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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서구처럼 수백 년에 걸쳐 진보와 보수가 형성된 게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갈등을 압축적으로 경험해왔다.

 

이건 순전히 주관적 해석이므로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진보의 역사는 시민권을 향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고, 시민권의 내용도 세 차례에 걸쳐 변화를 겪어 왔다.

제 1세대 시민권은 참정권이었고, 제2세대 시민권은 경제적 권리(복지권)이었다. 유럽에서는 전후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복지국가가 정착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복지권을 헌법 개정 조항으로 포함시키려다 갑자기 서거해 아직 시민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3세대 시민권은 자치권이다.

소수민족이나 문화를 지키기 위한 시민권인데 이를 헌법에 규정한 나라는 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제 3세대 시민권을 프랑스 68혁명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19세기와 20세기는 ​더 많은 보통사람이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에서 유산 계급으로, 유산 계급에서 평민으로,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과 젊은이들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참정권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 왔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됨과 함께 투쟁 없이 미군정에 의해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몇 차례 굴절됐고, 급기야는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그 참정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참정권을 향한 투쟁이 4.19, 5.18 그리고 6.10으로 이어졌다.

 

투쟁을 통해 드디어 참정권을 획득한 건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내세운 개헌운동의 승리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제1세대 시민권을 향한 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1987년의 6.10 항쟁은 화이트칼라가 가세함으로써 성공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중운동이라기보다는 지식인, 대학생, 중산층 위주의 제1세대 시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그랬듯이 경제권을 향한 노동자 정당의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 제1세대 운동에서 진보적이었던 유산계급은 보수화된다.

열린우리당은 탈지역주의 정치개혁을 소명으로 내걸고 창당했기에 영국의 자유당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의 자유당과 참여정부는 달랐다.

 

노무현은 2002년 대선에서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탈지역정당인 열린우리당의 탄생과 과반수 의석 달성, 노무현 정부의 정치개혁으로 한국민의 정치만족도는 2002년 말 아시아 최하위(25%)에서 2004년 초 1등(75%) 이 되었다.

정치개혁을 1년 만에 거의 완성했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를 의제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제2세대 시민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장본인이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1980년대 후반에도 노동자의 인권을 변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정동영은 노무현이 의제화한 제2세대 시민권을 2007년 대선에서 의제화하지 못했다.

 

그는 탈지역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을 깨고 이도 저도 아닌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는데, 선거에서 대패했고 신당은 정당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2012년 총선에서 혁신과 통합이라는 재야 시민단체 세력과 통합하면서부터 노동 분야 전문가를 대폭 공천했으며, 대선 후보가 된 문재인은 복지, 재벌개혁 등 좌파적 경제 공약을 대거 내걸었다.

 

민주당이 경제적 진보정당의 색채를 띠면서 호남의 기득권 정치인과 전문가 출신의 중도 정치인(박영선, 김한길, 변재일 등)이 안철수와 한 편이 되고, 비교적 진보적인 친노/민평련이 연대하는 본격적인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같은 호남 정치인들은 새누리당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교체를 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믿기에 보수화 행보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호남에서의 분열은 민주당이 제2세대 시민권인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자 세대 간 이념 갈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역사에서 살펴봤듯이, 제1세대 시민권에서 진보적이었던 자유당이 제2세대 시민권 운동이 등장하면서 몰락하거나 보수당에 흡수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중도보수정당이었지만, 2012년 이후 세계화와 양극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적 민주화와 제2세대 시민권을 향한 시대적 과제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호남을 중심으로 했던 60대 이상 민주화 세력이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서 보수화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중도보수적인 안철수와 호남 정치인들이 국민의당으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단지 문재인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념 갈등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호남 출신이었기에 민주당에 몸담았던 것이지 민주당이 경제적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라서 온 게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교수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 보수적으로 변화한 이유 역시 단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화 이후의 필연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와 독재의 균열이 사라지자 민주화운동을 했던 일부 유산 계급이 보수화된 것이다.

 

호남인들은 모두 진보여야 한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이라고 본다.

 

​호남인들 중에도 기득권 세력이 있다.

 

우리의 소선거구 선거제도는 지역주의 토호 세력에는 큰 행운이다.

