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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 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산업화 세력이 종북주의이념공세를 벌이고, 민주화세력이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에 빨갱이 마녀사냥의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막판에 허정과 송요찬 등 야권 후보들이 사퇴해 윤보선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는 민주화 이후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 반북,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부는 호남을 중심으로 흉년이 든 농촌에 원조 밀가루를 대량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가동하고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오로지 부정선거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남에서 압승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왔던 선거구에서도 이겼다.

도시에서 전반적으로 지기는 했지만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시민계층과 진보적 청년층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만약 내가 그 때 젊은 유권자였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쿠데타 주모자를 뽑기도 싫었겠지만 윤보선 후보도 지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경제적 자주, 자립이라는 공약을 미국원조를 거부하는 반미주의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편들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후보는 미국 원조자금이 52% 를 차지한 6000억 환 규모의 1961년도 추가경정예산을 경제적 대미예속이라고 비판했다. 1959년 시설부문 미국 원조 2 800만 달러 가운데 공업화를 위한 시설의 비중이 2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원조 총액의 30%를 차지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가경제가 몰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막대한 기업부채 규모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민족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모두 타당한 현실인식이었다.

 

 

 

-김종필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 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한일합병조약을 포함해 1910년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제강점기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배상과 징용 조선인의 미지급 임금 등 대일청구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 해역 50~60해리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요구를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합법적이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강점기 수탈에 대한 배상을 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떠난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고, 한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 들어 미국이 새로운 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한국을 묶으려 했다. 장면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성과를 토대로 1961년 말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한 끝에 1962년 가을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이 합의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1964 3월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5.16 이후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였다. 집회시위는 전국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정부투쟁이라기 보다는 당당한 대일외교를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1964 3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을 면담했고 다음 날 전국 대학생 대표들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학생 대표들을 대통령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마침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수천만 달러의 창당자금을 제공한 의혹이 불거졌다.

정권 실세들이 국유지를 부정 불하해 거액을 챙긴 사건도 터졌다. 여기에다 중앙정보부가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학생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이 부패한 친일세력으로 보였다. 5 20일 서울대 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레식이라는 규탄집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이념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공격했다.

 

 

 

-6.3 항쟁, 인혁당 사건-

 

그러자 정부는 대화를 포기하고 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거리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라고 판사를 협박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며 중앙정보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 사태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 8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 변란을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인혁당 사건>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 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 6 22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 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약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의 비준 절차가 진행된 여름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정부는 대학교를 미리 폐쇄하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비판적 언론인을 테러, 납치, 폭행하면서 언론보도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다시 군 병력을 투입했다. 9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학생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6.3투쟁은 1.49 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와 언론통제, 대학과 재야인사에 대한 감시체계를 대폭 강화했지만 학생운동과 야당, 재야 또한 투쟁 역량을 비축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공병단 파견을 시작해, 1965년 수송단과 공병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거쳐 1966년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0만 명 이상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다.

주둔 병력이 최대 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한미 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가 3000명의 병력을 비전투 임무를 주어 이라크에 파병한 2004년에는 전국적인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베트남 파병은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반대여론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고, 세계 평화와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6 9 [경향신문]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핵심은 일본 미쓰이물산이 울산 한국 비료 공장건설사업과 관련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과 삼성 관계자들은 현금 대신 대량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온 다음 이것을 처분해 정치자금과 공장 건설비, 한국비료 운영비로 쓰려고 모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설탕이 아니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과자와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자랐다. 정경유착과 밀수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이창희 씨가 총대를 메고 대신 구속되었다.

야당은 밀수 재벌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효창운동장에서 야당이 연 규탄대회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한 장준하 선생을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대학가는 정부와 재벌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집회로 끓어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리턴매치를 벌인 1967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4년 전보다 훨씬 큰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부와 공화당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전국을 돌면서 개발공약을 쏟아냈으며 일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온갖 빌미를 잡아 야당 후보를 구속하고 선거운동원을 구금했다. 공화당 조직은 막걸리, 고무신, , 밀가루, 현금을 집집마다 돌렸다.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고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 넣은 사례도 숱하게 드러났다. 도처에서 야당 참관인을 폭행해 내쫓았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후보 표를 무더기 무효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74% 130석을 차지했다.

 

 

 

-동백림 사건-

 

부정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규탄집회와 거리시위가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별로 휴업과 조기방학 조처를 내렸지만 시위는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그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 세칭 동백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해 북한을 오갔던 임석진 박사가 조선일보 독일특파원 이기양 기자 실종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신의 행위를 고백한 데서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을 한국으로 유인하거나 대사관에 모은 후 강제 압송했다.

<동백림사건>

1967 78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정하용, 황성모, 최창진 등 대학교수와 정규명 등 유럽 유학생, 장덕상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무려 66명을 검찰에 송치하고 23명에게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를 씌웠다. 신민당 6.8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의 장준화 의원과 부완혁 집행위원도 엮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1970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 반면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가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식어버렸고 선거무효를 주장하면서 장외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원내로 복귀했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 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 1.21 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 20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 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작업 그리고 촛불집회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2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먼저 내부의 개헌반대론자들을 회유, 고립시켜 공화당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3선 개헌안을 채택하게 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위,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신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앙정보부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일부 야당의원들의 3선 개헌 지지성명을 이끌어냈고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대학 문을 열지 않았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긴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촛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 9 14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대학이 다시 시위 열풍에 휩싸였고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0 17일 개헌 국민투표에는 77.1 퍼센트의 유권자가 참여했고 65.1 퍼센트가 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리고 김대중의 등장-

 

1971 4 27일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 20,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 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김대중 후보는 미, , ,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 18 100만 명의 청주우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검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김지하 시인이었다. 정부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 [오적]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 [o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 [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를 협박, 회유해 보도록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예비 음모사건>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성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7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관계자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10월 유신 체제 등장 (그리고 김기춘)-

 

그는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개헌안을 공고했다. 정부는 11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 %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것은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에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 , 동에서 하나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되었다.

 

12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 공약 발표도 하지 않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8년에는 똑 같은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다.

따라서 그날 이후 민주화운동은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힘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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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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