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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 인생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던 기간은 겨우 아홉 달이지만 그는 내가 살아갈 나라의 토대를 만들어두고 떠났다.

그 토대는 친미주의와 반공주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분단국가라는 것이다. 55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이봉창 의사를 높이 숭앙한다.

미국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조국 광복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고 본다. 게다가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벌을 만들고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으며 12년 장기집권을 한 끝에 독재와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시민을 살상한 죄로 쫓겨났다.

하지만 인간 이승만이 시종일관 악의 화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한때는 멋진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남보다 먼저 읽는 안목을 가졌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장악하는 배짱이 있었다. 개인으로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던 청년 이승만은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언론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만민공동회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구한말의 이승만은 빛나는 열정과 애국심을 가진 청년지식인이었다. 그는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덕분에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될 미국 유학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역사학, 국제법,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 다시 돌아와 한동안 YMCA 전국조직을 구축하는 등 교육운동과 선교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속대상이 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해 교민청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는 외교활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찾는 방안을 모색했으며 무장투쟁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34년에는 일찍이 혼인했던 박승선과 이혼하고 무려 스물다섯 살 젊은 프란체스카 돈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1900~1992)와 결혼했으며 1939년에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로 군림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모대접을 받았다. 당시 국민들은 아직 국제감각이 부족해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아무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 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는데,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04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 정가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41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 조선이 독립할 것임을 예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하라고 미국 정부에 청원하는 한편, 내분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일본군에 쫓겨 충칭으로 피난해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로운 망명객이 아닌 임시정부 지도자로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을 경우 조선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의 행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청원을 거절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행정부가 태평양 전쟁 지원을 받으려고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밀약했다는 주장을 해서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싱턴 조야의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을 접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자 맥아더 장군은 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안했다.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범국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분할점령을 모면했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과 국토가 두 동강 났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1945 12 28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장관들은 조선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중국을 포함해 네 나라가 신탁통치를 하자고 합의했다.

 

이번에도 우리 민족의 뜻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 박사는 즉각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신탁통치에 찬성한 조선공산당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신탁통치와 조선의 완전독립 문제를 다루던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했으며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다음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쫓아내 북조선을 차지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는 분단을 기정 사실로 만들고 남한 단독정부의 권력을 차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 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통해 좌우동거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투철한 반공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을 수는 있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멀리 있지만 소련은 국경을 맞댄 나라였고,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끈질긴 투쟁을 벌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조동조합과 농민단체를 비롯해 이념적으로 잘 무장한 전국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 정치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이 신탁통치체제에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 5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UN 38선 이남지역의 선거가 자유로운 가운데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의 조국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다른 국가가 탄생했다. 1948 8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 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퍼센트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과 그리고 반민특위 이슈]

 

국회 본청 중앙 로텐더 홀을 지나 의원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1999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국회의장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상을 세운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았으니 독재를 한 잘못은 잘못대로 비판하되 그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승만 시대 대한민국이 정통성 없는 국가였다고 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는 당신, 북으로 가라!” 그렇게 소리 지른다.

그럴 일이 아니다. 현대사 5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처음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크게 자랑해도 좋을 일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낸다는 말인가.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정통성을 일부 지니고 출발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정상적인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북한 체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에 살러 가지고 않을 것이다. 통일운동을 하러 북한에 간 사람들 역시 북한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인간적, 정치적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워야 할 국가원수로서 경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극단적인 사례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이다. 국제 축구연맹 (FIFA) 이 본선 티켓 16장 가운데 딱 한 장을 아시아에 배정했고 한국과 일본만 참가신청을 했다. 아직 외교관계가 없어서 선수들이 상대방 국가에 들어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몰수패를 당할 위기에 봉착한 축구계 인사들이 홈경기 허가를 청원하다가 나중에는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할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했다. 대표팀 이유형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출국허가를 받으면서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열린 두 경기에서 한국팀은 1 1무를 거두어 본선에 나갔다.

마흔여덟 시간 동안 비행기를 몇 차례 갈아타고 경기 전날 심야에 겨우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대표선수들은 헝가리에 아홉 골, 터키에 일곱 골을 먹고 탈락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스위스 시민들이 보낸 위문품과 위로편지가 만신창이가 된 대표팀 숙소로 쇄도했다.

 

그런데 그랬던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려고 여러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고문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특고형사의 대표선수였던 노덕술을 구하려고 국회를 짓밟은 사례 하나로 충분하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일제 군대, 경찰, 행정기관의 고위직을 지냈거나, 지위가 높지 않아도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악명이 높았거나, 관직은 없었지만 유명 지식인으로서 일본 왕과 조선총독부를 찬양하면서 징용, 징병과 근로정신대 등에 지원하라고 선동했거나 일제의 침략전쟁 군비조달에 큰돈을 기부한 기업인들이 용의자였다.

