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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 대하여

 

 

 

책 제목: 과학의 영혼

 

저자: 낸시 피어시&찰스 택스턴

 

109~113page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전통들은 서로 혼합되어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일종의 하이브리드(hybrid)를 창출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뉴턴(1642~1727)은 얼핏 보기에도 기계론자처럼 보이므로,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물리학을 과학에 대한 기계론적 접근의 전형으로 여긴다. 그의 저작 또한 이런 추정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했다.

 

 

 

뉴턴은 신을 위대한 기술자로 이해했기에, 행성체계의 창조자는 역학과 기하학에 능숙한 존재임이 틀림 없다고 기술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the law of universal gravitation)은 지구상과 천체상의 물체에 동일한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지구상의 물체와 전체상의 물체가 서로 대조되는 물질로 구성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빛에 대한 실험으로 빛은 다양한 중간 매개체를 통과했을 때에도 역학의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는 빛을 영적 상징이라고 이해하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주장을 뒤엎은 것이었다. 그는 빛을 입자들의 흐름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보일의 화학에 관한 견해와 유사한 것이었다.

 

 

 

 

더욱이 뉴턴은 신플라톤주의의 세계영혼(World Soul)에 관한 주장에 강력하게 반박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신으로 간주될 때 범신론에 가까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네럴 스콜리움](General Scholium)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존재는 세상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린다. … 그리고 신성은, 신을 세상의 영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상처럼, 신 자신의 몸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종들에 대한 지배력이다.

 

 

 

결과적으로 볼테르와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뉴턴의 업적을 전혀 다른 기계론적 세계관을 장려하는데 사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적 창조주를 우주라는 태엽을 감은 후에 그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이신론적 시계공으로 축소해 버렸다. 경제학자 존 키네스(John Maynard Keynes)의 말을 빌리면, 뉴턴은 우리로 하여금 냉철하고 무미건조한 이성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친.. 현대과학의 처음이자 가장 뛰어난 과학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뉴턴 자신은 이신론자도 합리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기계적인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기계적인 세계 이상의 것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지적 창조주였다.

 

 

[제너럴 스콜리움]이란 책에서 뉴턴은 가장 아름다운 체계인 태양과 행성, 그리고 혜성은 오직 지적이고 능력이 가득한 존재의 지혜와 지배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광학[Optics]에서는 과학의 임무를 결코 기계적이지 않은 첫째 원인에 도달할 때까지 원인을 결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뉴턴이 생각하기에 과학의 가장 유용한 혜택은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것이었다.

 

 

 

과학은 우리에게 첫째 원인이 무엇인지, 그가 무슨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받아 누리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서로를 향한 우리의 의무만이 아니라 그를 향한 우리의 의무도 자연의 빛에 의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뉴턴이 이룩한 대부분의 과학적 업적의 동기들이 변증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그가 살던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로저 코테스(Roger Cotes)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이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대한 가장 안전한 보호책이 될 것이며, 불경건한 무리들에 대항하는 미사일이 될 것이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뉴턴은 기계론자였는가? 최근 뉴턴의 철학적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많은 양의 글들이 집필되었다. 키네스는 뉴턴의 필사본을 연구한 후, 뉴턴에 대한 표준적 견해와는 달리, 뉴턴이 상징과 마술에 매혹되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왜 내가 뉴턴을 마술사라고 부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 우주 안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수수께끼로 보았는데, 이는 순수한 사고를 어떤 증거에 적용했을 때 비로소 해독될 수 있는 비밀이었고, 신이 세상에 내리신 어떤 신비로운 실마리였다. …. 그는 우주를 전능자가 만들어 놓은 암호문으로 간주했다.

 

 

 

키네스는 뉴턴이 이성의 시대의 첫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마술사였다고 결론지었다. 역사학자 라탄시(P. M. Rattansi)도 비슷한 맥락에서 뉴턴을 신플라톤주의의 전통 위에 올려놓았다. 뉴턴은 신플라톤주의적 전통의 능동적 원리를 채용하여, 이를 이 세상에서 신적 행위의 통로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중력을 능동적 원리의 가장 중요한 실례로 간주했다. 따라서 라탄시는 힘의 개념이 뉴턴에게는 지각의 세계에서 신의 현시로 보였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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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

 

케플러에 대한 오해

 

 

 

책 제목: 과학의 영혼

 

100page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처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른 중요한 천문학자였다. 케플러 또한 피타고라스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저서는 행성의 운행체계가 일련의 3차원적인 기하학적 공식들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비록 나중에 이런 시도를 포기해야 했지만, 이는 숫자와 기하학이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피타고라스적 신념을 케플러가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커니는 케플러가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기하학을 기초로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수학의 정확한 묘사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신뢰는 케플러로 하여금 여러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의 궤도라는 사실을 밝혀내도록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케플러도 부분적으로 태양중심적 천문학에 매료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태양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을 신이 세상을 현존하는 사실을 상징하는 물리적 위치로 생각하였다.

