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유시민의 저서에서 발췌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목 :[조선일보]는 북한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을 의심한다.

 

[조선일보]는 "국군 탱크가 평양 주석궁에 진입함으로써 통일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내놓고 북한을 경멸하고 비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사상적으로 의심한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해서 발전시키겠다고 공언한다.

'좌경용공분자'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이것이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말한다.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조선일보]가 '사상검증'의 덫을 씌워 공직에서 축출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싫어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선일보]가 멀쩡한 사람을 '용공분자'로 몰아세운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오래 되지 않아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몇 가지 들추어 보자.

[조선일보]는 김영삼 정권 시절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비서관과 한완상 통일부 장관, 김태동 경제수석을, 김대중 정권 들어서는 정책자문위원장 최장집 교수를 상대로 집요한 색깔공세를 펴 결국 공직에서 밀어냈다.

대선을 눈앞에 둔 1997년 8월 터진 '이석현 의원 명함 사건'도 [조선일보] 작품이다.

이석현은 해외용 명함의 '한국'이라는 국호 옆 괄호에 '남조선'을 병기했다가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과 극우단체, 그리고 [조선일보]의 뭇매를 맞은 끝에, 당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기 발로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를 떠나야 했다.

이석현의 '죄'는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 외국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피해자는 그밖에도 많다.

소설가 황석영과 조정래, 리영희 교수, 외국어대 이장희 교수도 [조선일보] 보도 때문에 '불그스름한 용공분자'로 몰렸다.

 

<조선일보의 노골적인 제목 선정 비교>

 

[조선일보]는 심지어는 [기자협회보]까지 검증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일보]는 1996년 2월 자칭 '세계적 특종'을 보도했다. '김정일 본처 서방탈출' 또는 '성혜림 망명사건'이다.

"김정일 후처들이 괴롭혀 결행" "김정일 여성편력에 가슴앓이" 등 [조선일보]가 제시한 망명의 근거를 보면 이것은 일종의 치정극이었다.

[기자협회보]는 이 '특정보도'의 진실성을 입증할 만한 사실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월간조선] 1996년 4월호에서 우종창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귀하는 안기부 편인가, 김정일 편인가?"

다음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공세에 대한 96년 3월 23일 [기자 협회보]의 소감이다.

본보가 마침내 '사상의 검증대'에 올랐다. [기자협회보]가 '김정일 편인가' 밝히라는 어이없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 까닭이다. 참으로 서글프게도 이 물음은 우리나라의 언론을 대표한다는 신문사 중의 하나인 [조선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조선]이 본보를 가리키며 물은 기사 중의 일부이다.(...) 우리를 더욱 서글프게 하는 것은, 문제의 기사에서 우리가 제기한 쟁점들 - 특종보다 진실보도가 우선 - 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제대로 된 반론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조선일보]가 햇볕정책을 집요하게 비난하는 것은 김대중 정권을 흔드는 동시에 노무현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발췌함-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조선일보가 이승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을 옹호했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다. 기만과 권모술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노련함이 잘 들어 있는 사설들이 많다. 또한 [조선일보]가 왜 '노무현'을 그토록 싫어했는지도 잘 알 수 있는 유시민의 글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선일보]는 민주화 운동가를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노무현을 싫어한다. 미워한다. 혐오한다. 사설과 기사를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민주화운동 전력을 가진 사람을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민족의 지도자로 숭배하며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필요악이 아닌 역사의 필연으로 규정한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양민학살까지도 대놓고 지지했다.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보면 노무현은 '입으로 민주화를 떠드는 시끄럽고 무책임한 선동가'에 속한다.

아무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험담하는 게 아니다. 지난날의 [조선일보]가 한 독재 찬양 행적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럼 먼저 지난날 행적부터 잠깐 보자.

 

사례가 하도 많아서 대표적인 것만 본다. 더 많은 사례를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강준만이 쓴 [권력변환-한국언론 117년사]를 보시기 바란다.

[조선일보]는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지지했으며 아직도 박정희를 민족의 영도자라고 찬양한다.

 

박정희와 방일영이 술동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서로 생각이 같기 때문에 술동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박정희 쿠데타 사흘 뒤인 1961년 5월 19일 [조선일보] 사설이다.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군사혁명은 이런 불행한 여건 하에서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군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16 쿠데타에 이어 1969년 3선개헌을 지지했던 [조선일보]가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에게 [조선일보]는 연일 화려한 꽃다발을 바쳤다. 다음은 1972년 12월 28일 [새 역사의 전개 - 제 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한다]는 제목의 사설이다. 1934년 일본 왕의 생일 축하 사설 [봉축천장절]을 떠오르게 하는 명문장이다.

지난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온 냉전 속에서의 동족상잔과 남북 결원의 민족사에 10.17 구국의 영단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위하여 정초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토록 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덥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 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더욱 전망적인 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구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영도자를 가졌다.

 

중앙정보부가 종종 비판적 언론인들을 지하 취조실에 끌어다 매운맛을 보이는 한편, 기자들의 검열거부운동과 권력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광고주를 협박해서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의 숨통을 조였던 시대에 [조선일보]는 번영의 토대를 구축했다.