반민특위는 동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지위와 활동내용을 기준으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에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장선 젋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분개한 국회는 정부가 체포한 국회의원들을 석방하라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그러자 군중 수백 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와 반민특위의 공산당을 숙청하라고 외쳤다. 반민특위는 이 난동사건을 일으킨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친일파는 곧바로 역습을 펼쳤다.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이 서울 중부경찰서 병력을 데리고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장 오세윤을 체포하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의 권총을 빼앗았다. 강원도와 충청북도 등 다른 지역 특경대원들도 지역 경찰 병력에 무장을 해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 경찰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 9000명은 전원 사표를 내겠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국회는 반민특위를 원상복구하고 특경대를 습격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특경대 습격을 지시했다고 한 데 이어, 반민특위활동이 민심을 해치고 있어서 특경대를 해산하겠다는 담화문을 낸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항일무장투쟁을 해서 자기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 것처럼 선전했고, 가랑잎으로 나룻배를 짓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거나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어쨌든 사실이었다.

북한 권력자들은 친일행위자들이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된 사실을 자기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소재로 삼았다.

남조선은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은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라면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는 것도 정당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2013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주이념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반민특위 해산 이후 65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2005 12월 국회가 친일재산환수법을 제정했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이 민족을 배신해서 얻은 토지를 되찾겠다는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3년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자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동상 건립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처벌을 모면한 친일반민족행위 용의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다음 자연사의 축복을 받았다. 결국 친일행위자에 대한 응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부와 국회, 권력기관은 물론이요, 경제계와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 뿐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과 함께 그 일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친일문학론]으로 지식인 사회의 일제 잔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친일인명사전] 발간 계획을 세웠던 임종국 선생 빈소에서 설립 발의가 이루어졌다.

1989 11월의 일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훼손소송과 발행금지가처분소송, 심각한 재정난을 모두 이겨내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까지 강만길, 백낙청, 윤경로, 염무웅, 최병모 등 200여 명의 역사학자와 지식인, 변호사, 종교인들이 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1000여 명의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10만명의 국민모금 참가자들의 돈을 모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반민특위가 적용했던 것과 거의 같은 기준에 따라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의 이름과 직위, 활동 내용을 수록했다.

 

 

 

 

 

[김일성]

 

1912년 평양 근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고 어머니 강반석은 모태 기독교인이었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만주군벌 부대, 조선인 유격대가 함께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조선 민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37년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이 조국광복회와 손잡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큰 충격을 준 보천보 사건에서부터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신문이 홍비’(공산당 강도)가 일으킨 이 범죄를 제법 크게 보도했다. 온 나라에 입소문이 돌았다. 김일성은 1940년대 초 일본 관동군의 공세에 밀려 소련으로 퇴각했다 광복이 되자 북한으로 돌아와 이미 조직되어 있던 인민위원회를 장악했다.

 

민족의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 6 26일 경교장에서,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정황이 많았지만 안두희는 입을 다문 채 죽었고 배후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 대륙은 1949 10 1일 마오쪄둥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깃발 아래 들어갔다.

소련과 동유럽에 이어 중국까지, 지구 표면 절반이 붉은 깃발에 덮인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열전에서 막 벗어난 지구촌은 이념적 상호비방과 경쟁적 군비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4.19 혁명-

 

국가 정통성의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과 광업, 전력 등 일제 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때문에 분단 직후 산업기반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게다가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빠르게 정비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70년대 초까지 경제적으로 북한에 뒤졌다.

 

 

 

국가정통성의 세 번째 요소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며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처음에는 국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국회를 탄압해 지지기반을 잃게 되자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했고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러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없애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한 표 부족으로 부결되자 소수점 이하를 떼버리고 찬성률을 반올림해 가결을 선포하는 기괴한 반칙까지 저질렀다.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4.19 혁명이었다.

 

 

 

 

-3.15 부정선거-

 

이미 12년을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선거일은 1960 3 15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문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였다.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는 장면 후보에게 졌다. 연로한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는 만큼, 자유당은 무슨 짓을 해서든 이기려고 했다.

그래서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조직까지 총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오늘의 선거문화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투개표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 2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 학생의거.

 

3.15선거는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으며 3인조, 5인조로 함께 투표하면서 누구를 찍는지 서로 확인하게 했다.

야당 투표 참관인을 내쫓고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이기붕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내무부 공무원과 경찰이 개입했다.

부정선거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득표율이 100%에 육박했고 이기붕의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곳도 허다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긴급 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조정했다.

 

민주당은 3.15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 11,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탈취해 경찰서장실 앞에 터뜨리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부정선거와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학교 학생시위였다.

4 18일 오후 고려대학교 학생 3000 여 명이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는 당시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대한반공청년당 깡패들이 대오를 지어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종로 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습격했다. 그들은 각종 흉기를 마구 휘둘러 유혈이 낭자한 참극을 벌였다.

이날의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해마다 4 18일에 수유리 일대를 뛰는 마라톤 행사를 한다.

