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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역사다 / 저자 : 리 스트로벨

 

 

 

344Page

 

 예수의 전기는 신뢰할 만한가?

 

나는 한 때, 복음서는 단지 종교적 선전물로서 절망적일 정도로 과장된 상상력과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권위자 중의 한 명인 크레그 블롬버그는 복음서에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타나 있고, 전혀 실수가 없는 정확성의 표시가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이 전기들은 매우 초기의 것으로서 단지 꾸며 낸 전설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예수의 기적, 부활, 그리고 신성에 대한 근본주의적 신앙은 기독교 운동의 가장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의 전기는 면밀한 검토를 견뎌낼 것인가?

 

블룸버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신뢰할 만한 역사를 보존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할 만한 능력도 가졌으며, 설명하기 곤란한 자료도 기꺼이 포함시킬 정도로 정직했고, 편견 때문에 왜곡 보도를 하지도 않았다는 납득할 만한 주장을 했다.

핵심적 사실에 대한 복음서들 간의 일치와 세부 사항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차이는 오히려 이야기에 역사적 신뢰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초대 교회에서 가르친 예수에 관한 사실들이 동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과장되었거나 틀렸다고 알려졌다면,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뿌리를 내리고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복음서는 8가지 증거 검사를 모두 통과했다.

 

 

 

예수의 전기는 신뢰할 만한 상태로 보존되었는가?

 

세계적인 학자인 브루스 메쯔거는 다른 고대의 문서와 비교해 볼 때 신약 성경의 사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으며, 기록 연대도 원본과 상당히 가깝다고 말했다.

 

현대의 신약 성경은 99.5 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본문 간의 차이가 없고, 중요한 교리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초대 교회가 어떤 책을 권위 있는 책으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사용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예수에 관한 가장 훌륭한 기록이다.

 

 

 

 

예수의 전기 이외에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문서는 고대의 다른 종교의 창시자에 대한 문서보다 뛰어나다라고 에드윈 야마우치가 말했다.

성경 외부의 자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치유 사역을 한 메시아이고,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 수치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하나님으로서 경배했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어떤 전문가는 예수의 생애, 가르침,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100가지 이상의 사실을 확증해 주는 39개의 고대 자료를 증거 서류로 제시했다.

게리 하버마스라는 학자에 의하면, 7개의 세속 자료와 여러 개의 초기 신경이 바로 가장 초기의 교회에 분명히 존재했던교리인 예수의 신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고고학이 예수의 전기를 확증하는가 아니면 반박하는가?

 

고고학자 존 맥레이는 고고학적 발견이 신약 성경의 신뢰도를 높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일찍이 어떤 발견도 성경적 언급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고학은 신약 성경의 약 4분의 1을 기록한 누가가 특히 신중한 역사가라는 것을 입증했다.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렷다.

누가가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역사적 사실을 (세부 사항에까지) 보고하는데 정확성을 기했다면, 어떤 논리적 근거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 예를 들면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을 기록할 때 경솔하다거나 부정확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와 동일한가?

 

그레고리 보이드는, 예수가 자신의 말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단체로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예수 세미나 모임은 신약 성경의 사고에서 극좌파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급진적 주변 학자들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그 세미나는 처음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의심스러운 기준을 채택하고, 몇몇 참가자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성질과 신화적 성격을 지닌 문서들을 높이 평가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들에 관한 신화로부터 출현했다는 생각은 면밀한 검토 결과 무너지고 만다.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가 제자들이 말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증거는 예수 세미나의 좌파 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보다 엄청나게 빠른 시기의 것이다.” 요컨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확신했는가?

 

벤 위더링턴은 확실히 전설의 반달로부터 안전한 초기의 전통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예수가 최상의 그리고 뛰어난 자기 이해를 했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위더링턴은 증거에 기초해서 말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았습니까? 그 대답도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마지막 메시아라고 보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못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까? 아니오, 그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가 미쳤기 때문인가?

 

유명한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는 예수가 어떤 부적절한 감정을 보인 적이 없으며, 현실 세계와 접촉했고, 영리했으며,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소유했고, 깊고도 지속적인 관계를 누렸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어떤 정신 질환을 겪었다는 흔적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에수는 기적을 통한 치유, 자연을 다스리는 놀랄 만한 능력의 입증, 비할 데 없는 가르침, 사람들에 대한 신적인 이해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최후의 입증인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완전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된 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활짝 펼쳐줄 만하다.

하지만 뛰어난 신학자인 카슨은 예수가 신성의 특징을 보여 준 많은 증거가 있음을 지적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빌립보서 2장에 기초해서 예수가 인간의 구속이라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권한을 버렸다고 믿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약 성경은 예수가 궁극적으로는 전지, 무능, 무소부재, 영원성 그리고 불변성을 포함한 모든 신적 자질을 소유했음을 명확히 확증한다.

 

 

 

예수는-예수만이-메시아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었는가?

