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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그가 행했던 경제 정책, 복지 정책, 안보 정책,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알고 싶다면 [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통하기 보다는 이 저서를 통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이병완은 노무현 대통령 당시 참여정부에 있었던 분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고 겪었던 사람이다.

 

또한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을 하면서 노무현의 king-maker 역할도 했었던 사람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국면이 지닌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워낙 노무현 정권이 <조선일보> 등의 보수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참여정부에 대한 정확한 평가 자료들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민주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경제 성장은 더뎌진다는 대중들의 오해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와 지표를 들어서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김영삼 보수 정권의 IMF 여파를 어떻게 막아 냈으며, 그 이후에 노무현의 참여 정부가 이룬 경제 성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논란이 되었던 FTA 협정 문제, 국정 교과서 문제, 작통권 환수 문제 등에 대한 참여 정부의 명확한 입장을 들을 수 있다 .

 

이 책은 아무래도 노무현의 나라가 좀 더 비중있게 다뤄진 책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얻을 지식들이 많은 책이니 1독을 해서 전혀 아깝지 않다.

 

특히, 언론 플레이에 많이 놀아 났던 참여 정권의 명예를 회복하길 열망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진실을 더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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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이 바라본 박정희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에서 발췌-

 

 

 

 

[박정희의 나라]

 

박정희 시대는 적어도 30년간 지속되었다. 1961 5 16일 이후 1990 3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단,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 합당 시기까지를 포괄적 박정희 시대로 보는 것이다. 5.16 군사혁명으로 시작돼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을 거치며 군사쿠데타의 본질로 변질되었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을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1961 5 16일 다음달 나온 <사상계>권두언의 일부이다. 당대 지식인들의 필독잡지가 <사상계>였다. 1년 전인 1960 4월호 권두언은 이랬다.

 

 

 

이번 3.15 정부통령 선거전에서 너무나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름일망정 민주국가인데 그 집권당 횡포가 이처럼 혹독할 수 있으랴. 공명과 영달에만 현혹되어 거의 광적으로 날뛰는 그들은 일당동재의 실을 확연히 노출시켰고 일부 악질 지도층은 악랄한 공산당 수법으로 백성의 수족을 꽁꽁 묶어 버리려 들었다…..우리는 정권 교체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를 미워해서도 아니고 어떤 당에 정권이 넘어감을 원해서도 아니다.

 

 

 

4.19의 촉발을 가져온 대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한 <사상계> 5.16 평가는 그 시대적 이해를 표현했다.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출발한 박정희 시대는 국가재건을 위한 국가 동원체제를 구축했고, 그 시대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부국강병]의 국가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식은 [개발독재]였다.

 

 

부국강병의 [부국]은 자립경제라는 경제적 민족주의 성향을 통해 대중동원과 강제적 자원배분으로 연결되었다. [강병] [반공에서 안보]로 진화되면서 방위산업이라는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발전되어 재벌체제의 등장을 가져왔다. 동시에 [민족주의적 군사혁명] [10월 유신 쿠데타]로 변질되었다.

 

 

박정희 시대를 관통한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잘 살아보세]의 구호와 GNP 와 성장률이라는 물신적 목표가 전 국민적, 전 국토적 변화를 추통시켰다.

 

[마이홈, 마이카, 1인당 GNP 1천 달러 시대]라는 경제적 목표와 [자주국방]으로 진화된 안보목표가 두 축이 되어 강압과 통제 속에 대중적 삶의 방식과 환경을 깡그리 바꾸어 놓았다. 고교 평준화와 그린벨트 정책도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대중의 생존방식과 미래설계가 엄청난 변화를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물리적 변화 속에는 정보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불신이 내장되어 있었다.

경부선을 축으로 한 자원 배분의 강제적 선택과 집중은 수도권과 영남권의 집중개발로 이어졌고, 농어촌 쇠락과 수도권 비대화, 호남권 소외와 지역감정 조장 등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구조적 문제를 배태시켰다. 보릿고개를 넘었지만, 기층민 계층을 확대시켰고 새로운 기득권 계층을 성장시켰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이 땅의 삶의 환경과 방식에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물리적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변화에 수반하는 화학적 변화를 수용하고 보완할 틀을 갖추지 못한 채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박정희 시대의 정치, 사회적 갈등이 성장통을 넘어서 고질적 질환으로 넘어갔다. 뒤이어 등장한 전두환, 노태우 시대는 박정희 시대의 유제와 유산이 남긴 역사적 후유증이었다.

 

박정희 시대, 박정희의 나라 30여 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피와 땀의 시대]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을까.

민주와 투쟁의 [핏자국]과 산업화 건설의 [땀 냄새]가 뒤엉킨 채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피의 치열함과 땀의 고귀함이 때로는 교훈이 되고, 때로는 향수가 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재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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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이 바라본 김대중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에서 발췌-

 

 

 

 

[김대중의 나라]

 

박정희 시대가 서구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19세기적 부국강병의 가치를 지향했다면, 김대중 시대는 20세기적 국리민복의 가치가 발현된 시기였다.