 

4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4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하면서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은 4 28일 새벽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주한 미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5 7월 세상을 떠났다.

 

1960 4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 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자유당이 사라지자 정치의 중심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당내 노선투쟁과 권력다툼으로 옮아갔다. 장면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군사정변에 무너졌으며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4.19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권력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바꾼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4.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득했다. 다음 인용문은 이 혁명을 촉발한 청년학생들의 정신적 각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19 선언문-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씁니다. 저도 생명을 바치더라도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이 남긴 편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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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한국 현대사 훑어보기]

 

[나의 한국 현대사] 요약-유시민 저, 2014년 발간-

 

 

 

 

 

알아둬야 할 내용이 많아서 대부분 그대로 발췌했고, 복지,경제,문화의 변천사 등은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내용, 국가와 정부가 정의와 진실을 져버렸던 사건들 중심으로 기록을 남깁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기를 좀 더 중점적으로 발췌했고 그 이후의 사건들은 상대적으로 짤막하게 남겼습니다.

근현대사 전체를 균형감 있게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 전체를 1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간첩조작, 안보관련 내용은 나중에 여건이 되면 다른 책 몇 권의 내용과 함께 묶어서 글로 남기고 싶어서, 이번엔 제외시켰습니다)

 

 

 

이 쪽 분야 책은 통 읽어본 게 없어서 비교가 어렵긴 한데, 유시민 씨 글이 개인적으로 맛깔나게 잘 읽히고, 특정 인물의 부정, 부패를 조목조목 서술하다가도 그 인물이 행했던 좋은 점들에 대한 부분도 나름 제시를 해 주면서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서술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혹자들은 유시민 씨도 분명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성과 색깔이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래서 이 책으로 한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글 좀 맛깔나게 잘 쓰고, 역사 서술이 훌륭한 명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게 좀 알려 주세요)

 

 

일단 이런 류의 책을 볼 때 꼭 명심해야 할 중요 전제를 기억합시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에드워드 H. [역사란 무엇인가] –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 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어떤 역사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은 소수의 사실만이 요행히 그 운명의 집행을 잠시 유예받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 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8대 대통령 선거 분석]

 

2012 12월 박근혜 후보는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열여섯 곳의 광역시도 중에서 서울, 광주, 전남, 전북 네 곳에서만 졌다.

 

-경기도와 대전, 제주도는 적은 격차로 이김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 강원, 충북, 인천에서는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일종의 세대전쟁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청년들은 압도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함.

 

-유신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40대는 문재인 후보를 조금 더 지지함

 

-박정희 시대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50대와 이승만 정부도 겪었던 60대 이상 고령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

 

 

 

2012년 대선의 실체는 역사전쟁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대별 투표성향은 한국현대사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젊은 유권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지도 않지만 격렬하게 미워하지도 않는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옛날의 독재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문재인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한 것은 문화적으로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 서 고령유권자들이 과거의 독재를 지지했다고 해석할 수도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공로를 인정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철권통치와 인권유린까지 옹호하지는 않는 게 보통이다.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 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과 해방공간의 혼란, 참혹한 전쟁과 절대빈곤의 고통을 견뎌내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대한민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노후를 맞았다.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2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로 2012년 대선 결과를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론]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하나는 5.16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 신문 사주와 고위간부들, 법원과 검찰과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 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 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현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

 

그들은 [근대화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을 자처하지만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는 [유신잔당], [5공잔재세력], [특권세력], [냉전세력] 또는 [수구꼴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행사해왔다. 그런데 1998 2월부터 2008 2월까지 정치권력 하나를 빼앗긴 적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들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 가운데 [산업화세력]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호불호의 감정과 가장 멀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하나는 4.19, 5.18과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 라고 부르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소통하며 가끔 오프라인에서도 대규모로 결집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 규탄 촛불집회],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집회] 같은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지속적으로 연대하거나 물질적 이익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심하게 다툰다. 정치에서는 2014년 현재 새정치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거대 자유주의 정당과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녹색당 등 작은 진보정당들이 이 세력을 대표한다.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현상은 2012년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분류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민주화세력에 속했지만 산업화세력의 품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만큼 그쪽에 넣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자.

2014년 현재 국민들의 전직 대통령 선호도는 둘로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40대 이하에서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합이 압도적으로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합이 훨씬 높다.

지역별, 연령별 호감도 분포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박근혜, 문재인 후보 지지도 분포와 거의 비슷하다.

 

 

 

 

 

산업화세력을 보수, 민주화 세력을 진보라고 할 경우 대한민국 국민은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한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빨랐던 탓에 생긴 현상이다.

서유럽에서는 300여년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래서 절충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큰 차이가 세대 대립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1959년 전후]

 

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연합(UN), 실제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그 아이를 구해주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와 같았다. 우리는 미군정의 감독과 보호를 받으면서 정부를 세웠으며 미군은 북한의 침공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우리는 미국의 후견과 지원을 받으면서 산업화를 이루었다.

