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개념 #정의 #방해 #안셀무스 #비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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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뜻하시는 바만이 홀로 정의롭고, 주께서 뜻하시지 않는 바는 불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이들은 구원하지 않기로 하신다.

 

따라서 전자의 구원과 후자의 정죄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롭다.

 

"오, 정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 주께 대해서는 벌하심도 용서하심도 정의롭습니다."

 

참으로, "주께서 벌하시고자 하는 이들이 구원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을 것]이며, 주께서 사하시고자 하는 이들이 정죄 받는 것도 정의[롭지 않을 것]입니다."

 

-> (이건 안셀무스 개인의 주장이다....이것이 진짜 기독교일지에 대해서는 각자 고민해 보자. 어떻게든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모습은 가상하지만, 사실 직관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납득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정의의 관계는 "주의 긍휼이 주의 정의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선하신 주님이시기에 용서하실 때도 선하시며 그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가 보여 준 수준에 못 미친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로 정의롭게 행하시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정의롭게 행하시는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전자를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돌려주심으로 이해하고,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뜻에 일치하게 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일부 범죄자들이 용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일이라는 데 주목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주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그들을 상대로 정의롭지 않으시다 해도, 하나님이 어떤 악인들을 용서하심은 그들에 대한 처벌 못지않게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일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 정의로우시다고 결론 내리라 말한다.

 

이런 논리는 원래의 당혹스러움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안셀무스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심으로써 정의가 금하는 바를 행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안셀무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인을 용서하시는 것을 악인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신 것이긴 해도,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적 정의가 미심쩍어 보이지만 일관됨 개념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안셀무스의 방식은 원래의 당혹스러움을 그와 진배없는 당혹스러움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안셀무스가 제안하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시는 일이 그들을 상대로 불의를 행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어떻게 선한 일일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불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을 그렇게 대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들을 불의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실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여전히 우리는 어느 때 못지않게 당혹스럽다.

 

안셀무스의 해결책에는 인간의 용서에 대한 어떤 적용점도 없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용서가 처벌의 포기를 요구한다면, 그리고 악인의 처벌을 포기하는 것이 정의를 침해하는 일이라면, 예수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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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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