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한국 기독교 흑역사에 나온 부끄럽지만 중요한 한국의 근현대사/교회사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해 봅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맙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일본을 적극 지지한 당시의 기독교

 

A: 기독교가 제도화되면 정부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겠는걸?

 

J: 그렇지. 국가 권력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거부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오직 하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시적인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였지. 그들은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거야. 부당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나서도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토대가 생긴 거지. “난 이 교회를 지켜야 했어!!” 라고 말하면서…..그들이 말하는 교회제도적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 ‘눈에 보이는 교회 재산등에 불과했을 거고….

 

 

 

A: 그동안 일제 강점기 때 기독교가 받았던 탄압만 들어왔어. 그들은 목숨이 위협 당하고, 교회 전체가 말살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말했고, 어쩔 수 없이 지배계층에게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던데

 

J: 물론, 흉흉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큰 박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황을 놓고 보면 한국 기독교가 일본에 협력할 때는 자발적인 측면도 분명 있었어. 그들이 자발적으로 부정한 세력과 결탁하면서 기독교의 부패가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A: 대표적인 예가 있을까?

 

J: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신사참배이지.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하는데 이걸 결의하기 이전부터 23개의 노회 중 17개 노회는 독자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하고 있었어. 1920년도만 해도 장로교는 일제에 타협하지 않아서 감리교 등이 받던 특혜를 가장 늦게 받았었는데 1930년대 재단법인 혜택을 맛 보기 시작하더니 제도적 기독교가 되면서 결국…. 이런 타협을 하기에 이르지

 

 

 

A: 타율에 의한 신사참배였다고 주장하고 싶을텐데, 더욱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면 그들의 자율을 언급해야 한다는 거지?

 

J: . 장로교는 1954년 안동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취소 사건을 일으켜. 이는 1938 27회 총회에서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결정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범한 것이므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거였지.

 

 

 

A: 15년 전에 있었던 신사참배 결의를 15년이 지나고 나서 취소한다는 게 말이 되나?

 

J: 말이 안되지….그런데 이 결의안은 겉으로 보기에도 웃기지만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어.

 

 

 

 

 

J: 먼저 신사참배 결의가 타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공식화하면서 자신의 내부에는 책임이 없고 외부적인 문제만 있었다고 주장한 거였지. 자신들이 일본에 협력하고, 타협했던 부분은 쏙 빼놓고, 그냥 일본의 강압으로 다 이뤄진 일이라면서 자신들의 도덕성, 윤리적, 종교적 책임은 면제를 받은 격이지. 그 다음 이 신사참배 결의 취소 사건은 자신들이 일본에 협력했던 행위가 신사참배 하나만 있는 것처럼 교묘한 말장난이 들어 있었어. 

 

그 다음 일본에 협력한 행위가 마치 신사참배만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결의 취소안이었는데, 신사참배 이외에도 신도침례,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 다양한 신도의식을 했었고 여러가지 부일협력 행위가 많았다는 점이 가려지는 문제가 있었어. 신사참배가 종교적 상징성을 띈다는 면에서 교회 내부의 체제 유지에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그 당시 일제의 침략 전쟁에 교회가 적극적인 도움을 줬던 부분은 전쟁 지지’, ‘평화 파괴’ , ‘정의의 소멸’, ‘폭력의 미화등의 관점에서 볼 때, 신사참배 그 이상으로 중요한 기독교의 잘못이라고 볼 수도 있지.

 

 

 

 

 

1937.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에 대해서 <기독교보> 1937 8.17 사설을 통해 이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했고, 10.21 사설은 [로마서13]을 인용하며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지. 그리고 장로교회는 중일전쟁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8 7.7 새벽에 황실과 황군을 위해 기도하고 국가의식을 행하고 설교를 통해 국민의 의무에 대해 가르칠 것을 지시했어. 또한 장로교회는 전승축하회 86, 무운장구기도회 2042회를 실시하고 국방헌금 454,539원을 거두기도 했었어.

 

 

 

전시 체제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복종의 신학, 지배의 신학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DNA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기독교가 취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어. 권력과 결탁해서 이득을 취하고, 재미를 보는 기독교….. 이 금단의 선악과를 맛 본 게 문제였지.

 

 

 

 

 

A: 신사참배 뿐만 아니라 침략전쟁을 지원했던 기독교의 과오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 줄래?

 

 

 

J: 일단 초기 기독교는 평화주의를 지향했었으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A.D 380)가 되면서 기독교의 평화주의노선이 전쟁 옹호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음을 알아야 해. 결국 기독교가 제도화되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잘 시사해 주지. 그러다 보니 1920~1930년대 한국 기독교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도왔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어.