미국을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냈으며 부시 대통령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 파병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미군은 60년 넘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에 대하여..]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내전인 동시에 동서냉전의 개막을 알린 국제전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 6 25일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주석의 동의를 받고 소련 스탈린 수상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김일성은 한 달 안에 [통일전쟁]을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인민군의 총공세를 죽기 살기로 막아내는 동안 유엔군이 상륙했다.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났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왔다. 결국 1953 7,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군사정전협정에 조인했다. [6.25에 대하여..]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명이었다.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 증가율이 3%를 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760만명이었다.

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 밖에 되지 않았다. …. 당시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총생산(GDP) 19억 달러, 1인당 GDP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 터키는 우리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 달러를 웃돌았다.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의 10%나 되는 2억 달러의 해외원조를 받으면서 전쟁고아를 돌볼 능력이 없어 대거 유럽과 미국에 입양시켰다. GDP가 물질적 생활수준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 거래와 자급자족 경제활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 대열에 있었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1959년 가난했던 전후 대한민국…]

 

 

 

열세 살이 넘어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 명이었다. 부끄러워서 감춘 사람도 있었으며 국한문을 혼용한 신문과 책을 읽지 못하는 [독해문맹]은 더 많았다. 한이 맺힌 부모들은 굶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교사들은 개천가 자갈밭에 천막을 치고 피난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 진학률이 15% 도 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도 보수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관리직, 전문직, 사무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과 생산직, [3D 일자리]는 대학을 가지 못한 85%의 몫이었다.

 

[1959년 교육받지 못했던 대한민국..]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사회주의 혁명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 전통이 거의 없었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났다. 소련 사회주의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결합했고 중국 사회주의는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흘렀으며 북한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개인숭배로 나아갔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 경력, 공산당 당원 자격, 소련 점령군의 후견, 대중적 명성, 연대조직의 지지, 육체적 활력 등 여러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교조주의를 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교조인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 관념론이다. 3대째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무덤 속의 마르크스가 안다면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북한]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1959 7 31,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의원으로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실시한 1952년 제 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 표를 얻어 2위를 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엔 보장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 성취] 1호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직전 별세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대신해 이승만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 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유효표의 25%가 넘는 216만 표를 얻었다.

 

조봉암 선생은 1954 3월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글에서 군사적 무력통일과 더불어 선거방식에 의한 정치적 통일도 검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진영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을 뿐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반대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1959 9 11일 강력한 가을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다.

최대 풍속 초속 85m의 대형 태풍 사라였다. 영남지역을 집중 타격한 사라는 사망, 실종자 849, 부상자 2533, 이재민 40만명, 선박 파손 9329, 유실 경작지 2000 제곱킬로미터, 재산 피해액 1700억 원이라는 대재앙을 안겨주었다.

정부는 태풍의 진로와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이어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신속하게 전파할 수단이 없었다. [이승만이 집권했던 그 시절…]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서민들은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대자본의 중소협력업체 수탈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 대형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장악 현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1959년도의 경제와 2014년도의 경제]

 

 

 

2014년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다.

1953년의 정전협정은 6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다. 남북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황을 종료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 당국자들은 1972 [7.4 남북공동성명], 1991 [남북기본합의서], 2000 [6.15 공동선언], 2007 [10.4 공동선언] 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에 합의했다.

한때 우리 국민은 금강산과 개성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우여곡적이 있었지만 개성공단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포격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문서는 사실상 모두 효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한다. 남한의 반북단체들은 북한의 체제와 권력자를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낸다.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인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난민촌 정서] 역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 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 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 1.21 사태와 1983년 아응산 테러사건을 비롯해 정전협정 발표 이후 60여 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굳건히 유지되는 독재체제와 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1959년도의 분단상황과 2014년도의 분단상황]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른 한국 근현대사 분석]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해 도시로 달아났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 자기 존중, 존엄, 정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무척 유익하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variability 가 있음을 나타내주는 예시]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20세기 지구촌에는 많은 신생국이 있었다. 그 나라 국민들도 똑 같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모든 신생국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환경과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 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폐허에서 출발했다. 40여 년간 제국주의 수탈에 시달린 끝에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으며  정부 수립 직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대한민국에는 도덕적,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지배층이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양반계급은 망국과 함께 무너졌으며 3.1 독립투쟁의 힘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은 조선왕조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거나 협력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혁명이 아니라 망국이 봉건체제를 해체한 것이다. 수많은 민족지사가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40여 년의 간난신고를 이겨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은 기업인들이 있었지만 해방공간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일제하에서도 봉건적 특권을 유지했던 지주계급은 토지개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사회였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해방공간의 권력이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민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민주공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물론 그런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 누구나 국가에 대해 자유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광복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원리를 배웠다. 현실성이 있든 없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4.19 혁명을 일으킨 최초의 주역이 고등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쥔 20세기 문명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한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승만 시대 전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정부 수립 13년째였던 1960 4.19혁명으로 터져 나왔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은 반공잘살아보세였고 국가 목표는 수출 100억 달러‘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달성이었다.

