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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16 쿠데타]

 

1961 5 16일 새벽, 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장면 정부는 남로당 경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박정희 소장을 중용하지 않았으며, 군 내부에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는 장성도 많았다. 미국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군사혁명의원회 의장으로 내세웠지만 쿠데타의 리더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미국 대사관과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 차례 정보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 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남북분단과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이 유혈내전을 벌이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가 하야를 만류하자 아무 실권도 없는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를 할 테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 6조를 폐기하고 1963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득표율 격차는 1.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 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4.19 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 혁명을 인정했다. 1962 12 26일 공포한 제 3공화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4.19의거이고 5.16은 그보다 더 의미가 깊은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4.19는 민중이 궐기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지만 새로운 권력 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가 주어진 것 말고는 바뀐 게 별로 없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 조직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중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구악일소를 내세운 혁명공약가운데 가장 쉬운 것부터 실행했다.

 

 

자유당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개 쳤던 정치깡패 이정재, 인기배우들을 괴롭혔던 영화계 건달 임화수, 전설적 조폭 두목 신정식, 정치깡패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의 재판이 5.16 쿠데타로 중단되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로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사형수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에서 출발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장면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하나의 역사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복잡하고 상충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다.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 생애-

 

박정희는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 5남중 막내로 1917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난 탓에 소년 박정희는 살가운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중도 진보 성향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둘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1 사건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소년 박정희는 공부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과목과 체육을 잘했다. 어른들의 강권에 떠밀려 김호남과 결혼했지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는 않았다.

1937년부터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1940년 제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다카키 마사오였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당시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 만든 괴뢰국가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고 만주군이 해산되었다.

 

소속이 없어진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 1대대 제2중대장이 되었으며 1946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그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11,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둘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그는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유일하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은인이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그를 구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편을 당해 앞날이 막막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1950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는 쿠데타를 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장면 정부는 친일 전력이 아니라 좌익 전력때문에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제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5.16 이전에도 세 차례나 쿠데타를 하려 했다. 첫 번째는 1960 3.15 선거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 다음은 1961 4 19일이었다.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민주당 정부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혼란이 벌어지면 그것을 빌미 삼아 쿠데타를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날은 별다른 시위가 벌어지지 않자 두 차례 거사일을 조정한 끝에 5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과 관련해 두 사람을 미리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정치 신인 김대중이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청년 사업가 김대중은 정치 입문 8년 동안 세 번이나 낙선한 끝에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불과 이 틀 후 5.16이 터져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었던 이 불운한 30대 정치 신인이 불과 10년 후 강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청년 장교 전두환이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갔다가 1년 후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으며 6년제 대구 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진해로 와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11기생으로 입교했다. 5.16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군단 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는 5 17일 육군본부로 무작정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독대했다. 그런 다음 쿠데타군 실세인 양 육사교장을 압박하고 생도들을 선동해 쿠데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했다. 5 18일 오전 육사생도와 소속 장교, 졸업생 1000여 명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 광장으로 행진했다.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소장을 독대하고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사주한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을 보 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이 때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회라는 육사 출신 장교 사조직을 만들어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대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 역시 없었다.

 

[김대중과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가 남긴 좋은 것들]

 

 

 

4.19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 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박정희 집권 시절,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사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2공화국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 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다른 건 몰라도 경제성장 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고정관념이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년의 불황과 1997년의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수습한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까지 진보정권 10년 동안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 시절과 비슷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수습된 후인 2010~2013년의 상승세는 진보정권 때보다 나을 게 없다. 결국 경제성장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관 그리고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선택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이 과제에 도전했다. 그는 성공한 사례를 알고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유럽을 따라잡는 산업화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독재를 확고히 한 가운데 국가계획에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시 계획경제를 실행함으로써 대량실업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해소했다.

