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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논리정연하고 동의되는 내용이 많아서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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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으면 진보가 된다?

 

조금 놀랐다. 성경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알려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읽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성경 한 번 보지 않은 이들이 무려 68%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매일 또는 한 주에 서너 번은 읽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열에 한둘일 게다.... 이래서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무안하고, 한국교회가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번역과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통이 차마 무색하다.

 

 

한국교회는 정말 보수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히 옹호한다. 어찌하든지 간에 성경을 읽도록 장려한다. 유교의 독서문화와 한국사회의 공부 열풍과 맞물려 개신교회의 성경 읽기 열심은 유별나다. 일주일에 QT를 몇 번 했는지, 성경을 일 년에 몇 번 읽었는가로 신앙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정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성경을 읽으면 더 진보적이 된단다. 미국의 라이프웨이 리서치와 베일러 종교조사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자주 읽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예컨대, 테러리즘과 싸우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과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사회 경제적 정의를 더 추구하며, 검소한 생활을 위해 소비를 줄이자는 것에 보수적 성향의 신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성경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간단히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애굽과 바벨론의 제국에 저항하는 불온한 문서이다. 제국은 말한다.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는 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왕의 통치 권한과 근거가 오로지 그만이 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여 다스린다.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반체제적일 수밖에.

 

계시록은 또 어떤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그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제국이 천국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프로파간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고만장한 로마제국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성경은 진보적이다 못해 급진적이다.

 

그러니 이런 성경을 자꾸 읽으면 기득권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하여, 나는 안 변할 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기성 질서는 몸에 맞지 않다. 테러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 더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고 생리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성경의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고 베풀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안 읽는 반면, 실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가치관과 생각이 성경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 결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처럼 바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경대로 사는 거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보다는 성경대로 산다고 말해야 옳다. 그게 그거다. 성경은 도덕적 사안들, 예컨대, 폭력과 전쟁, 가난과 부, 과학에 대해 진보적 색채를 띠게끔 만든다. 하여, 성경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은 맞다.

 

성경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진보적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보수적일 수 없다.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기를 일삼고, 버젓이 정당화하는 세상을 희년은 정죄한다. 안식년의 하나님은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놀린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뒤집는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눅 1:51) 그분은 모두 빼앗겨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고, 떵떵거리며 살면서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던 부자를 기어이 빈손으로 만든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찬송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권력이 헛되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세상의 가치를 전도한다. 세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성경을 읽으면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이 된다.

 

칼 바르트는 묻는다.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성경 안에는 낯설고(strange) 새로운(new) 세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다. 바르트의 멋진 말을 날 것 그대로 보면 좋겠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그 속의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리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네 생각과 언어를 닥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우리를 개혁한다. 참, 하나님은 너무 진보적이다.

 

하나님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진보적임에 틀림없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탓에 나름 열심히 데모하느라 바빴다. 총학생회도 기웃거리고, 동아리 연합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학습도 얼추 해보았다. 나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운동권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듯싶다. 내 추측이고,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빈 구석이 많다. 그래도 기독교인 비율이 상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나 멀어지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사회 참여에 대해 꽉 막힌 목사이고, 성공과 성장에 목을 매고, 가난한 자보다는 불신자에 더 관심이 많다손 치더라도, 그 설교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번영신학을 떠들어도 성경이 본디 그러하니 정의와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걸 듣고 자라면서 본 현실은 강도 만난 자로 득시글거리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거다. 성경 속의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었는데, 그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들었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과 진보의 상관관계는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을 떠받드는 이들이 갈수록 보수화가 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싶다. 하나는 그렇게 성경, 성경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거의 안 읽거나, 다른 하나는 읽기는 읽되 하나님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게 쉴 새 없이 말하거나 일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고. 소위 바이블벨트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읽으면서 전쟁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논지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 의사나 의지가 없는 성경 읽기는 자기만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나는 절대로 안 변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읽어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굴복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이다. 그러니 그냥 읽으라.

 

또 하나 보탤 것은 읽는다는 행위와 진보와의 관계이다. 본래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조사가 말한 진보라는 것도 기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 독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 읽기는 듣기를 무척 강조한다. 로마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읽는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분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개방적이 되고, 사회적으로 진보적 어젠다에 찬성하는 비율과 비중이 높아진다.