전국이 공사장 먼지와 굴뚝 연기로 뒤덮였고 걸신들린 부동산 투기 열풍이 온 나라를 달구었다. 거대한 소비재산업과 중화학공업이 형성되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그라운드 제로대한민국을 질주했다.

그 욕망의 탁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중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냈고 그 욕망의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역사 래프팅을 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4.19의 외침에는 자유데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그 원망과 분노에 화답함으로써 무려 25년 동안 독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 1987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김대중, 노무현의 진보정권 10년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현대사가 서로 다른 욕망의 전차가 부딪쳐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개략적인 대한민국]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4.19 5.16 의 의의]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queville) (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옳은 말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정부의 수준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 달리 표현하면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독재국가에서는 정부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낙관적 믿음이었을 뿐이다.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독재자의 발밑에 놓여 있다면 그 체제는 누구의 수준을 반영하는가?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포함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였다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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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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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승만과 종교

 

A: 대통령이 지닌 종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어. 이승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쭉 한번 설명해 줄래?

 

J: 일단 이승만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목사로 불렸어. 그도 한때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1899년 경시청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 7개월을 보내기도 해. 6개월 간의 고문과 독방수감, 처형의 공포 속에서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새 삶을 찾게 되지. 그래서 감옥에서 죄수 40명을 개신교로 개종시키기도 했고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지. 그는 민족운동과 개신교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 실험에 관심이 많았어.

 

 

 

A: 이승만 개인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건 알겠는데, 그게 당시 한국의 기독교 정세와 어떻게 연대를 하게 된거지?.. 그게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 거시적인 결과를 낸 게 있었어?

 

J: .. 아주 많았어.

 

 

 

건국 이후 개신교는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해.  이승만 집권기에는 1948, 1952, 1956, 1960년 네 차례의 정, 부통령 선거가 있었어. 이 중에서 국민이 직접 표를 행사한 선거는 1952년이 처음이었지. 이 두 번째 정, 부통령 선거 때 개신교는 아주 적극적으로 대선에 개입해. 한국 기독교 연합회( KNCC의 전신)는 기독교 선거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열심히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써.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주목례로 바꾸고, 군대에서 군종제도를 실시한 멋진 개신교인임을 열심히 강조했지.

 

 

 

1952 74일자 [기독공보] 사설을 한번 볼까?

 

 

 

우리의 영도자는 애국자요 실력자요 또한 크리스천이기를 원한다우리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요 신앙자다….. 매일 아침 5시에 예배 드리고 감옥전도제, 종군목사제, 국기주목례를 제정하여 전도의 길을 열어준 신앙자다. 우리 대통령은 한 가지 일에만 독재자다. 공산당 토벌에만 독재자다.”

 

 

 

 

 

 

이런 식으로 이승만이 분명 헌법 질서를 교란시키고, 부당한 독재를 하려 했으며 부정선거를 했고 수 많은 이들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가 있음에도 이 모든 건 공산당 토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거 빼고는 정말 다 기독교 친화적이라는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이후에 개신교 후보 이승만과 천주교 후보 장면 간의 대선 경쟁은 두 종교간의 대결 구도로까지 전개되면서 부끄러운 종교의 단면을 보여주고 말지.

 

 

 

A: 왜들 그렇게 자기 종교 대통령을 밀어 주려고 안달이지?

 

J: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거대한 개신교 나라를 만들고 싶어하는 꿈이 있었고, 친 개신교 정책을 많이 펴다 보니, 그게 실제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지. 이를 지켜보던 천주교도 그런 혜택을 꿈꿨을 것이고

 

 

 

이러한 개신교의 과도한 선거 개입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도 했어.

 

 

 

A: 이승만의 기독교적 정책을 좀 더 나눠줄래?

 

J: 그는 첫 국회인 제헌의회를 기도로 시작하고 대통령 취임식 석상에서도 자신의 종교 성향을 자주 드러냈어. 그리고 그가 재임 기간 중 펼친 친개신교적 정책들을 몇 가지 나눠볼께.

 

 

 

먼저 제헌의회 선거일을 연기시키는 사건이 있었어. 당시 첫 국회의원 선거인 제헌의회 선거일은 1948 59일 일요일이었어. 그런데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이 주일을 피해 다른 날에 선거를 하자고 요청을 해서 하루 늦춰진 5 10일 월요일로 연기되었지.

 

두 번째는 국영방송을 통해 선교를 허락한 점이야. 1947 3월부터 매주 주일마다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을 통한 복음 전도가 이뤄졌어. 각 종교 단체보다 확실히 개신교에 비중을 많이 줬지.

