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사람이 이삼십대가 되면 자아상, 즉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가 상당히 일관성을 띤다.

 

사십대쯤에 그때까지의 삶의 선택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서 중년의 위기를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자신의 가치들, 종교적 신조, 주요 문제들에 관한 입장, 경력과 관련한 선호 같은 것들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에 관한 탐색이 끝을 모른다.

 

타인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결여된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적 인식 역시 결여되어 있다.

 

언제든 믿고 매달릴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그녀)는 마치 폭풍 한 가운데 떠 있는 배의 갑판에서 비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강타당하는 승객과 같다.

 

맹렬한 폭풍우 한가운데에서 그는 붙잡을 무언가를 찾아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명조끼를 입고 돛대에 스스로를 묶은 다른 승객들 뿐이다. 또 다른 집채만 한 파도가 갑판을 덮치자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이 매달린 돛대를 함께 잡는다.

 

하지만 구명조끼는 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크기이고, 돛대도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갈라지기 시작한다.

 

 

 

로버트 윌딩어는 만성적인 공허함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인 정체성 혼미(identity diffusion)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체성 혼미란,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증상으로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 뿌리 깊으며 종종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다른 환경 속이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일관성 있게 경험하는데,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런 자기의 연속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대신,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들은 통합시킬 수 없을만큼 서로 모순되는 자기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흔히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는 듯하다거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거나,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의 내적 공허함과 혼미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존재할지를 결정하는 데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에 의지하게 된다.

 

누군가가 옆에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 못하거나, 아예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조차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 같은 환자들이 왜 혼자 있는 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종종 충동적으로까지 행동하는지, 그들이 왜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나 한없는 권태, 그리고 해리를 경험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경계인들은 자신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든간에 항상 모자람이 있다고 느낀다.

 

앞에서 분열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는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근거로 삼는 것은 상대방과의 가장 최근 만남이라고 했다.

 

그들은 관계라는 것을 여러 요소들이 공존하는 통합체로 보지 못한다.

 

관계란 언제나 "그런데 당신은 최근 나를 위해 뭘 했지?" 라는 질문일 뿐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그들의 자존감은 자신의 최근 업적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남들을 평가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가혹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마음에 드는 경우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 중 일부는 하는 일에서 눈부신 성공을 이루고, 직장과 공동체, 혹은 가정에서 업적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자기가 마치 대사를 외우는 배우 같다고 느낀다.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이 타인의 무력한 희생자라고 여긴다.

 

그의 행동이 특정한 상황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경우에도 말이다.

 

이것 역시 그들이 지닌 정체성 딜레마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집단상담 시간 중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어느 남자가 불평하기를, 집주인이 자신을 쫓아냈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한 20분쯤 그에게 동정의 말을 건네다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집주인의 주차 공간에 자신의 차를 세우는 등 아파트의 규칙을 너무 많이 어겨서 쫓겨난 것이었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한 여자는 상습적으로 남편을 구타했고, 수도 없이 바람을 피웠으며, 남편 옷가방 안에 마약을 숨겨 놓은 뒤 경찰에 신고하여 남편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여자는 끝내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했다. 그 후 남편은 직장에서 만난 여자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경계인 여성은 친구에게 자신의 이혼을 설명할 때 남편이 직장 동료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다.

 

두 경계인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자신이 한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 중 일부가 피해자 역할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동정적인 관심을 유발하고, 정체성을 제공하며,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학대 경험이 있는 경계인들은 그러한 경험의 각본을 그대로 반복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잔인한 행동을 기대하도록 오랫동안 조건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계속해서 피해자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였을 때 그들은 학대하는 사람의 행동이 자기 탓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어떤 점 때문에 사람들이 차갑고 무자비하게 행동한다고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을 때 타인에게서 최악의 상황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의 정상적인 행동을 잔인하거나 자신을 버리려는 행동으로 해석해 강한 분노나 절망, 혹은 수치심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배경을 모르는 주변 사람에게는 그들의 행동이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역할은 바로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는 역할이다.

 

이런 긍정적 역할은 경계인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하고 통제감을 강화시켜 주며 공허함을 덜 느끼도록 해준다.

 

[경계인의 고백]

 

내게는 함께 있는 사람의 특징들을 내 것으로 취하는 카멜레온 같은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내가 어떤 특정한 성격이 될 때, 나는 마치 망토를 입는 것처럼 진정한 나 자신 위에 그 성격을 덧입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일을 즐기는 교활한 책략꾼이 아니다. 그 과정은 사실상 의식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실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위조품 같이 말이다. 만약 나에게 이런 과정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이 있다면, 위협을 느낄 때마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잡았다, 네가 술래야]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