 

 

의외로 성경을 안 읽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아마도 교회 내 문제의 대부분이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난데없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가 보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교회는 갈수록 성경을 안 읽어서 그렇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진보가 아니라도 좋고, 딱히 진보적이 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자. 그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롭고 낯선 일들 말이다. 놀랄 준비하고 성경을 읽자. 성경을 읽고 놀라게 하자.

 

몇 년 전에 올린 글을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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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설명하는 수학의 힘을 사람들이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은 뉴턴의 연구 덕분이었다.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의 친숙한 운동(대포알의 궤도)부터 멀리 떨어진 하늘의 운동(행성궤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자연현상을 단일한 수학 공식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단순했다!

너무나 우아했다!

뉴턴이 과학계 최초의 슈퍼스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극적 돌파구는 성경적 통찰을 통해 열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부패의 영역인 지구와 불변하고 영원한 곳으로 여겨지던 하늘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둘이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지구상에서 작동하는 물리학의 원리를 별과 행성 같은 하늘의 천체들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사실상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듯 유서 깊은 지적 전통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의 창조 개념을 숙고한 결과였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으므로 모든 자연현상이 단일한 기본 계획을 따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주를 설계한 단일정신이 한 묶음의 기본 원리를 활용해 연관된 현상들을 다스릴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뉴턴은 그러한 생각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했고, 결국 하늘이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주는 통합된 코스모스다. 우주 어디서나 동일한 수학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뉴턴은 신학을 과학 안에 엮어 넣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 신학을 옹호했다.

그는 과학의 '본업'이 기계적 인과관계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 '기계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 제 1원인', 곧 인격적 창조주에게까지 마침내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턴은 이러한 추론의 몇가지 사례를 제시했는데, 태양계의 절묘한 균형을 설명하려면 "맹목적이거나 우연적인" 자연의 원인만으로는 부족하고, "역학과 기하학에 대단히 능통한" 지적 원인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뉴턴이 볼 때는 그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물인 중력 개념조차도 하나님의 증거였다.

중력은 질량과 전충성(물질이 공간을 메우는 성질) 같은 물질의 고유한 특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뉴턴은 중력을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사실 하나님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절대시간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속이었다. 절대공간은 "무한부터 무한에 이르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였다.

뉴턴 물리학이 본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계몽주의 이론가들이 손을 썼고, 뉴턴의 새로운 과학도 세속화의 부식 과정을 거쳤다. 볼테르는 뉴턴의 연구 결과를 유럽 대륙에 소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성경적 시각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대신에 그는 뉴턴의 물리학을 끌어다 계몽주의의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했다.

뉴턴의 중력 개념이 유물론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우주를 붙드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라 물질 안에 내재하는 힘에 불과했다.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논리적 범주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의 이론은 결국 그가 반박하려 했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흡수되었다.

얄궂게도, 유물론적 세계관은 '뉴턴 세계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뉴턴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세계관인데 말이다. 이 세계관은 우주를 변하지 않는 수학 법칙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로 그렸다. 수학적 모델은 과학뿐 아니라 사회, 정치, 도덕에도 적용되었다. 너무나 간단해 보였다. 갈릴레이는 경사면에서 공이 굴러 내려오는 것을 관찰한 끝에 움직이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를 밝히는 수학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은 떨어지는 물체(일설에 따르면 사과)를 관찰하여 모든 물체에 작용하는 수학적 중력 법칙을 계산해 냈다.

동일한 방법론을 사회과학에 적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몇 가지 단순한 사례를 관찰하면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보편법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역사가에 따르면, 18세기에는 "보편적 물리학의 관점에서 만물이 설명될 때가 멀지 않았다고 많은 이들이 믿었다."

물리학에서 통했던 수학적 방법이 다른 모둔 분야에서도 통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뿐 아니라 인간 본성을 지배할 수단까지 확보하게 될 터였다.

- [세이빙 다빈치]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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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너무도 깜짝 놀라 목사님께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은 '인디아나 존스'를 찍지 않으신다는 것.

 

이런 분야는 워낙 생소했던 지라, 호기심을 자극했던 건 사실이다.

 

우연 치고는 꽤 잘 들어 맞는 많은 영역들. 하지만, 모든 음모론이니, 논란의 주제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다 얼핏 보면 그럴싸 하다. 큰 시야를 놓치고, localized된 viewpoint를 가지고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순간적으로 현혹되는 건 시간 문제다.

 

 

이 책은 성경을 코드화 시켜서, 문자 속에 숨겨진 심오한 의미를 끄집어 내는 작업을 하는데 거의 '예언서' 로서 성경을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날 벌어진 굵직했던 사건들을 코드를 통해 보여준다.]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조만간 3차 대전이라도 한 번 일어날 것 같다는데.....