 

 

 

A: 1937 7.7 에 중일전쟁이 있었지? 그 때 한국 기독교의 입장은 어땠던 거야?

 

J: 그 당시 기독교는 시국선전’, ‘후방후원을 중심으로 전쟁에 협력했어. 여기서 시국선전은 황국신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타도할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교육이었지. 그리고 후방후원은 전쟁 물자 동원과 병사 위문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국방헌금을 모금하거나 유기그릇 헌납도 열심히 했지.

 

 

 

A: 유기그릇은 왜 모은 거지?

 

J: 이게 총알을 만드는데 아주 좋은 재료였던 거지. 병사위문의 경우는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돈을 모금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어.

 

 

 

A: 그냥 살짝 도와준 정도인 거 아니야?. 그 규모가 좀 있는 편이었나?

 

J: 일단 1940년 제 29회 장로교회 총회 보고에 의하면 1937~1939년까지 3년에 걸쳐 전승축하회 604, 무운장구기도회 8953, 시국강연 1355, 국방헌금 1580,424, 휼병금 172,646, 유기 헌납 308, 위문 181, 위문대 1580개라는 실적을 냈다고 해. 열심히 전쟁협력 했다는 걸 알 수 있지.

 

 

 

A: 개신교만 일본의 전쟁 협력을 지지한 건가?

 

J: 그렇진 않았어. 천주교도 그 당시 전쟁 협력을 했는데 천주교는 기도회는 55452회 개최하여 장로교회보다 6배나 많이 협력을 했어. 그러나 국방헌금 금액은 천주교회보다 장로교회가 436배나 많았어. 위문금도 천주교보다 장로교회가 약 185배 많았고. 물론 그 당시 신자 주가 장로교회가 천주교보다 2배 더 많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 같아.

 

 

 

A: 중일 전쟁 이외에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하면서 태평양 전쟁도 일으켰었지?

 

J: 1941 12 7일 발발했는데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태평양 전쟁의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

 

 

 

A: …..

 

J: 가령 비행기 헌납 운동이라고 해서 일본 본토에서 시작된 운동이 조선, 만주까지 파급된 경우도 있었는데 친일자본가들 다음으로 종교계가 이 운동에 열심을 다했어.

장로교회는 두 차례에 걸쳐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는데 1941 814일 장로교회는 금속품 공출과 폐품 회수, 그리고 애국기 헌납을 교인들이 전시체제의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할 사항임을 강조하였어.  [전시체제실천성명서], [기독교 신문], 1941 815일자.

 

장로교회의 2차 비행기 헌납 운동은 1944년 초반에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장로교회는 1.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 2. 조선예수교장로회로 분열된 상태였고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행위, 전쟁협력을 수행해. 그러다가 1944 1 12일 김진수 목사가 노회장을 맡고 있는 평북노회는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제 2차 비행기 헌납운동을 일으켜.

 

 

 

A: 전쟁 그리고 평화 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식민지 시대의 정의를 향한 목마름은 어디 가고, 정치 권력에게 잘 보이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빌붙기가 시작된 건가?

 

J: 분명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었어. 그들은 열심히 모금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1942 2 10일 장로교회는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정의 마련이 가능한 15만원을 일제에 헌납할 수 있었어. 이 금액은 농가 1년 수입의 160배 이상이나 되는 거액이었다고 해.

 

송규진 외, [통계로 본 한국 근현대사], 아연2004, 184

 

 

 

A: 비행기도 헌납하고 다른 건 뭐 없었어?

 

J: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비행기 뿐만 아니라 교회종도 전쟁 물자 보급을 위해 일본에 바쳤어. 교회종 헌납 운동은 전쟁 물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제가 시행한 금속회수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결과 1540개의 교회종이 무기, 총알 제작을 위한 재료가 되었어.

 

 

 

A: 이렇게 일본의 전쟁에 협력을 한 사건이, 현대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을까?

 

J: 일단,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부끄러운 과거사가 곪고 곪아서 이 지경이 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일본의 침략전쟁을 열심히 돕다 보니 국가주의 논리, 군사주의적 사고방식이 내면화 되면서 상명하달식 목표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군대식 교회 문화가 한층 강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이를 현대 기독교 속에 적용해 보면, 목사님의 말씀을 마치 군대의 엄명인 것처럼 여기고 거부하지 못하는 문화를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목사님이 성추행이라던지 부당한 행동을 요구하지만 이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교회 내에 이런 군대식 문화가 정착하면서 발생한 측면도 없진 않을 것 같아.