 

김대중 시대를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1971 4,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이후 2003 2, 15대 대통령 임기 종료 때까지 30여 년을 그의 시대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시기상 1970~1980년대는 김대중 시대와 박정희 시대가 중첩되어 때론 투쟁하고 경쟁하는 두 축이 되어 우리 사회의 전 영역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왜 김대중 시대인가. 그가 1971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후 한국의 정치는 영구지권을 향한 강권 독재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실질적 대립구도로 전개되었다.

그 이후 전개된 치열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1971년 대선에서 나타난 강력한 민의가 정치적 기반이 되고 추동력이 되었다.

 

민주화 투쟁기에 있어서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재야라는 큰 줄기가 있었지만 김영삼 세력은 1990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민주주의의 대의를 저버렸다는 평가를 외면할 수 없다.

민주화 투쟁세력이 민주화를 억누르던 집권세력과 야합한 셈이다.

 

이 시기 30여 년을 김대중의 시대로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김대중이 단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중심이자 상수였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유, 인권, 평화, 평등이라는 당대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해 온 한국의 대표적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부터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의 당위적 명제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일관된 논리와 주장을 집요하게 펼쳐왔다.

 

냉전체제의 지속과 안보독재가 펼쳐지고 있는 국내외 상황에서 그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끈질긴 접근은 실로 대단한 통찰과 용기였다. 그의 한반도 정책은 당시로선 금기의 벽에 도전한 것이었다.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종식시키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북 화해, 교류, 평화통일론] [, , , 중 한반도 주변 4강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은 사실상 역대정권의 한반도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고, 마침내는 그의 집권 기간 중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구체화 된다.

 

그가 [다중참여 경제론]으로 제창한 경제정책은 경제문제에 사회적 요소를 결합시킨 새로운 접근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관치경제, 개발경제, 재벌 경제 체제의 횡포와 모순을 시정하고, 보완, 개선하려는 이론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 중소기업 육성, 주식의 대중화, 경영 전문체제의 확대, 기업경영에 종업원 또는 노조대표의 참여 기회 부여 등 시장경제에 서구 사회주의적 요소를 절충한 내용이었다.

 

한국정치에서 남북문제 등 한반도 정책과 경제 사회정책에 일관된 이론과 논리를 제시하고 발전시켜 정치에 접목시킨 정치 지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철학과 정책 논리는 유신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심지어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였던 김영삼 정권하에서까지 [색깔론]이라는 정략적 이념 논쟁의 희생을 감내했지만 우리 사회에 진보적 민주 개혁세력의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 냈다.

 

또한 그의 대통령 재임중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의 완성과 기초 생활보장 등 사회안전망의 구축, 전교조, 민노총의 합법화, 의약분업 정책의 실시 등은 극심한 우편향적 사회에 좌, 우 균형의 가치를 접목시킨 역사적 조치들이었다.

 

물론 1971년 이후 대권 4수의 과정에서 빚어진 시대적 실패와 실책, 대통령 재임중 야기된 가신 정치의 행태와 친인척 비리 등은 비판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서 인권, 평화, 통일에 대한 시대적 헌신, 분단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IMF 외환위기 극복과 IT 산업의 획기적 발전 등 김대중 시대 30년의 큰 산맥에 비추어 보면 한점의 오점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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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이 바라본 이승만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에서 발췌-

 

[이승만의 나라]

이승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 시대를 살았던 이 땅의 대중들이 공유했던 가치, 다시 말해 그 시대를 함께하며 공통으로 추구했거나 추구됐던 삶의 방식과 태도, 환경을 규정한 표현을 우리는 찾지 못한다.

해방, 분단, 전쟁,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어진 이승만 시대를 한마디로 혼란과 혼돈, 그리고 가난이었다고 규정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 전적인 책임을 이승만과 이승만 정권에 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정치, 경제, 사회, 국제적 환경과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협박과 [반일, 반공, 통일]의 구호를 통치수단으로 12년을 군림했음에도 이승만 시대는 분단도, 전쟁도, 혁명도 막지 못했다.

[일제시대가 차라리 나았다] 는 서민들의 자조와 울분 속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외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2. 민주주의 3. 시장경제를 이식한 헌법 체계가 그에 대한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지키거나 지키려 노력했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차라리 이승만 시대의 가장 큰 업적은, 후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된 공교육제도의 완성이며, 이를 통해 그의 재임중 96%에 이른 의무교육 취학률에 있다 할 것이다.

 

어찌됐든 분명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국가에서 민중의 끓어오르는 기쁨과 열정을 수렴하지 못한 채 세계 역사상 첫 학생혁명에 의해 추방된 국가원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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