 

사실, 성경처럼 많은 단어가 집약된 경전을 code화 시켜서 단어를 뽑아낸다 치면 우연의 일치 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단어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게 이 책을 반박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그런 수학적이고 통계적인 '지식'을 배제해 놓고 바라봐 버리면 이 책의 저자가 '끼워 맞추고 있는' 단어들의 나열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어떻게 이런 단어가 성경 속에 숨어 있지?'

 

이런 식으로 성경에 접근하다가는 새로운 '비교'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인격 신을 믿는 우리들로서는, 이와 같이 난해한 방식으로 단어를 감춰두는 '괴짜같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내러티브가 함축하고 있는 예수의 인격과 성품에 철저히 위배된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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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욕구가 없으면 참된 만족은 없다.

-볼테르-

 


 

 
정당한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소유는 소유자체가 주인이 되어
소유자를 노예로 만든다.
-니체-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
-피타고라스-

 
 

가난은 사람을 현명하게도 처절하게도 만든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다.
 
-솔론-
 
욕망을 버려라,
그러면 너는 평안을 찾아낼 것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그리스도를 본받아>-
 
욕망의 절반이 이루어지면
고통은 두배가 될 것이다.
-B. 프랭클린-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30장7~)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히브리서 13장:5절)

 
 
돈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친구를 잃는 일은 적지만 
반대로 돈을 빌려줌으로써
도리어 친구를 잃기 쉽다. 
-쇼펜 하우어-

 
 
한 사람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5백명의 가난뱅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애덤 스미스-

 

 
 
 
재산이 많은 사람이 그 재산을 자랑하고 있더라도,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는
그를 칭찬하지 말라. 
-소크라테스-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돈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거든
나가서 남에게 돈을 꾸어 달라고 요청해 보라.

적에게 돈을 꿔주면 그를 이기게 되고,
친구에게 꿔주면 그를 잃게 된다. 
-벤자민 프랭클린-

 
 
돈은 현악기와 같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돈은 사랑과 같다.
이것을 잘 베풀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천천히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인다.
반면에,타인에게 이것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생명을 준다. 
-칼릴 지브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장 9절~)

 
 
 
도박하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건다. 
-파스칼-

 

 

 
도둑질로 잘사는 사람도 있으나,
잘사는 사람이라고 모두 도둑질한것은 아니다.
또한 청렴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다 청렴한 것은 아니다. 
-회남자-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 있다.
-러시아 속담-
 
만일 사회가 많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다면
부유한 소수의 사람도 구해 줄 수 없다 
-존 F.케네디-
 
게으름에 대한 하늘의 보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실패요,
하나는 그가 하지 않은 일을 한 옆 사람의 성공이다.
 
-르나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태복음 19장 23절~)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였느냐"
(야고보서2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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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로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절정을 맛보여 준 낸시 피어시의 신작 [세이빙 다빈치] 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미학과 철학 신학 과학을 넘나드는 이 책의 거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야를 굉장히 넓혀준다. 책을 읽고 나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공유한다. (참고로 낸시 피어시의 저서들은 인용구 등을 사용할 때 철저히 출처를 밝혀두기 때문에 출처에 대한 의심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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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감각자료]


모든 세계관은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 경험주의에 담긴 진리는 창조주가 그분의 창조세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오감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경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요일1:1,새번역] 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말할 때,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행26:26, 새번역] 지적했다. 그 일은 공적인 사건이었고, 그 일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이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반대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도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반대신문과 검증이 가능한 공적 진리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경험적 자료를 존중하는 복음서의 입장에 힘입어 학자들은 신약 성경 속 사건들의 역사적 증거를 탐구하는 경험주의 형식의 변증론을 개발했다.


이러한 변증 방식은 1700년대 Nathaniel Ladner의 [복음 역사의 신빙성] 에서도 볼 수 있고,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의 [역사적 예수]와 N.T 라이트의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같은 책에 드러난 최신 연구 성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세계관이 걸린 문제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 속 사건들에 대한 세속주의적 해석에 대해 역사에 근거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가능하고, 그 과정에서 그러한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세속주의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 또한 가능하다.


경험적 방법론을 내세우는 현대 과학도 성경적 세계관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 그리스인들은 주로 논리의 관점에서 과학을 정의했다.