 

조선일보사는 1969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 이토추 상사의 민간차관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은행금리도 연 25% 를 넘던 그 시절로서는 엄청난 특혜였다.

[조선일보]는 훗날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로 처벌받은 전두환 일파의 1979년 12.12 쿠데타를 지지했고, 군부의 언론자유 탄압을 옹호했으며, 1980년 광주학살을 왜곡 보도해 역사의 진실을 감추었다.

1979년 12월 20일 사설에서 "군의 이러한 입장과 결의가 새삼 천명되었다는 것은 전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군사 반란을 예찬했다.

[조선일보]는 또한 신군부의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협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 회견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선 극우파 신문으로 유명하다. 이 회견에서 선우휘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론규제는 없는 것이 낫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의 제약이 가해져도 하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은 어떠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전혀 양립되어 있지를 않았다. 하룻밤 새 모든 신문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서게 되고 1년 내내 연일 조석간을 통틀어 정부를 두들겨팼다. (....) 그 사태를 한국의 언론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 5.16에 의해 언론규제를 받게 되자 이번에는 언론의 자유를 붙잡고 '슬픈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감상적인 처사이다.

​[조선일보]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신군부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직후인 1980년 5월 28일 사설에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꼬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은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1980년 8월 21일 전군지휘관회의가 충성서약을 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축출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을 집합시켜 권좌에 오르자 [조선일보]는 즉각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8월 23일과 28일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내보냈다.

국민 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 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분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8.21군 결의'는 또한 역사적으로 깊은 함축을 간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희원해 마지 않는다.

(...)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시대 새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걸고 (...)

 

전두환이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호헌선언'을 통해 5공헌법에 따라 대통령 자리를 노태우​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을 때도, [조선일보]는 "현행 헌법에 따른 당초의 단임 공약조차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시간적, 상황적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며 맞장구를 쳤다.

[조선일보]는 '1등신문'이 아니었다. 1980년도 이 신문의 매출액은 161억 원이었다. [동아일보](265억원), [한국일보](217억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8년에는 [조선일보]가 매출액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원), [한국일보](713억원)을 앞질렀다.

 

조선일보사가 받은 특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월간조선]이다. 전두환은 언론통폐합 조처를 통해 제 마음대로 매체를 없애고 만들었다. 예컨대 1980년 [월간중앙]이 폐간된 시점에서 조선일보사는 [월간조선]을 창간했다.

이런 [조선일보]가 19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87년 6월을 아스팔트 위에서 보낸 노무현을 반길 리 없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영도자로 찬양한 [조선일보]가 보기에 노무현은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인물이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박정희와 '밤의 대통령' 방일영

 

그런데 방일영이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은 건 사실이다. 앞서 인용했던 한홍구의 글에 그 사연이 나와 있다.

 

그런 칭호를 내린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절대권력자 박정희였다. '밤의 대통령'이 의미하는 바도 전혀 다르다.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젊은 시절 방일영 -

 

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 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오입대장'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후 1987년 6월항쟁까지 40여 년 동안 우리 언론은 권력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군대의 폭력을 무기 삼아 언론자유를 목졸랐고, 전두환 정권은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신문과 방송 편집자를 무위도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고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던 시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지틀조선일보]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를 보라.

 

1960년 이후는 [조선일보]의 본격적인 발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조선일보]를 무대로 활약을 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일보]는 오늘날의 명성에 토대를 쌓았습니다. 이후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전달하고 비판하는 기사, 그리고 세계와 국내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각종 기획사업 및 행사로 성가를 높였습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복간사에서 내비친 변명,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회사 소개는 [조선일보]의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증명한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조선일보]는 탄압을 받은 흔적이 없다.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었다"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한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을 당당하게 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1) 10월 유신 ~ 6월 항쟁 : 직접적 언론통제와 종속적 유착관계

 

독재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박탈한 시대였기 때문에 언론이 사회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정치권력은 언론시장 신규 진입을 봉쇄하고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언론인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고 보도와 편집에 직접 개입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에 대해서는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열어주되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기반을 공격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은 이 시기의 권언관계를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종속적 유착관계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6월 항쟁 전야에 가서야 비로소 동요의 조짐을 보였다.

 

 

2) 6월 항쟁~2001년 1월: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

6월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독재시대의 종속적 권언유착은 종말을 고했다. 권언관계는 대등한 상리공생으로 발전한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치권력은 유력 언론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유야무야 처리한 것은,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언론이 성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언론사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이 탄생하도록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상리공생은 안정성이 약하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정치권력에 비판적일 경우 언론은 이윤과 사회적 권력의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제한적 대립각을 연출한다.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양김 혐오증 유발(87년)과 노골적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92년)를 했던 유력 언론사들이 이들의 집권 후반기에 가한 대정부 공격은 대등한 상리공생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도에 정기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등 집권 초기 3년 동안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유력 언론사와의 대립을 회피한 것은 소수파 정권이라는 약점과 경제난 등 불리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선택적 상리 공생의 수혜자가 되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2001년 1월~현재: 선택적 상리공생의 일시적 붕괴

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1987년 이후 약 15년간 계속되어온 권력과 언론의 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과도기다.