 

 

 

A: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게 기독교는 성경을 보고, 명확한 기준과 지침이 있는 종교인데 어떻게 무자비한 침략 전쟁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거지?

 

J: 성경을 오용해서 전쟁을 옹호한 사례들이 몇 가지 있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기독교사회운동 단체인 YMCA의 총무 신흥우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쳐.

 

 

 

우리의 위대한 구주 예수도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국가는 대일본제국이다. 그리고 우리 조선기독교인도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금의 우리는 종교인이고 조선인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천황폐하의 충성한 적자로서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기독교도에게 부여된 신의 사명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한다.”

 

신흥우 [ 조선기독교도의 애국적 사명], [동양지광], 1939 2, 74

 

 

 

 

 

여기서 신흥우는 [마태복음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해석을 전쟁협력의 논리의 근거로 삼는데 이건 정말 황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지. ‘그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인데, 이게 일본의 제국주의로 대체된 격이야.

 

 

 

감리교회의 심명섭 목사도 [누가복음534~38]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유명한 부분이 들어있어. 그의 논리는 예수가 유대교를 혁신하여 기독교를 만들었듯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도 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어.

 

심명섭, [기독교의 혁신], [기독교 신문], 1942 429일자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춰서 해석하면 얼마나 말도 안되는 합리화가 가능한지 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들이지.

 

 

 

 

 

그 이외에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무인 김종대 목사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영토 내에서 전도를 하기 위해 유대인의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로마인의 이름인 바울로 개명했듯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리고 바울의 전도는 로마가 지중해를 점령한 상태에서 발달된 교통수단의 혜택을 본 것이라고 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려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했지. 마지막은 더 가관인데 바울이 전도할 때 모국어가 아닌 헬라어를 사용했으니 우리도 일본어를 적극적으로 배워 전도의 기회를 삼자고 말했지.

 

 

 

A: 사도 바울 서사를 이용해서 창씨 개명, 대동아공영권, 일본어 사용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의 내선일체 기조를 적극 지지한 셈이로구나.

 

J: 요즘 유행하는 사이비 종교들의 해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졸렬한 해석들이지.

 

 

 

A: 기독교가 신사참배 허용하고 전쟁에 협력하면서 국가주의 논리, 군사주의적 사고방식을 지금까지 가지고 왔다는 점을 잘 알겠어. 그리고 또 어떤 부분에서 한국 기독교에 문제의 씨앗을 심게 된걸까?

 

J: 한국 기독교는 전쟁을 지지하고 침략을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말씀을 말도 안되게 끼워 맞췄지. 그러한 폭력의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고,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한 진심어린 회개와 각성보다는 이를 감추려 들거나 변명하거나 미화시키기 급급하다 보니 평화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두고두고 장애물이 되기 시작했어. 결국 한국 기독교의 친일협력 문제의 가장 큰 문제는 평화의 공동체로 나아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이지.

 

 

 

A: 그 흐름이 현대 극우 기독교 안에도 잘 보이는 것 같아. ‘공포심을 조장하고, ‘폭력과 증오의 신학을 역설하는 그들에게 평화’, ‘공존’, ‘대화등의 단어들은 일종의 금기어던데

 

 

 

J: 그렇지. 또한 한국 기독교가 전쟁협력을 하다 보니 구약성서에 대한 경시 풍조가 내면화되었어. 식민지 시절 한국 기독교는 구약성서에 담긴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을 자신에게 대입해서 바라봤어. 설교 시간에는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등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했던 지도자들을 중점적으로 언급했고, 성탄절에는 모세의 출애굽 테마가 교회연극의 주요 소재로 등장할 정도였지.

 

케네스 M.. 웰스 [새 하나님 새 민족], 김인수 역,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7, 143, 154

 

 

 

따라서 일본은 구약성서가 식민지배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 유대인의 저항의식을 조선인들에게 넣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러다 보니 일본은 구약성서말살정책을 펼쳐. 이에 감리교, 장로교 등도 타협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은 설교 시간에 구약성서, 요한계시록은 사용하지 않고 4복음서만 사용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해.

 

 

 

A: ?... 이런 모양새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아…. 나치에 적극 협력했던 독일 교회도 구약을 싫어하지 않았나?

 

J: 맞아. 독일교회가 구약성서를 폐기하자고 주장했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교회의 인종적 혐오 때문이었어. 순수한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구약성서는 유대인의 역사책에 불과했으니 인정할 수가 없었지.

 

 

 

일본은 구약의 저항적 메시지를 제거하여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가 자신들의 지배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게 세뇌시키고 싶어 했어. 이러한 일본의 구약성서말살정책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구약성서 이해는 성서의 저항적 메시지를 경시하는 태도를 내면화하기에 이르지.