그리스 고전철학은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고, 과학은 형상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다. 형상은 수처럼 이성적이고 영원한 것이므로, 과학은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과학의 진리는 경험적으로 발견한 내용이 아니라 엄격하게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게 되면 애초부터 경험적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는 문제가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기만 하면 될 뿐, 그것을 직접 살펴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추론만으로 대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모두 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냄비를 살펴보자.


냄비의 목적이 액체를 끓이는 것임을 알게 되면, 그것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 하고, 가열할 때 타거나 녹지 않도록 금속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 등을 연역할 수 있다.


이런 연역적 방법은 모든 지식의 본이 되었고, 그 결과로 고전 사상가들은 구체적인 실험과 관찰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자들은 몇 세기에 걸쳐 성경 본문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식 과학의 정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세상을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분은 우주를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실 수 있었다.


자연의 질서정연한 패턴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과학을 향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상아탑에 앉아 어떤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고,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질서를 창조하셨는지 알아내야 한다.


한마디로, 관찰하고 실험해야 한다. 17세기에 뉴턴의 친구 로저 코츠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자연이 "하나님의 완전히 자유로운 뜻"에서 생겨났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관찰과 실험으로"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모든 요소가 각기 '자연스러운' 위치를 찾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사이자 수학자였던 마랭 메르센은 그런 식의 연역적 추론에 반기를 들었다.


역사가 존 헤들리 브룩은 이렇게 썼다.

 

 


 

"메르센이 볼 때 우주에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의 자연스러운 위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두시며,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다."


이것으로 볼 때 현대 과학의 실험적 방법도 성경의 창조주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과학 초기의 과학자들은 "연역에 근거한, 논리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한 개연성 있는 지식이라는 과학의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였다.


철학자 리처드 팝킨이 지적한 대로, 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서 너무나 큰 역할을 감당한 영국 경험주의"가 탄생하는데 과학자와 철학자 못지않게 중요한 몫을 했다.


-낸시 피어시 [Saving Davinci] 210~213page]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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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에 만연해 있는 수 많은 이단들과 한국 교회의 위기설 등 여러가지를 고민해 볼 때 한국의 근본주의를 점검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설 중에선 도덕성의 부재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원인들이 고찰되고 있으며 비교적 최근에 신광은 목사님의 "아르뱅주의" 라든지,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 이라는 개념도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한가지 요인이 바로 '신학의 부재'와 '잘못된 개념의 유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중 '근본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의견들은 분분하겠지만 동의를 하든, 그렇지 않든 한번 쯤은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일 것 같아서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근본주의의 만연으로 인해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득세를 할 수 있었고, 창조과학부터 시작해서 말세를 특정하게 예견하는 세대주의적인 열풍에도 일조를 했다고 '일단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이후에 수정될 여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국에 뿌리 내린 개신교의 흐름을 추적해 보고, 분석해 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리라 믿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성경과 근본주의


신학적 측면에서 한국 개신교 안에는 근본주의적 목소리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회가 성서영감론 및 성서무오설을 근거로 성서비평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기초한 묵시적 종말론을 여전히 신봉하는 현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고히 유지하면서 타 종교들과 갈등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창조과학을 중심으로 진화론에 대해 거의 맹목적으로 반대의 관점을 고수하는 점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먼저, 성서무오설과 묵시적 종말론을 축으로 전개되는 성경과 근본주의 관계를 살펴보자.


[요약: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근본주의는 성서 영감설과 묵시적 종말론,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창조론에 근거한 진화론 반대 등으로 요약 가능]


현재에도 대다수의 한국 교회들은 성서무오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성서 비평학에 대해 비판적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는 교단총회 홈페이지의 "신앙의 뿌리" 코너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은 칼빈주의" 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본 교단은 수정되지 않은 정통 칼빈주의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된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구칼빈주의'와 '구프린스턴신학'은 성서무오설을 교리상으로 완성하여 미국근본주의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19세기 중반의 프린스턴 신학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예장(합동)은 적어도 성서의 영감과 권위 면에서 근본주의 전통에 서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와 성결교회, 그리고 오순절 교단들이 이런 입장을공유함으로써, 소수의 진보적 교단들을 제외한 한국교회 절대다수가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장로교 통합 측은 헌법 '제 2부 신조'에서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라고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기독교 대한성결교회의 헌법에는 성경에 대해 "우리 교회의 경전은 성경전서, 곧 구약과 신약이니 이 경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들이 영감에 의하여 기록한 것인즉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나니 성경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넉넉하므로 무릇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신학설이나 여하한 신비설이나 체험담은 신빙할 수 없으며 이런 것을 신앙의 조건으로 하거나 구원의 필요로 함을 배격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둘째, 근본주의 신학을 구성하는 중심축의 하나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는 묵시적 종말론이다.