 

그는 태양만이 가장 고귀한 신에 어울리는 것으로, 신은 이를 자신의 물질적 거처로 삼고 기뻐하며 천사와 함께 거한다. 단지 태양만이 그 위용과 능력에 근거해 그 주어진 목적과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며 신의 거처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 고 보았다.

 

 

 

 

길버트(Gilbert)의 자기학(magnetism)에 관한 저술들에 영향을 받은 케플러는 지구를 거대한 자기장(magnetic field)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력(magnetic attraction)의 개념을 행성체계 전체에 적용했는데, 이를 통해 태양을 거대한 중심 자석(great central magnet)으로 보았다.

 

이는 후대에 뉴턴이 주장한 중력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었다. 물리학자 제럴드 홀튼(Gerald Holton)은 케플러의 체계에서 태양은 3가지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태양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수학적 중심부이다.

 

둘째, 태양은 행성들을 그들의 궤도 내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힘이 작용하는 물리적 중심부이다.

 

셋째, 태양은 신의 신전 역할을 담당하는 형이상학적 중심부이다. 홀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3가지 역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과학적 업적은 그의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 입장들과 분리된 채로 이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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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오해

  1. 책 제목: 과학의 영혼

  2. 저자: 낸시 피어시&찰스 택스턴

    52page~54page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에게 기독교가 근대과학의 등장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서 놀라움과 불신의 반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정은 아직 학교로부터 대중문화나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가지 못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에 대하여 내가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회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통된 오해들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종교적인 논쟁들은 교회가 과학을 반대한다고 말하며 자주 사실을 과장해 왔다. 특히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개신교 교회의 모든 교단들, 즉 루터란, 칼빈주의자, 성공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반성경적이라고 매도하는데 경쟁적이었다.”는 전면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사실은 루터가 [탁상담화](Table Talk)에서, 그리고 칼빈이 행한 설교에서 여기 저기 언급하였던 사실을 제외하고는, 종교 개혁자들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논쟁 자체를 무시하였다. 더군다나 이러한 언급들의 진위여부마저도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루터의 경우, [탁상담화]는 이 담화의 참여자들의 기억에 의해 그 담화가 있은 뒤 몇 년 후에야 기록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루터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얕잡아 보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한다.

 

화이트는 칼빈의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칼빈은 시편93:1을 언급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대하는데 앞장섰으며,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위에 올려놓겠는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칼빈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며, 발행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도 코페르니쿠스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

 

진실은 신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답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의 가치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치명타를 입혔던 것처럼 기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지위를 우주의 중심적 무대라는 고상한 위치에서 강등시켰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역사학자 존 랜달(John Herman Rendall) [현대 지성의 성립](The Making of Modern Mind)이라는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인류를 우주의 목적이며 그 중심적 존재라는 교만한 위치에서 끌어내려 그를 끝없는 우주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작은 행성계의 자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고 주장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맞서서 자신들이 지닌 안정된 우주론이 무너지지 않도록 저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헌들은 이러한 묘사를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채택된 중세의 우주론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우주론에서 우주의 중심이 곧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악마의 장소였다.

 

우주의 중심에 지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지구, 그리고 천체의 순서로 점차적으로 더 고상한 행성들이 자리 잡았다.

 

 

 

사물에 대한 이런 착안을 통해 볼 때, 인류의 중심적 위치는 보완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위치의 상실 또는 강등(demotion)도 아니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기에 그의 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주장은 그의 이론이 인류를 원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렸다는 것이었다.

 

중세 우주론에서 인간의 의미는 지구의 중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호의(regard)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 가치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협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견해에 불과하다. 이 견해는 우리 시대의 고뇌(angst)를 역사 속으로 되돌려 읽고 있는 것이다

 

96page ~99page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1543)의 작품들은 과학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초석과도 같았다. 그의 태양중심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메우스로부터 주어진 지구 중심적 천문학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록에 의하면, 이는 어떤 실험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커니는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을 종교적 회심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비물질적인 수학적 개념이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플라톤 *

 

 

많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상징이 태양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태양의 빛과 따스함이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지구상에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는 태양신비주의(sun mysticism)와 관련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가르쳤지만,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태양의 위치가 마땅히 신적 상징으로서의 위엄과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대한 이런 신비주의적 견해가 코페르니쿠스에게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열어준 것처럼 보인다.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확실히 신플라톤주의적 태양신비주의의 흔적을 담고 있다

 

모든 자리의 한복판에 태양이 왕자에 자리한다. 가장 아름다운 이 신전에서 어떤 위치가 이 발광체로 하여금 이보다 더 훌륭히, 한꺼번에 모두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그가 등불로, 정신으로,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로 불리는 것이 옳다. …. 이제 태양은 왕적 보좌에 앉아서 자기 주위를 맴도는 그의 자녀들인 행성들을 다스린다.