 

세 번째는 건국 이후 첫 민간 방송으로 1954년 기독교방송(CBS)가 인가된 점이야. 정부 수립 후 설립된 첫 번째 방송국이 기독교 방송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네 번째는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1953년 메시지에서는 남북통일의 숙원들을 또 새해로 미뤄야 하는 오늘! 세계적인 명절날 크리스마스를 또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검소하고 경건한 태도의 잔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고, 국회에서도 성대한 파티를 열었어.

 

다섯째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로 바꾼 점이야. ‘국기에 대한 경례는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개신교들은 이 사건을 수치스럽게 여겼어. 이 때문에 개신교인 사이에서는 신사참배를 연상시키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일이 종종 벌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지. 그 당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기에 허리를 굽혀 절하는 방식이었는데 개신교는 이를 우상숭배로 여겼어. 그래서 이승만은 이 의식을 주목례로 바꿔 버리지. 오른손을 왼쪽 심장에 대고 국기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거야.

 

 

 

A: 정말 개신교가 혜택을 많이 입긴 했었구나.

 

J: 그랬지. 특히 방송 관련해서는 KBS, MBC, TBC 등 공중파 3대 방송 체제는 1960년대 들어서야 만들어졌고 불교방송, 평화방송 등 타종교 방송은 기독교 방송이 설립된지 36년 정도가 지난 1990년이 되어서야 설립되니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지.

 

 

 

또한 군대, 교도소, 경찰서에 개신교 선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다 보니 국가 기관과 밀접한 결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생겨.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 독재가 이어지잖아. 근대 내에 투입된 개신교는 권력을 맛볼 만한 위치에 서게 되지. 또 개신교 기념일인 크리스마스가 이승만 정권 때 공휴일로 지정되기도 해.

 

 

 

1954년 군종 현황을 보면 개신교가 87.8%, 천주교가 12.1% 로 나타나 개신교 편중 현상이 상당하지. 군종 제도 덕분에 군과 개신교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향후 등장할 군사독재정권과 개신교가 협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꼭 기억해 둬야 해.

 

 

 

A: 정말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니, 이전에는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인다.

 

J: 응 크리스마스도 공휴일 제정이 1949년에 이뤄졌는데 불교의 석가탄신일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75년도에나 공휴일로 지정되.

 

 

 

J: 이제 마지막으로 개신교가 이승만 정권 당시 어떻게 정치, 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알아볼께.

 

 

 

당시 개신교의 정치 참여는 타종교에 비해 월등했어. 이승만 초대 내각을 보면 정,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한 21개 부서장 가운데 9 (42.8%)가 개신교 신자였고 그 중 2명은 목사였어. 그리고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장, 차관, 고급 공무원, 대사, 장성, 의회 지도자를 지낸 298명을 살펴보니 개신교인이 39.2%, 불교인이 16.2%, 천주교인 7.4% 로 나왔어.

 

국회도 1946 12 7일 발표된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23% 21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목사가 7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어.

 

당시 개신교 신자 비율이 인구 대비 6% 미만이었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지.

 

 

 

A: 한국의 정치와 개신교는 따로 분리해서 볼 수 없을 정도구나.

 

J: . 미국의 역사도 그런 요소가 많긴 하지만 우리 나라는 군부독재 시절도 길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신교의 역사를 배제해선 안될 거야. 군대 내 개신교 인맥도 한번 살펴보면 이승만의 심복으로 부산 정치 파동을 해결한 원용덕 조선경비대 초대사령광은 독실한 감리교 장로였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과 정일권, 이형근도 군내 개신교도 였어. 해군에는 손원일 참모총장이 있었는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어. 해병대를 창설한 김성은 참모장 역시 개신교인이었어. 공군에는 최용덕 육군항공부대 사령관이 대표적인 개신교인이었어. 김구 선생의 아들이자 제 6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신 총장 역시 공군 내 개신교 인맥에 속한다.

 

 

 

A: 왜 한국의 근현대사가 극우 기독교, 군부 세력, 군부 정권 등과 같이 움직였었는지 조금 감이 오는데?

 

J: 그렇지…. 그 기원을 찬찬히 훑어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지?

 

 

 

J: 그 당시 개신교는 교육에도 영향력이 컸어. 1956년 개신교는 10개 대학, 1개 간호학교, 11개 신학대, 57개의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지. 그 당시 개신교 대표 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화학당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졸업생만 합쳐도 당시 대졸 학력 인구의 15~18% 에 달했어.

 

 

 

그러다 보니 개신교는 그 어떤 세력보다 고급 지식인을 많이 보유한 집단이 될 수 있었어.

 

 

 

A: 그런 역사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정말 한국 근현대사는 개신교의 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나.