전통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종말사상에 근거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견해를 고수했고, 그 연장 선상에서 일체의 사회개혁이나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이 점에서 한국 개신교회도 유사한 전통을 보존해 왔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회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자신들의 종말론으로 신앙하고 있다.

 

특히,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처럼 성령 운동을 주도하는 그룹들은 묵시적 종말론을 강조한다.


한국 개신교회가 묵시적 종말론의 영향하에 있다는 구ㅜ체적 증거로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의 재림을 예언했던 "다미선교회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그 단체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고, 또 그 에언이 시대적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런 사이비적 종말운동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정도로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유형의 종말론에 대한 암묵적 승인 혹은 동조가 한국 개신교인들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점은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천년왕국 운동이 발생했고, 그 대부분이 개신교 계열에서 기원한 사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한국교회 초기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전수된 근본주의적 종말사상은 근현대사의 질곡을 통과하며 한국의 특수한 민족주의와 만나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 자체가 한국 개신교 내에서 근본주의적 종말론이 얼마나 강력하게 뿌리내려 왔는가를 반증해 준다. 이 사실을 노길명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사회에서 천년왕국운동은 그리스도계 신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체험과 미국 개신교의 신앙유형, 그리고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 결합하여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민족의 수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근현대사 속에서 민중은 낡은 질서의 종말과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강조하는 미국의 개신교 신앙 흐름에 친화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에 덧붙여 교회사를 민족사와 분리시키는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 기성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종파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노길명 [한국의 종교 운동]-

 

to be continue~

-배덕만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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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에 이인규 권사님 책과 마틴 로이드 존스 책 뒤적거리면서 정리했던 글입니다.

더욱 나은 해석 접근법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단,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총 5가지가 있습니다.

1.    과거적 해석법

2.    역사적 해석법

3.    온건 미래적 해석법

4.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

5.    영적 해석법

 

이 부분은 한국 이단대책 위원회 이인규 권사님의 지식을 빌렸습니다. 간략하게만 언급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분류법을 같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교리적으로 안전함을 고수하는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이 분의 의견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더 나은 해석법을 추천해 주시고자 한다면 언제든 알려 주세요)

 

1.    과거적 해석법

이 해석법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 본문이 AD 1세기 경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는 AD 70(예루살렘 멸망 전) 근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 요한 계시록 2~3장의 우상숭배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라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 4~11장은 교회와 유대교 사이의 투쟁을 가르킨다고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 13~19장은 주로 네로 황제 혹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던 일을 가르킨다고 해석합니다.

바벨론, 짐승 : 로마제국으로 보곤 합니다.

 

이 해석법의 치명적 문제점: 요한 계시록이 지닌 예언적인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법입니다. 미래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 등과 관련된 종말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이 해석법은 문제가 많습니다.

 

2.    역사적 해석법

  이 해석법은 플로리스의 요아킴(Joachim)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부터 요아킴이 생존하던 시대가지 서구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간표적인 기록이라고 합니다.

특징: 이 해석법을 취하는 사람들은 적 그리스도, 바벨론은 로마제국, 교황과 동일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맥락도 없고, 기준도 없고, 근거도 없는 해석법입니다. 하지만 카톨릭을 말세 시대의 핵심 악마 세력으로 규정하는 해석법은 요즘 들어 매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점: 요한 계시록에는 상징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모든 걸 역사적 맥락에서 서술하려고 하다 보니 억지 주장이 많이 개입되어 있고,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역사 속의 시간표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해석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예로부터 수십 차례 있어 왔지만, 제대로 인정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또 하나의 이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    온건 미래적 해석법

요한 계시록 1장과 2~3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한 종말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과의 차이점은

1)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선 교회의 휴거를 반대합니다.

2) 요한 계시록 4장 이하를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시키는 것을 반대합니다. 즉 이스라엘과 전체 교회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의 특징이 이스라엘과 전체 그리스도인을 구별시킨 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콥도 BTJ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을 잘 드러냅니다.)

3) 요한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들이 교회사 전체를 가르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4.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

 

신약에 정면 위배되는 해석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각종 이단 종파들이 좋아하는 견해입니다. 이 속에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입장이 녹아져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 계시록 13, 17장의 짐승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합니다.