 

같은 인용문에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가시적 신’(the Visible God)으로 지칭하는 문헌을 인용한다.

 

신플라톤주의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적 행성체계론에 박차를 가했는지 또는 이것이 그에게 과거의 지구 중심적 체계에 대항하여 자신의 새로운 체계를 지지할 수 있는 논증자료들(당장 사용할 만한)만을 제공했는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확실히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동시대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데 있어서 신플라톤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6세기 전반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하면서도 실험적인 반대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지구가 어둡고, 비활동적이며, 무겁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듯이) 움직이지 않는 질량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천상의 별들은 빛의 접촉점이므로 빛과 불로 구성된 물체들이 그 주된 요소들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관찰에 대항해 지구가 실제로 별들과 같은 천상체로서 태양주의를 궤도를 따라 회전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태양 중심론(heliocentric theory)은 상식에 근거한 또 다른 반대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태양 중심론이 맞다면, 공중에 던져진 물체가 지구로 다시 떨어질 때는 처음 던져진 곳과 약간이라도 다른 곳에 착륙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물체가 공중에 머무르는 동안 지구가 회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신기하게도 유효한 이론이었다.

 

지구의 회전은 코리올리스 효과(Coriolis forces)를 가져오는데, 이는 푸코의 진자(Foucault pendulum)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 덴마크의 저명한 천문학자 타이코 브라헤(Tycho Brahe)는 대포알이 지구의 회전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쏘아 올려질 경우, 이 대포알은 더 멀리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구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운동량만큼의 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도가 더해진다.). 또 다른 유효한 주장에 대해서도,, 갈릴레오가 초기 형태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해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8장을 참고할 것).

 

또한 반대자들은 만약 지구가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면, 하늘에 박힌 별들도 그 궤도의 반대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위치가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유효한 주장이었지만, 그 차이가 너무 작아서 1838년까지는 관측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는 이처럼 수량적이며 논리적이었는데 반해, 당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위한 실증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역사학자 홀(A. R. Hall)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천상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사실,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주장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모두 철학적이었다. 커니는 신플라톤주의적 가정(assumption)에 대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공리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적절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가정을 근거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또한 동일한 이유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에 불과했다.”

 

이런 주장들을 넘어 코페르니쿠스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은 자신의 체계가 수학적으로 더 간단하다는 것 뿐이었다. 이는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주전원(epicycle)의 수를 80에서 34로 줄일 수 있었다. 이는 괄목할 만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수학이 자연의 진리에 대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호소력 있는 주장이었다.

 

 

실증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모든 과학적 진보를 종교와 신비주의를 극복한 합리성의 승리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종교와 신비주의는 분명히 코페르니쿠스의 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천문학 이론을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교리와 연관시키는 것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의 많은 추종자들 역시 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2장의 조르다노 부르노의 견해를 참고할 것)

 

더군다나 태양중심설에 대한 반대는 단지 교리와 반계몽주의(obscurantism)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유는 당시 지배적인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에 근거한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백년 후 갈릴레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은 신플라톤주의 전통 바깥에 머물렀던 과학자들에 의해 부인되었고, 뉴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중심설을 위한 물리적 구조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논쟁은 전적으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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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과학 사이의 논쟁들]

 

갈릴레오 논쟁에 대한 오해

 

 

 

책 제목: 과학의 영혼

 

54page ~58pag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회와 개별적 신자들을 분리하게 되면 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지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근대 초기의 몇몇 과학자들은 개인적으로는 종교적 신념을 굳게 지킨 반면, 정치적 차원에서는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종교적 탄압에 대한 교과서적 사건이 바로 갈릴레오의 경우이다. 이 사건에 대한 표준적 해설은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 [인간의 등정](The Ascent of Man)이라는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갈릴레오를 가톨릭의 종교재판법정(the Inquisition)에 기소된 선과 악 사이의 단순한 대결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역사학자 마틴 루드윅(Martin Rudwick)은 이 시리즈를 과학자 브로노우스키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과학적 승리주의’(scientific triumphalism)의 한 예라고 비난했다. 루드윅은 브로노우스키가 다룬 갈릴레오의 재판은 수집 가능한 역사적 연구 결과를 무시하는 의도적 선택에서 비롯된 모조품(travesty)이었다고 주장한다.