 

호남의 의원들은 공천만 받으면 천년만년 당선될 수 있다. 호남에서 민주당 다선의원이 보수화되는 건 당연하고, 때마침 등장한 국민의당은 민주당에 비해 경제적 쟁점에서 더 보수적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이념적 분열을 거치면서 지역주의가 약화되는 것이므로, 호남의 분열은 사실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을 안타까워하거나, 서로 간에 원망하고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선거 역사에서 진보/보수라는 이념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한 건 1997년 대선 이후 2000년 총선에서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호남의 한이 풀리면서 호남인들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이탈한 것이다. 고소득, 고학력, 성공한 호남 출신 수도권 유권자들이 이익 투표를 하면서 한나라당을 찍기 시작했다.

 

더는 민주당을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지역주의의 약화는 2000년 총선 때 시동이 걸렸다.

서구에서는 20세기에 좌우 대립이 있었다.

영국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에 일부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등장해 복지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면 좌파, 경제적 자유(사유재산권)를 추구하면 우파가 되었다.

​경제 문제가 정당을 가르는 핵심 균열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68혁명이 일어났다. 68혁명은 경직되고 비인간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표출했다.

20세기의 자본이냐 노동이냐 하던 경제적 균열은 둘 다 물질주의 뿐이다.

물질주의는 빈곤과 전쟁 등을 겪은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68세대는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풍요 속에서 자란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배고픔과 전쟁의 위협을 모른다. 이들에겐 물질이 더는 중요하지 않기에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기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 싸우면서 똑같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을 혐오했다.

​권위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유럽의 신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경제가 풍요로워 질수록 인간은 개인주의적으로 변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온도가 올라갈수록 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져 고체에서 액체,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과 같다. 68세대에게는 물질보다 자아실현과 정의 같은 가치관이 더 중요했다.

예컨대 인권과 일상 속에서의 민주주의, 환경, 생태, 여성 등의 가치를 높이 사고 이를 위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이 물질 이후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탈물질주의자라고 부른다. 유럽은 1968년 이후 30년간 혁명적 변화를 거치며 21세기에 도달했다.

.................

민노당이 원내에 진입하면서 경제 균열이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자, 진보언론과 지식인은 영국처럼 자유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사라지면서 민노당이 제1 야당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 우리당에 가혹하게 굴었다. 불행히도 한국은 분단과 6.25를 겪은 나라다. 빨갱이, 좌파 기피증이 민노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가로막았다. 이것이 우리가 유럽과 달리 제2세대 시민권을 성취하기도 전에 건너뛰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세계 최강의 IT 국가가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인터넷은 시민에게 정보를 주며 정보는 곧 권력이다. 제2세대 시민권을 확립하기도 전에 권력을 가진 시민들이 제3세대 시민권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게 노사모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한 노사모가 한국 탈물질주의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인터넷을 활용해 대통령이 되었는데, ​미국의 오바마는 2008년에야 이를 벤치마킹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가 미국보다 6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우파는 노무현을 좌파라고 공격했고, 좌파는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노 대통령은 "그럼, 참여정부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거냐"고 한탄했다.

 

그랬더니 좌우 언론은 노 대통령도 스스로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인정했다며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시민들은 양쪽의 공격이 다 부당하다고 느꼈다.

노무현은 분명히 공공성을 추구했으면서도 세계화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탈권위주의적인 그의 모습이 좌우 정치인 누구보다 진보적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무현 왕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우파, 좌파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인 노무현과 좌파 언론이 갈등을 보이는 이유는 좌파 언론이 노무현만큼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 언론이 20세기 경제적 평등이라는 구좌파 이념을 추구한다면, 노무현은 21세기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탈물질주의 이념을 추구했다.

​탈물질주의의 요체는 탈권위주의적이며, 이들을 유럽에서는 신좌파라고 부른다.

​신좌파는 좌파의 아류가 아니라 우파(시장)와 좌파(국가)를 모두 배격하고 제3의 영역에서 합리적 개인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자유당이 아니라 신좌파였던 노무현은 우파 언론뿐만 아니라 구좌파 언론과도 이념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의 정체성을 찾아 주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21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왕따의 정치학]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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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사회나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교회가 택할 가장 훌륭한 전략으로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경험주의적 접근법을 추천했다.

                  -윌리엄 템플-


특히 그는 교회가 "어느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나아갈 특정 방식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나 정치와 경제 세계의 실제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전문적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이 문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이기심의 유혹에 더 저항하지 않는 한, 그가 내린 판단의 신뢰도는 무신론자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템플은 기독교의 원리나 진리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특정 상황을 경험하고 얻은 그 상황에 관한 지식은 공공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데 긴요하다는 뜻이었다.