 

온건 미래적 해석법과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의 문제점: 다양한 천년 왕국론을 양산해 냄. 그리고 재림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없습니다. 상당히 세분화 되어 버리는 것이죠. 즉 이들은 장차 도래할 세상의 이야기를 요한 계시록과 연결시키려고 하다 보니, ‘천년 왕국을 실제로 도래할 왕국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라는 다양한 견해를 양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뭐가 진짜인지 구분 자체가 모호합니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무천년론에 가깝고, 감리교는 후천년론에 가까운 편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는 죽산 박형룡 교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역사적 전천년설을 지지했었습니다.) -> 이 부분이 궁금하신 분은 말씀해 주시면 추가로 글을 남기겠습니다.

 

5.    영적 해석법

성경의 난해한 구절에 대해서는 거의 전부를 상징적이며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들의 해석법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 전해져 온 선과 악의 투쟁에 관한 진리를 찾는 본문입니다.

 

문제점: 이러한 영적 해석법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나 144000명과 같은 숫자들이나 짐승과 같은 단어에 대해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비유를 가능케 만들어서 각종 이단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신천지등이 대표적이겠네요)

그리고 분명한 역사적 해석을 적용해야 하는 부분에서도 비유와 상징의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역시 균형감각을 잃은 해석법이 됩니다.

 

Swete 라는 신학자가 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전체로서 어떤 학파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모든 해석체계들과 접촉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나는 과거파에게서 당시 상황의 역사를 배우며미래파에게서는 장차 올 시대의 성취를 배우고이상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철학을 배우며역사파에서는 사건의 진행들이 어떠한 원리에서 적용되었는가 하는 예증을 배울 것이다.”

 

결론점: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으나, 어느 한쪽 방법만을 수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즉 요한 계시록의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성과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는 온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사랑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모른다 하여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그 분이 비춰주실 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해석법을 견지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요한 계시록 해석 방법

 

요한계시록의 3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이 이미 3세기경에 모두 현실화 되었다

2. 미래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3. 역사주의적 견해 – 과거나 미래에 국한되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

 

역사주의적 견해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기

1. 교회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교회 역사의 주요 단계들에 대한 개략 혹은 개관이다

2.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지 현실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연속적 역사적 견해영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받아 들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연속적 역사적 견해는 옳지 않다고 반박하십니다.)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1) 6장 – 6개 인을 뗌, 8 - 7번째 인 뗌, 8~11장 – 7 나팔, 16장 – 7 대접

이 내용들이 교회에 순서대로 일어날 일이라고 봄. 따라서 실제 나라들과 역사적 사건들과 일대일로 매치된다고 봄. (ex. 9장이 무슬림 왕조가 교회를 침공한 사건)

 

2) 문제점

)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다.(벌써 맹점이 드러남)

) 마지막장(22)에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옴 “또 내게 말하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0)

) 다니엘서와 비교 –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이라” ( 12:4) - 이 예언은 거의 5세기가 지난 후 일어남

) 500여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봉함을 명령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진지 거의 2천여년이 지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인봉하지 말라는 요한계시록의 명령을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점과 그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즉시 적용될 내용들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목사님이 지지하시는 견해)

1) 요한계시록이 어떤 상세한 연속적 역사적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2) 요한 계시록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3)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을 포함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4)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응시키는 것은 이 책의 영적 특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봅니다.(수 많은 이단들과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이런 대응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1. 요한 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습니다 ( 1:11)

교회를 돕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2. 도덕적 권면이 있습니다 (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만이 아니라 또한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요한 계시록은 계시의 책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특정한 일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갖게 해 줍니다.

 

4. 요한 계시록은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냅니다.

1) 시각적 상징 – 촛대, , 나팔, 대접, 짐승

2) 상징적 숫자 – 일곱 (54차례: 일곱 머리, 일곱 눈,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삼 년 반, 마흔두 달, 일백사십 사, ,

3) 요한 계시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 13:18 666)-> 세대 주의자들은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다.

 

4) 요한 계시록은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상징적 방법을 사용해 원리와 진리를 전달해 줍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이나 숫자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

)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머리에 인이 쳐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인데 결국 이스라엘 사람만 144,000명 구원 받는 것인가?