결말은 침략전쟁 패배로 인한 체제붕괴였지만, 단기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두드러진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박사와 달리 전 남로당원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사회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봉착한 첫 과제는 인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중화학 공업을 신속하게 육성해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포위당한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사적 소유를 일부 허용하는 가운데 국가전략산업을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절충형의 신경제계획(NEP)을 실시했다.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생산수단과 토지를 완전히 국유화하고 생산과정을 집단화하는 등 전면적인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소련은 1941 6월 유럽 동부전선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 24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과 제휴해 독일과 싸웠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막바지에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협공했다. 차르체제의 러시아군과 달리 소련군은 중화기로 무장한 현대적 강군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소련공산당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매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 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헤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박정희의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 8000여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 전문대 이상 대학 학력자가 24%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1970년대에는 중동지역이 외화 획득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공사로 시작한 중동 건설 붐은 남광토건, 신한기공, 대림산업의 요르단,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쿠웨이트 건설수주를 거쳐 1976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항만공사로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1979년 중동지역에 파견된 한국 노동자 수는 10만 명에 육박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 부산에 7, 경주에 4,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고 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리고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물가인상을 유발함으로써 현금과 예금을 보유한 국민을 착취하고 부채가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1972년의 8.3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것은 실패한 화폐개혁보다 더 노골적인 사유재산 침해 행위였다. 과도한 사채 규모와 높은 금리 때문에 부도 위험에 빠진 기업이 늘어나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 대출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박정의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즉각 무효화하고, 채무자가 사채를 신고하면 3년 거치, 5년 분할로 시중 사채이자의 3분의 1 수준인 월 1.35 % 의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채권자가 원할 경우 사채를 출자로 전환해주고 2000억원의 특별자금을 조성해 기업의 단기성 대출금을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바꾸어주도록 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조처였다. …. 채권자의 사유재산을 빼앗고 거기에 국민의 세금을 얹어 기업에 제공한 8.3 긴급조치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벌의 등장, 전경련의 탄생-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5.16 직후 군사혁명정부는 재개 서열 10위권 기업인들을 모두 구속했다. 일본에 출장을 간 덕에 체포를 면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지지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방침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시기에 만든 불합리한 세법 아래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한 기업인과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을 구별해야 하며, 경제인을 처벌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면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사정부의 종용을 받고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1961 6 27일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그는 법대로 세금을 냈다면 살아남은 기업이 없었을 것이며, 그런 환경에서도 큰 기업을 일군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속되어 있던 기업인들은 조국근대화사업에 협력하기로 맹세하고 모두 풀려났으며 각자 일정액의 추징금을 납부했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났을 때 기업인들에게 벌금을 물리기보다는 공장을 지어 정부에 헌납하게 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제안을 수용해 정부가 기업에 투자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국가기간산업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이 계기가 되었다.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다. 그 후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조금 지나면 대통령이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삼성그룹의 역사-

 

삼성그룹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병철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업과 운수업을 했다. 이승만 정부 때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며 한국전쟁으로 대구에 피난해 있으면서 제조업 진출을 준비했다. 가장 먼저 제일제당을, 그 다음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그는 소비재 독과점 공급자의 지위를 활용해 벌어들인 돈으로 국내은행 주식의 절반을 취득해 금융업 기반을 만들었다. 5.16 이후에는 일본 자본을 끌어와 울산에 한국비료를 세웠으며 동양방송, 용인자연농원 등 미디어와 레저산업에 도전했다. 1970년대에는 전자산업, 조선업, 플랜트사업, 석유화학, 방위산업에 손을 뻗었고 생명보험, 백화점, 호텔사업에도 진출했다.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은 1983년에 착수했다. 미국과 일본 기업에서 기술을 도입해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64KD 램과 16KS 램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웨이퍼를 수입해 회로를 입히고 절단해 중간재를 만드는 단순 공정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전후방 연관기술을 개발해 반도체 결정을 키우는 데서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데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 기업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집적기술을 확보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은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등 중화학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자공학 등 최첨단 수출산업 분야로 주력업종을 빠르게 교체했다.

이건희 회장 체제로 넘어온 뒤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삼성그룹은 하드웨어산업 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 이동통신기기, 문화콘텐츠, 의료서비스와 의료기기,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산업 등으로 계속해서 주력업종을 교체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나라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소득분배에 신경을 쓰다보면 경제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소득분배가 되도록 균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을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의 소득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 것은 UN 이었다. UN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 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1961 2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정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요강을 발표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서둘러 작성했지만 집권 민주당과 내각에서 사회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만 계획경제를 싫어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공공재와 국가기간시설을 비롯해 꼭 필요한 만큼만 하겠다면서 계획을 밀고 나간 끝에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군사정부의 손에 넘어갔다.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소비재 경공업 뿐만 아니라 철강, 자동차, 금속,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과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반도체, 이동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수출입을 합친 금액이 국내총생산과 맞먹을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다. 주요 산업을 거의 모두 소수의 재벌이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나 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에 불과하며 고용안정성과 근로환경도 현저히 나쁘다. 기업은 사실상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 외국자본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대기업들은 생산시설 일부를 외국으로 옮겼고 부품과 중간재를 외국에서 조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심화되었다.

 

국민경제가 이룩하려면 활주로와 연료가 있어야 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대한민국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자본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업화를 하려면 공장건물, 기계, 원료와 중간재 같은 실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해버리고 농지를 초지로 바꾸어 농업자본가에게 임대한 소위 인클로저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소비재산업에 앞서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을 먼저 육성했다. 시장 경쟁이라는 사회적 강제나 물질적 부를 향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혁명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 국가자본을 쌓았다. 냉전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념적,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는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생산물의 처분에 관한 권한을 자본가가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 행사한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초점은 단기간에 대량의 국가자본을 축적하는 데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주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또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을 위한 것이었다. 1 5개년 계획(1962~1966)의 핵심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국가기간산업 확충,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농업생산력 제고, 수출 증대, 기술 진흥이었다.