 

예수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할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다.

사실 십여 권의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진정한 메시야만이 꼭 들어맞을 지문을 남겼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사기꾼을 배제하고 진짜 메시아의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예수만이 전 역사를 통해 이 예언적인 지문에 정확히 들어맞았는데, 이는 가히 천문학적인 가능성을 뚫은 것이다. 1조의 13승분의 1의 확률을 맞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바로 예수의 정체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함을 확증해 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속임수였는가?

 

알렉산더 메드럴은 의학적, 역사적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예수가 폐와 심장을 꿰뚫은 크게 갈라신 상처는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끔찍한 고통을 견디고서 살아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가 십자가 위에서 기절하고 죽은 체했다는 생각은 기초적 증거가 빈약하다. 로마의 사형 집행인들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에서 살아서 내려온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처리했다.

비록 예수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더라도, 죽은 자나 다름 없는 그의 상태는 결코 그가 무덤을 뚫고 영광스럽게 승리했다는 전제를 가진 세계적인 운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인가?

 

윌리엄 레인 크레그는 부활절의 영원한 표시인 예수의 텅 빈 무덤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놀랄 만한 증거를 제시했다.

빈 무덤은 매우 초기의 자료, 예를 들어 마가복음과 고린도전서 15장의 교리에 그대로 기록되거나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그 사건과 기록 연대가 너무 가까워서 전설의 부산물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여자들이 텅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은,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준다. 예수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회의론자들도 조사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로마의 당국자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그 무덤 속에 아직도 예수의 시체가 있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할 아무런 동기나 기회가 전혀 없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꾸며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설은 심지어 오늘날 가장 회의적인 비평가조차도 믿지 않는 이야기다.

 

 

 

예수는 부활 후에 정말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났다는 증거는 그의 생애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어 신화로 수년 간에 걸쳐서 점차로 발전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활에 관한 전문가인 게리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부활은 매우 초기부터 교회의 중심적 선포 내용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대 신경에 보면,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들의 특정한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은 1세기의 회의론자들이 스스로 그 문제의 진실성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들과 직접 얘기해 보라고 도전하기까지 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매우 초기의 확증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반면에, 복음서에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영국의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예수의 출현은 고대의 어떤 사건보다도 잘 증명된다예수가 부활 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의심할 어떤 합리적 이유도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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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하워드 요더

출판 IVP

발매 2007.10.10

 

 

 

IVP 모던 클래식은 어느 정도 믿고 본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정치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 내겐 우선순위가 밀리는 책이었지만 중요한 사회 영역을 언제까지 배제해두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접근했던 책이다.

 


다른 어려운 서적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던 것 같다. 아래쪽에 난하주가 너무 많이 달려 있어서 본문을 읽는데 방해가 될 때도 많이 있었다.

(물론, 워낙 논쟁적인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적절한 변증과 섬세한 접근이 중요하긴 하다지만....가독성에 방해가 된 건 사실이다.)

 


 

일반 성도들에게 생소한 메노나이트 교단에 속한 요더는 칼 바르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예리한 지성,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언어와 학문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학식에 요더의 주변 사람들은 자주 놀란다고 하는데....

 

 

           

                                                (존 하워드 요더)


 

이 책의 요지는 이런 것 같다.

 


예수님은 다분히 정치적인 존재였다는 전제를 확실히 박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정치적인 색깔을 벗겨 내려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그분이 정치적으로 워낙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정치범을 향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세속 정치'에 기대어서 힘을 불려 나가거나,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되, 적절히 변형시켜서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가 추구하던 세상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 '온전한 평화'를 외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더가 추구하는 '평화주의'는 일반적인 평화주의와 동기와 철학적 근거가 판이하게 다르다것이다.

 


가령 톨스토이도 비슷한 강조를 했지만 그와 같은 인류애 때문도 아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간디처럼 그 노선이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예수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입장은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는 기존 사회 질서, 정치가들의 정치, 그 부산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참여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행동 양식에 대해서는 요더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같은 저서같이, 좀 더 실제적이고 사람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노선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더는 자신을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했던 유형론(typology)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노선을 견지하는 요더를 바라보고 나면 리처드 니버가 말했던 1번 유형이 떠오른다. 톨스토이나 터툴리아누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 문화는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속에 요더를 집어 넣고 싶어진다.

 


그러나 요더는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열정보다는 그저 대안 공동체인 교회를 더욱 회복시켜서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영향력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 같다.

 


분명 논쟁적인 책이지만,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평화가 무너져 버린 작금의 시대 가운데 다시 한번 요더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정치'.... 즉,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순종의 삶'이 회복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한번쯤 고민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수년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잦은 성추행으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비윤리적인 신학자가 전하는 '신학적 윤리학'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이론과 그 사람의 삶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주장을 전개한 주체와 주제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긴 힘든 것 같다.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행위가 없었더라면 그의 저작은 더욱 빛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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