(‘세대주의자들의 해석 등에 의거하면, 144000명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선발된다고 보므로, 그들의 해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올바른 해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따라서 4절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그것이 144,000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모든 영혼에 대한 묘사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요한 계시록 7 4절에 나오는 144,000명의 이스라엘 12지파만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리면 바로 5절 뒤에 나오는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배격할 수 있습니다.)

 

5.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1) 요한 계시록은 흥밋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2) 요한 계시록은 호기심과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6.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1) 그들을 위로하고, 2) 위안하고, 3) 교훈을 주고, 4) 권면하고, 5) 지지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7. 요한 계시록을 읽을 대는 사려깊은 상징성이 녹아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이 책을 읽으면서 불건전하고 병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 현재 실존하고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더 큰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3) 하나님이 온 세대를 지나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그 교회에 대해 가지고 계신 위대한 목적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개요

 

1. 1~3: 교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 1:20)

일곱 교회 이야기 – 1)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 상태에 대한 묘사, 2) 오늘날 어떤 모임이든 그 안에는 일곱 교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존재

 

2. 4~7: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4장 – 하늘에서의 위대한 장면

5장 – 하늘이나 땅에 능히 책의 인을 뗄 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à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주님만이 인을 뗄 수 있다.

6장 – 역사의 종말과 최후 심판

7장 – 구속 받은 자들의 놀라운 모습

 

3. 8~11: 주님 교회, 교회에 일어날 일들, 최후의 심판, 구속 받은 자와 멸망한 자들 (8장 전반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놀라운 장면이 묘사됨)

 

4. 12~14: “아들”이라고 표현된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묘사, 마귀, 마귀가 권세를 준 짐승, 바벨론 같이 교회에 대적하는 원수들이 등장한다. 즉시 최후의 심판. 구속 받은 자들에 대한 놀라운 묘사

주의사항 –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이 나오기 시작함

 

5. 15~16: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과 최종적으로 멸망한 자들 사이의 구분

 

6. 17~19: 주님의 대적자들과 그의 구속된 백성에 대한 이야기

17, 18장 – 바벨론, 두 짐승과 추종자의 최종 멸망에 대한 기사

19장 – 백마를 타고 입에서는 검이 나오는 모습의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심

 

7. 20~22: 마귀의 심판과 파멸,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최종적 승리, 영원한 영광의 도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

2, 3, 4, 5, 6부에 반복적으로 최후의 심판과 구원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옴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7개의 섹션으로 분류한 뒤에 이중에서 2부부터 6부까지 반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환란중에서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은 이에게 어떤 영광의 순간이 도래하는지와 반대로 사탄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오리라는 도식이 5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명해 주십니다.

 

결론

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입니다.

2. 목적 –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확실하고도 확정된 최후 승리의 이야기

3.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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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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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심리학(상담학)에 입각하여 성경 속 이야기들을 독백 형식으로 작성해 봤습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이 되어서,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성경 이야기를 더욱 깊게 들여다 보고, 더 나아가 한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통찰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약 10년 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

 

★니고데모의 목마름★

주님. 당신에 대해 배우고 , 연구하는데 제 인생을 걸었습니다.

다시 오실 메시아를 갈망하며 , 하루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나이다.

저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파의 길을 걸어 왔으며 율법학자였습니다.

수 년간 학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공부했고 ,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모세 오경에 대해 강론을 해 왔고 , 저의 신앙적 열심을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지니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당신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는 랍비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당신에게 가면 무언가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 당신이 하시는 말씀들은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도 그렇고 ,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요.

그렇게 말씀을 많이 보고 , 그 말씀을 제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고 다니는데도 이러한 열심이 구원의 조건이 안 된다는 건가요.

맞아요. 전 당신이 말씀하신 땅의 일에 대한 내용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는 메시지말입니다.

당신은 제 이해를 돕고자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지만 , 뭔가 모호하게 느껴지고 이성적인 담지가 되지 않는 이와 같은 메시지들에 대해 전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또한 제게 친숙한 [민수기 21] 말씀을 사용하신 저의는 무엇인가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 말이죠.

그렇다면 , 당신이 바로 그 인자란 말씀인가요뭔가 알 것도 같아요.

하지만 , 쉽지 않네요. 수십 년간 배워 왔던 지식과 전통들이 뭔가 큰 의미를 잃게 되는 것 같거든요. 정말 , 이와 같은 방법이 맞는 건가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중요한 지식을 깨닫지 못했던 건가요?

 

★예수님의 마음★

니고데모야. 난 널 사랑한다. 어두운 이 되어서라도 날 찾아와 준 네가 너무 고맙구나.