공공재 공급과 국가기간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장면 정부의 계획과 다를바 없었다. 이것은 비행기를 띄울 활주로를 닦는 작업에 해당했다.

 

2 5개년계획(1967~1971) 목표는 식량 자급, 삼림녹화, 화학, 철강, 기계공업 건설, 7억 달로 수출, 고용 확대, 국민소득 증대, 과학기술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 등이었는데 핵심은 화학,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1 5개년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가장 큰 난관은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 투자에서 이윤 획득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축적된 자본이 없었으므로 밖에서 들려오는 것 말고는 단기적 해결책이 없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 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산업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산업화의 성공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국민들에게는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김형욱, 김재규, 김성곤 등 음습한 정보공작 정치의 책임자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고위 경제관료들이다. 경제개발계획 입안과 집행을 총괄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1964~1967), 박충훈(1967~1969), 김학렬(1969~1972), 태완선(1972~1974), 남덕우(1974~1978), 신현확(1978~1979)이었다. 산업정책과 수출정책을 담당한 상공부장관은 박충훈(1964~1967), 김정렴(1967~1969), 이낙선(1969~1973), 장예준(1973~1977), 최각규(1977~1979)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국내 명문대학과 외국에서 공부했고 공직을 마친 다음에도 안락한 노후를 보냈다. 비밀결사를 만들고 거리시위를 조직해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이 수배, 도피, 체포, 고문, 투옥으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숱한 무용담과 인생 드라마를 남긴 것과 달리 그들의 인생에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산업화 초기의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남긴 기록에는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절반을 넘기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수출제일주의, 10년이 넘는 대규모 장기계획, 산업기계, 조선과 운송기계, 철강, 화학, 전자 등 5대 산업의 집중 발전 등이 선언의 핵심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위원장을 맡았으며 100억 달러 투자재원 조달계획에 따라 첫 3년 동안 31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동원했다. 오원철 경제수석, 김정렴 상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주역이었다.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을 증강하고 국군을 현대화하는 데도 필요한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업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참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나라 안팎에서 100억 달러를 동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한국 경제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했다. 국제 경제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이 돈을 찍어낸 탓에 달러 가치가 폭락하자 미국 정부는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 제도를 전격 중단해버렸다.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축으로 한 전후 국제 금융질서가 무너져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1973년 가을,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 대한 원유 공급을 거부하는 원유 무기화전략을 썼다. 1배럴에 2달러 수준이던 국제 원유가격이 단숨에 다섯 배 이상 뛰어올랐고 국내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계속해서 대규모 정부차관을 들여와 기업에 배분했다. 해외 국가채무 규모가 급증하자 나라 안팎에서 외채망국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원유가격 폭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 국가의 건설 붐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면서 속도를 냈고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올랐다.

 

4 5개년계획(1977~1981) 한복판에 10.26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4 5개년 계획 목표에 자력성장 구조 확립,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등과 더불어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을 포함시킨 것을 보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한국 경제가 이미 이륙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륙을 할 때는 추진력과 가속도가 중요하지만 이륙한 후 순조롭게 비행을 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경제정책과 관련해 처음으로 형평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4 5개년 계획 첫해인 1977년에 우리 경제는 100억 달러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조기에 달성했지만 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했고 생필품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내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다시 한번 물가가 폭등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정부가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율 10% 의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소비자물가는 더 높게 치솟았다. 민심이 사나워질 수 밖에 없었다.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에 형평을 포함시킨 것은 시의적절했지만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물가 폭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10.26 사태와 5.18에 이어 1980년 여름 이상저온 현상이 한반도를 덮쳐 농업마저 대흉작을 기록하자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계획 시행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산업화 이후 첫 번째로 맞은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후에도 세 차례 더 수립되었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1982년에 시작한 제5 5개년 계획의 목표에서 성장이 빠졌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제6, 7차 계획에는 자율, 경쟁, 개방, 국제화, 기업경쟁력 강화 같은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그런 목표들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적 계획경제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했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지구촌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세를 형성했다. 국내 대기업과 재벌들이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재원을 조달해 기업에 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1997년의 외환위기와 함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위협과 폭력이 항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는 것, 국민들이 국가의 목표를 자신의 개인적 목표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면 정부가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산업화의 성공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재벌과 정부의 관계 변화-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정부가 이고 재벌이 이었다. 정부의 사업허가와 자금을 배정받아야 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바쳤다.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3저 호황과 고도성장기를 거쳐 재벌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정부가 권력으로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게 되었다. 재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선거자금을 제공했다. 집권세력에게는 많이, 야당에게는 보험차원에서 적게 주었다. ‘삼성 X파일사건에서 보듯 삼성그룹 같은 재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과 검사를 포함해 국가권력 행사와 관련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돈으로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자본 권력이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포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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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로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 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 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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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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