 

 

 

A: 그러다 보면 현실에서 불의한 일이 생기고, 정의가 침해당할 때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잃게 되지 않나?

 

J: .. 지금 한국 기독교가 처한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 ‘정의를 잃어버린 기독교

 

 

 

 

 

A: 정의가 흐려진 기독교문제는 정의뿐만 아니라 평화를 향한 정신도 흐려졌다는 점 같은데

 

J: 함석헌 선생님도 이때껏 남의 나라의 침략 속에 살면서 평화운동 하나 일으킨 것이 없다라며 한국 기독교를 비판한 적이 있었어.

 

함석헌, [한국기독교 무엇을 하려는가], [씨알의 소리], 1971 8월호, 33

 

 

 

한국 기독교 주류는 중일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 한국전쟁(1950), 베트남 전쟁(1964), 이라크 전쟁(2003)에서 전쟁을 지지하기에 바빴고, 평화에 대한 깊은 성찰은 거의 없었어.

 

이런 부분들이 바로 일제의 군사동원에 한국 기독교가 협력하면서 국가주의, 군사주의가 내면화된 사례들이 아닐까 싶어.

 

 

 

물론 이에 반하고 참 기독교의 정신에 대해 고민했던 훌륭한 분들도 있었어. 1938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김만식 전도사와 김영환은 전쟁은 죄악이라 주장하며 중일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전하기를 거부하기도 했었어.

 

또한 1941년에 발생한 만국부인기도회 사건도 태평양전쟁 시기 한국 기독교가 평화를 고백한 몇 안되는 귀한 사례였어. 당시 일본은 반전 분위기를 조성한다며 이 만국부인기도회를 반전모략사건으로 규정하고 탄압했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한국 기독교 흑역사] 책의 내용을 참고해서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 글입니다. 한국 근현

대사와 한국의 교회사가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본질적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이와 같은 내용들은 잘 숙지해 두시길 추천 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과 미국 선교사의 결탁

 

A: J. 한국 기독교 요즘 왜 이런데?

 

J: 뭐가?

 

 

 

A: 도덕적으로도 엉망이라는 기사가 많이 나오고, 극우 정치 세력들과 자주 손을 잡는 것 같더라?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가 원래 이런 거야?

 

J: 도덕적인 부분의 타락은 분명 심각한 문제인 것 같아. 물론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이 있지만 이들의 소식은 언론이나 대중매체에 잘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지. 대형교회처럼 이슈화 되기 좋고, 권력과 잘 결탁되어 있는 무리들 속에서 문제들이 잘 불거지는 것 같아. 기독교가 극우 정치 세력과 결탁해 가는 과정은 한국의 교회사를 자세히 들여다 봐야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A: 한국의 교회사?...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J: 일단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이 보여준 모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구나.

 

 

 

A: 그 분들 덕분에 한국이 복음화 되고, 기독교가 전파된 거 아니야?

 

J: 물론, 그렇지. 좋은 일을 참 많이 해주고 가긴 했어. 그런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두운 측면들이 있었어. 그 부분을 나눠 볼께.

 

 

 

J: 1910 년을 전후로 한국 기독교는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지. 장로교회는 1907년 최초의 노회(지역조직) 1912년 총회(전국조직)을 발족해. , 북 감리교회는 1910년을 전후로 별도의 연회조직을 만들고 말이야. 그러다가 1930년도에 합동을 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탄생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는 하나의 사회조직이 되.

 

A: 꽤나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는 태동했었구나.

 

 

 

J. 그렇지. 그런데 식민지 시절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조치를 취해. 예를 들어 선교사의 명의로 되어 있는 교회 부지, 전답, 주택 등의 소유권을 인정해 줄 뿐만 아니라 면세 특권도 부여했지.

 

 

 

A: 왜 일본이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그렇게 잘 해줬지??

 

J: 이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대한 국제 여론이 나아지기를 기대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계산이 깔려 있던 거였어.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잘해주면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더 개선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A: 그런 뒷 이야기는 있는 줄은 몰랐는데…..

 

J: 물론 1910년 일본의 조선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했었어.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해 선교의 자유도 제한하고 미션스쿨의 종교교육도 금지했지.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조합교회를 식민지 조선에 침투시키는 간사한 방법도 써.

 

 

 

A: 그렇지. 교회와 선교사를 탄압하는 일본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J: . 그런데 1919 3.1 운동이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정책을 온건하게 바꾸기 시작해.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해 진 것이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도 잘해주게 된 거야.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미국 선교사였으니까….