 

J:  그렇지. 그렇다면 왜 작금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극우적인 발언을 하면서, 특정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지도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6.25 전쟁이 가장 큰 계기였어. 이는 남한, 북한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긴 정쟁이었고 250만명이 사망했으며 산업시설과 공공시설의 80%가 파괴된 처참한 전쟁이었어. 더군다나 같은 민족끼리 벌인 전쟁이니 그 마음의 상처는 어마어마했을 거야.

 

 

 

그러다 보니 이념적으로 남한에서는 반공, 친미’, 북한은 친공, 반미로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개신교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잔뜩 이동하게 되.

 

 

 

즉 초기에는 개신교 교세가 남한보다 북한이 월등히 높았는데 북한 정권과 이념적으로 싸워오던 북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갑자기 남한의 교세가 증가하게 되. 당시 한반도 전체의 3/1의 개신교인이 월남을 할 정도였으니….당시 장로교의 평양신학교, 감리교의 성화신학교 출신 목회자와 신학생 1200명이 포함되어 있었어.

 

 

 

그러다 보니, 갑자기 남한은 개신교 부흥국가가 되어 버렸고 남한 개신교에는 뿌리 깊은 반공 성향이 심겨지게 되었어.

 

 

 

더군다나 월남한 북한 개신교인들은 남한 개신교의 새로운 권력층을 이루게 되었지. ‘반공이라는 매개체가 군부 독재 정권의 입맛에 맞다 보니 그 둘은 열심히 협력하면서 이 나라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어.

 

 

              -한국 전쟁 당시 모습-

 

 

실제 영락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소망교회, 충현교회, 성락교회 등 쟁쟁한 대형교회들이 다 북한 출신 목회자에 의해 성장한 교회들이야.

 

 

 

왜 요즘 많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극우적인 발언을 하면서, 촛불 민심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조금은 유추가 가능하지?

 

 

 

A: 그런 역사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J: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이승만 정권은 1960 3.15 부정선거를 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해. 315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났거든.

 

 

 

그런데 이승만이 다니던 정동제일교회는 이승만과 부통령인 이기붕의 당선 축하 전보를 발송하며 3월 마지막 주에는 당선 축하 예배도 드리기로 결심해. 감리교 신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은 “4.19 사건은 우리가 교육을 잘못시켜 발생한 것이니 우리 모두 이승만 대통령께 사과하러 가자고 말하기까지 해.

 

 

 

A: 선고를 조작했는데, 어떻게 교회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J: 이미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는 정직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정의를 잃어가기 시작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정서는 이렇게 초창기부터 깔려 있었지.

 

국민들도 이런 개신교의 태도에 분노해서 서울 종로5가 기독교 회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4.19 순국학생합동 위령제를 불교식으로 치르기도 해.

 

개신교 스스로가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지.

 

 

 

그 이후에 이승만이 하야하고 장면 내각이 등장하는데 천주교도인 장면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천주교도 열심히 정치에 개입한다. 이승만은 이를 제지하려 했고 말이다. 장면이 집권했던 1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정치권의 천주교인 비율이 이전의 7.4%에서 11.9%로 늘어나게 되고 국회의원 숫자도 눈에 띄게 증가하지. 또한 장면은 이승만이 개신교에 주었던 특혜 정책 일부를 바꾸기도 했어. 대표적으로는 형목제도를 바꿔 놓은 점이지.

 

 

 

A: 그런데 이승만 정권 때 미처 이루지 못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부분도 약간 다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가 놓치고 간 어두운 과거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일텐데….

 

J: 잘 알고 있구나.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면서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대개는 친일 목사 처단, 신사참배 문제가 주요한 한국 기독교의 과거 청산 이슈였어. 그 와중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못했지.

 

일단 1948년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제 101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 (서기 1945-인용자 주) 8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면서 친일파 처단의 법적 정당성이 마련되지.

 

그래서 1948 9 22일 국회는 친일파 처단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이 법의 실행기관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조직해.

 

 

 

당시 반민특위의 예비조사 결과 7천 명에 달하는 명단이 작성돼. 그 중에 교회 지도자들도 상당수가 있었어. 당시 반민특위에 검거된 교회 지도자는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었어.

 

1.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유형 (ex) 비행기 헌납운동, 교회종 헌납운동)

 

2.     언론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징병제를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한 유형

 

3.     조선총독부가 주도적으로 조직한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한 유형

 

4.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반일적인 설교를 한 목사 및 교인들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유형

 

 

 

여기서 4번이 바로 밀정이라 일컫는 이들로서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어. 왜냐하면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수법으로 친일을 한 유형이었거든.

 

 

             -반민특위 모임-

 

 

당시 친일 목사들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는 증언을 많이 했어.

 

A: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불의에 동참해도 된다는 거야?

 

J: 그들이 말하는 교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교회는 결국 제도적 교회였을 뿐인거지.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신, 신념 등에 대한 부분은 그 중요성을 대폭 축소시켜야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였던 거야.