 

 

 

 

 

루드윅이 언급한 역사적 연구 결과란 과학과 종교 사이의 단순한 대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관련된 증거물들을 가리킨다.

 

갈릴레오에 관한 현대 저작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갈릴레오의 범죄](The Crime of Galileo)라는 책의 저자인 조지오 드산티야나(Giorgio de Santillana)는 갈릴레오 사건이 한 유명한 과학자와 종교적 교리 사이의 대결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교회내 지성인들의 다수파는 갈릴레오를 지지한 반면, 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는 세속적 견해, 즉 대학의 철학자들로부터 나왔다고 그는 지적한다.

 

갈릴레오를 로마로 귀한케 해 종교재판법정의 질문에 답하도록 명령했던 교황조차도 한 때 갈릴레오의 지지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사실, 대체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과학으로서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하여 어떤 논쟁도 없었다. 다만 교회의 반론은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위시한 모든 형이상학적, 영적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회적 결과들을 논박했던 것과 관련된다.

 

과학철학자 필립 프랭크(Philipp Frank)가 설명하듯이,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한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이유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법률의 형성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신의 최상의 본질을 충족시키기 위한 윤리적 책무감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객체(object) 또한 그 이상적 본질, 즉 목적이나 형태를 충족하기 위한 내적 몸부림에 의해 움직이는 유사 유기체(a quasi-organic entity)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객체는 밀고 당기는 기계적 힘보다는 윤리적 몸부림에 더 가까운 내재적 경향들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런 내재적 경향들 중 하나가 바로 우주에 있어서 자연적 위치를 향하려는 충동(impulse)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불꽃은 위로 올라가고 바위는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모든 객체가 자연적 위치를 향하여 몸부림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리적 위치는 고상함의 정도와 관련된 것으로, 우주의 중심은 가장 천한 것이고 천상의 영역은 가장 고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연구된 물리적 위계질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물리적 세계에서의 질서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을 포기하는 것에 저항하였던 이유는 이들이 도덕적이고 사회적 삶의 전체적 비전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연관성이 사라지게 될 경우, 성직자들은 도덕성 자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갈릴레오는 그릇되고 위험한 교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메리 헤스(Mary Hesse)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새롭고 위험한 견해들은 그 당시에 교리적으로 이들을 지지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 없이주창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이용 가능한 증거가 이론을 뒷받침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은 비과학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었다. 헤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들(위험한 견해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든 근시안적 견해 때문에 교회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교회 대표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을 지지해 줄 충분한 증거물도 지니지 못한 채 무책임한 공상에 의해 자신들의 세계의 모든 구조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과학철학자 제롬 라베츠(Jerome Ravetz)는 갈릴레오와 로마교회 사이의 대결에 관한 바른 이해는 사회적 요소들을 염두에 두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톨릭의 위계질서는 당시 개신교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하였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공격은 적군에게 탄환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과 교회의 연장자들인 기성세대의 엘리트들과 갈릴레오가 소속되었던 실질적 사고를 지닌 신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생생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에 자신의 작품을 라틴어가 아닌 지역어로 발행하기로 한 갈릴레오의 결정은 기성세대 엘리트들을 향한 공격이었으며, 이는 더 넓은 독자층으로 지적 리더십을 옮기기 위한 폭 넓은 전략이었다.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양측 모두 보기 흉한 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갈릴레오의 세력을 격감시키기 위해 비열한 방법과 인격적 원환을 사용했고, 이에 맞서 갈릴레오는 의도적으로 선동적이며 선전적 글들을 통하여 대항했다.

 

그의 [세계의 두 가지 원리적 체제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the Two Principal Systems of the World)라는 작품에 심플리시오(Simplicio)라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익살꾼이 등장하는데, 이는 한 때 갈릴레오의 친구이자 지지자이었던 교황을 살짝 위장하면서 풍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그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 논쟁에 관한 전형적인 개작(retelling)은 갈릴레오가 교회에 대항하였으므로 그가 공론적 무신론자이거나 적어도 불가지론자(agnostic)였음이 틀림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앞에 진실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릴레오가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이 종교적 교리 자체를 의심할 의도가 없었고,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유래된 과학적 체계를 의심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실증주의적 접근은 갈리레오의 견해에 대한 종교적 변호를 단순히 권력에 의해 강요된 편법으로만 인정하고 이를 제외시킨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신자였으며 종교를 세계에 대한 진정한 정보의 근원으로서 과학과 나란히 간주했다는 그 자신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남아있기로 한 갈릴레오의 결정만이 왜 그가 교황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렇게 노력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는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인 것처럼 보인다고 루드윅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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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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