너가 지니고 있는 모든 전통과 유전이라는 토대들은 허물어져야 한단다.

그 모든 자기 의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 너는 끝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너의 경건한 행동과 열심은 결코 너를 의롭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단다.

너의 상태를 봐야 해. 너가 나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고 있고 , 또한 나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러한 너의 삶 때문에 지금 너의 존재가 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 너의 상태를 바로 자각하지 않으면 ,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 버린단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나를 바라지 않았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모실 생각이 전혀 없었단다.

그저 , 자신들의 힘으로 ,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도구로 사용하기 급급했다.

자신들이 원할 때만 나를 찾고 ,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를 연구했다.

, 실존하고 있으며 인격을 지닌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지만 , 너희들은 나란 존재를 잊어 버린지 오래더구나.

그저 , 너희들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 ‘거룩한 민족이라는 완고하고 굳어진 마음만 지닌 채 , 오만하게 고개를 쳐 들고 사람들을 무시해 왔었지.

그 속에 난 거할 수가 없었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너희에게 소망이 없단다.

너희를 용서하시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나의 십자가다. 너가 곧 보게 될 인자의 들림말이다.

[민수기21] 은 너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주어진 모세오경과 구약 만으로도 난 충분히 나 자신을 계시했었다.

하지만희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바른 말을 하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을 너희들이 어떻게 대우했는지 기억하느냐….

너희 입맛에 맞는 예언만 취했고 , 도무지 너희들의 자원 없음’ , ‘을 인정하지 않았었지.

슬프도다. 이젠 , 이 모든 죄악의 사슬들을 끊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 너희 민족들을 만날 때마다 강한 훈계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 그 모든 게 내 안에 너희들을 향한 한 가닥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란다.

그래도 너희들은 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지 않더냐. 이젠 삶의 주인을 바꾸고 , 빈손을 들고 나를 찾아오지 않겠느냐.

난 너희들마저도 사랑하고 있단다. 난 너희들을 사랑하기에 , 너희들에게 이와 같이 선포하고 다니는 것이다.

돌아오너라.

어서 , 진리의 으로 나아와 어둠에서 멀어지거라. 난 널 사랑한다. 난 널 위해 이 땅에 왔다.  

 

★나의 느낀점★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공회의 위원장이던 니고데모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많은 말씀을 하시며 , 굉장히 지식적이고 , 생각할 거리가 많은 말들을 던져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필경 그 당시 니고데모의 입장이었다면 더욱 강렬하고 , 어쩌면 더욱 혼란스럽고 , 모호한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 무엇보다도 예수님에게는 니고데모를 향한 애끓는 사랑이 있었다. 자신을 곧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 민족이요.

오랜 세월 동안 ,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았던 문제아 중에 문제아인 그 이스라엘 백성 , 그리고 그들의 대표에게 그 분은 놀라운 자비를 베풀고 계신다.

말이 어려운 것 같아 보여도 , 사실 [3:16] 등을 통해서 이미 명확한 해답이 주어진 상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구원도 있을 수 없음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자세히 알려 줬음에도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 편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죄악과 악함이 그 상황을 초래했다고 보는 게 더욱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 그 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 그렇게 지닌 게 많고 , 아는 게 많은 사람이 그래도 예수님을 랍비라 칭하며 , ‘중에라도 찾아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니고데모의 용기와 목마름도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금만 남들보다 더 지니고 있으면 , 어느새 우쭐해 져서 나보다 덜 지닌 자들을 깔 보고 , 업신여기며 나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할 때가 많은데 , 니고데모는 그 누구보다도 그와 같은 위치에 처하기 용이했던 사람임에도 질문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녔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니고데모의 진심을 보시고 , 세심하게 그에 대해 답하시며 , 알려 주시며 그를 독려하셨던 것이리라 믿는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사랑하셨고 , 인류의 역사 초창기부터 친히 선택하시사 자신의 사랑을 친밀하게 드러내셨던 민족.

이스라엘. 그런 그들에게 받으셨던 예수님의 배신과,고난,핍박은 일반적인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충격을 더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건 , 그런 그들에게 끊임 없이 손을 내미사 , 그들이 으로 나아오기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장자의 입장에 서 있던 니고데모가 , ‘탕자와 같은 가난한 마음을 얻어감에 따라 그에겐 아버지가 부어 주시는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의 그림자가 서서히 스미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이 속에 감춰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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