다. 즉 남성의 내부에 있는 여성성을 anima라고 하며, 여성의 내부에 있는 남성성을 animus라고 한다.

남성성의 속성은 이성(logos)이고 여성성의 속성은 사랑(eros)이다. 인간은 누구나 양성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logos eros를 겸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숙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남자는 내부에 잠재해 있는 anima, 즉 사랑을 이해하고 개발해야 하며 여자는 내부에 있는 animus, 즉 이성을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현명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뿐만 아니라 이성을 갖추는 게 요구된다.

 

그림자(shadow) : shadow는 인간의 어둡거나 사악한 측면을 나타내는 archetypes이다. 즉 인류 역사를 통해 의식에서 억압되어 어두운 무의식에 있는 자료 및 인간의 원초적인 동물적 욕망에 기여하는 archetype이다.

Shadow는 사회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명력, 자발성, 창조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여 이로움을 주기도 한다. Shadow는 인간의 양면성, 밝고 긍정적인 면과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반영한 archetype이다.

빛이 없이는 그림자를 상정할 수 없다. 사회에서 부정되거나 부도덕하고 악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shadow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상담 및 심리치료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archetype이 바로 shadow이다. 상담자는 인간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내담자가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자기(self): self는 모든 의식과 무의식의 주인이다. 융은 인간이 실현하기 위해 타고난 청사진을 self로 보았다. Self는 전체로서 인간 성격의 조화와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archetype이다. 다양한 문화에서 발달된 상징이 이 archetype에서 나타난다.

Self는 정신의 중심인 의식과 무의식의 양극성 사이의 평형점이다. self는 다른 정신 체계가 충분히 발달할 대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융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는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변화의 시기인 중년의 시기에 나타난다. 개인의 자기실현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각과 미래의 계획 및 목표를 수반한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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