 

 

 

A: 어떤 방식으로 선교사들에게 잘 해 준거야?

 

J: 그들의 선교사 회유정책의 핵심은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를 보수화하여 식민지배의 한 축으로 삼는 것이였어. 그걸 가능케 했던 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이었지.

 

 

 

A: 이미 1900년도 초반부터 기독교는 보수화 되었던 거구나.

 

J: 그런 셈이지. 국가 정부와 결탁해서 이득을 취하고 재미를 보는 모양새가 그 당시에도 어느 정도 있었어.

 

 

 

 

J: 구체적으로는 일본은 포교규칙을 개정해서 교회로 하여금 자유로운 선교를 가능케 하면서 교회의 숫자는 크게 증가하게 되지. 그리고 1915년 조선총독부가 교육과 종교의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금지했던 미션스쿨의 종교 교육도 나중에는 허가를 내줘.

 

 

 

A: 미션스쿨이 허가를 받은 과정에서도 일본의 도움이 있었구나.

 

J: 그러다 보니 미션스쿨은 지정학교로 인가된 이후에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가정을 따르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들도 지정학교로 인가 받기 위해 총독부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입장을 지니게 되어 버렸지. 경신학교, 계성학교, 신흥학교, 신성학교 등의 미션스쿨들이 지정학교로 인가된 후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랐던 아픈 기억이 있어.

 

 

 

A: 미션스쿨이 그렇게 중요한가?

 

J: . 식민지 시기 장로교회의 재정 총회록을 보면 미션스쿨의 유지와 운영에 가장 큰 몫이 할당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어. 그러다 보니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장로교회는 미션스쿨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했던 부분이 있었지.

 

 

 

A: 일제에게 타협한 미션스쿨은 어땠을까?

 

J: 그러다 보니 나중에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침략 전쟁을 벌였을 때 미션스쿨들은 이를 지지하는 부끄러운 교육기관이 되어 버렸지.

 

 

 

A: 결국 미션스쿨을 세워서 바른 기독교 정신을 함양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고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과정과 그 수단과 그 중간 과정은 어두운 타협이 있었던 건가?

 

J: 말하자면, 그런 부분이 있었지.

 

 

 

J: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선교사 회유정책 중 기독교단체의 법인설립을 허용해 준 부분이 아주 중요했어. 이게 1920년도에 있었던 일인데 그 이전에는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재산을 개인 명의로만 등기해야 했어서 안정적인 재산 보호가 어려웠어.

 

A: 그러면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생기면 교회의 권리가 잘 보장되지 않았겠구나.

 

 

 

J: 그렇지. 그러다가 1919 3.1 운동이 있고 나서 선교사들은 교회 및 선교사 명의로 재산을 등기할 수 있는 법인 설립을 요청하였고, 총독부는 1924년에 이를 수용했어. 이를 계기로 기독교 단체는 재산권 행사의 주체가 되어 법의 보호를 받으며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되었지.

 

 

 

 

 

A: 교회의 재산이 이 때부터 축적될 수 있는 구조가 된건가?

 

J: 그런 측면도 있었지. 그 당시 세금 감면을 받았던 기록도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이런 여러가지 혜택을 받고 나서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거야. 당시 한 잡지에서는 선교사들이 그 아래에 있는 신도에게 향하여 정치운동과 종교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권세자에게 굴복하라고 일러주는 모습을 꼬집을 정도였지.

 

 

 

J: 이렇게 선교사들이 일본을 돕는 형국이 되면서 식민지 조선 백성들은 반감을 키우게 된 측면도 있어.

 

 

 

J: 그리고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기득권은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기 시작해. 재산목록과 사업상황, 지출과 수입 등 재산상황과 관련된 정보들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는 식으로 말이지. 장로교회도 지속적으로 조선 총독부에 의존을 했는데 기독교인 공동묘지 설치를 위해 총독부와 교섭하기도 하고, 총회 참석자의 경비 절감을 위해 철도 할인권을 총독부에 요구하기도 해.

 

A: 서로 이익을 주고 받기 시작하니까 감시하고 의존하고 뭔가 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는 걸?

 

 

 

J: 그러게. 이러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제도적 기독교화되기 시작해. 제도화 된 기독교는 국가권력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지니고 조직의 생존과 확장에만 큰 관심을 두기 시작하지.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속성과 의미에 대한 고민은 약해지고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드러나는 교회 건물, 눈에 보이는 교회 재산 등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기 시작한 거……. 소위 메가처치 현상도 이렇게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발생한 측면이 있는 것 같고….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