 

친일 목사를 두둔했던 민경배 교수는 천황 중추의 일제 헌법 아래에서 교회 자체의 생존 자체가 국법상 불가한 때였으며 만약 일제와의 타협이 없었다면 교회는 지상에서 소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결국 그들의 친일 행위 덕분에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를 이룰 수 있었으니 이를 심판하기 보다는 부등켜 안고 함께 눈물을 흘려야한다고 강조했지.

 

 

 

A: 상당히 교묘한 궤변 같은데?.... 그럴싸한가???

 

J: 만약 이들의 논리가 맞다면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구약성서 폐기 정책에 호응했던 전필순 목사의 행위는 교회의 보존을 위한 일이었다는 건가?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권유한 양주삼 목사도 교회 유지를 위한 선을 행한 것이 되고 말겠지? 또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동태를 일제 경찰에 밀고한 김길창 목사의 행위도 교회의 소멸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행동이었고 말이야. 그들의 논리에는 모순이 많았어.

 

 

 

A: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어? 나름 신실한 개신교 장로 대통령이었잖아?

 

J: 그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해. 이 과정도 이야기 할 게 굉장히 많지만 요약하면 이승만은 친일 청산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어.

 

 

 

이승만은 1. 반민특위 습격사건(1949.6.6), 2. 국회 프락치 사건(1949.6.20), 3. 김구암살사건(1949.6.26) 을 통해 극우 반공 체제의 골격을 만드는데, 반민특위 습격사건 당시 친일 청산에 힘쓰던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친일파인 손홍원과 김정한이 지도하던 국민계몽회가 이 를 주도했다는 거야.

 

 

 

A: 가만 보니, 이승만 정권 때 반공 이데올로기가 태동하기 시작했구나. 그리고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죄악과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그 수치심을 반민특위에게 전가했던 건 아닐까? 그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취급하면서….

 

J: 충분히 그러한 심리적 해석이 가능한 상황이었어. 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칼을 들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A: 김구 암살 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인가? 당시 단독정부 수립 때 김구는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었지?

 

J: 맞아. 그러다 보니 김구 암살 배후에 이승만, 미국 개입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해.

 

결국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인 친일세력의 안정화를 구축하고 국회 프락치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제헌국회를 길들여 갔지. 또한 자신의 라이벌인 김구는 서북청년회라는 북한에서 온 극우 청년 단체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지. 이러다 보니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친일파 청산의 노력은 좌절되고 말아.

 

 

 

A: 친일파들이 살아남아 오히려 기득권이 되어 버렸으니 일제 치하 식민지 유산이 더욱 강한 영향력을 미쳐 왔겠네.

 

J: 맞아. 과거사 청산의 핵심은 친일파 척결이라는 인적 청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구조,체제를 청산하는 게 더 관건이었지.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남한 사회에 구축된 국가주의적 사고 방식, 행동 양식을 걸러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 버린거…..

 

 

 

A: 아쉽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고, 문제를 바로 잡는 과정이 얼핏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개신교에 미친 영향력도 크겠다. 더군다나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이 그런 부분을 간과했다는 점은 뼈아픈 기억이 되겠어.

 

J: 맞아. 물론 모든 우리 사회 문제가 친일파 문제, 과거사 청산을 못한 문제 때문에 생긴 건 아니라지만, 이 부분도 중요한 한 요인이라고는 볼 수 있겠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다 나눌 순 없지만, 반민특위가 힘을 잃고 나서 친일 관련 이슈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금기어가 되어 버렸고, 그 이후에도 용감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았어.

 

또한 어떤 목사는 친일 행위로 죄를 반성해야 할 처지임에도 마치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로 선전되기도 했었어. 전필순 목사의 예가 바로 그러한 경우지.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사기극은 따로 찾아서 공부해 볼 필요가 있을 정도야.

 

 

 

그리고 이승만 정권 당시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 전체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인데 그 당시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데 기여를 했어. 그 이후에 여순사건도 있었고…..그런데 서북청년회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와 연관이 깊었어. 그 이외에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모든 과정 속에 극우 개신교가 깊게 개입되어 있어.

 

 

 

극우 개신교들은 당시에 이승만이 삼선 집권을 하게 만들기 위해 3.15 부정선거도 열심히 도와주고, 천주교인 장면이 대선 경쟁에 합류하자 천주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음모론과 흑색선전을 하기도 했어.

 

 

 

A: 이렇게만 보니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너무 암울하고 엉망인데?

 

J: 분명 훌륭한 역할을 해왔던 분들도 있었겠지만, 주류가 워낙 극우 개신교 집단이다 보니, 그들 중심으로 이뤄졌던 역사의 서술은 어두운 부분이 많았던 게 사실이야.

 

특히 이승만 정권 때와 박정희 정권 때는 극우 개신교의 흑역사가 너무 많다 보니, 지금은 다 말을 할수도 없을 지경이지. 그냥 큰 가닥만 잡고 가는 선에서 만족하자구.

 

[대통령과 종교]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각색해 봤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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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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