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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밤의 대통령' 방일영

 

그런데 방일영이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은 건 사실이다. 앞서 인용했던 한홍구의 글에 그 사연이 나와 있다.

 

그런 칭호를 내린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절대권력자 박정희였다. '밤의 대통령'이 의미하는 바도 전혀 다르다.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젊은 시절 방일영 -

 

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 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오입대장'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후 1987년 6월항쟁까지 40여 년 동안 우리 언론은 권력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군대의 폭력을 무기 삼아 언론자유를 목졸랐고, 전두환 정권은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신문과 방송 편집자를 무위도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고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던 시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지틀조선일보]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를 보라.

 

1960년 이후는 [조선일보]의 본격적인 발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조선일보]를 무대로 활약을 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일보]는 오늘날의 명성에 토대를 쌓았습니다. 이후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전달하고 비판하는 기사, 그리고 세계와 국내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각종 기획사업 및 행사로 성가를 높였습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복간사에서 내비친 변명,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회사 소개는 [조선일보]의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증명한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조선일보]는 탄압을 받은 흔적이 없다.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었다"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한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을 당당하게 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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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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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유신 ~ 6월 항쟁 : 직접적 언론통제와 종속적 유착관계

 

독재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박탈한 시대였기 때문에 언론이 사회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정치권력은 언론시장 신규 진입을 봉쇄하고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언론인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고 보도와 편집에 직접 개입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에 대해서는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열어주되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기반을 공격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은 이 시기의 권언관계를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종속적 유착관계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6월 항쟁 전야에 가서야 비로소 동요의 조짐을 보였다.

 

 

2) 6월 항쟁~2001년 1월: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

6월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독재시대의 종속적 권언유착은 종말을 고했다. 권언관계는 대등한 상리공생으로 발전한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치권력은 유력 언론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유야무야 처리한 것은,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언론이 성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언론사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이 탄생하도록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상리공생은 안정성이 약하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정치권력에 비판적일 경우 언론은 이윤과 사회적 권력의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제한적 대립각을 연출한다.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양김 혐오증 유발(87년)과 노골적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92년)를 했던 유력 언론사들이 이들의 집권 후반기에 가한 대정부 공격은 대등한 상리공생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도에 정기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등 집권 초기 3년 동안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유력 언론사와의 대립을 회피한 것은 소수파 정권이라는 약점과 경제난 등 불리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선택적 상리 공생의 수혜자가 되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2001년 1월~현재: 선택적 상리공생의 일시적 붕괴

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1987년 이후 약 15년간 계속되어온 권력과 언론의 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과도기다.

김대중 정부는 유력 신문사와의 상리공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합법적 수단인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사의 물질적 토대와 사주들의 특권을 공격하고 신문고시를 부활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규제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속된 유력 신문사 사주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부활한 신문고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동력과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선택적 상리공생이 어떤 식으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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