최근, 에버릿 쿠프는 사실은 제쳐 두고 결론부터 쏟아 내는 일이 1980년대 미국 공중위생국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내내 자신을 괴롭혔다고 호소했다.


재직 초기에 쿠프는 임신 중절권을 반대한다는 확고한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가 좌파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는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주장했다가 우파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이 책이 말하는 끈질긴 우연성에 호소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학문 탐구 정신의 결여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학적 원리에 의지하면 사실은 그리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마크 놀 [그리스도와 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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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하워드 요더

출판 IVP

발매 2007.10.10

 

 

 

IVP 모던 클래식은 어느 정도 믿고 본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정치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 내겐 우선순위가 밀리는 책이었지만 중요한 사회 영역을 언제까지 배제해두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접근했던 책이다.

 


다른 어려운 서적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던 것 같다. 아래쪽에 난하주가 너무 많이 달려 있어서 본문을 읽는데 방해가 될 때도 많이 있었다.

(물론, 워낙 논쟁적인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적절한 변증과 섬세한 접근이 중요하긴 하다지만....가독성에 방해가 된 건 사실이다.)

 


 

일반 성도들에게 생소한 메노나이트 교단에 속한 요더는 칼 바르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예리한 지성,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언어와 학문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학식에 요더의 주변 사람들은 자주 놀란다고 하는데....

 

 

           

                                                (존 하워드 요더)


 

이 책의 요지는 이런 것 같다.

 


예수님은 다분히 정치적인 존재였다는 전제를 확실히 박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정치적인 색깔을 벗겨 내려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그분이 정치적으로 워낙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정치범을 향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세속 정치'에 기대어서 힘을 불려 나가거나,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되, 적절히 변형시켜서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가 추구하던 세상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 '온전한 평화'를 외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더가 추구하는 '평화주의'는 일반적인 평화주의와 동기와 철학적 근거가 판이하게 다르다것이다.

 


가령 톨스토이도 비슷한 강조를 했지만 그와 같은 인류애 때문도 아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간디처럼 그 노선이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예수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입장은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는 기존 사회 질서, 정치가들의 정치, 그 부산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참여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행동 양식에 대해서는 요더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같은 저서같이, 좀 더 실제적이고 사람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노선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더는 자신을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했던 유형론(typology)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노선을 견지하는 요더를 바라보고 나면 리처드 니버가 말했던 1번 유형이 떠오른다. 톨스토이나 터툴리아누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 문화는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속에 요더를 집어 넣고 싶어진다.

 


그러나 요더는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열정보다는 그저 대안 공동체인 교회를 더욱 회복시켜서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영향력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 같다.

 


분명 논쟁적인 책이지만,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평화가 무너져 버린 작금의 시대 가운데 다시 한번 요더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정치'.... 즉,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순종의 삶'이 회복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한번쯤 고민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수년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잦은 성추행으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비윤리적인 신학자가 전하는 '신학적 윤리학'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이론과 그 사람의 삶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주장을 전개한 주체와 주제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긴 힘든 것 같다.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행위가 없었더라면 그의 저작은 더욱 빛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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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성호

출판 짓다

발매 2016.05.12.

 

 

 

 

기독교인이라면 꼭 봐야 할 책이다.

 

 

한국 기독교가 어쩌다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는지 추적을 하다 보면

 

 

율법주의적 신앙관 등 신학의 문제점도 관련이 깊지만,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가 취해 왔던 행보들, 정치와의 부당한 결탁 등도 한국 기독교의 변질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책은 한국 기독교가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고, 이승만 정권 때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군부 독재 시절에는 부당한 정권에 아부하며 기생했던 부끄러운 이야기가 구구절절 써 있다.

 

 

부정선거에 연관된 것은 물론이요, 로마서 13장의 정치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세운 권세는 부당해도 복종해야 한다는 궤변을 설교한 적도 많았으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기독교의 절대 진리인 것 마냥, 그 잣대를 중심으로 모든 걸 재단하려 했던 부끄러운 역사....

 

 

돈과 권력이 관련된 일에는 발벗고 나섰으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았던 매정한 기독교...

 

무례하고, 오만한 전도 방식과 주변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면서 성전 건축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

 

말하기도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노골적으로 잘 담겨 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한국 근현대사와 결탁한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생소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책을 봐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메가처치 현상] 등과 맞물려서,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문제점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면 필독서로 삼아야 할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자신의 정치관도 다시 점검하게 되고 어떤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는지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치 말고, 당당하게 직면하고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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