김대중 정부는 유력 신문사와의 상리공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합법적 수단인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사의 물질적 토대와 사주들의 특권을 공격하고 신문고시를 부활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규제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속된 유력 신문사 사주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부활한 신문고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동력과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선택적 상리공생이 어떤 식으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PD 수첩 2부 -고 장자연 사건을 다룬다.-

: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당시 수사 총 책임자의 양심고백이 들어 있는 상당히 중요한 화였다.

: 조선일보라는 언론 매체가 지닌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화였다.

 

 

조선 일보가 저지른 만행들이 가득 담긴 화였다.

조선일보 방정훈 사장도 장자연 씨의 유서에서 함께 있었다는 글이 나와 있으나 조선일보에서는 방 사장을 지키기 위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움직인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총 책임자인 전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의 양심 고백으로 많은 진실들이 드러나는 충격적인 화이다.

 

 

 


자신들이 김대중-노무현의 민주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다시 역행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다는 점을 자랑(?) 이라도 하듯이 자신들은 대통령을 세울 수도 있고,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수도 있다는 식의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요즘 언론인들을 기레기라고 폄하해서 부르는 일이 생기곤 한다. 2018.12.6 기준으로 외교에 힘쓰고 있는 대통령에게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로 기준에 맞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의 모습은 여전히 그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기자라는 중요하고도 숭고한 직업을 부여 받았으면, 사명감을 가지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각종 혜택은 다 누리려 하면서 사실과는 상관 없는 뉴스 기사라 불릴 가치도 없는 글을 재생산 해 내고 있다면 그건 '기자' 가 아니지 않은가?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를 담당한다. 그래서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필요한 직종이라 생각한다. 조선일보가 오만하게 행동하는 건, 그 도를 넘어선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방 사장이 언급되지 않게 해 달라고, 방 사장이 포토라인에 서는 일은 없게 하라는 식의 압력을 행사했으며 그 태도는 부탁을 하는 공손한 느낌이 아니라 반 협박에 가까웠다.

조선일보 김대중 사설가는 늘 부끄러운 글을 사설로 남기곤 하는 사람인데, 국회에서 장자연 사건 논의 중 방정훈 사장을 언급하나 이종걸 의원과 관련하여 '자살'을 운운하는 묘한 뉘앙스의 사설을 쓰기도 하였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 나간다. 이들은 어떤 역사관과 국가관,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그 이외에도 방정훈의 친동생이나 조선일보의 손꼽히는 주주인 코리아나 호텔 방용훈 사장도 장자연 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가 술자리를 즐긴다는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방정오의 딸이 운전기사를 노예 부리듯 하는 사건이 최근 보도되었었다. 방 씨 일가가 지니고 있는 오만함과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는 듯 하다. 자신들이 이 나라를 지배했다는 망상적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사건들이다.

 

 

1부에서 방정훈 사장의 아들인 방정오 씨는 이미 등장했었다.


그들은 경찰에서 제대로 수사를 받았는지 조차 의문이며 조선일보 홍보실이나 코리아나 호텔 스위트 룸에서 35~50분 정도 조사를 받았다 하니 제대로 된 정보를 얻었을 리 만무하다.


간단한 사안에서나 35분 정도가 소요되지 이런 중차대한 사건에서 이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건 제대로 조사를 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경찰들이 청룡 봉사상이라는 상을 조선일보로부터 받으면 상금 1000만원에 일계급 특진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이었던 조현오 씨도 수사 과정에서 TV 조선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곤욕을 치른 상태였다.


그 이외에도 조선일보 사회부장 이동한, 당시 편집국장 홍준호, 경영기획실장 강효상(홍준표를 보좌하던 비서 실장일도 함.) 등이 모두 한몸을 이루고 사건을 묻어 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한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박진현 검사와 윗선들도 PD 수첩 제작진과의 접촉을 꺼려하였으며 증거가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제대로 된 수사를 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TV 조선 일가들을 포함해서 당시 주한미 대사관 공사였던 조셉윤 (갑자기 제작진이 물어 보니 영어를 시전하질 않나, 기억이 안 난다는 필살기를 날리는 황당한 모습을 연출....), CNN 한국 지사장도 중식당에서 함께 만났었다고 한다.


돈과 권력을 충분히 누리더니 이젠 성적 욕구를 채우려고 했던 것일까?


이쯤 되면 조선일보의 행보는 가히 갈 때 까지 간 듯 하다.


이 사건을 끝까지 덮으려 하고, 자신들은 깨끗한 척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겠는가......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얼룩진 그들의 만행이 속히 온 천하에 드러나길 바란다.


경찰 일부 세력, 검찰 일부 세력, 수 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얽혀 있다 보니 난장판이 되어 있으며 수사하기가 쉽지 않은 듯 하다.


꼭 이 사건은 재조사를 하여서 억울한 망인의 한이 풀리길 바란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